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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와 도시 | |
익산 | 2024.11.15 |
5. 익산 1) 들어가며 익산의 발전은 교통과 깊은 연관이 있다. 조선 시대의 역로를 보더라도 익산(1995년 익산군과 이리시가 통합하여 익산시가 됨)을 통과하는 큰 역로가 있었는데, 당시의 역로 기능은 군사적 그리고 경제적인 목적이 있었고, 익산은 한성과 삼례를 통과하는 중심지에 있었다. 근대에 들어서 익산은 철도가 통과하는 도시로 발전하게 되어 급격한 성장을 하게 되었다. 익산의 발전과정을 보면 1413년에 익산군, 1914년 익산면, 1947년에 이리읍이 부로 승격하고, 1949년 8월에 이리시가 되어 익산군에서 분리되었으며, 1995년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하여 익산시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익산의 변화에는 철도교통이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근대에는 익산을 연계하는 철도망이 생기면서 당시 주변의 도시였던 전주와 군산보다 성장 속도가 더 빨랐다. 익산을 연계하는 철도 교통망을 보면 최초로 1913년에 전북경편철도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전북경편철도주식회사(1920년에 전북철도주식회사로 개명)가 우리나라 최초의 경편철도 부설 면허를 받아 1914년 5월에 공사에 착수하여 10월에 준공하였고, 11월에 협궤철도의 부설을 완료하여 전주에서 이리까지 총 24.9km 구간에서 여객운송을 개시하였다. 이후 1927년에 이 철도를 조선총독부에서 215만 966원에 매수하여 경전북부선이라고 개칭하였고, 이후에 전주 방면에서부터 표준궤 개축공사로 역사 등을 전면 신축하였다. 1914년 호남선이 전선 개통되었지만, 익산과 군산 구간은 1912년 3월 6일, 강경~이리도 같은 날 개통되었다. 한편 1931년 10월 전주~남원, 1933년 10월 남원~곡성, 1936년 12월 곡성~순천 간에 표준궤로 개통되었고, 이것이 이미 개통되어 있던 광주선과 순천에서 연결됨으로써 전라선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전주~순천 간의 133.2km의 공사로 1937년 3월에 전라선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그 후 1980년대 말 고속철도 계획에 의해 호남선 전철화가 계획되어 당초보다 늦게 호남선에 고속철도가 직결 운행하게 되었고, 호남고속철도는 2015년에 개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는 익산지역에서의 철도교통의 변화와 철도가 익산지역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하여 분석하고자 한다. 그동안의 연구는 주로 익산의 지역 발전 측면에서 많은 연구가 있었으나, 철도교통, 특히 전북경편철도, 호남선, 군산선의 개통과 관련한 연구는 없어 이 연구에서는 익산을 철도교통의 특성에 착안하여 발전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2) 호남선 및 군산선 호남선의 경우 우리나라가 자주적으로 건설하려는 호남철도주식회사도 설립하였지만, 자본금이 부족하였다. 조선 교통사를 통해 보면 호남선은 대전~목포 구간을 연결하는 선로로, 그 연선인 충청과 전라, 경상의 3도 일대의 지방은 예부터 3남이라 칭하여져 왔다. 그리고 토지가 비옥하고 수산물 및 여러 공예품이 풍부한 반도의 보고라고도 할 수 있어 일찍부터 개발이 계획되었으나 교통 운수 시설이 정비되지 않아 풍부한 자원을 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본선 부설은 이러한 자원의 개발을 목적으로 1898년 6월 다소의 경위는 있었지만, 한국과 일본 정부의 부설권에 관한 교섭이 성립하였으며, 그 후 통감부 시대에 제26회 의회(1909년 12월)의 동의를 얻어서 경원선과 함께 그 공사를 서두르게 되었다. 건설 노선은 경부선 대전에서 시작하여 가수원과 두계를 거쳐 논산·강경평야를 거쳐 금강 하구부터 전주평야의 동쪽을 따라 이리에 이르고, 여기서부터 평야를 횡단하여 김제평야의 동쪽으로 나아가 전라남북도 경계에 우뚝 솟은 노령을 통과하여 광주평야, 송정리, 영산포 등의 여러 읍을 지나 목포항에 도달하였다. 연장은 간선 162.3마일(261.1km)과 별도로 이리에서 군산항에 이르는 15.3리(24.7km)의 지선을 합한 177.6마일(285.8km)이지만, 그 통과 지대는 금강과 만경강, 동진강 등의 유역에 속하여 식량 자원 개발상 매우 중요한 선로이다. 이 공사에 든 총공사비는 약 1,317만 5천 엔이었고, 1912년 3월 6일 강경~이리, 이리~군산이 개통되었으며, 1912년 10월 1일 이리~김제 구간이 개통되었다. 지금의 군산선은 호남선의 지선으로서 이리 정거장에서 분기하여 군산항에 이르는 지선 연장 14.3km와 이리를 연결하는 23km 구간을 1911년 6월에 기공하여 1912년 3월 6일에 개업하였다.(참고 21) 군산선은 호남선 철도 부설 당시 호남선 철도공사에 필요한 자재수송의 일환으로 계획되었다고 한다. 군산지방의 일본인 거류민단이 주동이 되어 일명 호남철도기성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철도 부설 추진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는데, 그들은 호남선 철도공사에 필요한 각종 중량급 자재를 운송·보급하는 데 군산항을 이용하여 단거리 운송으로 이 노선의 건설을 제안하여 군산항까지 인입선을 부설토록 하였다.(참고 22) ▲ 과거 익산역(일제강점기) 열차운영은 당초 대전~목포 구간의 직통 여객열차와 혼합열차 각 1 왕복 외에 대전~이리, 송정리~목포 구간의 혼합열차 각 1 왕복을 운행하였으나, 여객과 화물물동량의 증가로 1918년 7월 이리~송정리 구간에 여객 취급 화물열차 1 왕복을 증설하여 호남 전선에 총 3 왕복 운행하였다. 이 중 직통 여객열차는 기존보다 1시간 단축하여 8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1922년 5월 직통 여객열차 1 왕복을 증설하고, 직통 운전시간을 7시간 30분으로 1시간 단축하였고, 평균시속도 34.8km까지 향상되었다.(참고 23) 1928년 대전~익산까지 열차 소요 시간은 2시간 46분이었고, 당시 대전과 익산까지의 거리는 88.6km였다. 운임은 2등에 2.50엔, 3등은 1.38엔이었다.(참고 24) 익산역의 수송량이 급격하게 증가하여 1920년 승차 인원이 197,441명에서 1940년에는 722,989명으로 증가하였다. [표 46] 익산역의 수송량변화 * 자료 :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1927년 자료에 의하면 이리역의 발송화물은 22,722톤, 도착 화물은 68,950톤으로 도착 화물이 더 많았다. 도착 화물은 조, 목재, 석탄, 석재, 비료 등이었고, 발송화물의 70%는 일본으로 향하는 쌀이었다. 승차 인원은 319,109명, 하차 인원은 317,898명이었다. 화물수입은 52,467원, 여객수입은 231,825원이었다. 이리역의 근무 인원은 45명이었다.(참고 25) ▲ 익산역(해방 이후) 익산역의 여객과 화물 취급량을 보면 여객의 경우 호남선에서 가장 많은 여객을 취급하였고 화물의 경우도 목포에 이어 2위를 기록하였다. [표 47] 호남선의 주요 역 여객 취급량 비율 * 자료 : 허우긍, 《일제강점기의 철도수송》, 2010, pp.218~219 이처럼 수송량이 계속 증가하여 열차 운행횟수도 증가하였다. 1935년에는 여객열차의 경우 익산이 4회가 통과하였고, 화물열차도 3회가 운행되었다. 동차의 경우 대전~이리가 1일 2회 운행되었다. 운행횟수의 증가와 1937년 전라선의 개통으로 당시 이리역의 역할이 커짐에 따라 당시 이리역은 증축되었으며, 건평 330평 규모의 새로운 역사였다.(참고 26) [표 48] 호남선의 열차운영현황(1935. 1. 현재) 철도교통을 통해 이리는 발전하였다. 호남선의 개통으로 이리는 그 중심역이 되어 여객과 화물을 가장 많이 취급하는 역으로 발전하였다. 군산선을 통해서는 쌀을, 후에 전라선의 개통으로 호남의 산악지방을 통과하여 순천과 여수를 연결하는 주요한 교통거점 도시로 발전하였다. 3) 철도교통과 지역 발전 (1) 익산 철도 개통 이후 당시 자료를 보면, 익산이 크게 발전하였으며 익산을 통한 철도수송이 군산과 연계되었고, 이를 통해 일본으로 쌀이 반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리는 전북 옥구 내에 위치하며 호남선의 주요 역으로서 군산 쪽으로 군산선, 동남 전주 쪽으로 경전북부선을 분기로 철도의 십자로에 해당되어 인구 1만 8천 명(일본인 3,600명)을 보유해 전주, 군산 다음가는 대도시이다. 1906년 일본인 4명, 조선인이 3,772명이었다. 부근은 화강암의 소구와 다습한 충적지가 복잡하게 뒤얽혀 시가는 구릉을 개간해 만든 평지 위에 있다. 마치 일본식의 신흥도시와 같아 각종 은행 회사를 두고 활발하게 상업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부근 농업지에 대중심을 이루는 동시에 교통의 요충지에 해당되며 장래 경전선(慶全線)의 전면 개통 때문에 한층 더 활기를 띨 것으로 예상된다.(참고 27) 철도교통의 발전에 따른 익산시의 인구변화를 보면 1920년 당시 7,267명에 불과하였지만 1940년에 약 3배가 증가하였다. 전주와 군산에 비해 증가 폭이 큰 것을 알 수 있다. [표 49] 익산시의 인구변화(명) * 자료 :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2) 군산(참고 28) 익산의 발전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 군산이다. 익산을 통해 쌀이 군산으로 수송되었기 때문이다. 군산에 집중하는 미곡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산물로 군산항은 일명 삼남 평야의 쌀 산지를 상권으로 금강 유역의 옥답에서 산출하는 것의 대부분은 금강의 수운과 철도편으로 수송되었다. 집산액이 특히 많아 군산항 수출 무역 총 가격의 91.7%이며 미곡의 수출고에 있어서는 부산항에 이어 개항장 중 2위이다. 그리고 거래 상태는 부산, 인천, 진남포와 거의 비슷하며 일본인의 대규모 농장 경영과 함께 소농 역시 각지에 흩어져 있다. 농경법도 비교적 진보하여 품종의 선택, 정미 방법 등이 다른 지방에 비하여 걸출하여 성가가 높고, 또 대농가와의 큰 거래가 적지 않으며, 금강 기타의 수운과 철도편의 이용이 거의 비슷하다. 1913년도 중 철도편에 의하여 군산에서 착·발한 곡물의 수량과 군산세관에서의 수출입 수량을 보면 쌀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이는 주로 일본으로 수출된 것을 알 수 있다. [표 50] 철도편에 의한 곡물 착발 수량(1913년)(단위 : 톤) * 참고 : 400톤 이상의 산출지는 논산, 함열, 황등, 이리, 김제, 태인, 정읍, 장성의 각 역 [표 51] 미곡 수출입 수량(1913년)(단위 : 톤) * 참고 : 외국의 수입쌀 및 조는 호남 연선 및 금강 유역 각지와 연해안에 분포 (3) 익산의 변화 철도교통의 발전으로 익산은 급격하게 성장해 왔는데 특히 철도가 개통된 초기인 1915년에 크게 성장하였다. 1911년 익산군의 인구는 37,319명에서 1915년에 97,840명, 1920년에 119,107명, 1925년에 133,6230명, 1930년 148,221명, 1935년에 160,405명, 1940년에 161,785명으로 증가하였다.(참고 29) 근대 이리는 경부선의 대전과 동일하게 호남선 철도의 부설을 계기로 형성된 도시이다. 이리역의 명칭은 마을 명에서 유래한 몇 개 역명 중 하나로 기존 도시가 아니라 아주 작은 마을이 철도로 인하여 도시화가 되면서 역명으로 지정되고, 이후 행정구역 개편에서는 도시명으로 확대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익산면이 탄생했지만 이보다 앞서 이리역은 1912년 3월 6일에 영업을 시작하고, 남일면의 한 마을이었던 이리라는 지명이 역명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즉 이리라는 지명은 과거 행정구역명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지명이었고, 역의 입지 및 역명 채택과 함께 새로운 중심지로 성장하였으며, 1931년 행정구역명(이리읍)으로 채택되어 철도교통에 의하여 완전히 새롭게 탄생한 곳으로 대전과 비교할 수 있다.(참고 30) 이처럼 한적한 곳에 호남선과 군산선의 역이 만들어진 것이다. 1912년 군산선의 기점 이리역을 만들 때 이리에는 겨우 주택이 10채밖에 없었다. 이 지역은 기존세력의 저항이나 개발 비용면에서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이리의 도시구조도 크게 변경되었는데, 이전의 이리는 전형적인 농촌 공간구조였으나 철도의 부설과 이리역의 건설로 인하여 도시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원래 익산의 발전은 지금의 익산역보다 동쪽인 삼례와 금마에서 철도역이 서쪽으로 옮겨오면서 도시의 발전 축이 변화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호남선과 군산선이 개통되면서 만들어진 이리역과 전북경편철도가 부설되면서 설치된 구 이리역이 철도교통의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호남선 부설공사가 시작되면서 익산군청과 우편소, 헌병분대가 이리시로 옮겨오고 익산지방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계속해서 호남선과 전라선의 개통으로 각종 관공서와 학교가 집중되었으며, 이에 따라 이리역 주변으로 인구가 모여들어 시가지로 번성하게 되었다. 철도 관련 시설인 이리보선구, 이리기관구, 철도관사촌, 철도병원 등이 이리역 주변에 생겼다. 당초 호남선과 군산선 철도 부설이 이루어지기 전에 일본은 금마면 소재지(당시 군내면)를 거점으로 익산지방을 통치하려 구상하였다. 그러나 전주~이리를 연결하는 전북경편철도가 평야 지대로 부설되면서 이를 수송하기 편리한 쪽으로 철도가 부설됨에 따라 호남선과 군산선의 철도 부설은 금마 중심에서 이리 중심으로 이전, 재편되었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이리역 앞 신시가지가 형성되고, 근린생활시설과 함께 시장이 개설되어 현재까지 이르게 되었다. ▲ 고속철도 개통 후의 익산역 (4) 결론 익산의 근대화와 도시화에서 철도교통은 큰 역할을 했다. 타율적인 운영이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철도가 운영되었고, 호남선과 전라선, 군산선의 거점 역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0여 호에 불과한 인가에서 시작된 익산은 철도의 부설로 인하여 완전히 새로운 도시로 변모하게 되었다. 작은 마을 명이 역명으로 활용되었고, 또한 당시 조선총독부의 정책으로 기존 도시인 전주보다는 새롭게 건설하기가 용이한 도시로 선정되어 도시로서의 성장이 더욱 가속화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단순히 도시정책과 함께 당시 도시발전의 주요 요소인 이동수단인 철도교통의 제공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특히 익산은 호남선과 전라선, 군산선 등 호남지역을 모두 연결할 수 있는 역이 위치한 도시이기에 더욱 다양하고 빠른 변화가 생겨났다고 판단된다. 향후 철도와 지역개발을 지역학적인 측면에서의 접근과 함께 다양한 기능에 관한 연구가 좀 더 진전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참고 21) 철도청, 《한국철도사 제2권》, 성문사, 1974, pp.106~109 참고 22) 이경찬, ‘철도시설과 연계한 이리 도시구조와 도시경관의 근대성 해석’, 2012,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ol 21. No. 6. p.66, 2012. 12. 참고 23) 선교회, 《조선교통사》, 1986, p.513 참고 24) 철도성, 《기차시각표》, 1928년 10월호 참고 25) 조선척식 자료조사회, 《조선철도연선요람》, 1927, p.566 참고 26) [매일신보], 1937. 9. 4. 참고 27) 《일본지리풍속대계》, 신광사, 1932, 이리편 참고 28) 조선총독부 철도국, 《조선철도역세일반 상권》, 1914, 군산편 참고 29) 국가통계포털 http://kosis.kr/(해방 이전 통계) 참고 30) Sungwook Cho(2016), The Influence of Honam Railway(1914) to Station Name and Central Place Change, 한국지리학회 제5권 3호, pp.322~3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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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와 도시 | |
대전 | 2024.11.08 |
4. 대전 1) 들어가며 대전은 철도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이다. 철도가 부설되면서 대전역 주변이 발전되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대전은 점차 내륙의 중심지역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대전의 발전은 철도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되면서 대전의 발전은 지역적으로 동서 방향으로 더욱 확장되었고 서대전역이 만들어졌다. 그 후 한국전쟁으로 큰 피해를 보았지만, 대전은 성장을 거듭하였고 특히 고속철도의 개통으로 전국의 거점 철도 도시로서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그동안의 철도 부설과 지역의 관계는 조선 시대 도로와 수운 이후 철도가 부설되면서 변화에 관한 연구들이 많이 진행되었다. 철도와 지역의 발전 관계에서는 기존 도시의 경우는 상호 영향 관계가 많았지만, 신흥도시의 경우는 철도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철도가 부설되어 발전한 도시로는 대전과 익산, 신의주, 조치원 등을 들 수 있다. 이번에는 철도가 만든 도시 대전의 발전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2) 철도 개통 이전의 대전 조선 시대의 대전과 관련된 도로를 보면 1462년에 역제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죽산과 진천을 거처 율봉도는 율봉역(청주)과 쌍수역(청주), 저산역, 장양역(진천), 태랑역(진천), 시화역, 증약역(曾若驛, 옥천), 가화역(嘉禾驛, 옥천), 토파역(土破驛, 옥천), 순양역(順陽驛), 화인역(化仁驛), 전민역(田民驛), 덕류역, 회동역(영동), 신흥역(新興驛, 황간), 사림역(舍林驛), 원암역(原巖驛) 등 17개 속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근대도시 대전의 형성, 내륙중심 도시 대전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수운과의 관계이다. 충청도 지역은 금강의 수계에 속해 군산에서 강경, 부강까지 수운이 운행하여 강경이 일찍이 발달하였다. 그 후 철도가 개통되어 대전과 익산 등 철도 도시 등이 성장하게 되었다. 3) 철도 개통과 대전(참고 11) (1) 철도의 위상 대전은 1905년 경부선 개통과 함께 도시가 형성되었는데, 일본이 경부선 철도를 계획할 당시 대전은 넓은 밭이라는 의미의 ‘한밭’으로 불리었고, 사람도 얼마 살지 않는 지역이었다. 1904년경 당시의 자료를 보면 이 정거장 소재지 주변에는 일본인의 가가옥(假家屋)이 겨우 한두 가구밖에 없었으며(참고 12) 철도를 부설하기 위한 일본인 기술자 188명이 거주하였다.(참고 13) 대전역의 변화는 당시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참고 14) 1898년 경부철도 부설권을 얻은 일본이 노선 예정지의 실측을 끝내고 3개의 노선안을 내놓았을 때 불과 수십 호의 농가가 오밀조밀 모여 있던 한밭골은 어떤 노선안에도 끼지 못했다. 이후 경부선이 수원과 천안, 조치원, 부강, 대전, 옥천, 영동으로 결정되었고, 허허벌판이었던 대전은 점차 교통의 요충지로 자리매김하였다. 이어 호남선이 부설될 때도 대전은 경부선 때와 같은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호남선 계획은 조치원을 기점으로 공주~논산~이리로 결정되어 측량까지 끝났으나, 역사 공사 기간과 경비를 최소화하려던 일본은 금강을 건너기 위해 철교를 부설해야 하는 난관에 부딪혔다. 이후 기점을 대전으로 변경시켰고, 경부, 호남 두 개의 주요 철로가 지나게 되어 대전은 하루아침에 신흥도시로 변모하였다. ▲ 초기 대전정거장 주변의 모습(출처 :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아카이브자료) (https://kutsukake.nichibun.ac.jp/CHO/index.html?word=大田) 철도공사장에 모여들었던 일본인들은 노역장에서 받은 월급으로 지금의 중동, 정동, 원동 일대의 논밭을 헐값에 사들여 일본인촌을 만들었고, 이와 함께 새로운 풍물이 철길을 따라 보수의 땅 충청도 한복판에 밀려들게 된 것이다. 대전은 계속하여 철도의 위상이 강화되었는데, 전국 9개 철도사무소 중의 하나가 자리 잡은 것이다. 전국의 주요 철도 거점의 사무소 위치는 서울(경성)과 대전, 안동, 순천, 평양, 해주, 강계, 원산, 성진이었다. 대전철도사무소의 관할은 경부선과 경북선, 호남선, 군산선, 전라선 일부까지 담당하였고, 이는 김천, 이리, 정읍까지 포함하는 영역이었다. 대전이 관할하는 철도 관련 인원은 1944년 말 현재 3,556명이었다. 직종별로 보면 대전역에 461명이 근무하였다. 열차구 285명, 검차구 302명, 기관구 1,801명, 보선구 459명, 전기구 157명, 건축구 91명이었다. 대전은 경부선뿐만 아니라 호남선의 개통으로 영남과 호남을 연결하는 중심지역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열차 운행 기록을 보면 개통 당시 대전~목포 구간의 직통 여객열차와 혼합열차 각 1 왕복 외에 대전~이리, 송정리~목포 구간의 혼합열차 각 1 왕복 등 총 4회 운행하였다. 1918년 7월 이리~송정리 구간에 여객 취급 화물열차 1 왕복을 증설하여 5회 운행, 1922년 5월 직통 여객열차 1 왕복을 증설하여 6회로 되었다. 당시 직통 운전시간이 7시간 30분으로 1시간 단축되었는데, 이는 평균시속도 34.8km까지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1924년 5월 일부 열차의 운행을 더욱 증편하였고, 노선 주변 화물의 반출과 교통의 편리를 도모하였다. 1935년에는 호남선 열차의 운행은 총 11회로 증가하였다. 이를 통해 강경과 기타 지역의 연결이 더욱 빈번해졌음을 알 수 있다. 1936년의 호남선은 대전과 서대전, 가수원, 흑석리, 두계, 연산, 논산, 강경, 함열, 황등, 이리, 부용, 김제, 신태인, 정읍, 사가리, 신흥리, 장성, 임곡, 송정리, 나주, 영산포, 다시, 고막원, 학교, 몽탄, 명산, 삼향, 임성리, 목포 등 30개 역이 있었고, 경부선과 연결되어 호남선을 통해 전국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표 35] 호남선 열차 운행횟수(1935년) * 자료 : 선교회(1986), 《조선교통사》, 삼신출판사, p.517 한편 철도역의 발전은 호남선의 경우 목포와 이리, 경부선의 경우 대전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강경은 점차 이에 편입되었다. 철도사무소도 대전에, 기관구는 대전과 익산에 설치되었다. [표 36] 철도 거점인 기관구의 설치지역(1940. 7. 현재) * 자료 : 선교회(1986), 《조선교통사》, 삼신출판사, p.517 (2) 근대 대전역의 변화(참고 15) 대전은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급격하게 발전하였다. 조선총독부 당시 철도통계를 보면, 1910년 경부선의 화물량은 대전이 서울과 부산, 대구에 이어 4위였으며, 1937년에도 동일한 4위를 유지하며 우리나라 중부권의 물류 거점 역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특히 기점과 종점인 서울과 부산의 높은 비중을 생각해 보면 중부지역에서 대전의 위상이 매우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1910년 서울과 부산을 합한 화물 수송량은 60%로, 1937년에는 74%까지 증가하였다. 산업 및 상업의 경우는 동양척식회사지점, 일해흥업 등의 농장, 대전군 농회, 축산조합이 있었으며, 주요한 회사는 대전전기주식회사, 대전피혁주식회사, 대전운수합자회사, 충청연초주식회사, 대전창고주식회사, 대전토지주식회사, 대전금융조합 등이 있었다. 철도의 개통과 함께 철도를 통한 수송량이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1913년도의 철도운수 성적은 다음과 같은데, 승하차 인원을 합하면 137,361명으로 1일 376명이 이용하였다. [표 37] 대전역 운수 성적(1913년) * 자료 : 조선총독부 철도국(1914), 《조선철도역세일반》, p.330 당시의 취급화물을 보면 발송의 경우는 쌀과 잡곡, 도착 화물은 쌀과 목재, 소금 순이었다. 목재는 각종 건축과 토목공사의 기초자재였다. 1913년 철도반입 품목은 쌀, 조, 소금 등 주식이 많았으며, 지역도 다양하게 분포되어 대전이 교통의 요지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철도의 빠른 속도를 바탕으로 전국으로 물동량이 이동할 경우 대전에서 하루 보관하는 등 물류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오사카와 시모노세키까지 화물이 이동하여 그 취급 영역이 넓었음을 알 수 있다. [표 38] 철도반입 품목(1913년) (단위 : 톤) * 자료 : 조선총독부 철도국(1914), 《조선철도역세일반》, p.335 한편 반출은 쌀이 많았으며 보리, 과일, 새끼 가마니, 채소가 뒤를 잇고 있었다. [표 39] 철도 반출 품목(1913년) (단위 : 톤) * 자료 : 조선총독부 철도국(1914), 《조선철도역세일반》, p.336 당시의 반입과 반출을 통해 대전은 교통의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수송이 되었고 또한 경부선을 통해 일본으로 화물이 수송된 것을 알 수 있다. 전국 철도역에서 여객의 경우 대전은 1910년에 10위, 1920년에 8위, 1930년에 13위, 1937년에 8위를 차지하였다. 화물의 경우는 1910년에 8위, 1920년에 13위, 1930년에 16위, 1937년에 21위를 차지하여 내륙 수송의 거점도시로 자리 잡아 갔다. 1926년 자료를 보면 일본인은 1,574호에 6,414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한국인은 1,536호에 8,314명, 그 외 외국인은 35호에 202명으로 합계 3,145호에 인구 14,930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관공 시설로는 관청과 면사무소, 학교조합, 법원 지청, 보병 80연대 3대대, 경찰서, 형무소, 헌병대대, 전매출장소, 우편국, 곡물검사소, 중학교, 고등학교, 소학교, 보통학교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관광지로서는 소제 공원, 유성온천, 계룡산 등이 있었다. 소제 공원 근처에는 대전신사가 있었으며, 300여 년 전 우암 송시열 선생의 서당이 옆에 있었다. ▲ 1919년 11월 9일 추정 사진(출처: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아카이브자료) (https://kutsukake.nichibun.ac.jp/CHO/index.html?word=大田) 초기 대전역은 지역의 중심으로 통과하는 화물이 많았다. 1926년 철도교통의 통과 차량은 15,391대, 중계화물은 51,438톤, 통과 여객은 243,084명으로 매년 20% 정도 증가하였고, 천안~군산 간의 철도 개통에 따라 더욱 늘어났다. 쌀은 군산 방면에서, 건축자재는 안동과 신의주, 승호리 방면에서, 석탄 등은 만주 등지에서 유입되었다. 1926년 대전역의 물동량을 보면 발송화물 29,439톤, 도착 화물 87,775톤, 승차 인원 241,225명, 하차 인원 241,792명이었다. 화물수입은 119,933엔, 여객수입은 350,457엔이다. 역의 종업원은 112명이며, 주요 처리화물은 쌀, 콩, 목재, 석탄, 가죽 등이었다. 일제강점기 1917년 대전의 열차 시간표를 보면 대전에서 부산, 서울 그리고 중국의 봉천, 장춘까지 운행된 것을 알 수 있다. [표 40] 대전역 시간표(1917년) * 자료 : 田中麗水(1917), 《大田發展誌》, 2000년, 경인문화사. pp.53~54 철도교통의 변화와 상권을 연결시켜 정리해 보면 대전정거장이 형성된 1905년에서 1918년까지는 정거장 주변(원동)에 관공서와 주된 상권이 자리 잡았다. 원동 주변에는 관공서가, 인동시장 주변에는 조선인 대상 잡화상이, 중앙로 주변에는 소비재 등을 판매하는 상점이 입점하였다. 그 후 대전역이 현재의 위치(중동)로 이동하면서 대전역 주변으로 상권도 따라갔으며, 1932년 도청 이전으로 대전역과 도청을 연결하는 지역(중앙로, 은행동)으로 대전의 중심지가 변화하였다. [표 41] 대전역 주변 주요상점 개소(1917년)(단위 : 개) * 자료 : 田中麗水(1917), 《大田發展誌》를 참조해서 작성 [표 42] 대전역과 상권의 변화 철도의 개통으로 도시들은 발전하기 시작하였는데, 대전은 1938년에 최초의 도시계획이 수립되어 시로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행정적으로는 1914년에 대전군이 신설되었고, 1917년에는 대전면, 1931년에는 대전읍으로, 1935년에는 대전부로 승격하였다. 대전의 발전 축도 대전역과 서대전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32년 충남도청의 위치가 두 철도역의 중간에 위치하게 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1932년 5월 30일 대전역의 발전 축을 서쪽으로 확산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서쪽으로 1.1km 떨어진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한 것이었다. 충남도청의 이전으로 대전은 1년 사이에 인구가 45%나 증가하였다. 1932년 충청남도 도청의 이전 당시 대전은 공주보다 인구나 도시기반 시설 측면에서 부족하였으나, 한반도를 엑스(X)자형의 종관 철도망으로 연결하게 되면서 통과 지점인 대전에 도청소재지를 이전시킨 것이다. 충남도청의 이전에 관한 역사는 19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0년에는 경기도 도청소재지를 수원에서 경성부로, 1920년에는 함경북도 도청소재지를 원산에서 나남(청진)으로, 1923년에는 평안북도 도청소재지를 의주에서 신의주로, 1925년에는 경상남도 도청소재지를 진주에서 부산으로 각각 이전하였다. 모두 철도가 놓인 곳이다. 충남도청의 이전 제의는 1910년을 전후로 호남선 부설 논의가 전개되면서, 주로 대전지역 일본인 거류민을 중심으로 여론이 대두되었다. 당시 공주의 인구가 더 많았음에도 대전으로 도청이 옮기게 된 것은 대전의 중심세력이 일본인들이었으며, 공주보다 일본인의 인구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내용을 [동아일보] 신문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참고 16) “공주는 조선인이 만든 곳이며, 대전은 일본인이 만든 곳이다. 즉 일본인과 조선인의 항쟁으로 관측할 수 있다.”(참고 17) 공주는 조선인, 대전은 일본인의 항쟁 구도를 이루었지만 결국 소재지는 대전으로 확정되었다. 중앙로의 양 끝단에 위치하는 대전역사와 충남도청사가 대전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대전이 서쪽으로 확장되면서 서대전역이 1936년 11월 1일 영업을 시작하였다.(참고 18) 1937년 자료에 의하면 대전은 소비도시에서 생산도시로 점차 변모하였다. 대전피혁, 대전물산, 남선창고, 대전전기 등 50개의 공장이 활발하게 움직였다.(참고 19) 이러한 발달을 요약한 것이 [표 43]이다. [표 43] 근대 대전의 변화 (3) 해방 이후의 대전 (가) 철도 관련 기관의 이전 철도의 도시 대전에는 철도 관련 주요 기관이 입주하고 있다. 광복 이후 철도 운영기관은 1946년 1월 1일 미군정청 운수부에서 시작되어 1948년 8월 15일 교통부로 개편되었고, 1963년 9월 독립채산제의 특별회계로 운영하는 철도청으로 독립하여 운영되었다. 철도청은 서울역 서부에 자리 잡았으나 1998년 7월 1일에 정부대전청사로 이전하였다. 그 이후 2005년 1월 철도청이 공기업으로 전환되면서 한국철도공사로 출범하였으며, 2009년 9월에 대전역에 위치한 철도 공동사옥으로 이전하여 본격적인 대전 철도의 시대를 개막하였다. ▲ 대전역 차량기지(한국전쟁 직후) ▲ 대전역 급수탑(2005년 촬영) 국가철도공단은 철도시설의 건설·관리와 효율적인 사업 시행 등을 수행하는 준정부기관으로 2003년 7월 29일 철도산업발전기본법 및 한국철도시설공단법이 제정·공포되면서 설립 절차에 들어가 2004년 1월 1일 발족했다. 이 공단은 과거 철도청 산하의 건설본부와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을 통합한 것으로, 철도 영업부문은 한국철도공사로 이관되었고, 공단은 철도 건설과 관리부문을 맡게 되었다. 2009년 9월 대전역 동광장에 있는 철도 공동사옥에 한국철도공사와 함께 입주하였다. 따라서 대전은 철도건설을 담당하는 기관과 철도를 운영하는 기관이 모두 위치하고 있는 철도의 메카로 변모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용산 차량기지가 폐쇄되면서 대전차량기지(대전철도차량정비단)의 역할이 더욱 커졌다. 위치는 대전 대덕구 평촌동 332번지이며, 면적은 약 535,931m2(162,119평)이다. 대전은 호남선과 분기로 대전조차장이 자리 잡고 있는데, 위치는 대전시 대덕구 대화동 산7번지로, 면적은 483,940m2(146,392평) 규모이다. ▲ 대전차량기지(출처 : 한국철도공사) 일본의 철도 도시 오미야(大宮)의 발전은 대전의 발전과 유사하다. 오미야는 일본의 철도 도시로 유명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1843년에 인구 1,508명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현의 중심지가 오미야 근처로 옮겨오고 1885년 철도역이 생겼다. 이후 동북지방과 니가타 방면의 철도가 분기하면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국유철도 시절에 차량기지와 조차장이 자리 잡았다. 철도망이 확장되면서 분기하는 철도가 12개 노선이 되어 도쿄에 이어 일본에서 두 번째로 많은 노선이 통과하고, 이러한 영향으로 인구가 50만 명이 넘고 있다. 이 시는 2007년 철도박물관을 유치하여 철도 도시로서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당시 철도박물관의 개관에 따른 경제적인 파급효과는 매년 112억 엔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지금도 매년 오미야 철도박물관을 100만 명이 찾고 있다. (나) 고속철도의 운행 철도 도시 대전은 철도를 통해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1905년 경부선 개통과 대전기관구 등 철도시설이 입주하였고, 한국전쟁 후 폐허가 되었지만 1990년 이후 철도기관이 입주하면서 철도의 도시로 부활하였고, 고속철도가 통과하는 중심도시가 되었다. 2004년 경부고속철도 개통 등으로 대전의 발전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새마을호로 2시간 소요되었으나 고속철도 개통으로 50분으로 단축되었다. 대전은 연간 고속철도 이용객이 약 1,000만 명이 넘고 있는데, 이는 서울과 동대구, 부산에 이어 네 번째이다. [표 44] 고속철도 주요 역 KTX 이용 인원(단위 : 명 / 연인원) * 자료 : 《철도통계연보》, 각 연도 * KTX 이용 인원 : 역별 KTX 승차 인원 + 역별 KTX 강차 인원(역 기준 / 일반 열차 제외) 고속철도 개통 이후 대전시민의 삶도 많이 달라졌으며, 정기권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수서고속철도의 개통으로 대전에서 수서(강남)까지 50분이면 이동할 수 있어 이제 공간적으로 새마을호로 이동했을 당시 대전은, 지금은 수원 근처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 인구의 증가 이처럼 철도 도시 대전은 해방 직후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에서 사람과 물자가 집산하는 교통의 요지로 발전하였다. 한국전쟁 초기에는 대전이 20여 일간 임시수도였고, 이후 수많은 피난민이 몰려왔다. 인구 10만 명이던 도시가 갑자기 100만 명으로 불어났는데 당시 사람들이 열차 지붕에 매달려 대전역으로 들어왔을 정도였다고 한다. 대전역은 그 당시 교통의 중심지로 주목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6·25전쟁 당시 폭격 때문에 큰 피해를 보았다. 대전역 역시 그 전쟁에 파괴되며 당시의 일본식 중세풍 대전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1958년 7월에 미국의 전쟁 복구기금을 통해 다시 건설되었다. 대전역은 이상순이라는 26세의 젊은 건축가를 중심으로 평지붕에 3층의 철근 콘크리트 모습의 역사가 지어졌다. 이는 당시 파격적인 시도였다고 한다. 특히 기본 모듈과 입면의 구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대전역의 옛 모습은 아직도 그 시절을 살았던 대전인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아있다.(참고 20) 대전은 계속해서 발전을 거듭해 1949년 대전시로 승격하였고, 1974년에 대덕연구단지의 시작과 1998년 정부종합청사의 입주, 고속철도의 개통 등으로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표 45] 대전의 인구변화 * 자료 : 조선총독부(각 연도), 《조선총독부통계연보》, 대전시(각 연도), 《대전통계연보》 4) 대전의 미래 이처럼 대전은 철도가 부설되면서 만들어진 도시이며, 그동안 철도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다시 고속철도의 개통으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향후 충청권 광역철도의 개통으로 지역의 중심으로 더욱 발전할 것이다. 향후 대전은 고속철도의 거점도시로서 더욱 성장할 것이다. 이를 위해 대전은 철도 도시답게 관련 문화유산의 정리와 보존 그리고 대전역을 복합기능을 가진 철도역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역은 이제 이용객을 위해 상품과 정보 그리고 숙박 기능까지 제공하는 다양한 시설로 진화하고 있다. 대전도 철도 도시에 걸맞게 새로운 구상을 해야 한다. ▲ 고속철도 개통 후의 대전 ======================================= 참고 11) 이 책은 저자가 이미 작성한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음을 밝혀둔다. 자료수집에 이토(우송정보대) 교수, 정병현(우송대학교) 교수의 협조가 있었다. 참고 12) 統監府鐵道管理局(1908), 《韓國鐵道線路案內》, p.44 참고 13) 田中麗水(1917), 《大田發展誌》, 2000년, 경인문화사, p.8 참고 14) [경향신문], 1974년 12월 21일, 4면 참고 15) 조선총독부 철도국(1927년), 《조선 철도 연선요람》을 참조하여 작성 참고 16) [동아일보], 1931년 3월 11일 참고 17) ‘충남도청 이전비 문제 갑론을박타가 부활키로 결정’, [동아일보], 1931년 3월 11일 1면 참고 18) [매일신보], 1936년 11월 1일, 4면 참고 19) 《조선도읍대관》, 1937년, 민중시론사, pp.23~24 참고 20) 대전근현대사전시관 게시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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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와 도시 | |
부산 - 해운과 수운(1912년 현재) | 2024.10.25 |
3) 해운과 수운(1912년 현재) (1) 일본 항로 - 부산~시모노세키 항로 철도원 소속 고려환, 신라환(이상 각 3,107톤), 일지환, 대마환(이상 각 1,691톤)과 차입선 서경환(2,904톤)의 5척으로 매일 아침, 저녁 2회 정기 운항하면서 철도 연락 및 여객 화물의 수송을 담당했다. - 부산~하카다 항로 대마운수회사의 경영으로, 기선 천진환(500톤)으로 한 달 6회 정기 운항했다. 화물 위주이며 여객은 대마도와 부산 간의 사람들이 많이 이용했다. 화물은 일본에서 석탄과 잡화, 부산에서는 미곡과 해산물이 출하됐다. - 부산 경유 서선~일본 항로 이 항로는 오사카상선, 이케사키기선의 두 회사로 오사카상선은 천진환(831톤), 살마환(1,000톤), 수마환(1,560톤), 한성환(1,125톤)의 4척으로 매월 8회 오사카~인천 간을 운행하며, 연안으로 마산과 목포, 군산에 기항하고, 또 안동환(1,803톤)과 성진환(1,244톤)은 나가사키를 기점으로 부산과 목포, 군산, 인천, 진남포에 기항하며 매월 4회 운항했다. 나가사키~대련 간의 운항을 위하여 이케사키기선회사는 대유환(661톤), 신대환(978톤), 군대환(660톤), 수길환(699톤)의 4척으로 매월 8회 운행했다. - 부산 경유 북선~일본 간 항로 이 항로에 종사하는 회사는 일본우선, 오사카상선, 조선우선 및 가와사키 기선이다. 일본우선회사는 입신환(2,703톤)으로 고베와 블라디보스토크 간 3주 1회 운항하고, 오사카상선은 신궁환(3,002톤), 장주환(1,608톤)의 2척으로 매월 3회 오사카와 청진 간을 운항했다. 조선우선은 충청환(762톤), 강원환(762톤), 함경환(802톤), 황해환(803톤)의 4척으로 매월 4회 모지와 웅기 간을 운항했고, 가와사키기선은 금평환(1,979톤)으로 3주에 1회 오사카와 청진 간을 운항했다. (2) 연안항로 부산항을 지점으로 조선 연안항로에 종사하는 것은 조선우선, 공동우선, 택산상회 등이 있었다. 조선우선은 북조선과 서선 각 항 간을 운항하고, 공동우선은 현익환(726톤), 창룡환(572톤)으로 부산과 청진 간을 운항하면서 전문적으로 명태 수송을 담당하고, 택산상회는 동해안 각 항구 및 부산과 마산 간을 운항하면서 여객과 화물 수송 그리고 이 항구를 중심으로 연안의 항구 간에서 화물 운송을 담당하였는데 부정기선이 많았다. 도로 부산의 육로교통기관은 철도 외 이 항구에서 부산진. 동래, 양산, 삼랑진, 대구 등으로 통하는 경성가도와 동래에서 분기하여 기장, 울산, 경주, 대구로 가는 길, 서쪽 대치 고개를 통하여 하단에 이르는 3개 도로가 있으며, 기타는 부근에 산재한 어촌과 마을에 통하는 소로에 불과하다. 부산진에서 동래온천까지는 조선가스전기주식회사가 경영하는 경편철도가 있었다. 하단은 낙동강의 바다 쪽에 위치한 이름난 선착장으로 부산과 가깝고(육로 1리 29정), 대치 고개를 통하는 도로가 거의 완성되어 소와 말, 지게꾼에 의한 화물의 운반이 빈번하였다. 낙동강은 철도 개통 이전에는 경상남북도를 통하는 유일한 교통기관으로 그 시대에는 하단에 모이는 물자도 많았으나, 철도 개통 후 화물의 대부분이 철도편을 이용하면서 낙동강 그리고 철도와 접촉하는 왜관, 낙동강, 구포 등에서 철도편에 접속되면서 하단의 집산물은 거의 없어졌다. 이전 하단 부근의 김해군 연안은 소금의 생산이 많아 뱃길로 상류 각지에 반출되는 수량은 연 2천만 근에 이르고, 이들 소금 운반선이 돌아오면서 곡식을 적재하여 하단에서 내리는 양이 적지 않아 이것을 다시 부산의 시장에 출하하였다. 하단~부산 간의 운송방법은 주로 범선 또는 육로로 소와 말 등에 의한 방법이 있었으며, 수운은 육로보다 수송능력이 크고 운임도 저렴하나 수로가 험악하고 위험이 수반되어 육로수송 안전의 확실성으로 점차 육운에 의한 것이 많아졌다. 하단에서 부산까지의 곡류 한 가마니에 대한 수륙 양편의 운송비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수운의 선임 : 6전 5리와 양육비 1전 8리, 계 8전 3리 육운의 선임 : 10전~11전 1913년 중 하단에 집산된 곡류는 53,600가마니로 전년과 비교하면 2만 가마니 정도가 줄었다. 당시 하단에는 일본인 약 150명, 조선인 약 700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3) 철도와 수운의 비교 부산에서의 곡류 거래는 주된 상업으로 집산 경로는 철도편과 배편이 있으며 철도편에 의한 것은 경부 연선 남부에 국한되었으나, 해항 운임이 장거리 수송을 조장하면서 경부지방은 물론 호남, 경원, 경의선 지방에서도 계속 집중되었고, 주(舟)운에 의한 것도 연안 교통의 발달에 따라 동서 연안에서도 부산항의 상권이 점차 확대되었다. 주요 출산지별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가) 철도편 구포 . 부산과의 거리(마일) : 11 . 1톤의 운임(원) : 0.65 . 산지에서 출발지까지의 운반방법 : 낙동강 유역에서 배편 및 소, 말 등 낙동강 . 부산과의 거리(마일) : 32 . 1톤의 운임(원) : 1.58 . 산지에서 출발지까지의 운반방법 : 낙동강 유역에서 배편 및 소, 말 등 진영 . 부산과의 거리(마일) : 42 . 1톤의 운임(원) : 1.98 . 산지에서 출발지까지의 운반방법 : 소·말 등 또는 지게 밀양 . 부산과의 거리(마일) : 39 . 1톤의 운임(원) : 1.86 . 산지에서 출발지까지의 운반방법 : 소·말 등 또는 지게 경산 . 부산과의 거리(마일) : 68 . 1톤의 운임(원) : 2.84 . 산지에서 출발지까지의 운반방법 : 소·말 등 또는 지게 대구 . 부산과의 거리(마일) : 78 . 1톤의 운임(원) : 3.14 . 산지에서 출발지까지의 운반방법 : 부근에서 철도편 또는 소, 말 등 왜관 . 부산과의 거리(마일) : 95 . 1톤의 운임(원) : 365 . 산지에서 출발지까지의 운반방법 : 낙동강 유역의 수운 또는 소, 말 등 김천 . 부산과의 거리(마일) : 115 . 1톤의 운임(원) : 4.10 . 산지에서 출발지까지의 운반방법 : 소·말 등과 지게 대전 . 부산과의 거리(마일) : 171 . 1톤의 운임(원) : 5.22 . 산지에서 출발지까지의 운반방법 : 부근에서 철도편 또는 소, 말 등 (나) 배편 하단 . 부산과의 거리(마일) : 3 . 1톤의 운임(원) : 0.78 . 산지에서 출발지까지의 운반방법 : 택산상회 예선 마산 . 부산과의 거리(마일) : 35 . 1톤의 운임(원) : 0.90 . 산지에서 출발지까지의 운반방법 : 상동 통영 . 부산과의 거리(마일) : 63 . 1톤의 운임(원) : 0.94 . 산지에서 출발지까지의 운반방법 : 조선우선회사 예선 삼천포 . 부산과의 거리(마일) : 90 . 1톤의 운임(원) : 1.80 . 산지에서 출발지까지의 운반방법 : 기선편 진교 . 부산과의 거리(마일) : 108 . 1톤의 운임(원) : 1.80 . 산지에서 출발지까지의 운반방법 : 상동 선진 . 부산과의 거리(마일) : 98 . 1톤의 운임(원) : 1.80 . 산지에서 출발지까지의 운반방법 : 상동 목포 . 부산과의 거리(마일) : 212 . 1톤의 운임(원) : 2.22 . 산지에서 출발지까지의 운반방법 : 기선편 울산 . 부산과의 거리(마일) : 35 . 1톤의 운임(원) : 1.44 . 산지에서 출발지까지의 운반방법 : 기선편 포항 . 부산과의 거리(마일) : 89 . 1톤의 운임(원) : 2.34 . 산지에서 출발지까지의 운반방법 : 기선편 삼척 . 부산과의 거리(마일) : 179 . 1톤의 운임(원) : 3.12 . 산지에서 출발지까지의 운반방법 : 기선편 강릉 . 부산과의 거리(마일) : 212 . 1톤의 운임(원) : 3.24 . 산지에서 출발지까지의 운반방법 : 기선편 원산 . 부산과의 거리(마일) : 298 . 1톤의 운임(원) : 3.52 . 산지에서 출발지까지의 운반방법 : 기선편 (4) 철도 개통과 도시의 발전 부산은 1876년 근대 국제항으로 개항과 함께 우리나라의 무역·상공업 중심지로서 발전하였다. 특히 1905년 경부선의 개통으로 인구는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1905년에 제1 부두가 축조되어 해운과 연결되었다. 당시 부산역은 초량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고, 1908년 임시정거장을 마련하면서 부산역으로 역명을 바꾸었다. ▲ 부산잔교와 연락선(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아카이브 제공) 첫 번째 역사는 1910년 10월에 준공되었다. 1905년 경부선의 개통과 함께 부산은 크게 발달하였다. 경부선 개통으로 지역 간의 신속한 이동이 가능해져 공간구조도 크게 변모하였다. 당시 1894년 우리나라를 다녀간 영국 여성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견문기에서 말을 타거나 걸어도 한 시간에 4.8km 이상은 갈 수 없어 당시 서울~부산 간에 약 14일이 소요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부선 개통 후 서울~부산이 약 14시간이면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905년 경부선, 1906년 경의선, 1914년 호남선과 경원선 개통 후 우리나라는 X자형의 종단철도망이 완성되어 국토 공간의 틀이 확립되었다. 또한 조선 시대까지 도로축인 서울~용인~충주~조령~문경~대구~밀양~부산과 철도 노선을 비교해 볼 때 철도는 충청북도를 지나지 않고 서쪽인 충청남도를 통과해서 그간 교통의 요충이었던 충주와 청주보다는 대전지역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철도망이 지나는 서울~대전~대구~부산 축이 우리나라 국토발전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고, 결국 이 노선을 따라 경부고속철도가 운행하게 된 것이다. [표 32] 철도 개통 전후의 이동 시간(서울~부산) [그림 9] 철도 개통 전후의 이동시간(1905년 전후) ▲ 초기 부산역(1910년 준공, 일본 철도 팩토리얼 잡지 이마쓰 편집장 제공) 1934년의 어느 여행단의 조선과 만주여행의 일정을 보면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여행단은 1934년 9월 13일에서 9월 30일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먼저 관부연락선으로 조선해협을 건넜는데, 9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이후 아침에 도착하여 부산에서 출발하여 당시 경성(서울)에 8시간 30분 만에 도착하였는데 평균 시속은 52km였다. 이 여행은 평양과 안동, 봉천, 하얼빈으로 당시 철도를 타고 관광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운임 수준은 2등 기준으로 서울에서 부산 간 12엔 63전으로 싼 편은 아니었는데, 당시 철도종사원의 평균 월급은 약 50엔 정도로 4분의 1에 해당했던 것이다. [표 33] 부산을 통한 일본과 중국 여행(1934. 9. 13.~9. 30.) * 자료 : ジャパン·ツ-リスト·ビュ-ロ-, 《旅程と費用槪算》(博文館, 1934년)을 참조해서 작성 [그림 10] 부산·만주 간의 승차권 이러한 교통 요충지인 부산은 급격하게 발전하였다. 부산의 인구를 보면 1915년에 60,804명에서 1925년에 116,853명, 1944년에 329,215명으로 30년 사이에 약 5배 이상이 증가하였다. [표 34] 철도 개통 후의 도시인구의 변화(단위 : 명) * 자료 :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및 국제조사자료 1914년 4월 부제(府制)를 실시했을 당시 부산 인구는 20,000명을 조금 넘었으나, 시역(市域)의 확장과 항만의 발달로 1925년에는 116,853명으로 증가했다. 이후 일제의 대륙 침략을 위한 관문으로써 무역량이 증가하였고, 1936년과 1942년 시의 영역 확장으로 도시의 발달이 촉진됨에 따라 인구는 1944년에 329,215명이나 되었다. [지도 12] 부산 지도(1930년대) (5) 도시의 발전 일제강점기 일본은 식민정책을 강압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주요 사업을 집중적으로 추진하였다. 특히 부산이 발전하면서 도시 내 이동을 위한 전차가 부설되었다. 일본이 한국 정부로부터 특허를 얻어 경영한 부산궤도(주)선의 부산진~동래온천 간 9.9km의 증기철도는 실제 조선의 사설철도의 효시이며, 대한제국 시대 유일한 것이었다. 이 철도는 1909년 6월 20일 부산주재 오이케 주스케(大池忠助) 외 6명이 출원하여, 같은 달 29일자로 한국 내무대신으로부터 특허를 얻어 같은 해 8월 29일 부산궤도(주)의 설립등기를 마쳤다. 자본금 10만 엔으로 하고, 선로는 전용궤도를 부설하여 궤간 0.6m, 증기 동력, 26kg/m 레일을 사용하였다. 최급 기울기 40분의 1, 곡선반경 3쇄(鎖) 계획으로 회사 설립등기 후 곧바로 건설 공사에 착수하였다. 같은 해 11월 말일에는 부산진 성내에서 동래 남문까지 6.8km, 12월 18일에는 동래 남문에서 동래온천까지 3.21km 구간의 공사를 준공하여 12월 19일 10.0km의 운수 영업을 개시하였다. 1915년 10월 31일 부산진~초량선이 부설되었고, 부산~동래 간은 경편과 전차를 겸용할 수 있게 건설되어 1915년 11월 1일에 영업을 개시하였다. 시내선은 1916년 9월에 개통·운행되었다. 1917년 12월에는 우편국~중앙동~광복동~한전(현 충무동)선이 개통되었고, 9월에는 옛 부산역전~부산진 간의 복선화와 1925년 보수동~도청 앞~부용동, 1927년 10월 말에는 동래선을 온천장까지 연장하여 1928년 9월에 공설운동장까지 연장·개통되었다. ▲ 부산진~동래 간 최초 사설철도 부산궤도주식회사 동래선(1909년) 한편 1931년 10월 전차가 다닐 수 있는 궤도로 바뀌었고, 아울러 1934년 9월에는 토성동~공설운동장까지 복선이 개통되었다. 한국전쟁 후 부산 인구가 계속 늘어나고, 교통난이 심해지자 서면~운동장, 서면~온천장, 서면~충무동, 서면~영도 등 4개 방면으로 운행하였고, 1960년대 중반까지 1일 평균 12만 명의 승객을 수송함으로써 시민의 발 역할을 크게 담당하였다. 그러나 도시교통의 혼잡과 미관을 고려하여 1966년 1월 1일부터 운행이 중지되고, 1968년 5월 20일 전차 선로를 완전히 철거하여 지금은 볼 수 없게 되었다. 1949년 8월 부산시(釜山市) 개칭과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국 각지에서 피란민이 몰려들고 임시수도가 되면서 인구는 급증하여 1951년 844,134명, 1955년 1,049,363명으로 100만 명을 돌파하였다. [지도 13] 부산 전차노선도(1939년,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제공) 광복 이후 1945년에는 281,160명으로 일본인이 물러감에 따라 일시적으로 줄어들기도 했다. 1963년 1월 정부 직할시(直轄市) 승격과 행정구역 확장으로 1963년의 인구는 1,360,630명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추진으로 경제발전과 도시화가 촉진되면서 인구는 점차 급증하기 시작하여 1970년에는 1,842,259명, 1978년 행정구역 확장으로 김해 일부 지역이 편입되면서 2,879,570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1980년에는 3,159,766명으로 300만 명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990년에 3,798,113명(1990년까지는 상주 인구조사 기준)으로 인구 증가는 둔화되면서, 1992년 3,887,278명(1991년 이후는 주민등록인구 통계 기준)으로 전년도 보다 0.1%가 감소하였다. 1995년 1월 광역시(廣域市) 개칭과 3월 행정구역 확장으로 양산군의 5개 읍·면이 편입되면서 인구는 3,892,972명으로 약간의 증가가 있었다. 이후 경제침체에 따른 영세기업의 역외 이전과 출산율 감소로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 1980년대 부산역(한국철도공사 제공) 이후 부산 인구는 계속 줄어들고 있는데, 2019년 12월 기준으로 총인구는 3,466,563명(전년 대비 27,456명 감소)이고, 성별 구성은 남성 49.2%, 여성 50.8%이다. 최근 부산 지역의 변화는 역 중심의 원도심에서 북구, 사상구, 사하구, 강서구의 서부산권과 센텀시티 주변의 동부산권으로 발전 축이 이동하였고, 신도시인 서면의 상업 기능과 연산의 행정기능 등이 원도심의 기능을 보완하고 있다. (6) 부산의 미래와 맺는말 부산은 항만과 철도가 부설되어 발전하기 시작한 우리나라 제2의 도시로 해양 수도, 동북아의 물류거점, 유라시아 철도의 출발지로서 그 역할이 기대되고 있다. ▲ 부산역(2008년) 역사적으로 부산은 수운과 항만을 시작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내륙 교통인 철도가 부설되면서 우리나라 두 번째 규모의 국제적인 도시로 성장하였다. 내륙 교통이 경부선과 경전선, 동해남부선으로 연결되고, 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전국에서도 편리한 이동으로 지역이 더욱 성장하고 있다. 향후 부산의 지리적인 위치를 통하여 동북아는 물론 유라시아와 연결되는 거점도시로서 그 기능이 더욱 기대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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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와 도시 | |
부산 - 근대 부산의 교통, 개항 | 2024.10.18 |
3. 부산 우리나라의 도시발전은 교통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조선 시대엔 수운을 중심으로 인구가 밀집하고 이를 통해 이동이 빈번하였고, 근대에 들어서는 개항으로 그리고 철도가 개설됨에 따라 내륙 교통이 발달하면서 근대적인 의미의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번에는 개항과 함께 도시가 형성되었고 철도 개통으로 크게 성장한 부산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지리적으로 부산이 인접한 낙동강은 저산성 산지를 경계로 배후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이 계곡은 한반도 교통의 요지이다. 부산은 한반도의 돌출 부분에 위치해 좁은 강을 끼고 이어지며, 후방 가까운 곳에는 중요 교통로가 되는 낙동강 계곡이 위치한다. 이러한 위치상의 특징은 부산이 조선 내 교통의 요충지, 한반도 제일의 무역항, 더욱이 동아시아의 관문으로서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근대 교통요지인 부산은 1930년대에 이미 국제적인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부산과 시모노세키 간에는 오전과 오후 두 차례의 철도 연락선이 왕복하고 내륙의 경부선은 부산을 기점으로 경성(京城, 서울), 봉천(奉天, 지금의 심양)에 직통열차가 운행하였다. 하코다테(函館), 기륭(基隆), 홋카이도(北海道), 대만(臺灣)으로 가는 관문으로서 여객 왕래, 화물 집산의 요지이며 유럽과 아시아 연락의 국제열차를 운행함으로써 세계 교통의 대관문으로서 손색없는 자연적인 위치 조건과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지도 10] 조선 시대의 부산(대동여지도 1861년 제작, 서울대학교 규장각 제공) 부산이란 지명은 원래 15세기 전반까지 부산포(富山浦)라 하였으나,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부산포(釜山浦)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부산포는 원래 독립된 지방행정 단위의 군이나 현이 되지 못하고 동래도호부(東萊都護府)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 동래는 오랫동안 현으로 내려오다가 명종 2년(1547년)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동래도호부 관내의 역으로는 휴산역과 소산역이 있었다. 조선 시대 부산(동래)은 나라의 관문이었기 때문에 국방상 요충지였다. 금정산성은 그 규모로 볼 때 국내 최대의 산성이며, 국방시설도 발달하여 지금의 수영에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부산진에는 부산진영이 설치되어 있었다. 1) 근대 부산의 교통 우리나라는 강을 이용한 수운이 발달하였는데, 수운과 관련한 도시는 한강으로는 춘천과 원주, 충주, 청주, 금강으로는 공주와 강경, 영산강은 영광과 나주, 낙동강은 대구와 진주 등이었다. 부산은 낙동강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 항로는 구포~삼랑진~현풍~사문진~왜관 및 신촌(상주군)~달지진 및 마전(예천군)~양호진(안동)까지 연결되어 우리나라의 관문인 부산포에서부터 경북의 최북단까지 담당하였다.(참고 10) 낙동강 연안의 김해와 창원, 밀양 등에서 지류별로 조세미를 집하(集荷)한 뒤, 다시 뱃길을 이용하여 상류로 거슬러 올라 성주까지 옮겼다. 당시 낙동강의 주요 나루는 아래로부터 김해의 강창포(감동포), 양산의 동원진, 밀양의 수산진, 의령의 정암진, 창녕의 우산진, 현풍의 답곡진, 대구의 사문진, 성주의 동안진, 상주의 회촌진, 용궁의 하풍진(삼강), 안동의 대항진 등이었다. 성주에 모인 조세미는 다시 육로를 이용하여 충주의 경원창(慶源倉)에 이르고, 또다시 배편으로 남한강 수로를 따라 서울로 수송하였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기 이전에 대부분 화물 운송은 낙동강 수운이 담당하였다. 경부선 개통 이후에도 어느 정도 수운의 역할이 있었으며, 일부 지역 토산물 등은 수운으로 하단포와 구포로 옮겨진 후 철도를 통해 소비지로 운송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부산항으로 수입된 외국 상품이나 수산물 등은 하단포와 구포에 집결된 다음 수운으로 경상도까지 운반되었다. [지도 11] 부산과 낙동강 수운(대동여지도 1861년 제작, 서울대학교 규장각 제공) 낙동강 수운을 통해 지역 특산품인 소금이 많이 운반되었다. 이 길은 영남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소금길이었다. 고대에서부터 구한말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소금은 전적으로 낙동강을 통하여 조달되었다. 낙동강 하구에 자리한 명지(鳴旨)와 녹산(菉山)의 바닷가에 있던 염좌(鹽座)에서 생산된 소금이나 해산물(건어물, 새우젓 등)이 구포의 남창(南倉) 나루터에 모였다가 상류로 거슬러 오르면서, 삼랑진의 뒷기미 나루터를 거쳐 수산과 남지, 박진으로, 더 위로는 밤마리(栗旨)와 현풍(玄風) 등지로, 또 상주의 낙동진과 안동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소금과 해산물을 팔았고, 현지에서는 나락, 보리, 콩, 팥, 기장, 조 등의 농산물을 싣고 내려왔다. 조선 시대의 인구는 이러한 지리적인 특성과 관련이 있는데, 말기인 1789년의 인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이 189,153명(경기도), 평양 107,590명(평안도), 의주 89,970명(평안도), 충주 87,731명(충청도), 전주 72,505명(전라도), 경주 71,956명(경상도), 함흥 71,182명(함경도), 상주 70,497명(경상도), 진주 69,495명(경상도), 길주 65,202명(함경도), 해주 63,472명(황해도), 대구 61,477명(경상도), 양주 60,425명(경기도), 강계 60,419명(평안도), 성천 58,956명(평안도), 나주 57,783명(전라도), 수원 57,560명(경기도), 영흥 57,560명(함경도), 성주 53,365명(경상도), 황주 54,061명(황해도), 홍주(홍성) 52,761명(충청도) 순이었다. 이 중에서 수운과 관련된 도시는 서울과 평양, 의주, 진주, 충주, 나주 등이었다. 2) 개항 부산의 발전은 개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은 1875년 5척의 군함으로 부산항에서 무력시위를 전개한 데 이어 강화도에도 운양호사건을 도발하고, 1876년 일본 정부는 소위 운양호 포격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군함 7척을 강화도에 보내어 조약 체결을 강요하여 1876년 2월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부산포(1885년, 고신대학 이상규 석좌교수 제공) 조약은 전문 12개 조항으로, “조선은 20개월 이내에 부산항 이외에 2개 항을 개항하고 일본 상인 활동을 보장하고, 일본은 조선이 지정한 항구에 영사를 파견하여 주재시키고, 일본인의 범죄 행위에 대하여는 일본 영사가 처리한다.”라는 등 불평등 내용이었다. 이어서 ‘병자수호조약부록’, ‘조일무역장정규칙’이 강제적으로 체결되었다. 한편 일본은 일본인 보호를 위한다는 구실로 외무성 관리를 관리관으로 파견하였고, 관리관과 동래부사 사이에 부산 일본인 거류지 설정 문제의 회담이 진행되어 1877년 1월 30일(양력) 부산구조계조약(釜山口租界條約) 체결로 일본인의 내왕과 통상, 토지임차권, 가옥 건축권 등의 확보로 점차 부산지방을 잠식하여 침략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부산에 일본 이사청의 설치로 영사관은 물론 감리제도가 폐지되고 일본 전관거류지가 초량왜관이 있었던 용두산 일대 330,000m2 면적으로 설치되었다. 일본 정부는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로 부산항 매축과 토목, 철도, 도로공사 등에도 주력하였다. 먼저 매축 및 부두 공사 시설을 시작, 오늘날 중앙동 부근 바다의 매축(바다를 메움)을 1902년 7월 착공하여 1905년 12월 준공하였고, 1902년 7월부터 1909년 8월까지 1, 2기에 걸쳐 136,534.2m2를 매축하였다. 이외에 초량과 부산진 앞바다 1,221,000m2도 매축하였다. 부산항 개항과 일본인 조계지 설치 이후 외국과의 항로가 개설되고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오사카상선과 조선우선으로 일본과 우리나라, 대륙을 연결하는 항로가 개설되었다. 이 중심에는 부산이 있었고, 부산은 이를 통해 급격하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31년 우리나라와 일본 간의 조선우선의 정기항로 현황을 보면 부산과 일본 간의 정기항로는 16회로 우리나라 항구에서 가장 많은 항로를 보유하였다. [표 31] 조선우선(朝鮮郵船)의 일본과 조선 간 정기항로(1931. 5.) * 자료 朝鮮旅行案內社(1931), pp.128~130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연락하는 관부연락선은 철도와 연계되어 철도국에서 운영하였는데 그 이용객도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1905년 이용객이 연간 35,000명에서 1925년에 598,174명, 1940년에 2,198,113명이었다. ▲관부연락선(景福丸,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아카이브 제공) ======================================= 참고 10) 고동환(2015), 《한국 전근대 교통사》, 들녁, pp.272~2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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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와 도시 | |
서울 | 2024.10.11 |
2. 서울 여기서는 근대도시의 성격을 가지고 철도의 영향이 매우 큰 도시와 내륙 교통으로 수운이 쇠퇴한 도시 그리고 철도의 기능을 새롭게 해석한 역을 선정하여 이를 설명해 보고자 한다. 철도를 통해 지역과 주변이 크게 변화한 주요 역으로는 고속철도가 정차하는 서울과 부산, 대구, 대전을 선정하였고, 철도가 만든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익산과 장항, 북한의 신의주 그리고 철도 개통으로 쇠퇴한 강경, 새로운 문화역으로 자리 잡은 황간역을 분석하였다. 우리나라 철도는 고속철도로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되었고, 수도권 고속철도인 GTX가 추진되고 있다. 2019년에는 국제철도협력기구(OSJD) 회의도 개최되어 향후 우리나라도 대륙철도를 달리는 꿈을 실현해 나가고 있다. 서울역의 시작은 경인철도로부터 시작되었다. 미국인 모스로부터 경인선 부설권을 넘겨받은 경인철도인수조합은 1899년 4월 4개 공구로 쪼개어 공사를 시작했다. 인천~노량진 구간을 우선 완공해 1899년 9월 18일에 영업을 시작했고, 한강철교 준공 후 1900년 7월 8일 경성~인천 간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경인선이 개통되자 12시간 걸리던 서울~인천은 1시간대로 단축됐다. 가히 교통 혁명이었다. 경인철도의 역은 초기에는 경성역(서대문역), 남대문역, 용산역, 노량진역, 영등포역, 오류동역, 소사역, 부평역, 우각동역, 축현역, 인천역 등 11개였다. ▲ 한강 철도건설 [그림 8] 초기 경성역의 모습 ▲ 초기 남대문역(훗날 경성역 → 서울역) 서대문역의 경우는 1919년 폐역이 되었지만, 그 역사를 보면 매우 흥미롭다. 경인선 개통 시 경성역으로 1900년 7월 8일 역사 업무가 시작되었다. 1905년 1월 1일부터는 경부선 시·종착역이 되었다. 그해 3월 27일 경성역에서 서대문역으로 개명되었다. 따라서 1905년 경성역이 서대문역이 된 이후 남대문역이 경성역이 된 1923년까지 약 18년 동안 우리나라에 경성역이라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1919년 3월 말 서대문역이 폐지되고 남대문역을 경부선의 기점으로 하였다. 또한 경의 본선의 일부를 개량하여 경성 서부의 아현터널 등이 준공되고 1920년 11월 수색~남대문 구간이 직통으로 연결되어 남대문역이 경의선의 기점이 되면서 우리나라 간선의 기점역으로 자리 잡았다. 1922년 7월경부터 경성역(구 남대문역) 신축에 착수하여 경성역은 1925년 10월 15일부터 신역에서 영업 개시하였다. ▲ 신축 중인 경성역(1925년 10월 15일 영업 개시) 건축의 경우에도 철도역은 큰 영향을 미쳤는데, 경성역(서울역)의 경우는 르네상스 혹은 절충식으로 불려 새로운 건축양식으로 소개되었다. 비록 일본인에 의해 지어진 건축물이지만 우리나라의 건축양식에 영향을 끼쳤다. 건축가는 쓰카모토 야스시였고, 시공은 시미즈건설, 건립 주체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였다. 경성역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나라 철도역의 효시였다. 승강기, 증기난방 등의 근대적인 설비를 완비하였으며, 당시는 기능적으로도 신식으로 중앙역에 걸맞은 당당한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경성역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열차가 수시로 왕래하여 국제 여객 수송에도 기여하였다. 1942년 10월 1일 현재 조선·만주·중국 직통 여객열차의 1일 운전횟수를 보면 부산~북경 구간 2 왕복, 부산~하얼빈 구간 1 왕복, 부산~신경 구간 1 왕복, 부산~봉천 구간 1 왕복, 경성~목단강 구간 2 왕복으로 경성역을 경유하였다. 개업 직후 여객수도 별로 많지 않았기 때문에 역 구내에서의 여객유도장치 설치의 필요성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 후 매년 증가하는 여객을 질서 있게 유도하기 위해 이 장치의 필요성이 점차 높아졌다. 1925년 7월에 조선철도에서는 처음으로 서울역의 맞이방(대합실) 및 여객용 승강장에 확성장치를 설비하여 여객의 정리 유도용으로 사용한 결과 여객으로부터도 호평을 얻어 양호한 실적을 올렸기 때문에 이후 급속하게 주요 역 구내에 설치되었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에는 등화관제 실시 시의 여객 유도와 더불어 관제 하의 역 구내 입환 작업의 능률 저하 방지라는 새로운 목적을 위해 역뿐만 아니라 조차장 구내에도 설치되었다. 설치를 시작한 지 불과 십수 년 후인 1939년도 말에는 설비 수가 53대가 되고 확성기 수도 200대를 넘었다. 역 구내 조명으로는 1932년에 경성역 구내의 남북으로 30m 철탑 2기를 건설하여 여기에 일광등 각 5개를 설비하고 동시에 용산역 구내에도 같은 철탑 1기를 건설하여 일광등 5개를 시설하였다. 한편 경성역의 경우는 지역 간 철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도시 교통사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899년 개통된 전차는 초기 경성역인 서대문역 인근인 서대문에서 청량리 간의 운행으로 대중교통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전차는 계층을 초월한 운송기관으로 시민들의 필요로 노선 연장과 복선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전차 수도 증가하여 대중교통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노선의 신설은 성곽의 파괴로 이어졌고, 성 밖까지 연결되는 전차노선은 서울의 공간구조를 변화시켰다. ▲ 차고지의 전차들(1968년 11월 29일 동대문 밖, 이혜은 교수 제공) 시내 대중교통수단으로 시민들의 환영을 받아 노선을 증설해야 했던 전차는 조선 시대 500여 년 동안 지속되어 오던 서울의 모습을 크게 변모시켰으며, 전차노선의 부설은 성문 개폐 및 인정과 파루까지도 폐지하게 하였다. 남대문에서 구 용산, 서대문에서 마포까지의 전차노선의 연장은 새로운 주거지 및 시가지 확장을 가져왔고, 이는 서울의 수평적 공간 확장에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지도 9] 서울 서부지역 철도 노선도(경성 외곽 순환선 포함, 1940년경) 또한 서울이 확대되면서 경성역은 광역교통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1929년 이후에는 용산~서강~당인리 간 및 서강~신촌 간 용산선에 열차 운전이 시작되었다. 또한 1940년도에는 용산~서강 간(4.3km) 및 서강~성산천신호소(수색조차장 내) 간 복선과 서강~신촌 간(1.6km) 선로 개량공사에 착수하였다. 이에 따라 직통 화물열차는 경부선 용산역에서 경성역을 통과하지 않고 직접 경의선 수색조차장으로 직결되는 한편, 용산역부터는 서강~당인리~신촌 또는 서강~신촌을 거쳐 경성으로 통하는 도시 환상선 운전을 개시하게 되어 도시 주변 교통은 한층 편리해졌다. ▲ 경성궤도(1930년~1961년) 아울러 경성역을 기점으로 경의선, 경부선이 통과하였고, 이를 통해 국제열차가 운행되었으며, 경춘선과 경성궤도 등 수도권의 거점 교통 역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표 28]을 보면 경춘선, 경성궤도 등도 경성역(전차 역명은 경성역앞) 전차로 연계되어 이동공간을 확대시켰다. [표 28] 근대 경성역과 연계 철도교통 ▲ 서울역 근처 경성역이 서울역이라는 지금의 이름으로 바뀐 것은 광복 이후인 1947년 11월 1일이다. 서울역의 새로운 변화는 2004년 고속철도의 개통과 함께 찾아왔다. 2005년 서울역의 고속철도 이용객은 1,200만 명에서 2017년에 2배인 2,400만 명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이제 서울역은 고속철도의 거점 역으로 중심에 있다. [표 29] 철도역 1일 이용객 추이(고속철도 + 일반철도)(단위 : 명 / 일 평균) * 자료 철도공사 1일 승하차 인원도 2021년 기준으로 서울역은 58,164명으로 가장 많은 여객이 이용하고 있다. KTX의 이용객도 서울역 1일 평균 이용객은 2019년에 78,774명으로 가장 많고, 코로나의 영향으로 2021년에 45,372명으로 감소하였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승객을 취급하고 있는 역이다. [표 30] KTX 역별 1일 이용객 순위(2019~2021년)(단위 : 명 / 일 평균) 이제 서울역은 수도권 고속철도를 통해 더욱 발전할 것이다. GTX 노선 중 가장 빠르게 진행되는 A노선은 지하 50m 깊이에서 최고 속도 시속 200km로 2023년 말에 개통될 예정이다. 완공 시 일산~서울역 14분, 동탄~삼성 20분이 소요되어 우리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이다. 그동안 서울역은 우리나라 철도교통의 거점 역으로 발전을 거듭해 왔다. 향후 서울역은 지리적인 위치와 경제적인 위상, 향후 한반도 철도망 계획에서도 그 위상이 더욱 확대 강화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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