철도 토공 기술의 변천사
1945~1960 년대에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철도도 경제성을 최우선으로 하여 설계, 시공되었다. 이에 따라 노선 중 구조물(교량, 터널) 보다 건설비가 저렴한 토공 쪽을 선호하였다. 따라서 토공 구간이 차지하는 비율이 구조물 쪽보다 많은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또한 경제적인 건설을 위해서 유토곡선을 그려서 종단의 구배와 평면의 선형을 조정하면서 깎기와 쌓기에 수량의 균형을 맞추도록 하였다. 터널은 가능한 짧게 하기 위해 갱구 쪽은 높은 옹벽과 함께 갱문 처리를 하였다. 아울러 교량도 짧게 하기 위해 제방에
바짝 붙여 교대를 세웠다. 그러나 근래 들어서는 도로와의 입체화, 도시 계획 구간내의 고가화 또는 지하화, 선형의 직선화 등으로 교량과 터널이 늘어나고 있어 상대적으로 토공 구간이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의 노반 폭은 열차의 속도 향상과 전차선주의 설치, 선로의 성능 향상을 위하여 1970 년대 이전보다 넓어졌다. 또한 흙깎기나 흙쌓기의 비탈면의 기울기도 경제성을 우선으로 설계했던 지난날과는 달리 현재는 안전성이나 유지 보수면을 고려하여 비탈면의 기울기를 안전하게 완화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광복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철도는 1970 년대 말 경부선 서울~수원간, 구로~인천간 복복선화와 수원~천안간의 복복선화 외에는 주로 3 급선에 해당하는 철도를 건설하거나 복선화와 개량을 했다.
1950~60 년대 건설한 정선선, 경전선 등은 노반 폭을 5.4m 로 했고 그 후에는 대부분 6.0m 로 건설했다. 노반 폭 5.4m 는 계산상으로는 궤도 부설 후 양쪽으로 0.58m 의 폭이 남아 도상 유지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도상 자갈의 퍼짐과 노견의 유실과 침하 등으로 노반 폭이 줄어들어 계산상의 폭이 유지되지 못했다. 자갈 보충을 위해 자갈 열차에서 자갈을 내릴 때 노반 비탈로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 노반 폭이 부족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990 년대에는 정규도나 국유철도 건설 규칙에는 5.4m 로 명시되어 있으나, 실제는 6.0m 이상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다가 근래에 와서는 철도의 전철화에 따라 전차선주의 건식과 각종 케이블 닥터의 설치 등으로 노반 폭을 더 확대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3 급선이나 2 급선 모두 단선은 8.0m 로, 복선은 12.0m 로 시행하게 되었다. 노반 폭의 확대는 바로 투자비의 증가를 가져왔으며 노반 폭을 5.4m에서 8.0m 까지 확대하는 큰 변화를 가져왔다.
경부고속철도는 속도 시속 350km/h로 설계되었으므로 고속에 따른 풍력, 안전등을 감안해 노반 폭을 단선은 9.0m로 일반 철도보다 1.0m 확대했고 선로 중심 간격도 5.0m로 해서 일반 철도보다 1.0m 확대해 복선의 노반 폭을 14.0m로 시행하고 있다.
1. 토공의 기계화
광복 후 1949 년 미국 ECA(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의 경제원조계획에 의한 경제계획수립에 따라 영암선, 영월선, 문경선 3 대 산업선 철도건설을 처음으로 한국인이 건설하게 되어 1949 년 4 월 착공하였다.
그러나 6 ㆍ 25 동란으로 중단되었고, 미국 ICA(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 원조자금으로 6 ㆍ 25 전쟁복구와 중단되었던 산업선 철도를 재 착공하였다. 한편, 충북선, 사천선, 강경선, 김포선, 오류동선, 주안선, 옥구선, 우암선, 울산선, 장생포선, 삼척발전소선, 영월발전소선 등을 건설하게 되었다. 특히 영암선, 영월선은 군 공병대와 중장비가 같이 동원, 투입되었다. 공사용 재료수송을 위한 화물트럭 GMC 동원으로
난공사를 극복하였으며 ICA 원조로 많은 중장비를 도입하여 처음으로 교통부 중기사무소를 설치, 운영하였다. 1960 년 3 월 중기사무소소장이 중장비 기계화시공 및 운용자료를 내용으로 한 토공중기계(임대철)를 발간하였는데 한국토목공사의 중기계사용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때 불도저, 그레이더, 스크레파, 공기압축기, 착암기, 크레인, 콘크리트 믹서기, 덤프트럭, 발전기 등 많은 장비와 기계운전공을 보유하고 철도건설공사에 무료대여로 지원하였다. 토공공사에서는 불도저, 그레이더, 스크레파와 착암기가 주요 현장에만 투입되었다.
1950~1960 년대에는 제 1 차 경제개발계획과 태백산 지역개발계획에 따라 황지선, 동해북부선, 능의선, 정선선, 경북선, 경전선, 경인선복선, 난포선, 청주역 개량, 망우리 무연탄하화장, 광주선 등의 철도건설공사에 토공중기계가 투입되었다. 1960 년대 말 경부속도로 건설을 계기로 미국과 일본에서 최신형 중기계를 대량 도입해 깎기, 운반, 다짐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기계화시공을 하게 되었다. 특히 고속도로 건설공사에 깎기시 풍화암이나 연암은 화약으로 발파하지 않고 불도저에 립퍼를 붙여 시공하였다. 불도저
집석과 로우더의 덤프트럭 상차, 운반하는 장비를 조합기계화 시공으로 토공공사의 일대 혁신을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철도도 1970 년 초 이후에 건설한 호남선 대전~이리 구간이나 북복선(조치원~봉양 간) 등은 토공의 굴착 적재 운반이 조합되어 굴착기로 굴착하고 페이로다로 적재하여 덤프트럭으로 운반 작업하는 방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 우리나라도 토공장비들을 생산하게 되면서 모든 현장이 기계화되었다.
현재에는 사소한 측구 터 파기나 전주를 심는 터파기 마저도 기계를 사용한다.
1945~1950년까지는 깎기한 흙의 운반도 인력으로 흙쌓기를 했다. 이때 운반 도구로서는 손수레와 트롤리가 이용되었다. 손수레(리어카)는 지금도 소량의 재료 운반용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트롤리는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트롤리는 소형의 경편 궤도를 깔고 철제바퀴인 트롤리에 나무상자를 얹어 나무상자에 흙을 삽으로 퍼 실어서 운반했다. 깎기하여 운반할 토량이 적을 때는 리어카로 하고 양이 많거나 거리가 멀 때는 트롤리를 이용했던 것이다.
당시는 깎기를 인력으로 했으므로 깎기 양이 많지 않아 서로의 조합이 많았다.
2. 다짐
경부고속철도의 경우 토공구간이 약 30%정도에 불과하나 기존 철도노선은 건설비를 줄이기 위하여 토공구간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토공구간의 노반에서 필수적인 작업이 노반의 다짐작업인데 초기에는 운반한 흙이나 암석의 다짐은 하지 않았다. 이는 작업기간이 길고 하루에 쌓기 하는 양이 적었으므로 비와 자중에 의하여 자연 다짐이 이루어지게 하였다. 쌓기할 재료는 1970 년대 초기까지는 깎기한 토사와 암석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즉, 터널이나 깎기 현장에서 나오는 암석을 운반할 수 있으면 그대로 운반하여
사용했던 것이다.
1970년 후반에 경부선 구로~수원간 복복선, 호남선 이리~송정간과 충북선 조치원~봉양간 공사에는 도로에서 시행하고 있는 다짐을 도입하였다. 우선 불도저로 1m 층 다짐을 시행했고 돋기 재료도 선별하여 사용하는 것을 인식하고 경부 복복선 수원~천안간, 전라선 전주~순천간 설계에 반영했다. 1일 쌓기량이 많아짐에 따라 다짐이 불가피해지면서 불도저 다짐, 롤러 다짐이 부분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다짐 결과에 대한 철저한 시험 결과를 확인 후 다음 작업에 들어가는 압밀도 90% 이상을 시행한 것은 80년도 후반기에 이루어졌다.
경부 고속철도의 건설과 더불어 재료의 선별과 다짐의 강화 등이 시행되었는데 일반 도로와 같이 상부 노반을 95% 다짐을 하고 있다.
3. 비탈면 시공
광복 후 초기인 1950~1960 년대는 비탈면 보호공은 주로 잔디를 사용하였고, 돋기비탈면은 깎기한 암석이나 터널에서 발생한 버럭을 이용하여 돋기비탈돌쌓기 또는 사석을 쌓기 시작하였다. 공사 현장 주변에서 잔디를 떠다가 깎기면에는 평떼를 사용하고 쌓기면에는 줄떼를 사용하였다.
1960 년대 말 경부고속도로공사가 착공되고 철도와 도로의 건설이 늘어나면서 떼의 수요가 급증한 데다 자연 잔디의 채취가 금지되면서 그 후부터는 인공으로 재배한 잔디를 주로 사용하였다. 그 후 1970 년대에는 생존력과 번식력이 강한 족제비 싸리가 묘목으로 생산되어 비탈면 보호에 족제비 싸리 심기를 주로 하였다. 하지만 잔디를 전혀 심지 않고 족제비 싸리만 심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왜냐하면 잔디를 심어놓으면 큰 비가 오지 않는 한 비탈면이 어느 정도 보호 유지되었으나 족제비 싸리만 심었을 때는 비탈면 보호가 잘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싸리를 심으면서 비탈면 유실이 심하여 비가 오면 피해가 많이 발생하였다.
현재는 비탈면을 다지는 콤팩터로 비탈면을 다지지만 그 당시에는 본체의 쌓기 하는 흙마저 다짐을 하지 않거나 적당히 하던 때이므로 비탈면의 정리는 잔디 입히기를 할 때 인력으로 널판을 만들어 두드려 가면서 심었다. 따라서 비탈면 보호공으로 잔디입히기를 먼저 한 후 족제비 싸리 심기를 함께 발주하고 시공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공법의 경우, 설계자가 지적을 받거나 공사비 환수 조치로 이어지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그 후 개발된 것은 깎기 구간에 블록 매입이다. 콘크리트 또는 P.V.C 등으로 된 사각, 육각, 다이아몬드 모양의 격자형 블록을 비탈면에 매입시켰다. 그리고 철근이나 대형못으로 고정시키고 그 안에 잔디를 심어 떼가 착근할 때까지는 물론 그 후에도 비탈면 보호 유지에 큰 도움을 주었다.
한편 비탈면 보호 블럭과 유사한 시기에 도입된 것으로 외국에서 성장의 속도가 빠르고 미관도 특수한 외국 잔디 씨가 도입되었다. 이것은 흙, 비료, 접착제, 섬유질을 혼합해서 비탈면에 뿜어 붙여 잔디를 자라게 하는 것이었다. 이 비탈면을 보호하는 방법은 지금에 활용되고 있다.
4. 비탈면 기울기
시대별 비탈면 기울기 변화를 살펴보면 시대 변화에 관계없이 선로의 등급에 구분을 두지 않아 2 급선이나 4 급선이 동일하게 되어 있다.
1950 년대나 1990 년대나 흙이 자연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사면 안전각이 다를 이유가 없으므로 바꾸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정규도에서 표시한 치수 즉, 깎기는 토사 1:0.8~1:1.5, 암석은 1:0.25~1:0.7 로 되어 있고 쌓기는 높이에 따라 1:1.5~1:2.0 으로 되어 있으므로 1980 년대까지는 이 범위에서 시행되었다.
그러나 1990 년대 들어와서는 열차의 안전과 유지 보수비를 감안해서 기울기를 보다 완화시켰는데 정규도의 상한선에 구애 없이 상한선보다 더 완만하게 시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1980 년대 초 깎기 비탈이 높은 곳은 깎기에 소단을 두기도 하였고 마산역 같은 곳은 깎기 비탈에 소단을 두어 비탈면을 보호하였다.
5. 조경 분야
60 년대까지 조경은 관심이 없었으나 그 후 선로변 조경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1970 년대 말부터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역 구내를 미화시켰고 매년 우수역을 선정하여 표창을 하였다. 아울러 신설선에서도 비탈 3 종 옹벽 위에 개나리를 심고 깎기 비탈면에 심줄 박기를 하고 눈향, 옥향, 단풍, 각종 상록수 등을 심었으며 터널 갱문 위에도 조경을 하였다. 이외 역구내에도 각종 꽃나무, 상록수 등의 크고 작은 수종을 군식, 점식, 열식으로 배열해 철도연변 조경 미화사업을 시행하였다.
토목공사는 미를 고려하여야 하므로 조경뿐 아니라 구조물에도 관심을 두어 옹벽면에 줄눈을 넣는다든지 호남선 대전~이리간 교량 난간을 특수하게 하는 것 등을 시행한 사례도 있다. 그러나 점차 철도의 고속화로 근거리 조경은 시각에 미치기 영향이 작기 때문에 근래 들어서 조경은 철도와의 인접 도로를 통행하는 사람들의 시야에 쾌적토록 국토를 가꾸는 차원에서 시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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