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역사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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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통신설비 및 운용 | 2023.01.25 |
4 | 신호 보안설비 | 2023.01.16 |
3 | 전철화(電化) 및 전력설비 | 2023.01.09 |
2 | 전기과 신설 이후 | 2023.01.04 |
1 | 공무과시대의 전기 | 2022.12.26 |
국유철도의 전기/통신 | |
통신설비 및 운용 | 2023.01.25 |
통신설비 및 운용 제1절 통신 회선 전화 및 전신 회선 전화 회선의 확충 강화는 수송 요청의 증가에 따라 1920년대 후반 이래 매년 계획적으로 실시되었다. 특히 1937년의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중국대륙으로의 수송량이 급증함에 따라 각 주요 간선구간의 통신설비가 극도로 부족해졌기 때문에 1940년부터 4개년 계획으로 전화용 중계선이 증설되었다. 과거 5년간 통화량의 약 2.5배에 달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계획은 긴급히 실현되어야 할 문제였다. 그러나 전시 중의 자재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계획을 변경하게 되어 일부 구간에서는 전선에 의한 가선공사를 연기하고 오직 반송 전화장치에 의한 통신 회선의 증가라는 방법으로만 실시되었다. 이 계획에 의해 증강된 통신설비 중 주요한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회선 신설은 전시 하의 자재 및 요원의 더할 수 없는 부족함으로 인해 곤란을 겪었지만, 관계직원의 노력과 지혜에 의해 달성되었다. (1) 중앙선의 전선 영업 개시에 따른 전 구간의 통신설비의 신설 (2) 전화 중계선의 신설 ① 반송식 전화선(각 3회선) 신설 용산, 신의주 구간 용산, 부산 구간 용산, 강계 구간 용산, 신경 구간 용산, 길림 구간 용산, 신경 구간 용산, 함흥 구간 청진, 도문 구간 ② 실회선 각 1회선 신설 이리, 목포 구간 용산, 복계 구간 대전, 순천 구간 순천, 진주 구간 청진, 나진 구간 외 5구간 (3) 배차지령 전화선 신설 용산, 철원 구간 평양, 원산 구간 대전, 여수 구간 외 4구간 (4) 운전지령 전화선 신설 용산, 토성 구간 평양, 정주 구간 마산, 진주 구간 외 2구간 (5) 전화 교환기 신설 또는 개량 통화용량의 증가와 방공적인 견지에서 주요 장소의 통신설비 증설 및 개량과 전화 교환방식의 자동 교환화가 이루어졌다. 또한 반송 전화의 단국장치의 분산화와 내탄전화교환실의 신설도 주요 역 구내에서 이루어졌다. 신설 : 철원, 안동, 부산, 강계 개량 : 용산, 부산, 대전, 순천 외 4곳 반송장치 분산 : 영등포, 함흥 외 3곳 내탄(耐彈)전화교환실 : 평양, 대전 (6) 무선통신설비 신설 및 증설 신설 : 경성, 순천, 부산, 함흥, 원산, 경북 안동 증설 : 대구 (7) 1940년부터 4개년 계획에 의한 통신 회선의 증강으로 1944년 3월 말 현재의 통신 회선의 총연장길이는 약 13만 5천km가 되었다. (8) 1944년 9월까지 신설된 전신 회선은 다음과 같다. ① 반송식 전신 회선(각 1회선) 평양, 강계 구간 용산, 봉천 구간 용산, 평양 구간 대전, 경북 안동 구간 ② 실회선 원산, 신북청 구간 수해에 의한 통신 장해 조선철도 관내에서 수해에 의해 통신선로가 받은 피해는 철도선로의 피해와 마찬가지로 거의 매년 어딘가에서 발생하였으며, 수송 장애의 큰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관내의 대부분 하천에 충분한 호안공사가 실시되지 않은데다 원시 하천 상태인 장소가 많아서 적은 강수량에도 하천의 제방이 붕괴하여 범람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들 피해 통신선로의 복구는 각 장소에서 발생한 피해 상황의 신속 정확한 파악과 그에 대한 적절한 대책 그리고 연락을 위해 가장 급속하게 시공을 요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재해 현장에서는 불면불휴(不眠不休)의 작업을 행하는 것은 물론 때로는 생명의 위험도 무릅쓰고 탁류를 헤엄쳐 임시전선로를 가설하는 등 통신 종업원의 고생과 노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각지에서 발생한 수해에 의한 피해 발생 건수가 매우 많았기 때문에 개별 기술은 생략하고 표준적 방법으로 이루어진 복구공사의 시행 방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약술한다. 재해복구공사는 크게 나누어 응급복구와 본 복구로 나누어졌다. 먼저 응급복구공사는 재해발생의 보고를 받은 직후 바로 고무선이라고 하는 재해대책용의 2심 절연전선을 다량으로 현장에 가지고 가서 먼저 재해연락용의 통신선 1회선을 개통하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이 경우 목조건조물 및 임시기둥 등 모든 시설을 이용하여 가선하고, 가능한 한 단시간에 응급 개통시켜 그 후의 복구작업 촉진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다음 작업인 주요 중계선이나 보선전용 통신선 등의 임시복구에는 막대한 양의 고무선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인접 통신구의 재고품을 사용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이들 응급공사에 의해 통신기능은 일단 회복되고 선로의 개통과 함께 열차 운전은 재개되었지만, 그 후 전기동선이나 전주 등을 입수하여 본 복구공사에 착수하는 데는 수개월이 필요했다. 이 임시복구 기간 중 임시설비를 보수하는 데는 상당히 고생을 하였다. 또한 수해로 피해를 입은 전철화 교환기를 비롯해 전철화기, 통표 폐색기, 전신기 등의 각종 통신기기는 모두 즉시 용산의 전기 수선장으로 보내어져 분해 수리가 이루어졌다. 제2절 전신 및 전화 운용 업무의 전기과로의 이관 철도운수에 불가결한 통신 업무 운용은 영업과 소관으로 그리고 통신설비의 유지 관리는 공무과 소관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두 과가 분할하여 담당하였다. 그러나 1935년 이후 중일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수송량의 급격한 증대로 인해 통신관계 업무도 매해 급격하게 증가하여 통신 운용량의 급격한 증가를 설비면의 확충이 따르지 못하게 되어 철도 업무 전반의 원활한 수행에 지장을 초래할지 모른다는 염려가 있었다. 이 사태에 대한 대책으로 통신설비 기능의 전반적인 향상을 위하여 종래 영업과에 소속되어 있던 통신 운용에 관한 업무가 신설된 전기과로 이관되었다. 전기과로 업무가 이관됨에 따라 통신관계 업무는 설비와 운용이 일원화됨으로써 운용 측의 업무 상황이 예전보다 설비 측에 신속히 전달되게 되어 통신설비 증강에 대한 대응도 원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해마다 증가 일로를 걷던 전화 교환 업무의 효율적인 운용에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각 역에 배치되어 있던 전신담당은 역 업무를 겸하는 요원인 경우가 많은데다 이 사람들의 인사권은 영업과에 있었기 때문에 전신기술 기능면에서는 기능이 다소 저하한다는 마이너스적인 면도 발생하였다. 제3절 통신 운용(1937년 이후) 통신 운용규정은 종전부터 국내(局內) 상호간에 혹은 대외 관계기관 상호간의 업무 능률 향상을 위하여 여러 번에 걸쳐 개정, 실시되었다. 또한 1938년 6월 만주철도와의 전보취급규정의 대개정이 행해져 여러 해 동안의 불편이 일소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시국을 고려하여 철도방공통신에 관한 규정이 제정되었다. 1939년 6월에는 부산∼용산 구간에 새롭게 인쇄 전신기가 신설되어 국내(局內) 상호간의 업무용 전보 송·수신의 능률 향상을 도모하였으며, 이와 관련한 인쇄 전신기용 취급규정이 제정되었다. 같은 해 격증한 조선∼일본∼만주∼중국 간 업무상의 연락 전보를 효율적으로 취급하기 위하여 연락 철도 전보 취급규정이 4자간에서 통일, 제정되어 전보 업무 취급의 신속화에 공헌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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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전기/통신 | |
신호 보안설비 | 2023.01.16 |
신호 보안설비 제1절 자동 신호 보안설비 중국대륙에서의 시국이 급박해 짐에 따라 1935년 이후 해마다 여객화물 수송량의 증가 요청이 커져 열차 운전의 고속화와 운전보안상의 입장에서 보다 고도의 보안설비를 도입할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간선구간의 자동 신호 보안설비의 조급한 설치가 수송력 증강을 위한 유효한 방안의 하나로써 여겨지게 되었다. 마침 1937년 6월 전기과가 신설되어 간선 수송력 증강을 위한 자동 신호화와 전철화(電化)라는 두 가지의 큰 과제실현에 전력을 다해 몰두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으로 경부와 경의 양 선의 복선화공사 시행에 따라 이들 각 선의 자동 신호화공사가 계획되었다. 이렇게 해서 1940년(제75의회 협찬)에 총액 682만 엔이 예산 편성되어 경부선 대전에서 경의선 남시 구간에 자동 신호공사가 4개년 계획으로 대전부터 북으로 향하여 착공되었다. 이 때문에 1941년 4월에는 대전에, 같은 해 7월에는 수원에 그리고 1942년 4월에는 용산에 신호공사 시행전문 공사구가 설치되었다. 각 공사구에서는 요원 및 공사용 제반 재료가 부족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관계 종사원의 책임감과 주야를 가리지 않는 노력에 의해 공사는 단기간 안에 차례대로 완성되어 전시 하의 막대한 수송 요청에 응할 수 있었다. 즉, 1943년 3월 말에는 먼저 경부선의 대전∼영등포 구간이 완성되고 자동 폐색신호기 259기, 제1종 및 제2종 전기연동장치 18개 역을 동시에 사용 개시하였다. 이 구간의 자동 신호화로 인해 경부선에서 열차 운행 횟수가 가장 많은 구간의 선로용량이 급증, 경부선 전체가 다수의 여객화물을 원활하게 취급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같은 해 9월 말에는 용산역 구내의 제1종 전공계전 연동장치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같은 역 구내의 보안도가 향상됨으로써 막대한 구내 교체작업의 효율화가 동시에 달성되어 열차 운전 취급상의 가장 큰 걸림돌이 해소되었다. 한편, 1943년 제81의회에서 실시 계획 예정인 경의선의 자동 신호화공사 예산에 대하여 물가 급등으로 인해 140만 엔이 추가 동의되었다. 경부선보다 약 2년 늦게 착공된 경의선 각 공구에서도 1943년 가을에는 개성∼토성 구간, 계정∼금교 구간 및 물개∼흥수 구간의 3공구 합계 212km가 완성되고, 이들 완성에 의해 자동 폐색신호기 371기와 제2종 전기 연동장치 설치에 따른 28개 역을 사용 개시할 수 있었다. 또한 1944년 3월에는 경부선의 청진∼남성현 구간 및 세천∼대전 구간의 2공구가 완성되고, 경의선에서는 일산∼차연관 구간의 7공구 합계 127km가 이어서 완성되었다. 그 결과 자동 폐색신호기 162기, 제2종 전기 연동장치 설치에 의해 22개 역이 사용을 개시하였다. 공사는 북쪽 공구에서 속행되었지만, 종전을 맞이하여 모두 중지되었다. 1944년 9월 말 현재 공사 계획 중이거나 공사 시행 중인 주된 신호관계 공사건명 및 공사 진척 상황은 다음과 같다. 부산, 대전 구간 자동 신호설비 : 자재 획득 노력 중 평양, 남시 구간선 증가에 따른 자동 신호설비 : 자재 획득 노력 중 영등포, 경성 구간선 증가에 따른 자동 신호설비 : 1945년 말 완성 예정 수색·평양조차장 확장에 따른 자동 신호설비 : 자재 획득 노력 중 전기 원방 신호기 신설 및 개량 : 계획의 40% 준공 다음으로 자동 신호공사 구간에서의 역 구내의 연동 종별을 개설하면, 경부선 대전∼경성 구간의 24개 역 중 구내가 큰 대전은 제1종 전기 연동장치, 천안 및 수원은 제1종 전기 연동장치, 용산 구내는 제1종 전기공계전 연동장치가 설비되고, 그 외의 작은 구내에는 제2종 전기 연동장치가 설비되었다. 이들 역의 사용 개시에 의해 열차의 취급은 더욱 원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경의선의 각 역 구내에 대해서도 같은 관점에서 시행되어 일부는 사용 개시되었지만, 남은 구간은 종전에 의해 미완성인 채 중지되었다. 이어서 조선철도의 자동 신호설비의 주된 기술적인 특징을 주로 철도성 설비와 대비하면서 기술해 두기로 한다. 상기와 같이 조선철도 내의 신호 보안설비 계획과 설계 및 시행은 대부분 철도성으로부터 전입한 기술자에 의해 행해졌지만, 설비화에 있어서는 조선 철도 내의 전력 사정이나 기후 풍토 등을 충분하게 고려하여 설비 기능의 안정화에 각별히 유의하였다. 먼저 신호용 전원 관계의 경우 철도성에서는 3,300V의 신호전용 배전선을 선로에 가설, 여기에서 선조변압기에 의해 100V로 강압하여 신호등용과 신호제어용 및 궤도회로 송착전용 등에 모두 교류전원인 채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철도의 경우는 조선 내의 전력 사정이 일본의 경우와 비교하여 전압 강하률과 정전률 모두 나쁘다는 점을 미리 고려해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전시 하의 동(銅) 부족으로 인해 알루미늄선을 사용하며, 전압은 철도성의 2배인 6,600V의 신호전용 배전선이 1회선 신설되었다. 각 선조 변압기의 2차 측에는 자동 폐색신호기용으로는 36Ah의 그리고 궤도회로용에는 12AH의 축전지를 부동식으로 접속해서 배전선이 3일 낮밤 정도 연속 정전되더라도 기능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즉, 전원 사정이 안정된 일본철도에서는 교류 100V 전원인 채로 사용이 가능하였지만, 조선철도에서는 직류전원으로 변환한데다가 축전지 전원까지 필요로 하였다. 더구나 조선철도에서는 신호등용으로도 신호제어용으로도 모두 직류 10V의 저전압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제어전류 쪽이 커져서 큰 구내에서는 전원용으로 대용량의 축전지를 필요로 하였다. 그리고 이것 말고도 각 역 구내 현장에 부착된 직류 전기전철기의 구동용 모터에 대전류가 필요하고, 단면적이 큰 전선을 사용해야만 한다는 등의 불리한 점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신호 보안설비 기능의 안정화를 위해 취해진 고육지책이었다. 신호등의 경우에는 철도성이 교류 다등형의 30V 40W의 신호전용 전구를 사용했던 데에 비해 조선철도는 직류 단등형의 신호기를 채용하고, 직류 10V 5W의 절전형의 신호 전구를 사용했다. 이 직류 단등형 신호등은 직선 구간에서는 철도성의 다등형보다 훨씬 먼 거리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는 우수한 성능을 갖고 있지만, 곡선구간에서는 극단적으로 인식 거리가 짧아진다는 결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구간에 설치되는 신호등에는 커브렌즈를 신호등의 표면에 부착하여 보정 사용하였다. 궤도 회선의 경우도 철도성이 교류전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던 것에 비하여 조선철도에서는 직류로 궤도 회선을 제어하였다. 이 때문에 특별한 궤도계전기 개발을 필요로 하여 신호기기 전문 업체인 경삼제작소가 새롭게 개발한 것을 구입하였다. 이 계전기는 리텐드·뉴트럴형이라는 유극 접점이 전극할 때 무극 접점이 낙하하지 않는다는 특수한 기능을 가진 직류계전기였다. 이 계전기의 개발에 의해 전방을 달리고 있는 열차에 의한 신호현시의 변화 시에도 비록 극히 단시간이기는 하지만 불필요한 적신호가 현시되는 현상을 완전하게 방지할 수 있어서 후방에서 주행 중인 열차에 불필요한 불안감을 주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이상과 같이 조선철도에 신설된 자동 신호설비는 당시의 철도성 설비를 그대로 복사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조선 내의 실정에 따라 계획되고 실시된 설비였던 것을 특기하고자 한다. 제2절 전기 수선장 조선에서는 통표 폐색기를 비롯해 특수한 신호기기나 전철화 교환기, 지령전철화장치 등 각종 통신기기를 수리하는 민간공장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 수리 및 개조를 실시하는 직영공장인 전기 수선장이 설치되었다. 여기에서는 신호기기 관계의 각종 기기의 수리 교체 외에 현저한 개조의 예로서는 통표 폐색기 전반의 성능 향상과 타블렛의 경량화를 구체화하고, 모든 관내의 통표 폐색기를 차례로 개량형으로 교체한 것을 들 수 있다. 즉, 조선철도 관내 전반적으로는 타블렛용 자재로서 오랜 기간에 걸쳐 포금제가 사용되었지만, 1935년에 이것을 백라이트제로 교체하고 폐색기 기구의 일부를 개수하여 경량통표에 적합하도록 고쳤다. 이 장치를 수색∼일산 구간에 시험적으로 사용하였는데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조선 전체에 이것을 보급시켜서 1939년에는 경부와 경의 및 경원선 각 역의 교체를 완료하였다. 경량화와 동시에 성능이 향상된 신형 통표 폐색기 수는 200대 이상에 달하였다. 그리고 경부와 경의선에서 복선구간이 연장됨에 따라 설치된 쌍신 폐색기의 수리 대수도 점차 증가하였다. 그러나 전시 상황 하에서 각종 부품의 조달이 원활하지 않아 계획 수선을 수행하는 데 상당한 고심을 하였지만, 각 방면에 걸쳐 창의성을 발휘함으로써 종전까지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책임을 다하였다. 또한 통신기기의 수리도 오랜 기간에 걸쳐 경성의 한 곳에서만 집중적으로 수리되었다. 그러나 각종 통신용 기기의 증비에 따라 그 수선수도 급속하게 증가하고 수리를 요하는 기기도 고급화되어 이 공장의 수리 능력의 한계를 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42년 부산에 그리고 1944년 함흥에도 전기수선장이 설치되어 각종 전기설비에 대한 수선 능력의 향상을 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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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전기/통신 | |
전철화(電化) 및 전력설비 | 2023.01.09 |
전철화(電化) 및 전력설비 제1절 전철화(電化)설비 기본 조사 조선반도에서 근대산업이 아직 요람 안에서 잠자고 있던 1926년 11월 총독부는 조선에서 전력정책 기본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전 철도성 전기국장 요시하라 시게나루(吉原重成)를 철도, 체신 양 국의 촉탁으로 삼아 주요 조사를 담당하게 하였다. 한편, 철도국에서는 공사과원 요네자와(米澤) 기수 이하 수명이 이를 보좌하여 5년 1개월이 걸려 1931년 12월 세 권에 걸친 방대한 조사자료 [전력정책 기본 계획조서]를 완성하고 조선에서의 전력의 발생, 분배 및 이용 등 각 방면의 추세를 고려한 원대한 대책을 수립하였다. 그 중에서 제4장‘ 조선 교통기관의 전력이용’ 항의 국유철도 및 사설철도 당시의 현재선 및 계획 선에 대하여 상세한 전기운전 계획을 설정하였지만, 당초 이 자료는 단순한 기본 조사에 그쳐 바로 구체화를 향한 진전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실행 계획 1932년 10월 철도국장 요시다 고(吉田浩)가 취임하여 철도 전철화(電化)의 실행 계획 작성에 착수하였는데, 전철화(電化) 예정구간으로 먼저 언급된 것은 경원선 복계∼고산 구간 53.9km였다. 이 구간은 반도 중부에서 척량산맥을 동서로 횡단하기 때문에 지세상 선로구배가 험하고 터널이 많아 증기기관차로는 올라가는 견인력이 부족하고, 하행 구배운전이 불안정하고, 매연에 의한 승무원의 질식사고 등 운전상 상당히 곤란한데다 특수 열차에는 보조기관차를 이용하여 그 기능을 유지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만주사변 및 중일전쟁 발생 후 조선 산업계는 풍부하고 저렴한 수력전기를 유력한 재료로 삼아 각지에 근대공업의 대규모 발전을 재촉하였다. 따라서 여객화물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조선 내 통과여객화물은 물론 조선 출발 여객화물이 증가하여 전선에 걸쳐 철도수송량을 격증시키게 되었다. 이 구간에서도 1938년 현재 1931년에 비해 철도수송량이 약 3배까지 증가하였으며, 또한 앞으로도 계속 큰 폭으로 수송량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어 경원과 함경 양 간선의 수송력 강화에 대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 구간의 전철화(電化)가 가장 유력시되었다. 이들 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1935년 12월에 이 구간의 전철화(電化) 계획을 공작과(당시 전기과 미설)에서 입안하는 한편, 철도성 전기국에 대해서도 같은 조사를 의뢰하였다. 당초 철도 전철화(電化)에 관한 전압에 대해서는 관계기술자 일부 사이에서 일본 철도의 표준인 직류 1,500V에 구애받지 말고 이탈리아(1927년 이후 실시, 이하와 같음), 소련(1932년), 미국(1915년), 모로코(1924년), 남아프리카연방(1936년), 그 외 8개국에서 이미 실용화하고 있는 직류 3,000V를 채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이미 대두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국 기계제작자 사이에서는 이것에 관한 어떤 연구도 없었고, 또한 철도성에서도 이것을 고려할 정도의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국에서도 우선은 일본과 같은 1,500V를 채용하기로 하였다. 신 전압방식의 도입 한편, 경경선의 전철화(電化) 계획에 관한 전기방식은 경원선의 1,500V안을 버리고 3,000V로 하는 등 전력 회생 제동방식을 채용하였다. 이 신 방식의 채용은 관계기술관 사이에서 상당한 고민과 결단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여러 외국에서는 이미 직류 3,000V방식이 활발히 사용되고 있었지만 기후가 다른 일본에서, 특히 그 경험이 전혀 없는 전기기기제조업자 사이에서 과감하게 이 방식을 채용한 것이었다. 이 조선철도의 전철화(電化) 계획은 일본 국내 관계기관의 주목을 끌어 철도성과 만주철도는 물론 제조업자간에 끼친 자극은 막대한 것이었다. 또한 경험이 전혀 없었던 전기기기제조업자도 급거 이 연구 및 시험제작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불과 2년 만에 국내 제품에 의해 완전하게 자급자족이 가능할 거라는 전망이 서게 된 것은 특필할 가치가 있는 성과였다. 게다가 이 방식은 그 후 도쿄∼시모노세키 구간 광궤 신간선은 물론 동아시아 세력권 내에 건설된 전기철도의 기준전기방식으로 결정된 경위를 감안하면, 조선철도가 이 방식을 채용한 것은 전기기술계에 있어서 일대 계몽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국유철도 전철화의 필요성 경원선의 전철화(電化)는 개량비 지변에 의한 것이었지만, 경경선 일부의 급구배구간은 처음부터 전철화(電化)를 시행하도록 계획되어 신선 건설비 예산 내에서 전기운전설비를 시공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공사 착수 후에 뚜렷한 물가 급등으로 인해 당시의 예산으로는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전기운전설비를 포기하고 건설비 예산의 추가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구배구간의 전철화(電化)공사로 철도변전소는 대체로 산간벽지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난공사인 경우가 많았다. 변전소 내의 수은정류기를 이용하여 교류수전전력을 직류로 변경해 전기기관차로 열차를 견인하는 방식이다. 한편, 경성과 평양, 부산 등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고속도 전차에 의한 근거리 구간의 여객수송 또한 전철화(電化)를 촉진해야 하는 대상이었고, 특히 일찍부터 그 필요성이 요구되었던 것은 경성∼인천 간 교통의 전철화였다. 중일전쟁을 계기로 이 노선 주변에서 각종 근대공업이 상당히 발전하게 되어 여객교통량 처리가 절실한 문제가 되는 한편, 경성 및 인천의 인구 증가에 따른 주택난도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고속도 전차 운전에 따른 노선 주변 주택 개발의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예산편성의 경위 이들 전철화(電化) 계획은 1937년 6월 1일 전기과(초대관장 기사 나가이켄조)를 신설하고부터 점차 종래의 연구적인 입장을 떠나 실리적으로 되어 같은 해 비로소 경원선 복계∼고산 구간 및 경인선의 전철화(電化) 계획(직류 1,500V)이 수립되고, 의회 예산 요구서가 조정되었지만 실현까지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1938년에 이르러 경경선 일부의 전철화(電化) 계획 추가예산을 제출하였지만, 이것도 정부의 재정관계상 승인을 얻지 못하였다. 전철화(電化)공사 예산 가결 조선철도 전철화(電化)에 관한 예산은 1940년 3월 제75제국의회에서 경원선 복계∼고산 구간 전철화(電化)설비로서 359만 엔이 가결되어 1940년 이후 실행에 옮기게 되며, 1941년 3월 제76제국의회에서 중앙선 제천∼풍기 구간의 전철화(電化) 예산도 가결되었다. 경원선 복계∼고산 구간 전철화(電化) 경원선 복계∼고산 구간 53.9km의 전기 운전설비는 1940년 이후 3개년 계획으로 완성할 예정이며, 전기방식은 직류 3,000V로 결정하였는데, 이것은 조선철도에 있어서 최초의 시도였다. 이 공사는 이 방식에 의한 변전소 및 전차선로 건설을 주요 내용으로 하며 1940년 12월에 착공하였다. 1940년은 전차선로 및 변전소 건설의 기초적인 계획 및 주요 공사재료의 일부 준비를 행하였다. 1940년 12월 복계 제1전기 공사구를 설치하여 전차선로공사를 담당하게 하고, 1941년 7월에는 복계 제2전기 공사구를 설치하여 변전소공사를 담당시켰다. 1941년에는 전차선로 지지주를 세우고 복계 및 삼방변전소 건물의 공사를 시공하였다. 공사는 귀선용 본드의 용접공사 이외는 전부 직영으로 시공하였다. 1942년 6월에는 삼방전기공사구를 설치하고, 삼방변전소의 공사를 담당시켰다. 1942년에는 전차선로의 지지주를 세우고 변전소 건물공사를 완성하였으며, 변전소 주요 기기 및 전차선로 가선 재료 등도 현장에 도착하였다. 1943년은 공사를 속행하였다. 그 결과 복계∼삼방 양 변전소 및 공중 가설 전차선로와 전기 운전에 필요한 복계∼고산 양 역 구내시설 등이 운전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완성되어 예정보다 1년 늦은 19944년 4월 1일에 운전을 개시하였다. 여기에 필요한 경비는 568만 엔의 거액에 달하였다. 경원선 복계∼고산 구간의 전철화(電化)설비 개요 전차선로 : 직류 3,000V 전기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선로전선, 적가선, 전차선의 지지대는 2중 절연으로 하고, 애자는 2개 직렬로 사용하여 1개가 파손되어도 다른 1개로 견딜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전차선의 분기 지점에서는 경점(硬點)의 발생을 막기 위해 디플렉터의 사용을 중지하고, 정거장 구내와 구 외의 전차선 구분에는 에어섹션방식을 이용하며, 열차속도가 작은 측선이나 기관고선 입구의 구분에는 특수한 애자형 구분장치를 사용한다. 전차선의 레일에서의 높이는 5,400mm가 표준으로 터널 내에 한하여 4,950mm이지만, 이 구간의 터널은 구형으로 협소하기 때문에 특례를 만들어 4,900mm로 하며, 간격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특수 지지 애자를 이용하였다. 이 구간의 기온은 최저 영하 35도, 최고 35도로 그 차이가 70도에 달하기 때문에 전차선의 이완이 심하여 장력 자동 조정장치를 설치하였다. 귀선용 용접 본드로는 처음에는 가스용접을 채용하였지만, 나중에 고압 배전선으로부터 전력을 공급하여 전차선과 레일을 이용, 간단한 전기용접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배전 선로에는 3상 교류 6,600V를 채용하여 자재의 절약과 전압 변동률의 향상을 꾀하였다. 전차선로 구조의 요점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전기방식 : 직류 3,000V 가공(架空) 단선식 적가방식 : 심플 카테나리식 궤전선 : 600m㎡ 경알루미늄 연선 적가선 : 85m㎡ 아연도금 강연선 전차선 : 110m㎡ 홈이 있는 경동선 측선의 일부 : 110m㎡ 홈이 있는 극난연강선 배전선 : 70m㎡ 이호 알루미늄 합금 연선 지지주 : 크레오소트 주입 삼나무 기둥 귀선용 본드 : 철단자 부착 150m㎡ 동연선 U형 용접 본드 변전소 : 변전소는 복계 및 삼방역 구 외에 6,000kw(건물용량 8,000kw) 수은정류기 변전소를 신설하고, 경성전기주식회사의 66,000V 송전선으로부터 각 변전소마다 전기를 받았다. 옥외설비의 지지주에는 전부 중공철선이 들어 있는 콘크리트 기둥을 사용하여 강재의 절약을 꾀하였다. 각 변전소에는 2,000kw의 격자제어식 평복권 특성을 갖는 수은정류기 3대씩을 설비하여 전기기관차가 전력 회생 제동을 사용한 경우에는 인버터로서도 작용해서 제동에 의해 발생한 전력을 직류에서 교류로 변성, 송전선을 통해 발전소로 반환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변전소의 전기설비는 복계는 도쿄 시바우라전기주식회사에, 삼방은 후지전기제조주식회사에 지정 주문하여 양 사의 장점을 충분히 발휘시켜서 비교 연구하도록 편의를 제공해 앞으로 진보 발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수은정류기는 옥내용 철조형으로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정격 출력 정류기의 경우 연속 2,000kw / 2시간 3,000kw / 1분간 6,000kw 인버터의 경우 연속 1,000kw / 2시간 1,500kw / 1분간 3,000kw 특성 정류기의 경우 무부하부터 1,000A까지 3,000V 일정 인버터의 경우 무부하부터 1,000A까지 3,000V 일정 전기기관차 : 이 구간에 사용하는 전기기관차는 광궤 간선에서의 사용, 직류 3,000V 전기방식도 우리나라 최초의 것이었기 때문에 제조회사는 큰 고심을 하였다. 전체 중량은 데로이형 139톤, 데로니형 136톤의 2종류이었다. 당국으로서는 경원선과 경경선의 양 선로에 함께 사용하며, 여객열차와 화물열차에도 단기 또는 중련으로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에 40분의 1의 급구배선로의 견인력에 중점을 두게 되어 내리막 구배의 속도는 어쩔 수 없이 상당한 제한을 받는다. 전기기관차는 크게 차체와 대차로 이루어지는데 Center Plate에 의해 연결되며, 차체는 상자형으로 전체 용접으로 만들어졌다. 대차는 1축 선대차식으로 동축 6개를 가진 1-C+C-1형을 채용하고, 6동축은 2대의 보기로 분할되어 1,500V, 350kw의 전동기가 조괘식으로 장치되었다. 그리고 운전의 보안도 향상을 위해 공기 제동과 수 제동 외에 전력 회생 제동을 채용하며, 회생 제동에 고장이 발생한 경우에는 바로 자동적으로 공기제동이 작용하는 동시에 신호장치에 의해 승무원에게 주의를 주도록 되어있다. 이 전기기관차에 설비하고 있는 보조장치의 주요한 것은 다음과 같으며, 전동기는 모두 정류자 2개를 직렬로 이용한 복정류자식 구조이다. ㄱ. 정전압 전동발전기 : 점등 및 제어회로용 ㄴ. 전동송풍기 : 주 전동기냉각용 ㄷ. 공기압축기 : 단위 스위치 및 제동용 ㄹ. 자기화용 전동발전기 : 회생 전동기 자기화용 직류 3,000V의 주 회선을 개폐하고, 전기기관차의 속도를 제어하는 단위 스위치에는 전자공기식을 채용하였으며, 개방 시에 발생하는 전호를 완전하게 차단하기 위해 전호를 끄는 강력한 작용을 가진 특수한 아크슈트가 이용되고 있다. 중앙선 제천∼풍기 구간 전철화(電化) 중앙선 제천∼풍기 구간 50.5km의 전기 운전설비를 1941년 이후 3년에 걸쳐 완성할 예정이었다. 이 구간에는 죽령터널 및 대강루프터널 등이 있어서 수송상 가장 곤란한 지점으로 가장 긴급을 요하는 공사였다. 여기에 채용하는 전기방식은 직류 3,000V로, 같은 방식에 의한 변전소 및 전차선로의 건설을 주 내용으로 1941년 12월에 착공하였다. 1941년에는 설계와 용지 매수 등을 시행하고, 단양변전소 건물을 시공함과 동시에 주요 공사재료의 입수 준비에 착수하였다. 1942년에는 풍기에 공사구를 설치해서 1943년부터 1944년에 걸쳐 변전소 및 전차선로공사를 시공하여, 단양∼풍기 구간은 1945년 10월부터, 남은 구간은 1946년 당시부터 운전을 개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제반 상황상 공사는 난항에 빠져 꽤 지연되었기 때문에 1945년 8월 종전 시에는 미완성인 채였다. 제2절 전등·전력설비 일반(1938년 이후) 전등·전력설비는 업무의 진전, 문화의 향상에 따라 각 역 청사 및 관사 등의 전등조명설비 및 배전선로의 신설과 개량을 행하여 1938년에는 전 조선 554개 역 중 전등설비 역 326개 역, 그 설비 등 수는 59,811개였다. 배전선로는 길이 528,514km, 연장 1,618,568km, 전주 12,687개에 달하였다. 이들 전등조명설비는 특별한 시설기준도 없었고, 조도도 설비장소마다 제각기인 상태여서 사용상으로도 보수관리상으로도 부적합한 것이 많았다. 그래서 1937년에 전기과가 설치되자 바로 전등조명설비 기준이 제정되고, 이후는 사용 장소별로 표준 조도에 따라 설비되었다. 한편,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명전운동에 호응하여 전등기구와 배선, 배광 등을 개량하였으며, 더불어 청사와 관사 등의 전등조명은 밝아졌다. 그리고 청사와 같이 다수의 전등설비가 필요한 장소는 물론 각 관사에 있어서도 종량제를 사용하여 전력의 절약에 노력하였으며, 보안을 위한 분전반과 점멸기 등을 설비하였다. 역 구내 조명으로서는 1932년에 경성역 구내의 남북으로 30m 철탑 2기를 건설하여 여기에 일광등 각 5등을 설비하고 동시에 용산역 구내에도 같은 철탑 1기를 건설하여 일광등 5등을 시설하였다. 이 일광등에 의한 구내 조명 효과는 대단히 양호하였고, 이후 이것을 차례로 증설하게 되어 1939년에는 부산과 초량, 대전, 경성, 용산, 평양, 진남포, 순천, 원산, 성진 등 합계 30여 개 역에 총수 300기, 총용량 164kw를 설비하였다. 그 후 복선 개량에 따른 각 정거장의 전등설비 개량 및 동해와 중앙 및 평원선 건설공사, 지방철도국 설치에 따른 전등 전력설비의 신설 등에 의해 1941년에는 배전선로 연장이 2,519km가 되고, 전등설비 역은 전역의 57.5%가 되었다. 그러나 이 보급률은 아직도 낮아서 철도 업무의 원활한 수행 및 등화관제상 곤란한 점이 많은데다 등유류를 극도로 절약해야 했던 당시의 정세 하에서는 전역의 전등화는 매우 긴급을 요하는 것이었다. 또한 1941년에는 시국의 중대성을 고려하여 철도 업무 운영상의 치명적인 문제인 전원의 차단 방지를 위해 전원 확보가 가장 필요한 경성 및 부산에 디젤기관 직접 연결발전기에 의한 예비발전소를 설치하여 유사시에 대비하였다. 1942년에는 대전∼남시 구간의 자동 신호화에 따라 대전∼영등포 구간에 자동 신호용 고압배전선로를 완성하였다. 1944년 역사 조명설비에 대한 전등화는 매수선의 영업 개시에 따라 그 비율이 61%가 되었으며, 배전선로 연장은 3,554km에 달하였다. 등화관제설비 1938년경 중일전쟁이 치열해 짐에 따라 각 역의 완벽한 등화관제를 위해 전등 멸압장치, 배선 변경 및 전등류의 개량에 힘을 쏟아 전력소비량의 절약에도 노력하였다. 1939년 9월에는 등화관제설비 기준에 관한 여러 규정이 제정되고, 각 역에 대하여 기술적으로 완전한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이 설비로서 부산, 초량, 부산진, 대구, 대전, 경성, 용산, 평양, 진남포, 신의주, 원산, 함흥, 성진 및 나남 등 각 역의 배선 개량공사가 시공되었다. 1940년에는 등화관제설비로서 부산철도사무소 관내 28개 역, 경성철도사무소 관내 11개 역, 원산철도사무소 관내 45개 역, 성진철도사무소 관내 28개 역에 시설하였다. 그리고 일부 지장이 있는 장소를 제외하고 1941년에 종료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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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전기/통신 | |
전기과 신설 이후 | 2023.01.04 |
전기과 신설 이후 제1절 신설까지의 경위 국유철도에서의 전기관계 설비의 신설, 보수관리 등에 대해서는 1937년까지 통신설비와 신호보수설비 및 전등조명설비 등은 공무과에서 그리고 공장전기설비 및 차량전기설비 등은 공사과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분산 관리되었다. 그러나 만주사변이 진전됨에 따라 국유철도는 국방상의 이유로 일본∼만주 간을 연락하기 위한 대륙 일관철도로서의 중요한 사명을 새롭게 떠맡게 되었다. 즉, 일본에서는 산요(山陽) 본선이 이미 전선 복선화되었고 차례로 자동 신호화되어 수송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는 한편, 만주 방면에서도 안봉선의 복선 자동신호화설비가 진척되었기 때문에 양자 간을 연결하는 조선국유철도로서도 수송력의 비약적인 증강과 함께 그것에 대한 운전 보안설비의 고도화가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되었다. 이상 내외의 여러 상황 변화에 근거하여 신호 보안설비를 비롯해 전기관계 제반 시설의 확충 강화를 단기간에 꾀하기 위하여 종래 각 과에서 분산 관리되고 있던 전기설비 및 기술을 1과로 통합해서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어 1937년 6월 1일 전기과가 신설되게 되었다. 제2절 신설 후의 변천 초대 전기과장에는 철도성으로부터 나가이 켄조(永井?三)가 초빙되었다. 그리고 담당계로는 서무계와 전력계, 통신계의 3계가 신설되었다. 과의 설치 직후 1937년 7월 7일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조선 내에서의 수송력의 비약적인 증강이 요구되어 간선 노선 주변의 역 구내 및 선로의 개량과 증설이 급속하게 실시되었다. 이 때문에 공무관계에서는 이미 경부선(1936년 착공, 1940년 6월 전선 완료)과 경의선(1937년 착공, 1945년 8월 현재 극히 일부를 남겨두고 완료)의 전선 복선화 및 레일의 50kg화, 경원선의 부분 복선화 및 조차장의 신·증설이 계획되어 차례로 완성되었다. 따라서 이들 공사에 부대하는 통신설비나 전등전력설비의 공사량도 급증하여 전기과는 신설 초부터 매우 바빠졌다. 그 후도 시국의 추이에 따라 수송력 증강에 대한 요청이 점점 심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상기의 여러 시책 외에 단기간에 수송력의 증대를 꾀하기 위하여 특수 구간(경원선의 산악구간, 복계∼고산 구간 약 50km)의 전기운전 전철화 및 경부선과 경의선의 복선화에 따른 자동 신호화가 긴급 시책의 하나로서 추가 채용되어 전기과는 중대한 사명을 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3개의 계로 발족한 전기과도 해마다 급증하는 긴급 공사를 전문으로 처리하기 위하여 1942년에 이르러 전기과 내에 공사담임관제도가 신설되어 전철화공사 및 자동 신호공사의 계획부터 시행관리까지를 일원적으로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이들 계획을 실시하는 현장기관으로서 재래의 보수관리용 현장구 외에 1941년 4월 전철화공사 시행을 위하여 경원선의 복계 및 삼방의 2지구에 그리고 자동 신호공사 시행을 위해 경부선의 대전, 수원 및 용산의 3지구에 각각 공사구가 신설되었다. 거기에 1943년에는 경의선의 자동 신호공사 시행을 위해 신막 및 개성의 2지구에 그리고 전철화공사용으로서 풍기와 단장의 2지구에 각각 공사구가 설치되어 종전까지 각 공사구는 공사의 시행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들 공사 시행용 현장기관은 전시 하의 공사 단기완료와 원활한 공사 시행을 위해 모두 전기과 직속기관으로 설치되었다. 제3절 전기관계 요원의 증강 1937년에 전기과는 신설되었지만, 공사 계획과 그에 따른 예산 요구 및 공사 시행을 위한 기술요원을 조선 내에서 구하는 것은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급속하게 요원 증강을 꾀하기 위하여 나가이 과장은 일본 철도성 전기국장에게 다수의 전기관계 기술자의 전출원을 간청하였는데, 철도성 간부의 시국 인식과 상당한 호의에 의해 1937년부터 1941년에 걸친 수년간에 약 140명의 중견 기술자를 조선철도에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사람들 중에는 다수의 관리자급의 기술자가 포함됐기 때문에 전기공사 및 자동 신호공사의 계획 및 예산 요구 단계부터 현장의 공사 시행 계획에 이르기까지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루어져 각 방면의 공사 추진에 대한 귀중한 원동력이 되었다. 제4절 현장 기술원의 대량 양성 계획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중견 기술자의 증강은 철도성의 이해와 협력에 의해 실현되었지만, 계획의 진척에 따른 공사 시행에 즈음하여 젊은 현장 기술원의 부족이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대책으로서 전기관계의 공사 시행에 필요한 젊은 청년들을 조선 내는 물론 일본 각지로부터 다수 모집하여 현장 기술자로서 양성하기로 하고, 1939년 4월부터 철도종사원양성소에 교육과정 1년의 전기고등과를 개설하였다. 이렇게 해서 매년 50명 전후의 현장용 기술원을 양성하여 일단 각 공사구의 수요에 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해마다 급증하는 공사량에 대처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1941년에 이르러 새롭게 양성기간 2년의 신호보안과를 개설하고, 1943년부터 종전까지 매년 수십 명의 현장기술자를 공급하였다. 졸업 후 그들은 바로 각 공사구에 배속되어 현장 제일선의 기능자로서 신속하게 공사를 시행하여 귀중한 전력이 되었다. 제5절 전기관계 개량비 연도별 예산 및 결산 전기관계의 건설 개량 및 신규 사업에 대한 연도별 예산 및 결산액은 [표 7-1(a)]와 같다. 먼저 예산표를 보면 1939년까지는 통신설비 개량비만을 요구했다. 이때까지는 간선구간의 수송 증가에 따른 통신 폭주 대책에 중점을 두어 통신설비의 확충 강화를 꾀했다는 것을 결산표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1940년에 들어서 통신설비비 외에 전철화(電化)설비비 및 전기신호 보안설비비의 막대한 예산이 요구되어 의회의 동의를 얻음과 동시에 종전에 이르기까지 전기과는 최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표 7-1(b)]에서 보면 알 수 있다. [표 7-1] 제1표 전기관계 개량비의 연도별 예산 및 결산(1944년 11월, 조선 교통 상황 제1회로부터 발췌)(단위 : 천엔) (a) 건설 개량 및 신규 사업 예산표 (b) 건설 개량 및 신규 사업 결산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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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전기/통신 | |
공무과시대의 전기 | 2022.12.26 |
공무과시대의 전기 조선국유철도에 있어서 전기관계설비의 신설이나 보수관리 등에 대해서는 창업 이래 오랜 기간에 걸쳐 공무과 소관이었다. 그 후 1937년 6월에 전기과가 신설됨에 따라 이들 업무는 전기과로 이관되고, 이 조직으로 종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따라서 여기에 창업부터 1937년 12월까지의 기간에 있어서의 전기설비 상황에 대하여 기술하기로 한다. 제1절 전등조명설비 철도영업에서는 다수의 승객을 혼란 없이 원활하게 이동시키기 위해 창업 당시부터 역사 내 및 관내의 전등에 대한 조명 개선의 필요성이 요구되었다. 이 때문에 1900년 경성 남대문역을 설치할 즈음에 당시의 민간 전기회사였던 한미전기회사(후의 경성전기회사)의 마포발전소로부터 전기를 받아 역사 및 구내에 점등한 것이 최초의 전등조명이었다. 당시의 전등조명 점등방식으로는 옥외용등으로는 전부 탄소아크등을 사용하고, 옥내조명용으로는 탄소필라멘트전구를 사용했기 때문에 막대한 소요 전력에 비해 밝기는 극히 불충분한 점이 많았다. 더구나 탄소필라멘트전구는 수명도 짧고 외부로부터의 진동에도 매우 약해서 이들의 유지, 관리에는 많은 비용과 일손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등유에 비교해 현저히 밝고 편리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역 구내에 사용되게 되었다. 그 후 1909년 11월에는 용산공장 내에 직영의 발전소가 건설되어 경성·용산지구의 청사, 공장 및 관사 등에 배전하게 되어서 전등 및 전력의 사용량은 상당히 증가하였다. 즉, 이 지구에서의 전등 보급률은 매년 10∼20% 증가했다. 그리고 경성지구 이외의 인천, 부산, 평양, 대전, 신의주 및 목포 등의 각 주요 역 구내에서도 각 지역의 민간전기회사로부터 전력을 공급받게 되어 전등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그들 각 지역에서의 증가율은 상당히 커서 매년 2배 혹은 3배에 가까운 비율로 증가, 보급되어 갔다. 그러나 이들 주요 역 이외의 지역에서의 역사 조명의 경우에는 조선 내 각 지방의 전기사업의 발달이 늦어져서 각 역 모두 긴 기간에 걸쳐 등유에 의한 조명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에 들어 일반 전기사업도 점차 보급되었기 때문에 각 역의 조명도 점차 등유보다 전등으로 개선되고 해가 갈수록 그 설비 수도 증가하였다. 종래 영업선 각 역의 전등설비는 예산 및 보수인원 관계상 일부에 대해 전력공급회사에 구내 일대의 청사와 역사 및 관사의 전등설비를 시행토록 했는데, 그 수는 1935년 현재 전등 설치 320개 역 중 약 4할에 해당하는 128개 역에 달하였다. 이들 회사 시설에 대해서는 보수 및 기타 사항에서 불편을 통감하여 전부터 이들의 매수계획을 진행했지만, 예산 등의 상황으로 인해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전등시설의 직영화는 역의 보전을 위해 이대로 방치할 수 없기 때문에 1937년 예산 약 12만 엔을 계상해서 부산 관내 13개 역, 대전 관내 17개 역, 경성 관내 25개 역, 평양 관내 13개 역, 순천 관내 3개 역, 원산 관내 23개 역, 성진 관내 24개 역 등 합계 118개 역의 전등 6,039개의 매수를 완료하여, 당시 개량계획 중이던 6개 역 및 타 회사로부터 사용전력의 무상공급을 받는 2개 역 등 모두 8개 역을 남기고 역의 전등설비 전부를 철도국의 소관으로 하였다. 그리고 청사와 관사 그 외의 건조물 내의 전등조명에 대해서도 종래에 시설 기준이라고 할 만한 특별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설계자의 임의대로 설치하였으며, 그 조명도 각기 다른 상태였다. 이들 시설기준은 전기과 신설 후 제정되었으며, 조선철도 내의 전기시설에 대한 조도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제2절 기계식 신호 보안설비 조선반도의 주요 간선인 경부·경의 양 선에 이은 전선 개통은 1905년과 1906년의 일이었다. 양 노선의 열차 운전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보안설비를 개관해 보면 그 역할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 공장의 일반수준과 마찬가지로 매우 유치한 것이었다. 즉, 역 구내 진입의 가부를 지시하는 신호현시방식은 개업 당시부터 단선 및 복선구간 모두 완목식 신호였다. 이 방식의 조작방법으로는 역 중앙에서 장내 신호기 설치 장소까지의 약 500미터 정도의 원거리가 1개의 와이어로 조작되고 있었다. 하절기와 동절기 중에는 기온 변화에 따른 와이어의 신축 때문에 보수를 위한 일손이 필요한데다가, 신호 자체도 불확실한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이러한 현시방식은 1941년 간선이 자동 신호화되기까지 모든 간선구간에서 사용되었다. 또한 역 구내의 진입선로상의 전철기는 현장에 설치된 제2종 기계식 연동신호장치와 함께 쇄정(신호기의 잠금장치)되도록 되어 있어 일단 진로상의 안전은 확보되었다. 초기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 장내 및 출발용 신호기만으로 충분했지만, 열차속도의 향상에 따라 원방신호기를 병치해야 했다. 이에 간선구간에서는 지형상 전망이 안 좋은 곳의 모든 장내신호기 바깥쪽에 원방신호기를 설치하여 수송력과 보안도 향상에 기여했다. 폐색기 및 폐색 회선 경부철도에 있어서는 1905년 10월 영업 개시 당시부터 1구간 1열차 주의를 채용하고, 명령권과 전철화 통신을 병용하여 열차 운전의 안전을 꾀하고 있었다. 한편, 임시군용철도로서 건설된 경의선은 경부선과 거의 같은 시기를 전후로 하여 개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경부철도와는 다른 보안방식을 채용해 초기에는 표권식으로 운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개업 후 얼마 되지 않아 경의선의 문산∼신의주 구간에 고교식(高橋式) 폐색기 40대가 설비되어 경의선 구내에서의 안전은 일단 확보되게 되었다. 상기와 같이 양 간선철도의 소속이 달랐기 때문에 각 역에 설치된 폐색장치의 취급 방법이 각각 달라서 양 구간을 직통 운전하는 열차는 운전취급상의 불편뿐 아니라 열차 운행 횟수가 증가함에 따라 보안상으로도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래서 1906년 7월에 통감부 철도관리국이 설치되자 바로 근본적인 대책으로 양 간선구간에서의 폐색기의 정리, 통일이 이루어졌다. 즉, 1906년과 1907년 2개년 계획으로 긴급하게 타이어 씨의 타블렛식 폐색기가 전선에 설비되게 되고, 1907년 8월에 먼저 경부선 청도∼신동 구간을 시작으로 1908년 1월에는 경인선의 전 구간에 그리고 같은 해 4월에는 경부선 전체 구간에 설치를 완료하였다(당시의 일본 철도성에서는 1902년 9월부터 이미 주요 선구에 있어서 이 폐색기가 설치, 완료되었다). 한편, 경의선의 경우에도 1년 후인 1909년 8월에는 전구간의 설치를 완료하였기 때문에 양 간선을 직통하는 열차에 대해서는 그 취급과 운전 보안 양면 모두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또한 이 양 간선 이외의 평남, 경원 및 호남선 등과 같은 건설공사 중인 노선의 경우에는 그 부분 개업구간에서 일시적으로 표권식으로 열차를 운행시키다 점차 타이어 씨의 타블렛식 폐색기로 변경하였으며 전 구간 개통과 함께 이 방식의 폐색기에 의한 열차 운행이 이루어졌다. 그 후에는 건설된 각 선에 대해서는 건설 시작 때부터 대부분 타이어 씨의 타블렛식 폐색기가 설비되게 되었다. 각 지구에서의 이상과 같은 경과를 거쳐 단선구간에서의 폐색기의 설비 대수는 당초 1906년 말까지 불과 40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해를 거듭할수록 각 노선에 급속하게 증설된 결과 1926년에는 380대가 되고, 1939년 말에는 836대로 증가하여 열차 운전의 안전 확보에 큰 역할을 다하였다. 이어서 복선구간에서의 폐색장치로서는 1905년 10월에 처음으로 영등포∼서대문 구간에 쓰보이(坪井)식 쌍신폐색기(철도성형)가 각 역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상호 역 사이 전용의 공중에 걸친 폐색 회선으로 접속함으로써 열차운전의 안전을 꾀하였다. 그러나 이 폐색방법은 상대역 상호간에 응답 확인을 위한 전류를 주고받지 못한 채 단지 신호 교환으로만 열차 운행을 하기때문에 보안상 중대한 문제가 있는 것이 그 후 판명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철도 전기수선장 직원의 고안으로 조선철도형 특수 쌍신폐색기 4대를 용산∼영등포 구간에 1932년 이래 시범 운용하였는데 그 성적이 양호하여 그 후 경부와 경의 양 본선의 부분 복선구간에 이 형의 쌍신폐색기가 다수 설치되게 되었다. 이어서 열차의 폐색을 행하기 위한 양 역간에서의 폐색 회선에 대해서는 지전류 및 여러 잡음의 영향을 적게 받는 지역(대부분의 지방선 구간)에서는 경제성을 고려하여 주로 단선식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대도시 주변의 여러 원인에 의한 지전류 및 잡음의 영향을 받기 쉬운 지역이나 케이블 매설이 불가능한 장소에 대해서는 복선식을 채용하여 외부로부터의 전기적인 영향을 줄임으로써 폐색 회선의 품질 향상을 도모하였다. 이들 회선방식은 자동 신호설비화 구간 이외의 지역에서는 종전 시까지 사용되었다. 제3절 전기식 신호 보안설비 개업 초기부터 1935년경에 이르는 오랜 기간 조선에서의 전기식 신호 보안 설비는 극히 소수만 설치되었다. 즉, 주된 것으로서는 당시 유명했던 압록강 개폐교에 설비된 전기식 보안설비가 전부였다. 이것은 1911년에 압록강철교가 준공됨에 따라 조선∼만주 구간의 직통열차가 운행되게 되었기 때문에 신의주와 안동의 양 역간에 처음으로 폐색선이 신설되게 되었다. 이 회선은 개폐교와 연동하여 개폐되는데 개교의 경우에는 신호의 동작과 함께 회선도 자동적으로 끊어지며, 폐교하여 열차의 운전에 전혀 지장이 없어진 경우에 한하여 전기적으로 개폐 회선을 구성하도록 한 장치이다. 그리고 별도로 육상 및 교상선(다리 위의 선로)에 의해 신의주와 압록강 남안대기소 간에는 반응신호기를 신설하고, 개폐교의 개폐와 연동하여 자동적으로 표시하는 장치로 만들었으며, 교량 남안 입구에는 원판 자동 정보 표시기가 설비되었다. 그리고 안동역과 압록강 북안 간에도 이것과 같은 설비가 부착되었는데, 이들 설비는 1934년 3월 31일에 압록강교량의 개폐가 정지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이 보안설비 이외의 주요한 것으로는 1920년에 경성 및 용산역 구내에 조사 쇄정이 처음으로 설비되어 대형 역 구내의 남북 양 레버 취급소간의 보안도 향상에 상당히 유효한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에 그 후로도 대형 역 구내의 취급소에 차례로 설비되었다. 또한 전기식 신호기는 1926년에 처음으로 설비된 후 1935년까지 단 6기, 건널목 경보기는 1928년에 처음으로 설비된 후 불과 5기에 지나지 않았으며, 접근 벨은 한 곳에 불과했다. 이상이 1935년경까지의 전기식 신호 보안설비에 대한 개황인데, 품질 및 양 모두 극히 빈약한 설비로도 보안이 가능했던 것은 그 시기까지는 아직 열차의 수송밀도가 별로 높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4절 통신설비 통신선로 조선철도 각 노선 주변의 통신선로 건설공사는 교통이 편리한 곳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난공사의 연속이었다. 즉, 당시의 통신선로용 자재는 전주용으로 임시사용한 조선 소나무 이외에는 거의 조선 내에서 입수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전선을 비롯해 완목, 애자(碍子), 달구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본 국내에서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이들 자재의 수송은 불완전한 도로와 선박 운송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특히 철령산맥을 통과하는 통신선로용 자재의 수송에는 선로 주변에 인가가 거의 없는데다가도로도 극히 험했기 때문에 사람이 직접 운반하거나, 소나 말을 이용하는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청천강과 대령강의 강을 가로지르는 가선공사 시에는 유빙 및 수차례의 대홍수 피해를 입는 등 작업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곤란을 겪었다. 각 선에 대해서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경인선 : 경인철도합자회사가 인천∼노량진 구간의 철도를 운영함에 있어서 1900년 7월 철도노선 주변에 조선 소나무를 전주로 세워 여기에 400파운드 철선 2줄을 가설하고 복선식 전철화 회선 1회선을 신설하였다가 이것을 경성까지 연장하여 사용한 것이 조선철도 최초의 통신선로였다. 경부선 : 이 노선 주변에서의 통신선로공사는 1904년 말에 준공하였다. 공사시행에서 가장 곤란했던 것은 자재의 공급이었다. 주요 자재인 전주의 경우는 처음에는 일본산 삼나무를 구입하여 충당하였다. 철도를 긴급 건설해야 했던 시기에는 입수가 제때 이루어지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노선 주변의 조선 소나무나 통나무를 이어서 사용하였지만, 그래도 제때 맞추지 못하는 장소에서는 선로 주변에 자라는 나무를 일시적으로 그대로 이용하여 공사의 조기 준공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전선이나 애자 등의 수송에도 육로나 선박 등의 모든 운송수단이 사용되었지만, 공사의 진척에 맞추기에는 많은 노고가 있었다. 특히 1904년과 1905년경 전시 중의 수송에는 자재를 탑재한 기선이 격침되는 등의 불운을 만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맥주병을 일시적으로 애자로 대용하는 등 응급조치를 강구하여 여기에 400파운드 철선 2줄을 가설해서 간신히 영업 개시에 맞출 수가 있었다. 경의선 : 이 노선 주변에서의 통신선로공사는 1905년 봄 용산∼신의주 구간이 전선 준공되었다. 경의선은 원래 군용철도로서 건설되었기 때문에 이미 용산∼잠성 구간의 통신선로는 군에 의해 건설되어 이용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잠성∼신의주 구간의 통신선로 건설공사에는 임시군용철도감부 담당을 명령받은 직원 및 작업원의 손에 의해 상당한 고초를 겪으며 준공되었다. 수송 환경이 경부선보다 더욱 열악해서 주요 자재인 전주마저 수송이 생각대로 되지 않아 아주 적은 구간에 통나무를 이은 전주를 사용하였고, 대부분의 전주는 선로 주변의 조선 소나무나 버드나무 등의 잡목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전주에서 가지와 잎이 생기는 기이한 현상도 때때로 보였다. 마산선 : 1905년에 준공 호남선 : 1913년에 준공 경원선 : 1913년에 준공 그밖에 이들 각 통신선로는 철도 준공 후 열차가 운전을 개시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임시사용된 조선 소나무나 버드나무 등의 전주를 점차 일본의 삼나무 혹은 낙엽송 등으로 교체하였다. 그리고 완목이나 통신선로도 시간이 지나면서 증설되었으며, 안정된 통신이 가능한 통신설비로 정비되어 갔다. 다음에 사용된 전주는 당시 본선용과 지선용으로 나뉘어 사용되었지만, 그 후 통신 회선의 증가에 의해 8선용 완목이 필요했기 때문에 모두 본선용의 전주로 통일되게 되었다. 또한 전주를 오래 사용하기 위해 본주에 방부제를 주입한 것을 사용한 것은 1926년에 부산통신구에서 전주의 상하 각 4m를 크레오소트에 침지(물속에 담아 적심)하여 이것을 추풍령∼황간 구간의 개축공사에 사용한 것이 최초이고, 다음해인 1927년부터는 쿠민 침지주를 다수 채용하게 되었다. 이들 방부제 주입주의 방부효과가 현저한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에 이후는 전시 중의 약품 부족 상황 하에도 불구하고 자재 절약을 위해 모두 방부제 주입주가 사용되었다. 전주에 부착되어 있던 전주 번호표와 연호표 등은 처음에는 내구성을 고려하여 모두 금속제였지만, 중일전쟁 발생 이후에는 대부분 대용품 혹은 목제품으로 교체되었다. 전주의 경우에는 목주를 사용하는 것이 표준이었지만 특수한 장소, 예를 들면 교량 위 등에는 목주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철주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통신 회선 수가 적었던 당초에는 앵글재 3개를 조립한 것을 사용해도 강도상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본선 노선 주변 구간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통신 회선 수가 증가하여 강도 부족의 문제가 생겼다. 이 때문에 1936년에 경의선 일산∼금촌 구간의 금성천교량에 처음으로 강도가 보강된 사각형 철주가 가설되었으며, 그 후 교량용 철주는 모두 이 형식이 채용되었다. 통신선로 부속설비 통신용 완목 : 전주에 부착된 완목은 창업 이래 강도 관계상 느티나무 자재 약 6.6cm 크기의 4선용 혹은 8선용이 오랫동안 사용되었지만, 점차 입수가 곤란해져 1916년에 규격을 개정하여 졸참나무 자재의 약 6.6×6.6cm로 하여 이 규격이 끝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각 전주에 부착될 완목의 종류로는 창업 이래 한결같이 4선용의 짧은 것이 표준으로써 사용되었지만, 통신 회선의 증설이 행해지게 된 1920년대 중반경부터 점차 8선용의 것으로 교체되어 8선용 완목이 표준이 되었다. 중일전쟁 이후 대륙에의 수송량 증가로 인해 통신 회선의 증강도 급피치로 행해진 결과 경부·경의선에서는 8선용 완목이 7단에 걸쳐 부착되게 되었지만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었다. 통신용 애자 : 통신용 완목에 부착된 애자는 일반적으로는 핀형 통신용 2중 애자를 사용하고 또 교차지점에서는 앵글 애자를 사용하는 것이 오랜 통례였다. 그 후 일시적으로 만주철도제의 유리애자를 사용한 적도 있었지만, 1928년 이후에는 철도성이 제정한 신형 통신용 2중 애자가 채용되게 되어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각 지역에 걸쳐 채용되었다. 통신용 가공선 : 통신용 가공선 중 주요 선 구간 및 장거리 회선용으로는 3.5mm 경동선을 사용했지만, 단거리 회선용 및 일반선 구간용으로는 4mm 철선도 사용되었다. 또한 특수한 곳의 장·경간용 통신선로용으로는 당초에는 동선이나 동을 입힌 강선이 사용되었지만, 1932년 이후부터는 전기적인 특성도 좋고 항장력이 큰 동합금선 만을 사용하였다. 통신용 케이블 : 통신용 케이블 중 가공용의 경우는 1907년에 남대문, 용산, 평양 및 신의주의 전철화교환기를 신설할 때 사용한 것이 최초인데, 그 후 각지의 전철화 교환기 신설 시에 많은 지역에서 사용되게 되었다. 지하용 케이블은 1926년에 용산지역의 수해복구 공사용으로서 노량진∼용산 구간에서 사용한 것이 최초이며, 그 후 대부분의 대형 역 구내용, 방습을 위한 터널 내용, 또한 교량에 첨가하기 위한 것으로서 여러 곳에 다수 사용되었다. 그러나 전시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가공용과 지하용 모두 케이블의 입수가 극도로 곤란해졌기 때문에 통화량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전철화 교환기의 신설 혹은 증설은 상당한 제한을 받게 되었다. 통신선로용 지선 : 통신선로용 지선에는 오랜 동안 8번 철선이 사용되었지만, 1939년의 통신선로시설 준수사항의 개정에 의해 4.5mm 아연도금철선과 강연선을 병용하도록 규정화되어 이후 이들 자재를 사용하게 되었다. 통신 회선 전화 회선 : 전화 회선은 1900년 7월 인천∼노량진 구간에 400파운드 철선 2줄을 가설하여 각 역 상호간의 통화용으로 제공한 것이 최초였다. 그 후 수년이 지나 경부선은 1904년에 그리고 경의선 및 마산선은 1905년 봄에 연이어 시설이 완료되어 통화용으로 제공되었다. 1906년 통일 이후는 전화 회선의 증강 및 개량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 후 1911년 11월부터 조선∼만주 간 직통열차 운전이 개시됨으로써 만주철도와의 사이에 통화량이 급격하게 증가하였기 때문에 다음해인 1912년 1월 신의주∼안동 구간에 전화용 중계선을 신설하고 연대 통화의 범위를 만주철도 관내까지 확대하게 되었다. 호남선 및 경원선에 있어서는 건설이나 선로 개량공사용 전화선을 공사 종료와 함께 영업용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전화 회선만으로는 영업 개시 후 얼마 되지 않아 부족하였기 때문에 선로 개량공사 시에 장거리 교환 전화 회선 및 구간 전화 회선도 동시에 설비하여 영업용으로 제공하였다. 각 역 상호간에 연락하는 전화는 종래에는 운전이나 영업상의 편리를 위하여 일정 구간을 나누어 사용하는 구간 전화였기 때문에 장거리 통화용으로는 극히 불편하였다. 이런 불편을 개선하기 위하여 1919년 5월부터 먼저 경부선 및 경의선의 주요 역 상호간의 직통 전화 회선이 신설되었다. 뒤를 이어 용산과 대전, 초량 및 평양의 각 역은 전화 교환기로 수용하고, 그 외의 역은 역사 내에 전환기를 두어 장거리 전화선 상호간 혹은 구간 전화선과도 접속하여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조선 최초의 전화 중계선이었다. 1919년 12월 경의선의 평양∼정주 구간 및 정주∼신의주 구간에도 전화 중계선이 신설되어 만주철도와의 사이의 통화 폭주 완화에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각 노선에 전화 중계선의 증설이 진행되었다. 이 실회선의 증설 외에 1923년부터 환영(幻影) 회선의 이용에 따른 전화중신법도 채용하게 되어 전화 회선의 증설이 행하여졌다. 더불어 1931년부터 반송식 전화중신법을 채용함으로써 원거리의 두 지구간에 있는 재래회선을 이용, 최대 3회선의 증설이 가능하게 되어 증가하는 통화량을 처리하는 데 유력한 수단이 되었다. 기타 특수한 통신설비로서는 1923년에 보선관계 업무용으로서 각 보선구를 중심으로 전용 단선식 구간 전화를 신설하여 작업현장에 대한 지시를 수시로 정확하게 맞아 틀리지 않게 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의 실적을 참고하여 1925년에는 운전 및 배차사무 정리를 위한 지령전용 전화가 부산과 대전 양 운전사무소와 그 소관 내의 각 역 및 구간과의 사이에 신설되었다. 각 지령은 현장기관에 직접적으로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달하도록 되어 원활한 열차 운전이 이루어졌다. 이 방법은 그 후 1934년이 되어 경부선의 남은 구간 전 지역과 경의선의 전 구간에도 새로이 신설되었으며, 1936년에는 경원선 및 함경선의 전 구간에도 각각 신설되었다. 그 후 전시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수송량의 증가는 점차 지선에도 미치게 되어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지선구간에서의 지령 전화 회선의 신설도 매년 각 지구에서 이루어졌다. 전화 회선 : 열차 운전을 위한 양 역간의 연락방법으로써 전신기는 창업 당시부터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전신 회선은 이미 1904년 말에는 경부선 전 구간이 그리고 1905년에는 경의선의 전 구간이 설비를 완료하고 직통열차의 운전용으로 제공되고 있었다. 그 외 호남선은 1912년 6월에 그리고 경원선은 1912년 10월에 각각 전신설비를 완료하여 영업 및 운전용으로 제공되었다. 1906년 통감부에 의한 통일 이후에는 통신이 열차 운전의 안전 확보상 극히 중요하다는 점을 감안하여 전화 회선의 설비 확충 및 개량이 전 지역에서 매년 행해진 결과 원거리 상호간의 교신에 있어서도 안정된 통신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통신량이 증가함에 따라 각 지역의 전신 회선은 건설 개량 계획의 실시 및 사설철도선의 매수 등에 의해 매년 연장되었다. 통신용기기 전화 교환기 : 1905년 개업 당시에는 경부철도회사의 인계품으로써 초량에 1대가 설비되어 있었을 뿐이었지만, 1907년에는 용산과 남대문, 평양 및 신의주에 자석식 전화 교환기 각 1대가 연이어 신설되었다. 그 후로도 통화량 증가에 따라 교환기용량 증대 요청에 대응하기 위해 매년 주요 지역에 신설되거나 대용량으로 교체되었다. 1925년 대수해의 복구 시에는 1926년 용산교환소에 종래부터 설비되어 있던 자석식 교환기를 철거하고 처음으로 공전식 교환기를 설치하여 설비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다. 이 교환기는 복식 2좌석 교환기 2대와 50회선용의 시외교환기 1대가 설비됨에 따라 처음으로 공중 전화와 철도용 국내 전화가 동일 교환기 내에 수용되게 되었고, 전화 교환작업의 획기적인 능률 향상이 꾀하여지게 되었다. 용산교환소 교환작업의 현저한 효율화 실적으로 그 후 주요 지역의 전화 교환기는 자석식에서 공전식으로 차례차례 교체되었다. 또한 용산교환소에서는 매년 격증(激增)하는 통화량을 처리하기 위해 1939년 새로운 공전식 3좌석 교환기 4대와 시외용으로 2좌석 교환기 5대가 증설되었다. 이상의 경과로 추정할 때 당초 겨우 1대였던 전화 교환기 수는 매년 증설되어 1936년 말에는 77대가 되었고, 1945년 종전 당시에는 약 2배의 대수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음으로 인력에 의한 교환작업이 필요 없는 자동 교환기의 경우에는 1935년 조선호텔의 교환용으로 처음으로 사용되었는데, 편리하였지만 공전식에 비하여 고장 발생이 많고 설비비가 고가였기 때문에 그 보급은 조금 늦었다. 전화기 : 창업 당시의 경인철도시대에는 미국제 모르스에 의한 것을 사용하였지만, 고장이 잦아 불편이 많았기 때문에 데르빌 및 소릿드백 전화기로 교체되었다. 전화기도 용도에 따라 점차 적당한 형식의 것이 사용되게 되어 구내 상호전용의 것으로는 주로 실내 전화기(폐색기용 전화기와 같은 것)가 사용되었다. 특수한 장소에는 갑호 및 을호 탁상 전화기가 사용되었으며, 열차의 폐색용으로는 인접 역간 전용으로 설비된 폐색기용 전화기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전선로 건설이나 보수용으로는 간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휴대 전화기가 사용되었다. 그 후로도 전화기 자체의 감도 향상에 따른 성능 향상 및 경량화가 이루어졌는데, 특히 1914년 5장짜리 자석식 전화기의 개발로 송신전압 및 전류를 크게 할 수 있게 되어 종래 불가능했던 원거리 상호간의 통화도 가능해져서 철도 업무 전반의 효율적인 수행에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1925년에는 열차 운전의 효율화를 꾀함과 동시에 긴급 시 수십 개의 역을 일제히 호출하고 업무내용을 동시에 전달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지령 전화장치가 간선구간에 처음으로 설치되었으며, 그 후 주요 노선에는 대부분 설치되게 되었다. 휴대 전화기의 경우도 당시는 한정된 현장기관에서만 사용되었지만, 각 업무기관에서 그 편리성과 유용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먼저 1927년 각 역 구내에 있는 보선구의 선로반 대기소에 배부되어 보선작업현장과 인접 역 및 선로반 대기소 상호간에 임시연락도 가능하게 되어 보선현장 업무 처리가 많이 편리해졌다. 그 후 각 열차 구간에도 배부되어 차장이 업무 시마다 휴대하게 됨으로써 열차사고 및 기타 긴급 정보를 역장에게 직접 연락할 수 있었으므로 긴급하게 대책을 마련할 수 있었다. 더욱 편리한 개별 호출 전화기가 개발되어 1931년 10월 초 부산 및 그 주변의 역간에 시범 사용되었는데, 성능이 높고 업무 수행에 매우 유용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결과 먼저 주요 역 구내에 차례로 설비되고 이어서 보선용으로도 사용되었다. 일반용 전화기의 경우 장기간에 걸쳐 자석식이 사용되었지만, 1926년 용산 교환소의 전화 교환기가 공전식으로 교체됨에 따라 용산 주변에서 사용되고 있던 다수의 자석식 전화기가 동시에 공전식용의 전화기로 교환되어 종래와 같은 손으로 돌려서 하는 호출은 하지 않게 되었다. 이 교체로 인해 생긴 수백 대의 자석식 전화기를 전용하여 각 지방의 구형 전화기가 일제히 교체되었으며, 그 외의 미설치 지역에도 새롭게 다수 설치되어 각 현업기관의 원활한 업무수행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 전화기는 이후 종전 시까지 사용되었다. 그리고 1926년은 조선에 있어서 통신설비의 제1차 근대화가 실시된 기록으로 남는 해가 되었다. 그 후 매년 통신설비는 질과 양 양면에서 증강되어 각지의 교환기가 공전식화됨에 따라 급속하게 충실해졌다. 따라서 전화기의 설비 수는 1906년에는 겨우 259대에 지나지 않았지만, 1936년 말에는 5,160대가 되어 약 20배에 달하였다. 그 후 태평양전쟁 수행으로 인해 업무량이 급격하게 늘어남에 따라 통신량도 막대해졌기 때문에 종전 당시는 그 배로 증가한 것으로 추계된다. 자동 시보장치 : 철도의 원활한 수송실황을 위해서는 각 현장기관에서 정확한 시간을 파악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개업 당초인 1907년 당시에는 남대문역이 경성우체국으로부터 전송받은 정오의 시보를 각 역에 중계하여 전송하였다. 그 후 이것을 용산역에서 받아 여기서 각 전신기의 전건(電鍵)을 일제히 눌러 전 노선에 통보하는 방법으로 전달하도록 개선되었지만, 이 방법은 취급상 불편한데다가 오차도 많다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1923년에 용산과 대전, 부산 및 평양 등 4곳에 자동 시보장치 각 1대를 신설하고, 이 장치에 각 역으로 가는 시보 회선을 접속시킴으로써 자동적으로 일제히 통보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어 오랜 기간의 현안이 해결되었다. 그 후 이 시보 회선은 각지에 신설되었으며, 주요 현장기관뿐 아니라 사무소와 공장 및 철도국 등으로 서비스 범위가 확대되어 업무상 가장 중요하고 정확한 시각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여객유도용 확성장치 : 개업 후 약 20년간은 여객 수도 별로 많지 않았기 때문에 역 구내에서의 여객 유도장치 설치의 필요성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 후 매년 증가하는 여객을 질서 있게 유도하기 위해 이 장치의 필요성이 점차 높아졌다. 1925년 7월에 조선철도에서는 처음으로 경성역의 대합실 및 여객용 홈에 확성장치를 설비하여 여객의 안내유도용으로 사용한 결과 여객으로부터도 호평을 얻어 양호한 실적을 올렸기 때문에 이후 급속하게 주요 역 구내에 설치되었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에는 등화관제 실시 시의 여객 유도와 더불어 관제하의 역 구내 입환작업의 능률 저하 방지라는 새로운 목적을 위해 여객 역 구내뿐 아니라 조차장 구내에서도 각 장소에 설치되었다. 설치를 시작한지 불과 십 수 년 후인 1939년 말에는 설비 수가 53대가 되고 확성기 수도 200대를 넘었다. 전신기 : 전신기는 창업 당시부터 단신음향기와 현자(現字)기가 주로 역 상호간의 연락용으로 사용되었는데, 현자기는 현자지, 먹물 및 조출장치가 필요한데다 수신 시에는 시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수신 속도 및 정확성이 청각에 의존하는 음향기식 수신에 비해 매우 떨어졌다. 음향기식이 현자기식과 비교하여 경제적으로도 통신 속도상에서도 훨씬 우수한 수신방식인 것은 잘알고 있었지만, 전면적으로 음향기식으로 변경하려면 취급자가 취급기술을 대폭적으로 서둘러 습득해야 했기 때문에 취급자의 양과 질의 향상을 꾀하면서 시간에 따라 점차 음향기식을 설치하여 통신 속도를 향상시켜 갔다. 1908년 11월 남대문과 초량 구간에 처음으로 2중 음향기가 설치되었는데 성능이 안정되고, 양호한 실적을 올렸기 때문에 그 후 점차로 이 장치로 개량되었다. 당시의 통신용 전원으로는 일반적으로 다니엘 전지가 사용되었는데, 신의주를 비롯해 혹한지의 동절기 대책으로 빙결을 막기 위해 전지실 전체를 온돌로 개축해야 하는 등 보안상 여러 가지 곤란한 문제가 생기고 취급상 불편한 점도 많았기 때문에 점차 취급이 간편한 건전지로 교체해 갔다. 1926년 4월에는 전신의 감사와 전신담당자의 기술 지도를 위하여 용산에 전신 감독기 1대를 설비하여 업무 능률의 향상과 전신담당자의 기능 향상을 꾀하였다. 만주사변 발발 이후 매년 급증하는 업무량에 따라 통신량이 증가하고, 통신의 속도 향상에 대한 요청도 점점 커졌기 때문에 전신설비의 근대화를 꾀하게 되어 차례로 새로운 고성능의 전신설비가 도입되었다. 1934년에는 타이프라이터에 의한 수신이 처음 개시되어 보다 고속도의 송·수신이 가능하게 되었다. 1937년 7월 용산∼부산 구간에 이어 1938년에는 용산∼순천 구간 및 용산∼청진 구간에 모두 재래 전신선의 전기적 중첩에 의한 반송식 전신장치가 새롭게 설치되었다. 또한 1939년에 부산∼용산 구간에 인쇄 전신기가 처음으로 설치되어 주요 간선구간 상호간의 막대한 통신량의 신속한 처리에서 위력을 발휘하였다. 전신기의 설비 수는 개업 당시인 1906년 말에는 99대였지만, 1936년 말에는 200대를 넘었다. 제5절 통신 운용 통신 운용규정의 변천 통신 운용규정은 통신설비의 진보 및 취급 업무의 양과 질의 변화에 따라 철도영업 당시부터 여러 번 제정과 개정을 반복해 왔는데 이들 주요한 것에 대하여 연차를 따라 기술하기로 한다. 1906년 7월에 처음으로 철도전보약호가 제정되고 전보 전달업무의 능률화가 꾀하여졌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철도전보취급규정이 제정되고, 취급업무가 통일화됨과 동시에 취급전보의 종류를 특별지급보, 전신불통보(不通報), 열차 운전보, 지급보, 통상보의 5종류로 분류하여 운용하게 되었다. 나아가 철도 업무 수행상 긴급을 요하는 사안에 대한 통신설비의 정비가 꾀하여짐과 동시에 전보 취급역이 증설되었다. 즉, 1904년부터 이미 취급이 개시되어 있던 경부선 내 전보 취급역 외에 새롭게 경의선 및 마산선에 21곳의 취급역을 늘려 합계 36역으로 하였다. 1907년에는 공중전보조사 절차를 제정하고, 같은 해 9월에는 철도전보선편연계 절차를 제정하였다. 이것은 조선철도 선내 각 장소와 일본의 제국철도청 관내의 각 장소 간 상호의 철도전보에 대해서는 당시 철도 전용 해저케이블이 없었기 때문에 부산∼시모노세키 구간의 연락선으로 탁송할 필요가 있어서 제정된 것이었다. 이어서 시보전달 절차를 제정하여 경성우체국에서 전달되어 온 시보를 남대문역에서 중계, 이것을 관내 각 역에 전달하기로 하였다(자동 시보장치 항 참조). 이 취급 개시로 인해 각 역에 일제히 정확한 시각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어 열차 운전 취급상에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1909년 4월에는 만주철도주식회사와 일본의 철도원(鐵道院) 및 조선철도의 3자간에 있어서 각 역 상호간에 왕복하는 철도전보의 취급이 개시됨에 따라 새롭게 전보취급규정이 제정되었다. 1914년 8월에는 철도전보의 취급범위가 확대되고, 국제연락 철도전보취급규정이 제정되었다. 이 취급규정의 제정에 의해 조선과 연락운수를 개시한 외국 철도의 본부나 지부 및 그 연락 역 상호간에 운수사무에 대한 철도전보의 취급이 개시되게 되었다. 1920년 5월 취급 통신량의 증가에 대응하기 위하여 철도전보취급규정의 대개정이 행하여졌다. 1927년 3월에는 매년 각지에서 발생하는 폭풍우에 의한 풍수해에 대처하기 위해 폭풍우 경보 취급 절차를 제정하여 폭풍우에 의한 철도 재해 발생 시의 긴급 취급 실시에 의해 재해의 신속한 복구에 공헌하였다. 1934년 7월에는 통신을 보다 신속화하기 위해 타이프라이터에 의한 교신이 개시되고, 타이프라이터 수신 취급 절차가 새롭게 제정되었다. 통신설비의 운용 통신 회선의 운용 : 창업 당시부터 전신 업무량의 증가에 따라 전신 회선설비도 매년 각 방면에서 정비되었다. 전신 회선의 전로방식으로서는 당시 폐전로방식과 개전로방식의 2가지 방법이 병용되었지만, 회선의 증가와 함께 전원용 전지 수 또한 현저하게 증가한데다 이들 전지의 보전관리에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에 개전로식을 폐지하고 폐전로식으로 통일하기로 하고 차례로 같은 방식으로 변경하였다. 또한 통신방식으로서는 당시의 짧은 기간에는 단신법만이 사용되었지만, 그 후 1908년 11월에 남대문∼초량 구간에 처음으로 2중 전신법이 사용되고, 직통의 2중 음향기에 의한 획기적인 교신법을 실시하여 교신의 원활화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로 인해 이후부터는 오랜 시간에 걸쳐 단신법과 이중법을 병용하여 운용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이들의 전신 회선의 운용방법에 대해서는 1910년 11월 처음으로 실시방법을 정하여 전보 취급량과 그 경로 및 전신 회선의 부담 능력을 감안하여 각각의 지역에 분할하여 운용하게 되었다. 즉, 전선을 남과 중, 북 3개의 지역으로 크게 구별하여 남부지역은 초량, 중부지역은 용산, 북부지역은 평양을 그 집중역으로 정하고, 전신 회선도 이들 집중역과 담당구역 내의 각 역간의 직통회선을 구성하도록 변경하여 운용효율의 향상을 꾀하게 되었다. 이어서 1912년 6월 호남선에 그리고 1912년 10월 경원선에 각각 직통 전선회선을 신설하여 이들 지역 내에서의 효율적인 운용에 공헌했지만, 한편으로는 각 지방에서 용산으로의 직통 전보 취급 수가 점점 증가하였기 때문에 먼저 제정된 주요 지역 집중주의의 운용방법으로는 오히려 취급상의 불편이 발생해 지연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개선 대책으로서 1913년 10월에는 용산∼신의주 구간 회선(용산, 평양, 정주 및 신의주의 4역 접속)을 그리고 다음해인 1914년 8월에는 용산∼목포 구간 회선(용산, 이리 및 목포의 3역 접속)을 각각 신설하고, 주요 역으로부터 용산에 직통으로 통신할 수 있도록 운용을 정하였다. 그 후로도 철도선로의 건설 및 개량 계획의 실시, 사설 철도선의 매수 등에 따른 선로의 연장에 의해 그리고 철도의 전반적인 업무량의 증가에 의해 전보 취급량도 급증하였다. 이 사태에 대응하여 주요 역 상호간 각 역과 철도 사무소 혹은 본국 소재지 역 상호간 및 그 외의 각 구간 상호간의 장거리 전신 회선의 신설이나 개폐가 행하여졌지만, 이들 신설비의 운용에 대해서는 보다 광역간의 효율화에 시점을 둔 운용방침이 취하여졌다. 전보 취급 실적 : 철도전보의 취급 실적 통수는 1906년의 창업 당시 겨우 74만 5천통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후 해마다 증가하여 1939년에는 1,635만 2천통에 달하였는데, 이것은 창업 당시와 비교하면 약 22배가 되었다. 그 후도 전시 수송의 격증과 함께 취급 통수도 지속적으로 증가하였지만, 종전 시의 통계가 없기 때문에 취급 실적이 불명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전신기능 향상 대책 : 전신계의 기능 향상을 위해서는 창업 이래 종사원양성소의 전신과라는 교육과정에 의해 기초적인 지도를 행하는 것 외에 통신경기대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전신 감독기에 의해 수시로 전신 담당의 지도에 임하는 등 반복하여 실시하였다. 통신경기대회는 1933년 11월 본국에서 제1회 연합통신경기대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후로도 매년 속행되었다. 이 때문에 1934년 10월 철도총국 개국 기념을 위해 만주에서 개최된 조선·만주 연합통신경기대회에서 조선철도로부터도 기술이 우수한 대표자 4명을 파견하여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다. 전화 회선의 운용 : 전화 운용의 효율화에 대해서는 매년 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용자에게 협력을 호소하였지만, 통신 수의 증가가 회선용량의 증가를 뛰어넘어 업무운용상 지장을 초래하였기 때문에 1923년 7월에는 정기적인 업무연락을 필요로 하는 장소 상호간의 통화를 확보하기 위하여 정시 통화제도를 만들고, 이를 위한 사용지침이 제정되었다. 1925년 5월에는 상시 긴급 연락을 필요로 하는 배차 및 운전 정리 업무용으로 전용 전화 회선이 설비되고, 이러한 운용을 위해 지령용 지침을 제정하여 업무의 원활화에 공헌하였다. 이상의 대책 외에 일반용 장거리 통화의 확보를 위하여 1934년 10월에 철도전화규정 및 철도전화 취급지침을 제정하고, 장거리 상호간의 기록통화취급업무를 새롭게 개시하여 종전에 이르기까지 장기에 걸쳐 통화자에게 편리를 제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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