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역사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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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철도 개통 전후의 교통 - 항만과 해운 노선 | 2024.08.16 |
4 | 철도 개통 전후의 교통 - 연안항로 | 2024.07.26 |
3 | 철도 개통 전후의 교통 - 한일합방 이전 | 2024.07.26 |
2 | 철도 개통 이전의 지역 교통상황 - 교통과 장시 | 2024.06.21 |
1 | 철도 개통 이전의 지역 교통상황 - 우리나라 교통망 | 2024.06.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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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개통 전후의 교통 - 항만과 해운 노선 | 2024.08.16 |
철도 개통 전후의 교통 3) 항만과 해운 노선 조선의 항만(1944년 현재)은 개항 14개 항, 지정항 38개 항, 관세지정항 9개 항, 지방항 326개 항, 합계 387개 항인데, 중복되는 것을 빼면 실제로는 368개 항이다. 이를 유사한 것끼리 구별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개항 [표 9] 통상항으로 개방된 곳 14개 항(개항 연월은 일본 측만) * 자료 : 선교회(1986), 《조선교통사》를 참조하여 작성 (2) 지정항 지정항은 조선 공유수면 단속규칙 제3조에 의해 선거, 선류, 계선벽, 하양장, 잔교, 교가호안, 방파제, 방사제, 순도제, 도수제, 갑문, 계선 기타 부표, 각종 등표 또는 견고한 건물을 신축, 개축, 변경 혹은 제거, 수면 구역을 변경하는 공사를 시행, 또는 굴착 등에 관한 행정상의 처방이 조선 총독의 권한에 속하는 항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당초 여수, 포항, 삼천포, 겸이포, 장전, 서호진, 신포, 웅기의 8개 항에 불과했지만, 그 후 증감이 있어서 1944년 현재, 다음 38개 항이 되었다. [표 10] 조선 공유수면 단속규칙 제3조에서 규정하는 항만 * 자료 : 선교회(1986), 《조선교통사》를 참조하여 작성 (3) 관세 지정항 조선과 일본, 대만, 가라후토(樺太)에는 남양군도와의 선박 및 화물의 출입에 관한 규정에 근거하여 조선 총독의 지정으로 개항 이외에 선박 및 화물의 출입이 가능한 항만을 가리킨다. 당초 지정항은 19개 항이었으나, 그 후 변경이 있어 9개 항이다. •경상남도 울산군 방어진항 •경상남도 마산부 마산항 •경상남도 창원군 진해항 •경상북도 영일군 포항항 •경상북도 울릉도 도동항 •함경남도 흥남읍 서호진항 •함경남도 통영군 통영항 •전라남도 여수군 여수항 •전라남도 제주도 성산포항 (4) 전시체제 하의 해운회사 및 단체 전시 하에는 조선에서도 당초 선주들 간의 자주적인 통합이 이루어졌는데, 전세가 악화됨에 따라 통제가 강화되고 최종적으로 대형선은 국가에 의해 운영되고, 나머지 소형선은 조선선박운항통제회사에 위탁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주요 해운회사 및 단체에 대해 약술하고자 한다. 조선우선주식회사 : 이 회사는, 조선의 산업·교통 발전을 위해서는 해운업의 발달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을 통감한 조선총독부에서 1912년 해운 행정을 체신국에 통일시킴과 동시에, 민간 해운업자 난립의 폐해를 우려하여 총독부의 기탁에 부응할 수 있는 유력회사를 설립하기로 한 결과, 일본우선, 오사카상선 및 기타 업자의 동의를 얻어서 설립된 것이다. 그때 이래 종전까지 30여 년간, 수많은 명령항로에 투입되었고, 해운 국가관리 시대에는 조선에서 선박운영회의 실무자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조선선박운항통제회사에 자금 및 수많은 요원을 파견하는 등 시종일관 조선해운의 대표회사였다. 서일본기선주식회사 : 이 회사는 남선 지방의 소형선 해운회사인 다테이시기선, 조선기선, 고요기선 등 3사를 통합하여 새로운 해운 체제에 부응하도록 설립된 것이었다. 조선해운주식회사 : 이 회사는 부산을 중심으로 하는 연안 해운업자인 주식회사 가네타회조점을 중심으로 하여, 동종동업의 미쓰모토회조점, 조선해운주식회사, 선흥해운상회, 낙동운수조합, 마산기선, 천파운송점, 가토회조부에 의해 1942년 설립되었다. 조선유조선주식회사 : 이 회사는 조선유조선의 일원적인 운영을 위하여 조선 정어리 기름 제조업, 수산조합연합회 및 주식회사 다테이시상선 소유선의 현물출자로 1943년에 설립되었다. 조선근해운수주식회사 : 이 회사는 조선 연안 및 조선과 관동주, 북중국 및 일본 간의 수송을 위해 대양 항해가 가능한 대형범선을 구입하는 것 외에, 계획조선(操船) 할당도 받아서 선단 수송을 계획하고, 유도기 범선까지 준비하여 1943년 8월부터 영업을 개시하였다. 조선해운협회 : 이미 1941년 근해해운업자를 주체로 하는 조선해운조합이 설립되었는데, 1943년, 그 조직을 전면적으로 개편하였다. 회원으로는 기선 또는 범선의 소유자 외에도 수상 소운송업자도 망라하였다. 대동강수운주식회사 : 이 회사는 대동강 및 진남포항을 중심으로 하는 수운의 특수성 및 서선지구의 중요 수송 물자의 증가를 고려, 순 범선의 선주를 집약하여 1944년에 설립되었다. 160여 명의 선주와 1,000여 척의 선박을 관장하였다. 각 지구 순범선해운조합 : 전술한 바와 같이, 조선 전체의 6지구별로 설립된 순범선해운조합은 조선선박운항통제회사의 하부조직으로서 통제 수송에 협력하였다. 기타로는 조선선박운항통제회사와 조선해륙운수주식회사가 있었다. (5) 1910년 이후 항로(보조항로, 명령항로)(참고3) 일본에서도 1875년 조의(朝議)에서 민영 보조주의라는 해운정책의 기본이념이 확립되어, 한편으로는 조선(造船) 장려, 운항 보조금 조성 등 많은 지원을 제공함과 동시에 정기항로 개발 등의 의무를 부가하고 있었는데, 조선총독부에서도 이 정책에 준하여, 당초부터 구 한국 정부의 명령항로를 답습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그 서북부를 제외하고 연안항로는 정기선이 운항되고 있었으나, 그 영업성적은 좋지 않았다. 이에 총독부는 구 한국 정부의 명령항로 기간 만료에 맞추어, 경쟁하는 해운업자를 설득하여 조선 연안에서 항로를 정비하고 충실화하여, 근해(일본과 중국)항로에 진출할 수 있는 해운회사를 설립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조선 내 업자 및 일본의 유력 회사가 참가하여 1912년 1월 자본금 300만 엔을 들여 조선우선(郵船)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이리하여 1912년도 이후, 이 조선우선을 중심으로 하여 기타 해운회사 또는 개인 사업자에 대해 보조금을 주어 명령항로를 확보하였다. 제1기 명령항로 : 1912년도 이후 3개년을 1기로 조선우선에 대해 연안항로로 삼아, 부산~웅기선 외에 8선의 항해 명령으로 연안항로를 통일하는 조선해운의 기초를 놓았다. 또한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내륙 산업의 개발에 이바지하고 다 같이 교통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대동강 및 금강의 수운 항로를 개설하고, 전자는 진남포 기선합자회사에, 후자는 이를 강경에 거주하는 마쓰나가에게 항로의 운항을 명령하였다. 1913년 4월 연안항로의 일부를 개정, 조선우선에 대한 명령에 추가하여 남쪽 연안 다도해항로 2선을 개시하게 하고, 이어서 1914년 4월 압록강항로를 창설, 신의주 거주 다카바네에게 이를 명했다. 제2기 명령항로 : 제2기 명령항로는 1915년 4월부터이며, 수로 폐쇄를 위해 항행이 불가능하게 된 금강항로를 제외하고 종래의 수령자에게 그 항해를 계속하게 하였다. 또한 대러시아 무역이 점점 밀접해진 것을 고려하여 원산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근해항로를 신설하였다. 명령항로의 기간은 모두 1920년 3월 31일까지의 5개년으로 하였다. 제3기 명령항로 : 1914년 유럽에서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그 전국이 확대됨에 따라 선박의 수요는 날이 갈수록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각지 각 선박에 그 영향이 파급되어 선박 부족에 의해 운항에 지장을 가져온 곳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완화책으로 1917년 12월 이후 원산~블라디보스토크선을 오사카까지 연장해서 조일 간 수송을 보충했고, 또한 북지(北支)에 대해서는 조선우선으로 진남포~대련 간에 자영항로를 개설하게 하였다. 그 후 중국과의 무역은 점차 진전을 보이고 그 자영항로에만 의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1922년 아와노쿠니공동기선주식회사의 대련~위해선을 인천에 기항시킴과 동시에, 조선우선으로 하여금 조선~북지선의 개시를 명령하였다. 또한 압록강수선공사로 하여금 압록강에 기선항로를 개설하게 하였다. 그 기간은 3개년으로 하여 신의주~초산 간, 초산~중강진 간, 중강진~신갈파진 간의 3선으로 긴 유역에 걸쳐 국경 경비와 여객·화물 수송에 기여하였다. 한편 밀접한 지리적 관계에 있는 북조선과 일본(우리나라의 동해) 사이에 항로를 게시하는 것은 현안이었으나, 시대의 진전에 따라 항로 개설의 긴급성을 인정하여 1918년 4월 이후 조선우선에 대한 보조 명령에 추가하여 2,000톤급 1척으로 1개월 2회 반의 항해를 조건으로 하는 청진~원산~쓰루가 간의 정기편을 개설하게 하였다. 또한 1923년 8월에는 여기에 미야즈~쓰루가에 기항하는 항로 연장을 명했다. 이어서 시베리아 대륙의 환난에 의해 일본군이 출병하기에 이르러, 그 군수품 수송을 위해 원산~웅기선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장하는 방안을 조선우선에 명령하고, 또한 호쿠리쿠기선주식회사로 하여금 후시키~나나오~블라디보스토크선을 청진에 기항하게 하였다. 이상 제3기 명령항로는 1924년도 말까지였다. 제4기 명령항로 : 제2기에서는 1929년까지인데 대체로 종래의 방침을 답습한 것이지만 명령 조건을 추가하는 것에 대해서는 보조금을 증액하고, 이익이 인정되는 것 또는 발동기선의 발달이 현저한 노선에 대해서는 이를 자영으로 옮겨 보조금을 삭감 또는 폐지하는 등 정리를 했다. 한편 신규로 근해항로로 조선~상해선 및 조선~나가사키~대련선을 그리고 연안항로로 부산~제주도선을 창설하였는데 이는 1925년의 일이었다. 이듬해인 1926년에는 조선과 홋카이도, 일본해, 남만주 상호 간의 수송 교통에 이바지하기 위해 조선~홋카이도~대련선을 개시하고, 또한 1928년 9월에 함경선 철도 개통으로 존속할 필요가 없어진 원산~청진선 폐지와 동시에 북조선과 도쿄 방면과의 연락에 대해서는 직통 항로로 북조선~도쿄선을 설치, 재래선에 의한 경우의 일본 동해안 항구들 또는 부산 혹은 한신 중계의 불편을 해소하기로 했다. 제5기 명령항로 : 이 시기에는 전기명령의 갱신계획을 세웠으나, 때가 해운 불황이 심각한 시기였던 만큼 명령을 받은 회사의 경영 악화로, 부산~제주도~관문선(일본), 진남포~재령진~강포선 및 신의주~중강진선의 일부를 폐지하고, 그 외에 대해서는 1개년 간 현상 유지를 하여 얼마간 정세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근해 8선, 연안 7선, 하천 2선, 기항항로 2선 합계 19선에 대해 명령하였다. 제5기는 1930년도 1개년이었다. 제6기 명령항로 : 1931년에 들어서도 해운 불황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을뿐더러 한층 더 심각해져 국가 세입의 감소도 심각하게 곤란한 상황이었으나, 조선 물자의 판매 확장의 견지에서 부산~하카타선 및 홋카이도~니가타선의 조선기항을 신설, 천진~대련선의 조선기항 및 조선~북지선의 증설을 하였고 조선 연안항로의 계통 및 기항지를 정리하였다. 그 결과 제6기의 명령항로는 근해 8로, 연안 3로, 하천 2로, 기항 4로 등 합계 17선이 되었다. 당시 조선우선의 조선과 일본의 정기항로를 보면 가장 운행 빈도가 높은 노선은 오사카~부산항로, 오사카~청진, 오사카~웅기항로였다. 우리나라 항구로서는 부산, 청진, 웅기 등 북선항로도 꽤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항로를 해석해 보면 초기 개항장 중심의 이동으로 인해 일본과 청국 등의 개항장 중심으로 항로가 개설되었다. 항로는 부산 중심에서 후에는 청진, 성진, 나진 등 3개 항구가 있는 북선 지방으로 확대되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북부지방의 공업화와 함께 만주국 이후 이곳을 통해서 일본과 대륙으로 이동이 편리한 것에 기인하였다. 또 하나는 항로와 철도의 연결이다. 예를 들면 모지와 부산을 연결할 경우 일본 내의 철도와 조선 경부선의 연결 등이 가능한 것이었다. 철도 연락선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제7기 명령항로 : 1932년 4월부터 제7기에 들어갔는데 중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항일운동이 맹렬해지자 물자의 거래가 급감하여 호전될 전망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조선~북지선을 변경 축소하고, 1930년도 이전 상태로 되돌려 추이를 살펴보기로 함과 동시에 발동기선의 발달 및 연안지구의 자동차 노선의 개시 등을 감안하여 부산~제주도선을 폐지하고 부산~원산선을 부산~울릉도선으로 바꾸었다. 또한 종래 체신성 명령의 선미 이출항로였던 서선~도쿄선을 총독부에서 계승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제7기는 근해 9, 연안 2, 하천 2, 기항 4 등 합계 17선이었다. 제8기 명령항로 : 1933년도 제8기 명령에서는 일반재정 긴축방침에 따라 새 계획은 모두 보류하고, 전년도를 답습하기로 하였다. 제9기 명령항로 : 제9기 명령에서는 거래 물자 수량의 움직임으로 보아 각 항구의 중요성에 응하여 선박 및 기항 증감을 조정하고, 혹은 선편의 관계를 고려하여 기항 생략에 의한 항해 일수의 단축을 도모하였다. 이와 동시에 일면 만몽(滿蒙) 물자가 북조선에 유출되는 것의 탑재도 고려하는 것 외에 남조선과 일본 간의 교통 운수의 편의에 이바지하기 위해 여수~시모노세키선을 신설하여 광주~여수 철도와의 연락을 꾀하였다. 제10기 명령항로 : 이 시기에는 대(對)만주국 거래의 진전 및 북조선 개발시설 등에 의해 일본해 항운의 증강을 필요로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기 때문에 종래의 니가타~홋카이도~북조선을 북선~니가타 직통선으로, 또한 후시키~블라디보스토크~청진선을 청진~후시키선으로 바꾸어 그 항해 수를 증가시켰다. 제11기 명령항로 : 1936년도인데, 이 시기에는 광주~여수 간 철도의 국철(局鐵) 매수 및 경전선의 개통에 따라 일본과의 선차연락(철도와 배의 연락) 간선으로서 점점 그 중요성을 더해가는 여수~시모노세키선을 일본에서 출발하는 항로로 하고, 또한 만주국 영구에서의 조선총독부 안전 농촌 조성을 위해 조선~북중국선을 그곳에 기항하게 하였다. 이것 외에 만주국의 발전, 조선 내 특수 광산자원 혹은 수력의 적극적인 이용개발 등에 의한 조선 내 산업의 약진에 수반하여 전면적으로 배선의 증가 및 선형의 확대를 도모하였다. 제12기 명령항로 : 1937년도 제12기에는 주로 신항로의 개척을 계획하고, 우선 관계 지방민의 다년간의 바람이었던 북선~홋카이도선을 개설하고, 또한 종래 주로 일본 중계에 의존하던 조선 생산품의 대외 수출에 편리를 꾀하기 위해 남양우선주식회사의 자바항로 및 오사카상선주식회사의 캘커타항로를 부산에 기항시키기로 하였다. 또한 북선과 상해 방면과의 교역 조성을 도모하기 위해 조선~상해선을 일부 북선으로 연장하였다. 제13기 명령항로 : 1938년도에는 북중국 신정권 수립으로 경제건설이 착착 실행에 옮겨지는 듯한 정세였고, 이에 따라 조선~북중국 간의 여객과 화물이 현저하게 증대되는 것으로 예상되었기에 서선~천진선, 서선~청도선 및 요코하마~천진선, 부산 기항의 3선을 설치하는 한편, 대외 수출 무역의 촉진을 위해 일본우선주식회사의 함부르크항로를 부산에 기항시키는 것으로 하였다. 제14기 명령항로 : 1939년도에 이르러 시국의 진전에 따라 한반도에 맡겨진 병참기지로서의 사명을 더욱 구체화할 목적으로, 전면적으로 북중국항로의 태세 확립을 기하여 조선~북중국선을 서선~북중국선으로, 대련~위해선을 인천~위해~대련선으로 각각 변경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서선~청도~천진선에 대해서는 출항 횟수를 증가시키고, 천진 매 4일 1회, 청도 매 5일 1회의 정기편으로 하는 것 외에 국책항만 다사도의 제1기 공사 완성을 계기로 겨울철 정기편 확보를 도모하기 위해 서선~도쿄선을, 특히 월 2회 같은 곳에 기항시키기로 했다. 그 결과 제14기 명령항로는 근해 10, 연안 2, 하천 2, 기항 4 등 합계 18선이 되었다. 제15기 명령항로 : 1940년도에는 북중지 신정권의 확립에 따라 서선~천진선을 1척 증가해 진남포~천진 간에 취항하고, 조선~상해선을 변경하여 서선~청도선으로 상해까지 연장함과 동시에 북선~상해선을 개시하는 등 서선 및 북선과 북중지의 연락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제3국 무역 촉진을 위한 오사카상선의 필리핀선의 부산 기항을 개시하고, 또한 여수~시모노세키선에서 다시 일본 출발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그 반면, 비상시 아래 국가 재정 현황에 맞추어 북선~도쿄선 및 서선~도쿄선 및 조선~나가사키~대련선을 당분간 무보조 명령항로로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압록강 발전(發電)계획의 구체화에 따라 신의주~중강진선(고뢰주)을 폐지함과 동시에 신의주~신갈파진선(발동기선)을 만포진까지로 축소하는 등 정세의 추이에 맞추었다. 이로써 제15기 명령항로는, 근해 10, 연안 2, 하천 1, 기항 7 등 합계 20선 및 무보조 3선이 되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태평양전쟁까지의 조선 해운을 위한 보호 조성의 대략적인 내용이며, 1940년 4월 1일 현재의 명령항로로서 보조한 것은 다음 표와 같다. [표 11] 명령항로 일람표(1940. 4. 1. 현재) * 참고 : 속력은 최고 속력, G/T는 총 톤수 * 자료 : 선교회(1986), 《조선교통사》, p.994 한편 1941년도 이후의 전시 하의 명령항로에 대해서는 항로 및 배의 제약을 받아 종래의 형태를 유지하기는 곤란하였지만, 민생 및 치안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항로의 단축 등은 피할 수 없었으나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1944년도, 즉 제19기에 해당하는 명령항로는 다음 표와 같다. [표 12] 1944년도 명령항로 일람표(1944. 4. 1. 현재) * 주 : 명령 기간 1944년 4월 1일~1945년 3월 31일 * 자료 : 선교회(1986), 《조선교통사》, p.995 명령항로는 정책적인 측면이 강한 항로라 할 수 있다. 명령항로는 철도와 도로 등의 개설 후에는 폐지되었다. 명령항로의 변화를 보면 초기에는 연안 해운 위주에서 점차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근해 위주로 변해갔다. 이는 국내의 철도망이 부설되었다는 것과 함께 당시 일본의 대륙 진출과도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표 13] 명령항로(보조항로)의 변화 ======================================= 참고 3) 선교회(1986), 《조선교통사》 해운부문, pp.991~996을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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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개통 전후의 교통 - 연안항로 | 2024.07.26 |
철도 개통 전후의 교통 2) 연안항로 연안항로는 개항장을 중심으로 시작하였으며 추가적으로는 웅기 정도였다. 웅기는 나진 근처로 북방지역에서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웅기는 수심이 깊어 내만 연안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북단 무역항이며 해상과 육상 교통의 요충지인 웅기항이 발전하였다. 이곳은 1909년에 블라디보스토크항이 폐쇄되면서 두만강 유역에서 생산되는 물자 수송을 전담하게 되어 급격히 발달하였다. 1911년의 연안항로를 보면 철도가 본격적으로 부설되기 이전이라 부산∼웅기, 부산∼목포 등의 항로가 있었고 개항장과도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표 4] 연안항로(1911년 말) * 자료 : 조선총독부(1913), 〈수운〉, 조선총독부시정연보, pp.217~218 한편 조선우선주식회사가 경영하는 1912~1915년의 명령항로를 보면 다음과 같다. [표 5] 조선우선주식회사 경영 명령항로(1912~1915년) * 자료 : 조선우선주식회사(1937), 《조선우선주식회사25년사》, pp.40~60,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다음 표는 1915년 9월 현재 조선의 연안항로로 1911년보다 더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표 6] 연안항로(1915년 9월 현재) * 자료 : 조선총독부철도국(1914), 《조선철도역세일반》 참조하여 작성 * 주 : 즈푸(참고 2), 대련선, 대고산, 천진, 안동선은 중국항로 이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1911년 말 연안항로는 부산을 중심으로 하여 남해안 노선이 많았지만, 1915년 9월에는 동해안과 서해안이 증가하여 이동이 많아진 것을 알 수 있다. [표 7] 연안항로 수의 변화 1915년 9월 국제항로를 보면 개항지를 중심으로 국제항로가 개설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우리나라는 부산과 인천의 국제선의 기항 횟수가 특히 많았다. [표 8] 국제항로(1915년 9월) =========================================== 참고 2) 즈푸는 지부로 중국 산동성에 있는 항구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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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개통이전의 교통과지역 | |
철도 개통 전후의 교통 - 한일합방 이전 | 2024.07.26 |
철도 개통 전후의 교통 1) 한일합방 이전 철도가 출현하기 이전 조선은 1876년 이후 우편 취급을 개시하였으며, 이후 1884년에는 전신까지 취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 교통은 매우 미흡한 상태였다. 조선 정부의 시설로는 도로의 구축에 관한 과역법과 통신에 관한 우편 규칙과 그에 따른 우편사 등이 있었다. 민간에는 들것이나 짐말, 가마 등을 이용하는 자유 노동자와 매우 영세한 강(江) 운송업자 그리고 여객 화물은 중계기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객주 등이 있었으나, 교통 수요가 적어 교통이 매우 황폐한 상황이었다. 도로는 과역법에 의해 민간 비용으로 구축하는 제도가 있었으나, 사실상 실효성이 없는 법이 되어 파괴되어도 그대로 방치되었다. 주요 간선 가도조차 말로 통과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으며, 하천에는 교량이 거의 없어 도보나 배로 건너다녔다. 더욱이 우기에는 하천이 범람하여 교통이 자주 끊기는 상태였다. 도로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행은 도보나 교자 또는 짐말에, 화물의 운송도 들것이나 짐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역참의 뒤를 이어 생겨난 우편사의 운송도 짐말이나 보행의 방법을 이용했다. 가마는 장거리의 빠른 여행에 적합하지 않았고, 여러 명의 인부가 필요하여서 임금이 비싸 일부 부유층만이 이용하였다. 짐말은 장거리 여행이 가능하여 어느 지역에서나 요구되었다. 화물 운송은 소량의 단거리일 경우 대부분 들것을 이용하였으며, 대량의 원거리일 경우에는 짐말을 이용했다. 그러나 짐말이 운반할 수 있는 양도 쌀 8가마 또는 석유 3통 정도였고, 장거리 운송의 경우 짐말 업자를 신용하기 힘든 데다 연대제(連帶制)도 도입되지 않은 상태여서 반드시 보조인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운송 비용이 많이 들어서 사실상 대량화물의 원거리 운반은 거의 불가능했다. 도로교통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하천 운송은 내륙 교통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압록강, 청천강, 금강, 낙동강 등은 그 중류 이하에서 모두 봉선(조선 고유의 범선) 또는 일본 선박을 이용했다. 하천의 상태에 따라 운송 범위가 자주 바뀌었으며, 선박의 구조가 매우 조잡하고 왜소하여 운항에 어려움이 따랐다. 그러나 육로운송과 비교하면 수송력이 훨씬 뛰어나고 임금도 저렴하여 여객과 화물이 모두 하천 운송에 집중되는데, 특히 화물 운송에 많이 이용되었다. (1) 근대의 도로(1914년) 대한제국 시대의 도로는 2, 3개 간선에는 차량이 통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폭은 한 간(1.8m) 정도의 협소한 길이었으며, 지형에 따라 기울기가 심하고 요철이 많았다. 또한 하천에는 다리도 없어 작은 개울은 도보로 건너고 큰 강에는 나룻배 운송이 고작이었다. 장마철이나 출수기에는 교통이 끊기고 물이 줄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여객은 도보로 걷고 말 등이나 가마를 이용하고, 화물은 지게에 지고 소나 말 등에 싣고 다녔다. 1906년 4월 정부에서 지도국을 설치하여 각지의 주요 도로 개수에 착수하여 1910년 합병까지 총연장 850km에 소요예산 3,427,300원이 들었다. 1911년 도로규칙을 제정하여 도로의 등급, 관리, 축소, 유지, 수선 등에 통일적인 규정을 정하는 등 도로제도를 확립하였다. 1916년 3월에 제1기 계획노선의 완성을 예정하였으며, 철도와 도읍, 도읍과 항만을 연결하고 중요 도읍 간을 접속하는 등 교통편의 향상을 기하였다. 1913년 9월 말 현재의 보수공정을 보면 1등 도로 전 연장 537리 28정 중 보수 완료 209리 6정, 2등 도로 전 연장 1,591리 10정 중 보수 완료 850리 19정, 3등 도로 전 연장 1,981리 33정 중 보수 완료 1,274리 11정으로 이것을 각도, 선로별로 열거하면 다음 표와 같다. [표 3] 각도 개수도로 이정표(1913년 9월 말 현재) 1등 도로 1913년의 1등과 2등 도로와 조선 시대 10로를 비교해 보면 의주선, 원산선은 1로, 2로와 노선이 거의 일치하고, 부산은 4로, 목포는 6로와 유사하다. 다른 것은 경부철도선을 따라 천안~대전~김천을 통과하는 간선도로가 부설되었다는 것과 평원선 철도를 따라 평양~원산 간의 도로가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개항지인 부산, 마산, 목포, 군산, 인천, 진남포, 원산, 성진을 전체로 연결하는 도로망이었다. 이는 우리나라 교통망이 조선 시대의 도로망을 기본으로 하되, 개항지와 연결하고 경부선 등 내륙 철도망과 연계되어 도로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근대 교통망의 경우 철도가 군사 외교적인 목적으로 내륙 간선 교통망으로 먼저 건설되고, 도로는 이후 철도역과 경제적 자원소재지, 도청소재지를 연결하는 형태를 취했다고 할 수 있다. 2등 도로 3등 도로 * 참고 : 당시 1리=약 4km * 자료 : 조선총독부 철도국, 《철도역세일반》, 1914년 12월, pp.36~60 1등 도로와 2등 도로(1930년대) * 출처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한국 근대 전자역사지도 (2) 조계와 해관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불평등조약 체결로 중국과 한국에는 조계, 일본에는 거류지가 만들어졌다. 19세기 후반, 근대자본주의의 물결은 한반도에도 들이닥쳐, 문호 개방과 통상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이에 따라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고 이 조약에 근거하여 한일 간 국교와 무역이 시작되었는데, 일본 우편기선 미쓰비시회사(1873년 설립 후 1885년 10월 미쓰비시회사와 공동운수주식회사가 합병하여 일본우선주식회사가 됨)의 소유 선인 ‘나니와호(浪華號)’가 매월 1회 부산으로 출항하였다. 그 후에는 오사카상선주식회사(1884년 설립)도 신조선인 ‘안레이마루(安寧丸)’를 부산에 기항하였다. 그 당시의 개항지는 부산과 원산뿐이었지만, 일본에 이어 청나라와 미국,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등의 나라들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1883년에는 인천과 양화진, 경성을, 1888년에는 흥남을, 1898년에는 평양을 그리고 1906년에는 용암포를 각각 일본과 기타 각국에 개방한 것이다. 이를 자세히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에 조계가 처음 설정된 것은 1877년 1월 30일 부산항조계조약(釜山港租界條約)에 의해서이다. 이어 청나라를 위시하여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가 각기 수호통상조약 체결과 동시에 인천, 진남포, 군산, 마산, 성진 등지에 설치하였다. 조계는 전관조계(專管租界)와 공동조계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전관조계는 1개 국가만이 거주하며 상행위를 하는 곳이며, 공동조계는 여러 나라 국민이 공동으로 거주하며 상행위를 하는 곳을 말한다. 이러한 조계는 국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경제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경우와 군사·정치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일본이 한국에 만든 것은 공동조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침략과 식민을 위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세관이 설치된 것은 1883년으로, 청나라 북양대신 리홍장의 추천으로 초빙되어 온 묄렌도르프는 고종의 지시에 따라 개항장인 부산, 인천, 원산에 3개의 세관(당시는 해관)을 설치하게 된다. 일본의 조계는 부산이 1877년, 원산이 1880년, 인천이 1883년, 마산이 1902년에 설치되었다. 중국의 조계는 인천이 1884년, 부산이 1884년, 원산이 1888년이었다. 러시아는 1900년 마산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각국의 공동조계는 1884년 인천, 그 후 1887년 진남포와 목포, 1889년 군산과 성진, 마산이었다. 조계지는 1914년에 모두 해지되었다. ▲[지도 7] 우리나라의 해외 각국의 조계지(1887년~19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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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개통이전의 교통과지역 | |
철도 개통 이전의 지역 교통상황 - 교통과 장시 | 2024.06.21 |
철도 개통 이전의 지역 교통상황 2) 교통과 장시 조선 후기의 장시는 전국적으로 1,000여 개 있었는데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였다. 당시의 《신증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 등의 자료를 통해 정리해 보았다. (가) 조선 후기 충청도 도로 조선 후기 6로(六路)는 한양~동작나루~과천~수원~천안~공주~여산~삼례역~전주~남원~함양~진주를 거쳐 통영에 이르는 길인데, 한양에서 보면 경상도로 가는 길 세 개 중에서 오른쪽에 있어 ‘경상우로(慶尙右路)’라 하였다. ▲ [지도 5] 신증동국여지승람(조선 중기)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조선 시대 우리나라 충청도에는 율봉도를 비롯해 일신도와 연원도, 성환도, 황강도, 증약도, 시흥도, 금정도, 이인도가 설치되었다. 조선 시대 역제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죽산과 진천을 거처 율봉도는 율봉역(청주)과 쌍수역(청주), 저산역, 장양역(진천), 태랑역(진천), 시화역, 증약역(曾若驛, 옥천), 가화역(嘉禾驛, 옥천), 토파역(土破驛, 옥천), 순양역(順陽驛), 화인역(化仁驛), 전민역(田民驛), 덕류역, 회동역(영동), 신흥역(新興驛, 황간), 사림역(舍林驛), 원암역(原巖驛) 등 17개 속역을 관할하는 역도로 확립되었다. 근대도시 대전의 이전에는 율봉로의 소역으로 전민(회덕)이 있었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표 2] 조선 역로(율봉도) * 자료 : 세종실록지리지 [세종실록] 제149권, ‘지리지 충청도’를 보면 충청도에는 다음과 같은 역이 있었다. 율봉도(栗峯道)의 관할 역은 진천의 장양(長楊)과 태랑(台郞), 청주의 쌍수(雙樹)와 저산(猪山), 청안의 시화(時化 또는 時和), 문의의 덕역(德驛 또는 德留驛), 옥천의 증약(增若)과 가화(嘉和), 토파(土坡), 순양(順陽), 화인(化仁), 영동의 회동(會同), 황간의 신흥(新興), 보은의 원암(元巖 또는 原巖)과 함림(含林), 회덕의 전민(田民 또는 貞民) 등 16개 역이다. 일신도(日新道)의 관할은 5개 역이다. 중심역은 역승(驛丞)이 주재하였다. 성종 이후 성환도(成歡道)에 병합되었다. 이에 속하는 역은 경천(敬天, 공주)과 광정(廣程, 공주), 평천(平川, 연산), 단평(丹平, 공주), 유구(維鳩, 공주) 등 5개이다. ▲ [지도 6] 조선 후기 충청도 지도(출처 : 조선 후기 충청도 지도) http://www.atlaskorea.org/historymap.web/IdxMap.do?method=JR 연원도(連原道)의 역은 충주의 단월(丹月)과 가흥(可興 또는 嘉興), 용안(用安), 괴산의 인산(仁山), 음성의 감원(坎原), 연풍의 신풍(新豊)과 안부(安富), 청풍의 황강(黃江)과 수산(水山 또는 壽山), 안음(安陰), 단양의 장림(長林)과 영천(令泉 또는 靈泉), 영춘의 오사(吾賜), 제천의 천남(泉南) 등 14개 역이다. 성환도(成歡道)의 관할에 속하는 역은 천안의 신은(新恩)과 김제(金蹄), 공주의 광정(廣程)과 단평(丹平), 일신(日新), 경천(敬天), 유구(惟俱 또는 維鳩), 연산의 평천(平川), 연기의 금사(金沙), 청주의 장명(長命), 목천의 연춘(延春 또는 迎春) 등 11개 역이다. 황강도(黃江道)의 관할 역은 청풍의 수산(水山)과 안음(安陰), 단양의 장림(長林)과 영천(令泉), 제천의 천남(泉南), 영춘의 의풍(義豊, 속칭 吾賜) 등 6개 역이다. 증약도(增若道)의 관할 역은 옥천의 가화(嘉和)와 화인(化仁), 토파(土坡), 순양(順陽), 보은의 원암(元岩)과 함림(含林), 영동의 회동(會同), 황간의 신흥(新興), 회덕의 전민(田民) 등 9개 역이다. 시흥도(時興道)의 관할 역은 신창의 창덕(昌德), 예산의 일흥(日興), 덕산의 급천(汲泉), 면천의 순성(順城), 당진의 흥세(興世), 아산의 장시(長時), 평택의 화천역(花川驛) 등 7개 역이다. 뒤에 금정도(金井道)와 병합되었다. 금정도의 관할 역은 대흥의 광시(光時), 결성의 해문(海門), 보령의 청연(靑淵), 홍주의 세천(世川)과 용곡(龍谷), 해미의 몽웅(夢熊), 태안의 하천(下川), 서산의 풍전(豊田) 등 8개 역이었다. 그러나 뒤에 시흥도(時興道)가 금정도에 병합됨에 따라 시흥도에 딸린 8개 역도 이에 소속되었다. 이인도(利仁道)의 관할 역은 9개이다. 용전(龍田)과 은산(銀山), 유양(楡陽), 숙홍(宿鴻), 남전(藍田), 청화(靑化), 두곡(豆谷), 신곡(新谷), 영유(靈楡) 등이다. 분행(分行)과 좌찬(佐贊) 2역(驛)은 경기 찰방도(京畿察訪道)를 관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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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개통이전의 교통과지역 | |
철도 개통 이전의 지역 교통상황 - 우리나라 교통망 | 2024.06.14 |
철도 개통 이전의 지역 교통상황 1) 우리나라 교통망 교통망에서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지형적인 여건이다. 도시는 정치와 경제적인 중심지로서 사람들이 편리하게 거주하고, 이동이 편리한 곳에 자리 잡는다. 우리나라의 지형을 보면 동고서저(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지형)의 지형과 배산임수의 특징으로 큰 도시는 대부분 서쪽에 위치하고 수운과 연관된 곳이 많다. ▲ [그림 1] 우리나라의 지형(산맥과 강)(출처 : 한국지리교과서) (1) 도로 조선 시대의 도로망을 보면 우리나라의 지형을 반영하여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였는데, 중국 등 대륙과의 경제적인 교류 등으로 교통망은 기본적으로 남북 종관형의 특징을 보이며, 동서 간의 교통로는 지형적인 여건과 경제적인 교류의 필요성이 적어 지역 간의 상호교류는 발전의 속도가 늦었다. 조선 시대의 도로는 《동국문헌비고》와 《대동지지》에 따르면 10대 간선도로는 한양에서 북쪽으로 2개(1로, 2로), 동쪽으로 2개(3로, 10로), 남쪽으로 4개(4로, 5로, 6로, 7로), 서쪽으로 2개(8로, 9로)가 있었다. 도로별 경유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로(一路)는 한양~고양~파주~평양~정주를 거쳐 국경 의주(義州)에 이르는 길. 2로(二路)는 한양~원산~영흥~함흥을 거쳐 국경 두만강 하구 서수라(西水羅; 우리 땅 산경 장백정간의 종점)에 이른다. 3로(三路)는 한양~원주~동해안 강릉을 거쳐 평해(平海; 현 경북 울진군 평해읍)에 이르는 소위 관동로(關東路)이다. 4로(四路)는 한양~판교~용인~양지(陽智; 현 용인시 양지면)~광암~달내(達川;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충주로 흘러 남한강에 합수, 3대 명수의 하나)~충주~조령~문경~유곡역(幽谷驛; 문경시 남쪽에 있음)~낙원역~낙동진(洛東鎭; 현 상주시 낙동면)~대구~청도~밀양~황산역을 거쳐 동래(東萊), 부산(釜山)에 이르는 길이다. 5로(五路)는 한양~유곡역은 4로(四路)와 같고, 유곡역~상주~성주~현풍~칠원~함안~진해~고성을 지나 통영(統營)으로 통한다. 6로(六路)는 한양~동작나루~과천~수원~천안~공주~여산~삼례역~전주~남원~함양~진주를 거쳐 통영에 이르는 길인데, 한양에서 보면 경상도로 가는 길 세 개 중에서 오른쪽에 있어 ‘경상우로(慶尙右路)’라 하였다. 7로(七路)는 한양~삼례역은 6로(六路)와 같고, 삼례역~태인~정읍~장성~나주~영암~해남을 거쳐 수로로 제주(濟州)에 다다른다. 8로(八路)는 한양~평택~소사를 거쳐 충청수영(忠淸水營; 현 충남 보령시 오창에 있었음)에 이르는 길이다. 9로(九路)는 한양에서 강화(江華)에 연결되며, 10로(十路)는 한양~충주를 지나 안동(安東)과 봉화(奉化)에 이르는 길이다. 우리나라의 도로망은 이처럼 남북이 중심이 되어 동서 지역 간의 이동에는 한계가 있었다. 한편 조선 시대 지방관이 파견된 목을 보면 [그림 2]와 같은데, 경부 축에는 경주와 안동, 상주, 호남 축에는 전주와 광주, 나주, 충청도에는 충주와 청주, 공주, 경기도 쪽에는 한성과 광주, 여주, 강원도에는 원주, 북쪽으로는 개성과 평양, 정주, 의주, 함흥, 길주 등이었다. ▲ [그림 2] 조선 시대 도로망(도로 10로,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를 통하여 보면 조선 시대의 경우 남북으로 도로망이 형성되었고, 상대적으로 동서축이 발달하지 못하여 강원도 지역은 원주와 강릉 정도가 그나마 인구가 밀집된 곳이었다. 도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상업이 번성한 지역으로 시전과 사상도고(私商都賈) 등 상인들의 세력이 컸던 고을은 한성과 개성, 평양, 전주, 상주, 대구, 충주, 의주 등 도시인구가 1만~3만 명의 규모였다. 외국무역이 이루어졌던 한성과 부산, 의주, 경성에서 큰 장시가 열렸다. 조선 시대 후기의 인구 5,000명 이상의 도시는 경기도에 한성과 개성, 강화, 광주, 양주, 충청도에 충주와 공주, 당진, 청주, 부여, 온양, 아산이었다.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 광주, 태인, 제주, 경상도는 동래와 밀양, 부산, 진주, 거제, 대구, 상주, 안동, 경주, 의성이었다. 황해도는 해주와 황주 연안이었으며, 평안도는 평양과 의주, 영유, 성천, 선천, 정주, 안주, 창성, 초산, 상원, 철산, 덕산, 가산 등이었다. 함경도는 경성과 길주, 단천, 영천, 함흥, 흥원으로 교통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표 1] 조선 시대의 주요 도시(18세기 후반) * 자료 : 손정목(1977), 《조선 시대 도시사회연구》, 일지사, p.223. (2) 수운 우리나라에는 수운을 이용할 수 있는 큰 강이 많다. 두만강과 압록강, 대동강, 한강, 낙동강의 5대강을 비롯하여 청천강, 예성강, 임진강, 만경강, 영산강 등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도로 여건이 좋지 않아 교통은 주로 하천을 이용하였고, 주변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암초와 모래섬, 산림의 남벌로 민둥산도 많았다. 수원확보가 어려워 평소에는 고갈되고, 비가 오면 범람하는 예가 많았다. 수운에 관련한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리고 이 분야의 전문가인 고동환 교수 등의 자료를 참고하여 정리해 보고자 한다. 수운과 관련한 도시는 한강으로는 한성(마포, 용산, 서강)과 춘천, 원주, 충주, 청주, 금강으로는 공주와 강경, 영산강은 영광과 나주, 낙동강은 대구와 진주, 문경, 삼랑진, 대동강은 평양과 남포 등이었다. 당시 수운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수운으로 세금을 운반하는 조운이었다. 조운로를 보면, 이는 해로와 강의 수운을 이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운의 편의를 고려하여 한양에 도읍을 정한 조선왕조였지만, 처음에는 고려를 계승하여 서해안과 남해안 지역에 몇 개의 조창을 설치하고 이를 기점으로 해운에 역점을 두었다. 건국 직후 왜구에 대한 경비책을 강화하여 왜구의 횡포가 점차 제거되면서 각 지방의 세곡을 해운으로 수송하도록 하였다. ▲ [그림 3] 조선 시대의 조운(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그러나 우리나라의 연해안은 다도해로서 항로의 사정이 양호하지 못하였다. 그중에서도 장연의 장산곶(長山串), 태안의 안흥량(安興梁), 강화의 손돌항(孫乭項), 임천의 남당진(南堂津), 영광의 칠산량(七山梁) 등은 항해하기에 험난한 항로였다. 게다가 조선 초기에는 항해기술도 이와 같은 지형 조건을 쉽게 극복할 만큼 뛰어나지 못하여 난파 좌초되는 일이 많았다. 즉 태조 4년(1395년)의 경상도 조선 16척, 태종 3년(1403년)의 경상도 조선 34척, 태종 14년(1414년)의 전라도 조선 66척, 세조 원년(1455년)의 전라도 조선 55척의 침몰 등 큰 사고가 있었다. 이는 국가 재정상의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과 조군의 확보 문제와 아울러 민심에도 영향을 주었다. 조운은 조창의 위치에 따라 몇 개의 해로가 존재하였다. 전라도에는 영광의 법성포(法聖浦), 나주의 영산창(榮山倉), 함열의 덕성창(德成倉)에 조창이 있어 해로를 통해 서울로 운송하였다. 충청도에는 아산의 공진창(貢津倉)과 충주의 가흥창(可興倉)이 있었는데, 공진창에서는 서해를, 가흥창에서는 남한강을 통해 서울로 연결되었다. 북한강 유역에서는 춘천의 소양강창(昭陽江倉)과 원주의 흥원창(興原倉)이 강원도 조세를 운송하였으며, 황해도 강음의 조읍포창(助邑浦倉)은 해로를, 배천의 금곡포창(金谷浦倉)은 내륙 수운을 이용하였다. 국방상의 요지인 함경도와 평안도는 조세를 해당 지역의 군수 물자로 사용하도록 하여 서울로 운송하지 않았으며, 경상도는 남부 지역의 경우 동래부에서 수납하고, 내륙에 인접한 북부 지역의 일부는 충주 가흥창에 조운을 이용하여 세금을 납부하였다. 압록강은 신의주의 목재, 대동강은 평양의 석탄, 금강은 강경의 미곡 등의 수운 통로로 이용되었다. 20세기 초기인 1915년경의 자료를 통해 본 당시 강의 상황이다. ▲ [그림 4] 우리나라의 수운(출처 : 고대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한국 근대 전자역사지도) http://waks.aks.ac.kr/rsh/dir/rdir.aspx?rshID=AKS-2011-EBZ-3105 두만강 두만강은 백두산의 동쪽에서 시작하여 함경북도 북부의 작은 물줄기들을 모아 동북으로 흘러 만주의 간도 지방에서 오는 해란강과 합류하여 동해 쪽으로 들어가는 약 390km의 긴 강으로, 수량은 많으나 강바닥이 거칠어 하구에서 80km 정도인 경원군 근방까지만 소형의 배가 다닐 수 있다. 압록강 압록강은 백두산의 서쪽에서 발원하여 함경남도와 평안북도의 여러 물줄기와 만주 쪽의 여러 물줄기가 합류하여 황해로 들어가는 길이 약 660km로 한반도에서 제일 길다. 하류에는 1,000톤 내외의 기선이 하구에서 안둥(지금의 단둥)을 거쳐 100여 km 상류 창성까지 운행하였다. 모래섬과 암초의 위험은 있지만 작은 배는 혜산진까지 갈 수 있다. 대동강 대동강은 평안남도의 동북쪽에서 출발하여 서남쪽으로 흐르는 대동북강이 평양 동쪽에서 대동남강과 합쳐 평양시가의 동쪽으로 흘러 재령강과 합류하여 폭이 넓어지면서 바다로 흘러간다. 하구에서 겸이포까지는 수천 톤의 기선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50톤 내외의 작은 배들은 평양까지, 그보다 작은 배는 하구에서 약 180km 떨어진 별창(북강) 덕천(남강)까지 운행하고 있다. 한강 한강은 강원도 북부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강원도 남부에서 발원하여 충청북도 동북부에서 여러 물줄기가 남한강과 합류하여 경기도의 중앙을 거쳐 서울의 동남쪽을 돌아 서쪽으로 흐르면서 예성강, 임진강과 합류하여 강화만으로 들어가는 반도 중부의 큰 강이다. 강의 길이는 약 390km로 작은 증기선은 용산까지 다니고, 약 150km 상류 북창까지는 50~60석(섬이라고 표현되며 무게는 150~200kg)을 싣는 배가, 춘천까지는 작은 배가 다녔다. 한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번성한 지역으로는 경강의 용산, 마포, 서강이 있으며, 남한강의 충주, 북한강의 춘천이다. ▲ [지도 1] 중부지역의 수운(출처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한국 근대 전자역사지도) http://waks.aks.ac.kr/rsh/dir/rdir.aspx?rshID=AKS-2011-EBZ-3105 ▲ 마포 선착장 : 마포는 경성의 서남쪽으로 약 4km 떨어진 한강 연안의 포구이다. 철도가 발달할 때까지는 경성을 위한 주요 항구로, 여기까지 배로 운송하여 짐을 운반하였다. 건너편 강가를 왕래하는 나룻배가 다니며, 부근에는 여러 공장이 있다. 낙동강 낙동강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여러 갈래의 물을 합해 경상남북도를 종관하여 남으로 흘러 부산의 서쪽에 이르는 유역 약 430km의 남한 최대의 강이다. 경상남북도 대부분을 권역으로 하고 있으며, 수량이 많을 때는 안동까지 배가 다녔고 평시에도 낙동 이하도 배가 다녔다. 철도가 개통되기 이전 경상도 지역 대부분의 화물 수송은 낙동강 수운에 의존하였다. 낙동강 본류의 중요한 포구들은 하단과 구포, 삼랑진, 수산, 남지, 현풍, 왜관, 낙동, 풍산, 안동 등이었다. 아울러 대구도 낙동강 나루터인 사문진에서 12km 떨어진 경상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수운 수송에 큰 영향을 받았다. 철도가 개통된 이후에도 낙동강 수운은 구포와 하단으로 연결되어 경부선 철도를 통해 전국으로 수송할 수 있었다. ▲ [지도 2] 남부지방의 수운(출처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한국 근대 전자역사지도) http://waks.aks.ac.kr/rsh/dir/rdir.aspx?rshID=AKS-2011-EBZ-3105 기타 금강은 하구에서 약 44km의 강경까지 소형 증기선이 다니고, 작은 배는 하구에서 135km 떨어진 부강까지 운행하였다. 영산강은 하구 목포에서 85km의 방하동까지 운항하였으며, 목포~영산포 간은 소형 증기선이 왕래하였다. 이들 강은 매년 겨울철에는 최장 11월부터 3월까지, 최단 12월부터 2월까지 강물의 결빙으로 운행이 불가하였다. ▲ [지도 3] 금강과 대전의 회덕 금강의 수운은 군산에서 출발하여 부강까지 연결되었으며, 주요 포구로는 웅포와 입포, 강경, 규암리, 공주, 논산 등이 있다. 강경은 수운과 연결된 수송이 많았으며 1902년 소형 증기선이 강경과 군산 간 운항을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과 강경 간의 증기선이 군산보다 앞서 운항하였다. 1912년 기록을 보면 당시 수운으로 강경에서 금강을 통해 석성까지 1시간, 규암리 3시간, 부여까지 3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1927년에는 빠른 배를 투입하여 강경에서 오전 9시와 오후 6시 출항하여 부여까지 소요 시간이 1시간으로 단축되었으며, 운임은 편도 95전(현재 가격 약 9,000원)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강경은 1912년 은진군 김포면(전북 여산군 북일면 일부 편입), 1914년 3월 1일 논산군 강경면으로 개정되었다. 이후 1915년 전북 익산군 망성면 작촌리를 일부 병합하였으며. 1931년 4월 1일 강경읍으로 승격하였다. ▲ [지도 4] 금강의 뱃길과 교통로(출처 : 매일신보 1931. 8. 2.) 당시 전성기 강경은 포구의 하역을 돕는 노동조합원의 수가 만 1명까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강경의 번성을 알 수 있는 것이 법원과 경찰서, 세무서 등이 이곳에 자리 잡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의 수운을 통해 많은 물건을 수송했기 때문에 은행도 번성하였다. 근대기에 한호농공은행지점, 한일은행지점, 삼남식산주식회사, 강경신탁주식회사 등 7개의 금융기관이 있을 정도로 번성하였으며, 역 주변에도 2개의 여관이 있었고 숙박료는 특등 5원, 1등 4원, 3등 3원의 요금을 받았다. 번성했던 강경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철도 개통으로 금강 상류의 강경 상권에 포함되었던 지역이 상권에서 벗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강경은 호남고속도로 노선에 포함되지 않았고, 한때 철마다 생선과 쌀 운반선으로 100척 이상 들어왔던 배도 상류의 토사로 결국 수운이 중지되었다. 영산강은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40km 구간에 선박이 운항하였다. 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까지 올라간 배는 큰 배는 아니었고 조그만 나룻배(江船)였다. 조선 시대 영산포 상류의 수심은 1m 내외였지만 곳곳에 수심이 60cm도 못 미치는 곳이 많았다. 영산포의 상류는 해선이 항행하기는 불가능했고, 나룻배만이 다닐 수 있었다. 바다를 항해하는 범선은 영산포에서 2.4km 상류에 있었던 노항포(路項浦)까지만 항행할 수 있었다. 영산포에서 목포까지는 영산강의 중·하류 지역이다. 이 구역에는 수많은 여울이 산재해 있어 선박이 항해하려면 밀물을 기다려야만 했다.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항해시간은 선박의 종류에 따라 달랐다. 증기선의 경우, 소강에는 4시간 반, 하강에는 3시간, 돛단배의 경우 소강에 18시간, 하강에 12시간이 소요되었다. 철도는 이보다 훨씬 빨라 2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영산강 수운은 호남선 철도 개통 이후에도 철도교통에서 소외된 지역의 교통 수요를 충족시키면서 생명력을 이어갔다. 영산강 유역의 장시망은 일반 군현처럼 군현의 읍치에서 열리는 읍내장을 중심으로 주변 농촌 지역의 소규모 장시를 연결하는 장시망과 영산강 수운을 기초로 한 광역의 장시망의 이중구조로 구성되어 있었다. ▲ 영산강의 수운(출처 : 전남 100주년 사진집 인용) 읍내를 중심으로 한 장시망이 지역 내부의 네트워크라고 한다면, 영산강 수로를 통한 장시망은 영산강 유역을 넘어서서 다른 지역으로 연결하는 지역 간 네트워크였다. 영산강 유역에서 생산된 농업생산물은 읍내 중심의 장시망에서 집산된 후, 영산강 수로의 장시망을 통해 외부로 반출되었다.(참고 1) 이들 강은 매년 겨울철에는 최장 11월부터 3월까지, 최단 12월부터 2월까지는 강물의 결빙으로 운항할 수 없었다. 1920년대 후반, 목포항에 일본으로 갈 쌀을 실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이 쌀들은 영암과 나주 들녘에서 영산강을 통해 운반되었다.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는 1980년대 초반 하구언 건설에 따른 지형과 지물의 변화이다. 1908년 한 달 평균 배편을 이용해 목포에서 영산포를 오간 사람 수는 1,212명이었다. 이 중에서 한국인이 60%였고, 일본인이 40%를 차지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914년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목포~영산포 간 뱃길은 큰 변화를 겪었다. 영산포에서 목포까지 철도 운행시간은 두 시간에 불과해 이용객이 폭증하고 항로 이용은 급감했다. 우리나라 수운은 한반도 깊숙한 곳까지 물길로 연결될 수 있었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교통의 중심은 수운이었다. 이러한 수운의 우월성으로 육상운송에서 수레의 사용에도 제한이 있었다. 이처럼 수운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지만 조선 시대에는 명나라의 해금 정책을 계승하여 대양 항해가 금지되어 국내 연안 항해만이 유지되었다. 근대 교통망으로 철도가 생기기 전까지 우리나라 교통망은 수운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였다. ============================================== 참고 1) 고동환(2011), ‘조선 후기~한말 영산강 수운과 시장’, 도서문화,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pp.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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