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역사 블로그
블로그
전체 21개의 글 (현재 1 페이지 / 5 페이지)
21 | [일본철도] 국철 경영의 변천과 분할 정책의 전개과정(6) | 2020.04.02 |
20 | [일본철도] 국철 경영의 변천과 분할 정책의 전개과정(5) | 2020.03.23 |
19 | [일본철도] 국철 경영의 변천과 분할 정책의 전개과정(4) | 2020.03.16 |
18 | [일본철도] 국철 경영의 변천과 분할 정책의 전개과정(3) | 2020.03.10 |
17 | [일본철도] 국철 경영의 변천과 분할 정책의 전개과정(2) | 2020.03.03 |
철도의 발전 | |
[일본철도] 국철 경영의 변천과 분할 정책의 전개과정(6) | 2020.04.02 |
국철 경영의 변천과 분할 정책의 전개과정(6) 11. 국철 운영난의 외부 요인 - 누가 국철 경영 재건을 방해했는가? 몇 가지의 외부 요인도 국철의 경영 파탄현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는 ① 급격한 시장경쟁의 진전(시장적인 요인), ② 규제정책이 가져온 내부 보조 의존(행정적인 요인), ③ 공공기업체를 둘러싼 일본적인 환경(정치·문화적인 요인)의 3가지가 중요하다. ①의 시장적인 요인은 1960년 후반부터 시작된 일본 교통시스템의 급격한 구조 변화 현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교통의 경쟁적인 현상은 선진제국이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 일본의 경우 경쟁화현상의 시작은 늦었지만 변화의 속도가 빨랐다는 특징이 있다. 일본의 교통시스템은 1980년 초반에는 완전히 경쟁형으로 바뀌어, 1960년~1970년대의 국철 수송의 장래 예측이나 수요 예측은 큰 오차를 발생시켜 이에 기초한 과대한 설비투자계획과 재정 재건계획은 예상을 크게 빗나갔다. 이러한 원인의 하나로 교통시스템의 변화 정도가 컸다는 점과 또한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빨랐다는 것을 들 수 있다. ②의 행정적인 요인은 전후 일본의 운수정책이 전통적인 자연 독점형 규제체계에 의존해서 실시되어 왔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교통산업에 대해서 엄격한 경제적인 규제를 실시해 교통기업에 대해서는 내부 보조에 기초한 운영원칙을 중시한 운수정책이 결과적으로 국철 경영에 대한 역풍으로 작용한 것이다. 내부 보조 중시의 운수정책은 지방 적자선의 버스 전환이나 국철 화물수송의 축소·합리화를 늦추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비채산부문에 대한 공적인 지원조치를 불충분하게 머무르게 하는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이러한 점에서 선진제국의 교통정책이 경쟁의 진전에 수반하여 조기에 내부 보조를 억제하고 기업과 공적 부문간의 책임분담, 비용분담규칙을 명확히 한 것과는 명백하게 대조적이었다. 내부 보조에 기초한 교통기업 경영은 공공교통의 경쟁력을 감소시켰지만, 일본에서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내부 보조에 관용적인 운수정책이 계속되고 있고, 규제 완화가 실시된 현재에도 복지 목적이나 통학 정기운임 등 공공할인 운임에 대해서는 공적인 보조는 거의 실시하고 있지 않다. ③의 정치·문화적 요인은 공공기업체를 둘러싼 일본의 문화·정치적인 풍토의 요인을 들 수 있다. 전후의 국철이 관업뿐만 아니라 독립채산제를 전제로 하는 공공기업체로서 발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정치나 행정은 국철에 여러 가지로 개입해 국철에 대해 기업으로서의 당사자 능력을 빼앗고, 관업이었다면 아마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재정지원과 공적인 보조를 태만하게 하여 국철 재정을 파멸로 이끈 원인을 제공하였다. 국민도 또한 그러한 무책임한 상황을 엄격하게 감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방 적자선의 폐지계획을 포기하게 하거나, 필요한 운임 인상을 인위적으로 억제하려고 하는 정치적인 개입을 오히려 지지하는 측에 서서 국철 경영 개선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방치하는 데 일조하였다. 어려운 문제를 연기시켜 파탄의 직전까지 문제를 방치시킨 현상은 일본의 문화적인 풍토와 깊은 관련이 있다. 종전 직후 점령 하에 있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관업도, 사기업도 아닌 공공기업체라는 경영 형태를 국철에서 도입한 결과 공공기업체가 발휘해야하는 장점 — 공공성과 기업성의 양립 — 이 거의 실현되지 않았고, 반대로 관업에서도, 사기업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최악의 경영 파탄을 가져오고 말았다. 이는 일본의 정치나 행정이 국철에 대해서 여러 가지 불가능한 것을 강요한 결과이며 국철의 당사자 능력을 서서히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어려운 문제를 미루어 무책임한 체제를 장기간에 걸쳐 방치한 현상을 초래하였다. 이 무책임한 체제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국철의 과거 채무 처리를 미루는 현상으로 계속되고 있으며, 이 문제에 대한 국민의 감시 소홀의 상황 또한 계속되고 있다. |
|
첨부파일 :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
댓글 0 ▼
철도의 발전 | |
[일본철도] 국철 경영의 변천과 분할 정책의 전개과정(5) | 2020.03.23 |
국철 경영의 변천과 분할 정책의 전개과정(5) 10. 국철 운영난의 내부 요인 - 무엇을 고쳐야 했는가? 국철은 1872년의 창설 이래 일본 사회의 근대화나 일본 경제의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철이 채산을 달성한 것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단기간에 불과하며, 심각한 경영상황과 천문학적인 수치의 누적 채무를 발생한 채 1987년 국철은 해산되었다. 그 경위와 국철 개혁을 둘러싼 정책적인 논점은 이상에서 살펴보았는데, 여기서는 마지막으로 '국철이 왜 경영난에 빠지게 되어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되었는가?’에 대한 원인과 이유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국철 경영난과 재정난에는 몇 가지 원인과 요인이 지적되고 있는데, 이는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으로 나눌 수 있다(물론 양자간에는 상호 작용이 있다). 그동안 ① 인건비 문제, ② 지방선 문제, ③ 화물수송의 부진, ④ 차입금의 의존 등 4가지가 지적되어 왔다. ① 인건비 문제는 국철 직원의 임금 수준이 사철 등에 비해 높은 것이 원인이 아니었다. 국철 운영난이 진행된 시기의 국철 직원의 평균 연령이 매우 높았다는 것과 수송의 국철 이용 감소로 인해 업무량이 감소했다는 것이 노동생산성 감소의 핵심이었다. <표 1-12>는 국철과 민철 사이에 노동생산성 격차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자료는 양자의 격차가 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철 개혁 후의 격차가 급격하게 축소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② 지방선은 1983년 이전에는 국철 영업거리의 거의 반을 차지하였고, 간선으로서 내부 보조에 의해 유지되어 왔다. 1983년부터 지방선의 폐지가 급격하게 진행되었지만, <표 1-13>의 자료에서 알 수 있듯이 지방선은 영업거리가 장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국철 수송량의 4%를 차지하는 것에 불과한데 국철 적자의 34%의 원인을 차지하고 있다. 정부는 1976년부터 지방선에 대한 공적 보조를 개시했지만, 보조액은 손실액 수준에 크게 못 미쳤다.(참고 12) 지방선의 많은 부분은 원래 적자 발생이 불가피한 노선으로 국철 경영난이 진행된 단계에서 폐지의 자유를 국철에 부여하든가, 아니면 존속을 전제로 하는 경우 적자 보전을 위해 공적 보조가 행해질 필요가 있었다. 1968년 이래 국철이 세 번에 걸쳐 제안한 지방 적자선의 폐지 계획은 정치시스템 주도로 저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적자 보전을 위한 조치를 강구하지 않은 책임은 정부 측에 있었다. ③ 화물수송의 부진은 손실 발생액의 크기에서 보면 가장 큰 적자 요인이었다. 전후의 국철 화물수송은 수송력 부족을 원인으로 하는 대량의 체화 발생 → 대규모 설비투자에 의해 수송력 부족의 경감 → 경쟁시대의 도래(화주의 국철 이용 감소) → 화물수송 근대화의 지체(야드 수송방식의 고집, 파업에 대한 신뢰성 감소) → 국철 화물수송의 붕괴라는 과정을 거쳤다. ④ 1960년대 후반에 국내 화물수송(톤·km 기준)의 30% 이상을 담당하는 해운에 이어 제2의 수송을 분담한 국철 화물수송이 1985년도에는 겨우 5% 수준에 머물렀다. 이 원인은 일본의 산업구조에 있어서 공업구조의 변화(중후하고 장대한 형으로부터 경박 단소로)라는 외부적인 요인과 관계가 있지만 그것 이상으로 국철 자신이 수송서비스의 고품질화의 중요성을 낮게 평가하였고, 또한 매년 반복된 파업에 의한 화물열차의 운전 운휴가 주요 화물운송을 트럭으로의 전환을 가속화시켰다. 국철은 직송 운송방식과 비교하여 품질이 열악(화물수송의 대부분이 도착일시가 불분명)하여 비용이 4배에 가깝게 드는 야드계 수송방식을 장기에 걸쳐서 계속하였다. <표 1-14>의 자료에서 알 수 있듯이 1985년의 국철 화물수송은 개별비를 기초로하여 보면 비용이 수입의 2배에 가깝고, 총원가 기준으로서는 비용이 수입의 4배가 넘는 어려운 현실에 있었다. ▲시모노세키(下?)역의 생선수송 차입금 의존 체질은 국철 문제 최대의 본질적인 부분을 나타내고 있다. 국철의 적자액이 아무리 크더라도 국철의 운영이 '(수입 + 공적 조정) ≥ 지출’의 기본 원칙을 지켰다면 국철 경영이 파탄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국철 경영은 수입과 공적 조성금으로는 충당이 불가능한 손실액을 차입금으로 보전하고, 차입금과 지불 이자를 포함한 결손액을 다음 연도로 다시 이월시키고, 여기에 다음 연도의 영업손실을 가산한 손실액을 다시 차입금으로 충당하는 방식인 이른바 '자전거 조업’을 계속하였다. 원래대로 보자면 1960년~1970년대의 대규모 설비투자계획이나 1970년~1980년의 수차에 걸친 국철 재정 재건계획의 실패가 국철 적자를 증가시켜 장기채무의 누적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지만, 이것만으로 국철 말기에 나타난 상식을 벗어난 채무의 잔고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종업원의 급여(국가 공무원에 준한다)를 차입금에 의존해 지불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말기의 국철은 기업으로서의 당사자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또 당사자 능력을 상실한 국철에 자금제공을 계속한 금융기관 등 융자 측의 행동도 거대한 누적 채무를 가속시키는 원인이었다. 도산의 경우 차입으로 인해 파산에 이르는 사기업과는 달리 공공기업체의 경우 최종적으로 정부가 책임을 지는 채무는 국민 부담에 의해 보전된다는 안전 신화가 돈을 빌리는 측과 빌려준 측 쌍방에 함께 인식되었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를 안전 신화(아무리 예산을 쓰더라도 정부가 최종 책임을 지고 뒷받침한다는 안이한 사고방식)라고 부른다. 차입금에 대한 의존 체질은 이러한 종류의 일본 문화와 관련이 있다. ========== 참고 12) 1970년부터 지방교통선특별교부금이 개시되었는데, 1976년~1986년도의 지방교통선 적자액 총액 규모가 4조 3,750억 엔인데 비해 11년간 교부된 보조금 총액은 8,576억 엔으로, 적자액의 19.6%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
|
첨부파일 :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
댓글 0 ▼
철도의 발전 | |
[일본철도] 국철 경영의 변천과 분할 정책의 전개과정(4) | 2020.03.16 |
국철 경영의 변천과 분할 정책의 전개과정(4) 8. JR체제의 정착과 혼슈(本州) 3개 회사의 완전 민영화 - 1990년대에서 21세기로 새로운 체제로 출범한 1987년의 JR그룹 7개 회사의 경영성적 합계는 흑자로 좋은 출발을 보였다. JR그룹 전체의 흑자기조는 그 후에도 계속되어 2004년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당초 흑자계상은 국철 개혁정책이 만든 공정대로의 결과라는 평가도 있지만 국철시대 말기에 당시 연간 2조 엔이 넘었던 거액의 영업손실이 해소된 성과는 대단한 것이다. 자립 채산을 운영원칙으로 하는 혼슈(本州) 3개 회사가 첫해부터 흑자경영을 실현해 그 후에도 건전 경영이 계속되었다는 것은 국철 개혁의 성공을 인상 깊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혼슈 3사의 경우 민영화 전에는 매년 반복되어온 운임 인상이, 민영화 후에는 18년에 걸쳐 실시되지 않았으며(소비세 관련의 운임 개정을 제외) 지금까지 좋은 경영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3개 섬 회사(北海道, 四國, 九州)의 경우 새로운 체제의 발족 직후 JR홋카이도가 경영 적자가 되는 등 불안정한 현상을 보였지만, 경영안정기금 운용 수익의 투입으로 인해 영업손실을 보전하여 경상이익을 나타내는 운영방식이 점차 정착되었다. 대량 고밀도 운송시장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3개 섬 회사의 경우 일본 경제의 버블현상이 붕괴된 1990년대에 흑자경영 달성이 곤란한 사태에 직면하게 되어 1996년에 운임 개정을 실시하였다(운임 인상률은 각 회사마다 다르다). JR화물의 경영은 그룹 가운데에서도 가장 어려웠는데 회피가능비용 원칙이라는 운영원칙에도 불구하고, 거품경제가 붕괴된 1990년에는 영업수익이 감소하였고, 흑자경영 달성은 어렵게 되었다.(주석 10) 국철 분할 직후라는 얄궂은 운명이었지만 1988년 봄 세이칸(靑函)터널해협선과 세토오하시(瀨戶大橋)가 완성되어 일본열도는 철도로 상호 연결되었다.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를 연결하는 JR그룹의 상호 직통체계가 완성된 것이다. 또한 다음해인 1989년에는 7년간에 걸쳐 추진되어 온 특정지방교통선의 폐지가 마무리되었다. 폐지된 83개 노선 3,158km의 지방선 중 38개 노선은 제3섹터사업 등으로 양도되어 지방철도로서 다시 출발하였다. JR 발족 직후부터 표면화된 철도정책 초점의 하나는 신칸센 리스방식을 둘러싼 문제였다. 혼슈 3개 회사는 신칸센 자산을 보유하고 있지 않고 감가상각비의 비계상으로 기업 내부에 자산 축적이 불가능한 점을 들어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에 정부 측은 신칸센 매각 수입을 이용한 국철 채무를 상환하거나 철도 정비에 저리로 융자하는 기금제도를 만드는 것을 기획하였다. 1991년에는 신칸센 4노선(東海, 山陽, 東北, 上越)이 혼슈 3개 회사에 매각되어 그 매각 수입 9.2조 엔을 이용, 철도정비기금이 설립되었다.(주석 11) 국철시대에 규제로 제한되었던 부대사업의 전개와 그룹전개 등 사철업과 같은 다각적인 사업 전개가 JR 각 회사에 의해 급속하게 전개된 것은 국철 민영화가 가져온 큰 변화였다. JR 각 회사는 주식 공개를 통한 민영화(민유화)가 실시되기 이전에 경영면에서 사기업화에 적극적으로 변화하였다. 현재 여행업, 호텔업, 역 빌딩업, 터미널을 이용한 대규모의 소매업, 부동산업, 정보산업 등 여러 분야에 진출한 JR여객회사의 그룹 회사 수는 2004년을 기준으로 JR히가시니혼의 경우 100개 회사 이상, JR니시니혼의 경우 60개 이상, JR도카이의 경우 약 30개 회사의 규모까지 확대되어 있다. 그런데 JR 본사 3개 회사가 소유 면에서 민영화(민유화)를 개시한 것은 JR히가시니혼의 주식이 상장된 1993년이다. 이 회사의 공개주식 매출 가격이 38만 엔이었는데, 시장에서는 60만 엔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1996년에는 JR니시니혼의 주식 상장이, 1997년에는 JR도카이의 주식 상장이 각각 실시되었다. 그리고 JR히가시니혼의 완전 민영화는 2002년 6월에, JR니시니혼의 완전 민영화는 3월에 달성되었다. 9. 부의 유산으로부터의 탈피와 규제 완화의 시대 도래 - 2000년 이후 JR여객회사의 순조로운 경영이 국철 개혁의 밝은 부분이라면 국철의 과거 채무와 잉여인원 문제는 어두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채무는 거액의 차입금에서 발생한 것으로, 경제 버블기에 구 국철 용지를 고가로 매각하는 것을 정부가 제한하여(토지 가격의 상승을 더욱 유도할 가능성이 있었음) 채무 삭감의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뿐만 아니라 철도정비기금도 정비신칸센 등 대규모 투자에 대한 자금융자로인해 국철 채무의 감액은 별로 진척되지 않았다. 1997년 채무 잔고가 28조 1,000억 엔에 달하자 정부는 JR회사 - JR여객 7개사 - 에 대하여 국철 과거 채무 3,600억 엔의 추가 부담을 요구하는 방침을 결정했다. 이 추가 부담 안을 둘러싼 JR 각사와 정부가 대립하여 1999년 JR도카이·JR히가시니혼이 반액으로 압축된 추가 부담을 받아들이기까지 1년 이상이 소요되었다. 국철개혁과 관련한 여러 가지 정책 국면 중에서 가장 해결이 늦은 것이 바로 국철의 과거 채무 문제였다. 국철시대에 심각하게 대립한 노사분쟁이나 노노(노동조합간)분쟁이 함께 관련된 잉여인원 문제는 조합간의 이데올로기의 대립 문제가 많이 포함되어 있어 재고용에 관한 판단을 사법부의 판단에 맡기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분쟁의 대부분은 JR 측의 승소로 결말이 났으며, 일본 사회에 있어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후퇴현상과 분쟁 당사자들의 고령화로 인해 문제는 많이 잠잠해지고 있다. 이상과 같이 일본 정부가 실시한 전후 최대급의 개혁정책이라고 불리는 국철 개혁은 ① 관료적 경영으로부터의 해방, ② 정치적 개입으로부터의 해방, ③ 과거 채무로부터의 해방을 내걸고 국철 해체라는 가장 강력한 정책수단을 사용하며 실시되었다. 또한 이는 JR그룹의 흑자 전환이라는 큰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1990년대 이후 여러 외국의 철도정책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JR여객회사의 운영을 상하 분리방식이 아닌 상하 일체방식으로 추진한 점에 큰 특색이 있다. 상하 일체방식의 선택은 일본 철도 여객수송이 대량 고밀도 수송의 환경에 있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다만 상하 일체적 운영 하에서 독립채산을 달성하는 것이 곤란한 3개 섬 회사(北海道, 四國, 九州)나 JR화물회사의 경우는 채산 달성을 위해서 독자의 규칙이 적용되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21세기를 맞이하여 일본의 교통정책은 본격적으로 규제 완화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2000년 3월 철도여객사업에 관한 진입 규제의 완화(면허제로부터 허가제), 운임요금 규제의 완화(허가제로부터 상한 인가제와 사전 신고제), 퇴출 규제의 완화(허가제로부터 사전 신고제로)가 실시되었고, 철도 화물사업에 대해서도 2003년 4월 거의 같은 내용의 규제 완화가 실시되었다. 수급조정 규제라고 불리는 수량 규제형(자연 독점형) 진입 규제의 철폐는 교통산업 전체에 걸쳐 실시되었으며, 운임과 요금 및 퇴출 규제도 이전에 비교해서 대폭 완화되었다. 규제 완화에 의해 JR여객회사는 국내 항공 수송이나 고속버스 수송과 유연한 경쟁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대도시권의 통근수송에 관해서는 병행하여 운영되는 사철노선과의 수요 획득 경쟁이 격화되어 사철기업의 승객감소를 유발하는 등 도시교통정책상의 새로운 문제를 가져왔다. ▲다카야마(高山)와 나고야(名古屋)를 연결하는 JR도카이(東海) 특급열차, 시라가와구치(白川口)역 주석) 10. JR화물은 1987~1992년도의 5년에 걸쳐 흑자경영을 계속하였지만, 1993~1997년에는 적자를 기록하였다. 그 후 경비절감 효과가 발휘되어 2000년도 이후에는 흑자를 계속 기록하고 있다 11. 철도정비기금은 1997년에 선박정비공단과 합병하여 ‘운수시설정비사업단’으로 조직을 개편하였고, 더욱이 2003년에는 일본철도건설공단과 합병하여 독립행정법인인 ‘철도건설 시설정비지원기구’로 다시 개편되었다. 즉, 국철청산사업단도 현재까지 국철청산사업본부로서 이 기구에 속하여 있다. |
|
첨부파일 :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
댓글 0 ▼
철도의 발전 | |
[일본철도] 국철 경영의 변천과 분할 정책의 전개과정(3) | 2020.03.10 |
국철 경영의 변천과 분할 정책의 전개과정(3) 6. 경영 파탄과 국철 민영화의 결단 - 1980년대 1980년 들어 국철 경영이 파탄에 가깝다는 것은 일반인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1980년의 영업손실은 1조 엔대를 넘었고, 같은 해 정부는 장기채무에 관한 두 번째의 보류(2조 8,220억 엔)조치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1981년에는 장기채무 잔고가 단기간에 10조 엔에 이르게 되었다. 그 후 1985년의 영업손실은 2조 엔대로, 장기채무 잔고는 18조 엔 — 연기분을 합하면 23.5조 엔 — 을 넘게 되어, 말하자면 일종의 파국적인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1982년 5월 임시행정조사회 제4부회는 국철의 분할 민영화를 제언하고 9월에 정부가 국철 재건에 관한 비상사태를 선언하는 등 국철 개혁을 둘러싼 움직임이 급속하게 분주해졌다. 당초 국철 분할 민영화에 대해서 신중한 자세를 취하였던 언론은 1982년부터 국철 직원의 도덕적 해이를 지탄하는 캠페인 기사를 연일 게재하였다. 이러한 언론의 기사는 체제 옹호파의 국철 직원들에게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철 문제의 심각한 상황에 대하여 사회의 관심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1981년에는 특정지방교통선(지방 적자선)의 폐지계획이 확정되었고(실제로는 1983년부터), 1983년에는 경영 부진이 한도에 다다른 야드계 화물수송의 폐지를 예정보다 앞당겨 실시하는 등 국철 자신에 의한 근대화를 분주하게 진행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경영 파탄이 가속되는 재정 상황을 막는 효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1983년 8월 국철재건감리위원회는 정부와 국철 쌍방에 대하여 조직의 재편, 신규 설비투자의 중지, 지역 격차 운임의 도입 등을 요구하는 긴급 제언을 하였다. 1984년 5월 국철 당국은 종업원 35만 명 체제를 목표로 한 국철 경영 개선계획(1981년 개시)의 목표를 32만 명으로 수정하고, 수지 예측을 비관적으로(당초보다 적은 규모) 수정하는 등 계획의 수정안을 운수대신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재건감리위원회는 이것을 경영 개선계획의 사실상의 좌절로 평가하고, 이제는 경영형태의 변경을 수반하지 않는 국철 개혁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그리고 8월에 국철 분할 민영화의 방침을 명확히 제시한 제2차 긴급 제언을 하였으며, 10월에는 운수성이 이것을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국철은 1986년 1월 민영·비분할을 내용으로 하는 ‘경영개혁을 위한 기본방침’을 재건감리위원회에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현재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되어 재건감리위원회와 운수성뿐만 아니라 국민이나 언론의 비판을 받는 결과가 되었다. 1984년에는 그동안의 국철 여객운임의 전국 일률운임제도가 폐지되고 간선, 지방교통선, 대도시권(2종류)으로 나누어진 운임제도가 실시되었다. 현장에서는 영업 개선이나 경비절감 노력이 계속되어 분할 민영화 직전 국철의 영업성적은 그 이전에 비해 개선되었으며, 1986년의 여객 수입은 1980년에 비해 35% 증가하였다. 수요동향에 맞게 수송체제의 정비도 급속하게 진전되어 여객열차는 1982년 11월 열차 다이아 개정 전의 18,607회가 1986년 11월 개정 시점 때 21,651회로 16% 이상 증가하였고, 화물열차는 같은 시기에 3,744회에서 846회로 5분의 1 가까이 감소하였다. 이처럼 ‘민영화’의 의미가 현장에 서서히 침투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984년 이후의 이자채무비용은 1조 엔을 넘었고, 국철이 보유하고 있는 거액의 장기차입금은 최후까지 국철의 경영수지와 재정을 파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985년도의 영업손실은 2조 엔, 장기채무 잔고는 18.2조 엔, 연기분을 합하면 누적 장기채무는 실제로 23.5조 엔을 각각 넘어 철도 적자는 어느 항목을 보더라도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늘었으며, 1986년도에는 25.4조 엔이 되었다. 1985년 6월 분할 민영화에 소극적이었던 국철 총재가 경질되고, 개혁에 적극적인 새로운 총재가 취임하였다. 이는 당시 나카소네(中曾根) 내각의 국철 개혁에 대한 리더십이 발휘되는 모습이었다. 7월에는 재건감리위원회의 최종 답신이 제출되었고 개혁에 적극적인 새로운 총재의 국철 내부에 ‘재건실시추진본부’가 설치되었다. 최종 답신에 의해 분할 민영화의 실현을 향한 기초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듬해인 1986년에는 그룹의 편성과 새로운 회사조직체제가 결정되었고, 11월에는 국철 개혁 관련 8개 법안이 가결·성립되었다. 결국 국철은 1987년 3월 31일을 기해 폐지되었다. 7. JR체제의 출발과 신체제의 지지기구 - 1986년 체제 1987년 4월 JR그룹(여객 6개사, 화물 1개사)이 출범하였다. 구 국철의 여객수송부문은 JR홋카이도(北海道), JR히가시니혼(東日本), JR도카이(東海), JR니시니혼(西日本), JR시코쿠(四國), JR규슈(九州)의 6개 회사로 분할되었고, 화물수송부문은 일본화물철도주식회사(JR화물)가 전국을 하나의 체제로 운영하게 되었다. 또한 신칸센철도보유기구가 신칸센 4선의 시설을 보유하고 혼슈(本州) 3개사(JR히가시니혼, JR도카이, JR니시니혼)에 임대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JR화물은 여객 6개 회사가 보유하는 노선을 임대하여 화물수송을 수행하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쌍방 모두 상하분리방식의 도입이었다. 새로운 체제 하에서 발족한 것은 JR그룹 7개사 등 전부 11개 회사였는데, 이와는 별도로 국철청산사업단이 국철 과거 채무의 처리(국철 용지의 매각, 주식매각 등)와 구 국철 잉여인원의 재취업 등의 문제를 취급하는 조직으로 설립되었다. 신체제의 출범과 함께 철도사업에 적용된 법제도 새롭게 되어 국철 관련 일련의 법률은 폐지되었다. 1986년 제정된 철도사업법은 1919년 제정된 지방철도법(국철 이외의 철도사업에 적용)에 기초한 신법이며, 이것이 JR, 사철, 공영 등의 모든 철도사업에 적용되었다. 이 법은 철도사업을 제1종~제3종으로 구분하고 철도의 상하분리방식에 대응하는 법제도를 각각 규정하고 있다. 즉, 도로의 부설을 원칙으로 하며 궤도사업에 적용된 궤도법(1921년 제정)은 철도사업으로 통합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다. JR그룹 7개 회사에 대한 운영 원칙은 혼슈(本州) 3개사의 자립채산 원칙, 3개 섬 회사(北海道, 四國, 九州)의 수지균형 원칙, JR화물의 회피가능비용 원칙의 3종류로 나누어졌다. 수송시장 환경이 좋지 않은 3개의 섬 회사에 대해서는 1.3조 엔의 경영안정 기금이 준비되어 기금의 운용 이익에 의해 3개 회사의 영업손실을 보전하고 수지균형을 실현하는 원칙이 도입되었다. JR화물의 회피가능비용 원칙은, 여객 6개사에 지불하는 선로 사용료는 회피가능비용 규칙이 설정되어 영업 수입으로 선로 사용료와 영업비를 조달하면 된다는 등 JR그룹 7개 회사 중 부담이 가장 적은(선로 사용료를 가능하면 싸게 하여 운영 부담을 줄임) 운영 원칙을 나타내고 있다. 국철 분할 민영화에 수반하여 새로운 체제로의 이행이 가져온 채무액 합계는 결국 37.1조 엔으로, 그 내역을 보면 ① 국철 장기채무 25.4조 엔, ② 철도건설공단·본사공단(本四公團) 채무 5.1억 엔(조에쓰(上越)신칸센 건설비 1.8조 엔, 세이칸(靑函)터널 건설비 1.1조 엔, 세토오하시(瀨戶大橋) 건설비 부담 0.6조 엔 등), ③ 경영안정기금 1.3조 엔, ④ 고용대책비 0.3조 엔, ⑤ 연금 부담 등 5.0조 엔이다. 또한 37.1조 엔의 분담책임은 ① 청산사업단 할당분 25.5조 엔(국철 용지의 매각 수입 7.7조 엔, JR주식 매각 수입 1.2조 엔, 신칸센보유기구에 대한 채권 2.9조 엔, 국민 부담 13.8조 엔), ② 신칸센 보유기구의 자산 승계분 5.7조 엔(그 중 2.9조 엔은 청산사업단이 지불), ③ JR혼슈(本州) 3개 회사의 분담분 5.9조 엔과 같이 3개로 분할되었다. |
|
첨부파일 :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
댓글 0 ▼
철도의 발전 | |
[일본철도] 국철 경영의 변천과 분할 정책의 전개과정(2) | 2020.03.03 |
국철 경영의 변천과 분할 정책의 전개과정(2) 4. 국철 이용의 감소현황과 경영 개선계획의 실패 - 1970년대 전반 1970년대에 들어 일본의 교통은 본격적인 경쟁시대를 맞이하였다. 더욱이 두 차례에(1973년, 1978년) 걸친 석유 위기가 일본을 직격해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이 끝나는 등 국철 경영을 둘러싼 상황은 크게 변화하였다. 1971년도에 국철 화물수송량은 감소 기조로 들어섰고, 다음해인 1972년의 국철 경영은 감가상각 이전에 적자라는 구조적인 적자경영에 빠지게 되었다. 1975년에는 산요(山陽)신칸센이 하카타(博多)까지의 전 구간을 개통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철 경영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여객수송량은 전후 처음으로 축소기조로 전환되었다. 앞에서 서술한 1969년에 시작한 국철 재정 재건계획은 당초의 예상을 넘어선 경영 악화로 수정하게 되어 1973년 제2차 계획으로서 새롭게 시작되었다. 1975년에는 다시 같은 이유로 제3차 계획으로 수정되기도 했다. 그 3차 계획도 2년이 지난 1977년에는 5만 명의 직원 감소를 목표로 한 ‘국철 경영 개선계획’으로 변경되는 등 국철 경영의 병적 증상은 서서히 급성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표 1-9>에 나타난 바와 같이 1970년대의 국철 영업손실 1,549억 엔이 1975년에 9,235억 엔으로 급증한 현상으로 알 수 있다. 국철 경영과 국철 재정의 급격한 악화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철을 둘러싼 내외의 상황은 문제해결의 방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국철노동조합의 대표적인 존재인 국철노동조합과 동력차노동조합의 노동운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길을 걸었고, 대규모 파업은 연중행사처럼 반복되었다. 1974년 4월 파업은 6일간에 걸쳐 계속되어 국철 수송의 신뢰성을 크게 손상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의 국철 직원의 연령 구성은 40세 이상이 60%를 점하는 고령화가 되어(참고 1), 국철 이용의 감소에 의한 노동생산성의 저하와 높은 수준의 임금지불액이 국철 경영의 큰 압박요인이 되었다. <표 1-10>은 국철·JR의 영업거리와 종업원 수의 추이를 나타낸 것인데, 이 통계는 이 시기에 지방 적자선의 폐지나 종업원의 감소가 좀처럼 진행되고 있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다. 국철이 계속해서 주장한 지방 적자선의 버스 전환방침은 1972년 정부가 지방 적자선의 폐지에 대해 ‘지방의 동의’ 가 필요하다는 조건을 붙임으로 인해 사실상 보류되었다. 지방선의 승객 감소가 현저했던 이 시기에 정치 개입에 의해 지방 적자선의 버스 전환정책의 추진이 쉽지 않았다. 정부는 더욱이 석유 위기 후의 높은 물가상승 - ‘광란물가’라고 불리고 있다 - 에 대한 대항수단으로 국철 운임에 대하여 공공요금 억제책을 더욱 강화하여 여객운임은 1969년부터 1974년까지, 화물운임은 1966년부터 1974년까지 장기에 걸쳐 그 인상이 동결되었다. 운임 인상이 가장 필요한 인플레이션기에 운임 인상이 불가능하게 되어 앞에서 언급한 영업손실의 급증현상을 초래하였다. 1970년대 전반은 도래된 경쟁시대에 대응하여 국철 운영이나 국철정책을 크게 변화시켜야 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 큰 전환점의 시기를 국철 자신이나 국철정책 관계자가 충분하게 자각하지 않았던 것이 후에 국철 해체로 연결되었다. 이 시기의 국철문제를 포함한 정치나 학회의 논의의 중심 테마는 ‘종합교통체계론’이었다. 국철의 수요를 재전환시키기 위해서 관념적인 수요조정론(모달 시프트론)이 논의의 주가 되어, 국철 적자를 줄이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논의는 거의 없었다. 국철정책을 둘러싼 당시의 논의와 현실 - 경영난의 진행 - 과의 큰 격차는 공공기업체라는 경영형태의 본질을 숨기는 수단으로서의 임금 문제, 지방 적자선 문제, 운임 억제정책에 대한 보조정책의 도입 등 국철 경영난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이라는 어려운 문제가 모두 연기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5. 국철 경영난의 가중과 기업조직의 붕괴 - 1970년대 후반 1970년대 후반 들어 국철 문제 - 운영난, 재정난 - 는 심각한 상태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교통은 본격적인 경쟁시대에 돌입하였고 여러 차례에 걸친 국철 재정 재건계획은 계속하여 파탄하였다(그때 계획을 부득이하게 수정하게 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하였다). 공공요금 억제책의 반동으로 1974년 이후 국철 운임은 거의 매년인상되었지만, 운임 인상이 수입 증가로 연결되는 시대는 이미 과거의 것이 되고 말았다. 이에 1976년에 실시된 여객·화물 운임의 50%를 넘는 운임 인상은 큰 수입 증가효과를 가져오지 못하였고 오히려 여객이나 화물의 국철 이용을 감소시키고 말았다. 이시기의 국철 경영 적자는 운임 인상의 효과로 인해 표면적으로는 소강상태에 머물렀지만, 국철의 장기채무 잔고는 계속 증가하였다. 1970년대 후반 5조 엔 전후였던 장기 채무 잔고는 1979년에 10조 엔을 넘어버려 국철 경영을 근본부터 무너뜨리는 징조가 보이기 시작하였다(<표 1-9> 참조). 1974년의 제1차 석유 위기를 계기로 일본의 교통은 크게 변하였지만, 교통 경쟁시대의 본격적인 도래가 사회에 느껴지게 된 것은 1970년대 후반 이후였다. 예를 들면 석유 위기를 계기로 국철 여객수송량은 1975년부터 연속해서 8년간에 걸쳐 축소기조를 유지하게 되는데, 같은 시기에 자가용차의 수송실적은 반대로 계속 증가하였다. 1975년의 국철 파업은 파업권 획득을 둘러싸고 실시된 사상 최장의 8일간에 걸친 노동쟁의였으나, 화물열차의 전면 운행정지로 인해 국민생활에 대한 영향은 크지 않았다. 이는 이미 트럭 수송이 국민의 소비생활을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를 내건 파업을 상투적으로 수반한 국철 노동운동은 투쟁방법에서 근본적인 수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70년대 후반은 국철 문제를 둘러싼 각종 움직임이 표면화되었다. 국철은 1975년 국철의 현상을 호소하는 - 대폭적인 운임 인상에 대해 국민들의 이해를 구하는 - 광고를 주요 신문에 게재하였다. 그리고 정부의 국철정책도 시기는 늦었지만 경쟁원리나 구체적인 시책을 중시하게 되었다. 경영 부진이 계속되고 화물수송에 관해서도 정부는 드디어 국철 화물수송의 패배를 인정, 1976년부터 화물수송의 대규모 축소·합리화를 진행시키는 방침으로 정책을 전환하였다. 1976년 정부는 3조 엔이 넘는 이월 결손금 가운데 2조 5,404억 엔분을 특별계정으로 넘기고 장기채무의 지불을 연기하였다. 1977년대 말에는 국철운임법 개정안이 가결되었다. 이로 인해 국철 운임은 법정제 - 개정에는 국회의 의결을 요한다 - 로부터 사철 운임에 준하는 인가제로 변경되었고 국철 운임 개정에 대한 정치 개입의 여지를 축소시켰다. 1979년에는 지방 적자선 약 5,000km를 버스로 전환하기 위한 논의가 정부에 의해 개시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의 영향을 받은 국철은 1977년 ‘국철 경영 개선계획’을 정하고 1980년까지 종업원 5만 명을 감축시켜 35만 명 체제를 실시하고, 화물수송의 축소·합리화를 진행함과 동시에 화물수송에 있어서 등급제 운임의 철폐와 고속직행 수송으로의 전환 등을 꾀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공사비 부담금 등 국철에 대한 공적 조성도 1976년부터 소폭으로 증액되었으나, 적자의 감액에는 ‘언 발에 오줌누기’라는 아주 적은 효과밖에 가져오지 못하였다. =========== 참고 1. 1974년에는 국철 직원의 60%가 40세 이상, 45세 이상은 44%, 50세 이상은 16%를 점하였다. |
|
첨부파일 :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
댓글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