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역사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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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경영 성적(4) | 2021.09.13 |
11 | 경영 성적(3) | 2021.09.06 |
10 | 경영 성적(2) | 2021.08.30 |
9 | 경영 성적(1) | 2021.08.23 |
8 | 제2차 총독부 직영(제2기)(1936년~종전) | 2021.08.09 |
국유철도의 경영 | |
경영 성적(4) | 2021.09.13 |
경영 성적(4) 제5절 조선철도는 기업으로서의 경영이 가능했는가 기업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적정한 감가상각과 차입자본에 대한 과실 배부가 필요하다. 감가상각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하기로 하고, 먼저 차입자본에 대한 금리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1910년도에 총독부가 설립되면서 기존의 투자는 일반 회계가 부담하기로 하였다. 즉, 속성공사로 개통된 경부·경인선의 매수비와 경의·마산 두 노선의 공사는 총독부에서 부담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4개 노선은 1911년도 이후 나머지 건설공사와 개량공사, 매년 발생하는 수해의 개량 복구공사 등이 이어지면서 그 원형을 알 수 없을 만큼 완전한 이중 투자가 되었다. 이러한 경위를 감안할 때 조선철도의 투자액은 1911년도 이후부터 살펴보는 것이 적당하리라 여겨진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조선철도의 자본을 살펴본다면 총독부 지출액은 차입자본으로, 보충비의 누계액은 자기자본으로 처리하게 된다. 총독부 지출액(차입자본)에 대한 금리와 수지 차익 금리 이율은 같은 업종인 일본 국유철도가 차입자본에 대하여 지불하고 있는 이자 및 채무 취급제비용의 비율을 채택하는 것이 상식적이라고 보고, [표2-16]과 같이 1935년도까지는 4.83%, 1936년도 이후에는 4.03%를 적용하였다. 적용된 이율로 총독부 지출액에 대한 매년도 금리를 계산하여 수지 차익액(1925년도부터 1931년도까지는 만주철도 납부금을 포함)과 비교하면 [표 2-17]과 같다. 즉, 다이쇼(1912~1926)시대에는 금리를 지불하면 미미한 금액이 남았으며, 1930~1932년도에는 불황의 여파로 4,000,000엔 정도의 적자마저 생겼다. 그러나 1934년도 이후 잉여금이 계속 발생하여 1943년도의 잉여금은 누계 166,000,000엔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점차 상각 전 이익이 흑자로 전환된 것은 1934년도 이후였다. [표2-17] 총독부 지출액(차입자본)에 대한 금리와 수지 차익 등의 비교(단위: 천엔, %) 감가상각 철도는 보존비로 레일, 침목, 도상 등의 시설을 상황에 따라 교체하고 차량 수선비로 차량의 정기수리를 실시하였기 때문에 기타 공작물 등 시설 노화에 따른 교체를 제외한 것들은 수선비로 충분히 충당할 수 있었다. 또한 소액의 개량, 개조, 확장 공사는 보충비를 사용하여 수시로 실시하였다. 따라서 감가상각에 의한 재생 자금의 내부 유보 필요 범위는 비교적 작다. 또한 건설 개량공사 가운데 노화로 인한 개량, 개조, 확장 공사가 얼마나 포함되어 있는가를 알아본 후, 이것이 자기자금(상각 전 이익액)의 범위 내라면 감가상각을 실시한 것과 비슷한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에 근거하여 건설 개량공사 가운데 자기자금으로 실시해야 하는 것은 1937년도 이후 개량비(1936년도 이전에는 개량공사의 공사별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서 추출하였다. 개량공사 중 자기자금으로 실시해야 하는 것 개량비 가운데 개량·교체공사라고 여겨지는 것을 정리 과목에 의해서 추출하면 1927년도부터 1943년도까지의 결산액은, 선로개량비 42,769천엔 교량개량 23,912천엔 정거장설비개량 27,272천엔 매수선개량 15,265천엔 -------------- 계 109,218천엔 이 되며, 이는 같은 기간의 개량비 결산액 663,354천 엔의 16.5%에 해당한다. 이 밖에도 차량비 가운데 차량 개조(금액은 소액으로 무시해도 큰 문제는 없다)나 폐차 보충을 위한 신규 차량 비용을 계상해야 하는데, 같은 기간 중에 보충된 차량이 없었다. 앞에서 기술한 개량·교체공사의 1년 평균액은 15,603천 엔이었다. 한편 1937년도부터 1943년도까지 7년간의 수선비는, 보존비 138,058천엔 차량수선비 79,923천엔 -------------- 계 217,979천엔 으로, 1년에 평균 31,140천 엔이었다. 앞에서 기술한 개량공사비는 이 수선비의 50%에 상당한다. 참고로 일본 국철에서 수선비에 대한 감가상각비의 비율은 71%~77%이며, 앞에서 기술한 50%에 차량의 폐차 보충분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다지 큰 차이는 없다고 추정된다. 1937~1943년도의 영업 실적을 고려할 때 훌륭한 기업으로 성립 1937년도부터 1943년도까지의 상각 전 이익액은 [표 2-17]에 의하면 149,498천 엔, 1년 평균 21,357천 엔이며, 1941년도의 관동군 특별대연습에 의한 손실액을 수정할 경우 25,000천 엔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일본 국철 수준의 감각상각을 실시하여 수선비에서 환산하면 1년에 23,000천 엔(31,140천 엔 × 0.74)이 된다. 위와 같은 점을 감안한다면 1937년도부터 1943년도까지의 영업 성적은 기업으로 성립할 만한 성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 1911년도부터 1936년도까지의 개량비 합계는 94,115천 엔으로, 이 16.5%가 자기자금으로 실시되어야 한다고 보았을 때 그 금액은 15,529천 엔이며, 17호표에 의하면 1936년도의 자기자금은 16,682천 엔이므로 상각 부족은 없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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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경영 | |
경영 성적(3) | 2021.09.06 |
경영 성적(3) 제4절 총독부 재정과 조선철도의 수지 차익 조선철도 영업 수지의 차익과 만주철도 납부금(만주철도에 위탁경영 기간 중의 납부금과 위탁 해제에 수반한 종업원의 퇴직수당 명목의 납부금)은 총독부 특별 회계의 경상부 세입이 되며, 이 자금으로 총독부 회계의 부담으로 발행한 공채와 차입금의 이자 및 기타 행정 비용을 충당했다. 1910년 조선총독부 개설 이래(조선철도의 회계는 1911년도부터) 1943년도까지 조선철도가 총독부 회계에 납부한 금액은 [표 2-12]와 같이 총 636,477,338엔이었다. [표2-12] 수지 차익과 만주철도 납부금(단위: 엔) 한편 총독부가 일반 회계(이후 국채정리기금 특별회계)에 공채 이자 및 채무 취급 제반 경비로 이월한 금액은 [표 2-13]에 나타난 바와 같이 1911년도부터 1943년도까지 총 539,042,542엔이므로, 조선철도가 벌어들인 수익으로 총독부 전체를 위하여 발행한 공채의 이자를 불입한 결과 100,000,000엔에 가까운 잉여금이 발생하였다. 물론 초기에는 철도 관련 공채의 지불에도 급급할 정도였으나, 1934년도 이후 대폭으로 증가한 수지 차액 덕분에 1941년도에는 이를 완전히 보충하고, 1942년도 이후부터는 매년 많은 이익을 남겼다. [표2-13] 조선총독부 특별회계 공채 및 차입금 이자, 공채 제비용(단위: 엔) 철도 관련 공채 이자와 이자 지불 후의 잉여금 조선철도 관련 공채 발행액은 매년 총독부에 의해서 통지된 공채 지불액(회계 참고서, 철도 상황에 기재, [표 2-15])를 근거로 하고, 그 이율은 관련 자료가 없으므로 일본 국철의 차입자본과 이자 및 채무 취급 제비용의 비율 [표2-16]을 참고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철도와 관련한 공채 이자 등을 계산하고, 연도별로 수지 차익금 등을 비교하면 [표 2-14]와 같다. 즉, 초기에는 수익금이 이자 등에 비해 적었던 연도도 2~3차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총독부에 피해를 입히지 않았으며, 1935년도 이후에는 총독부 재정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주) 1. 조선총독부의 공채, 일본 국철 공채 모두 국채정리기금 특별회계에서 발행하며, 기타를 취급하므로 발행 조건에는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2. 조선총독부와 관련된 목적별 발행 현재액이 쇼와재정사(昭和財政史) 제16권(대장성재정사실편)에 게재되어 있는데, 자료에 의하면 1943년 3월 말 기준으로 건설 개량을 위해 사용된 비용은 1,771,588,000엔, 총독부 총액 2,394,700,000엔이다. 그러나 건설 개량비는 1911년도부터 1942년도까지의 결산 누계액이 1,112,792,000엔으로 큰 차이가 나며, 지불 이자액 38,954,000엔을 보더라도 지나치게 금액이 크기 때문에 차환 발행을 포함한 수치일 가능성도 있어 채택하지 않았다. [표2-14] 조선철도의 총독부 납부액과 공채 이자 등(단위: 천엔, %) 비고) 1917년도는 1917년도분 만주철도 납부금이 1918년도에 납부되었기 때문에 부족액이 발생했다. [표2-15] 조선철도 관계 공표 지불액(단위: 엔) 비고) 1942년도 누계가 불분명하여 1943년도 말 누계에서 1941년도 말 누계를 뺀 금액을 투자액에 근거하여 1942년도와 1943년도 발행액으로 배분했다. [표2-16] 일본 국유철도에서의 차입 자본과 이자 및 채무 취급제비용(1911년 이후만 해당) (단위: 천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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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경영 | |
경영 성적(2) | 2021.08.30 |
경영 성적(2) 제3절 영업 성적 영업 성적을 판단하는 지표로서 영업 계수 또는 순영업 계수가 채택되는 데, 이는 이 절의 마지막에 기술하기로 하고, 이 영업 계수를 좌우하는 각 요인을 연도별로 일본의 국유철도와 비교해보려고 한다. 영업 성적에 영향을 미치는 각 요인 수송 밀도 : 영업 킬로미터의 1일 1km당 수송 인원과 수송 톤수는 [표 2-4]와같다. [표2-4] 수송 밀도(1일 1km당 평균 여객 수, 화물톤 수)(단위: 명, ton) 1. 수송 인원 : 1912년 562명에 불과했던 조선의 수송 인원은 1925년에는 1,248명(원년도의 2.22배)으로 증가하였고, 그 후에도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매년 증가하여 1943년도에는 5,317명(1925년도의 4.26배)이 되었다. 일본 국철의 수송 인원은 1925년도에 4,200명으로, 이는같은 해 조선철도의 3.37배에 달하는 수치였다. 1943년도의 경우 10,473명으로 같은 해 조선철도의 1.97배를 기록했다. 즉, 쇼와시대에 접어들어 조선철도의 여객 수송 신장은 일본 국철의 1.7배가 되었지만, 수송 밀도는 2분의 1 수준에 지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2. 수송 톤수 : 조선철도의 1912년도 실적은 342톤이었으며, 1925년도는 1,248톤으로 3.65배 증가하였다. 또한 1943년도에는 5,008톤으로 4.01배 신장하였다. 일본의 국철은 1925년도에 2,626톤으로 같은 해 조선철도의 2.1배를 기록했으며, 1943년도에는 5,763톤으로 같은 해 조선철도의 1.15배였다. 즉, 1925년도 이후 조선철도의 화물 수송 증가는 일본 국철의 1.82배에 달하였으며, 수송 밀도도 매우 근접해졌다. 3. 조선 내 5대 간선의 수송 밀도 : 조선 내 5대 간선의 1942년도 수송 밀도는 다음과 같다. 경부선 . 수송인원수 : 10,390명 . 수송톤수 : 5,719ton 경의선 . 수송인원수 : 8,136명 . 수송톤수 : 7,149ton 호남선 . 수송인원수 : 3,355명 . 수송톤수 : 1,728ton 경원선 . 수송인원수 : 6,269명 . 수송톤수 : 6,513ton 함경선 . 수송인원수 : 5,148명 . 수송톤수 : 6,976ton 즉, 여객 수송의 경우 경부선만이 일본 국철(전선 평균)을 다소 상회하였으며, 화물 수송의 경우 호남선 이외의 각 노선이 모두 일본 국철의 실적보다 증가하였다. 농산물 수송에 의존하는 호남선은 다른 간선의 실적과 격차가 발생했는데, 이는 중일전쟁 이후 화물 수송의 품목 변화와 이에 따른 수송 현황의 변모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간 거리 : 역간 거리는 개통 구간에 있어서의 역 수의 밀도를 나타낸 것으로, 대체적인 경향을 살펴보면, 여객이나 화주에 대한 서비스 향상 및 객화 유치, 선로 용량의 증가를 도모하면서, 역 수는 점차 증가하고 역간 거리는 짧아졌다. [표2-5]에 따르면 조선철도의 역간 거리는 1912년의 10.28km에서 1925년의 8.82km로 줄어들었고, 1943년도에는 6.76km가 되었다. 일본 국철도 1912년도의 5.75km에서 1925년도에는 5.46km, 1943년도에는 4.8km로 조선철도보다 감소율은 낮았지만 점차 단축되었다. 역의 수에 따라 수송 직접비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발착 경비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경비만을 놓고 본다면 역 수가 적은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역 수가 증가함에 따라 수송량도 증가하므로, 이에 따른 수입 증가와 발착 경비 경감이 기대될 경우 어느 쪽이 이득인지 산정해야 한다. 조선철도와 일본 국철의 역간 거리를 비교해 보면 1925년도에는 조선철도가 일본 국철의 1.62배였으나, 그 비율이 점차 감소하여 1929년도 이후에는 대체적으로 1.4배가 되었다. 즉, 조선철도의 정거장 경비는 일본 국철의 약 0.7(1÷1.4)로 충분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영업비 가운데 운수비(정거장이 대부분)가 차지하는 비율의 경우 조선철도가 일본 국철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이유로는 긴 역간거리를 들 수 있다. [표2-5] 역간 거리(단위: km) 주) 영업비에 차지하는 운수비의 비율은 각 연도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으나(1925년도~1939년도) 조선철도는 19.1%~22.7% 일본 국철은 32.1%~36.8% 1인 평균 승차 거리와 1톤 평균 수송 거리 : 1인 평균 승차 거리와 1톤 평균수송 거리는 발착 경비와 큰 관련이 있다. 즉, 승차 거리와 수송 거리가 증가하면 1km당 발착 경비는 그만큼 경감된다. 1. 1인 평균 승차 거리 : [표 2-6]에 나타난 바와 같이 조선철도의 경우 1925년 이후 점차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대륙과의 교통이 빈번해지면서 증가폭이 갑자기 커졌다. 또한 1943년도 이후 여객 수송 규제 조치로 인하여 단거리여객이 상대적 감소함에 따라 승차 거리가 증가하여 1944년도에는 82.3km로, 1925년도의 52.3km보다 1.57배 증가했다. 반면 일본 국철의 1인 평균 승차 거리는 1925년도에 27.5km로, 1944년도까지 연도별로 다소의 증가는 있었으나 1943년도의 28km와 거의 변함이 없었으며, 1944년도에는 24.9km로 급감하였다. [표2-6] 1인 평균 승차 거리·1톤 평균 수송 거리(단위: km)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조선철도는 국철에 비하여 승차 거리 자체도 훨씬 길고 또한 신장률도 더욱 커지고 있었다. 국철의 1인 평균 승차 거리를 비정기 여객과 정기 여객으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1926년도 . 정기 여객 : 36.9km . 비정기 여객 : 1.8km 1933년도 . 정기 여객 : 39.0km . 비정기 여객 : 12.2km 1942년도 . 정기 여객 : 41.9km . 비정기 여객 : 13.9km 1943년도 . 정기 여객 : 43.6km . 비정기 여객 : 14.3km 정기 여객의 승차 거리가 1인 평균 승차 거리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비정기 여객의 경우도 전차(電車) 구간 승객의 승차 거리가 12km 전후인 점이 비정기 여객의 승차 거리를 단축시켰다. 한편 정기승객의 수송 인원의 경우 조선철도의 1933년도 실적은 전체 여객의 14.3%에 불과하였으며, 1942년도에는 실적이 4.15배로 증가하였으나 전체 여객에 대한 비율은 12.1%로 감소하였다. 주) 1933년도 3,174,950명 ÷ 22,238,338명 = 0.143 1942년도 13,161,360명 ÷ 108,477,181명 = 0.121 이에 반하여 일본 국철은 1933년도에 전체 여객의 53%였던 정기 여객이 1942년도에는 55%가 되었다. 이와 같이 여객 수송의 경우 조선철도가 일본 국철에 비하여 채산상 매우 유리한 상황이었으며, 이러한 상황이 매년 향상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1톤 평균 수송 거리 : 앞의 [표 2-6]에서 본 바와 같이 조선철도의 수송거리는 일본 국철에 비하여 30% 정도 길며, 또한 조선의 수송 거리 자체가 1925년도 이후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단축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중일전쟁 후 1937년도부터 다소 증가세를 보이다 1942년도부터 대륙 화물수송으로 인하여 매년 급증하였다. 국철의 수송 거리도 거의 동일한 양상을 띠었다. 열차 1대·1km당 승차 인원 및 적재 톤수 : 열차의 수송 효율을 나타내는 것으로 수송 경비가 비교적 적당한 수준인지를 결정한다. [표2-7]에 따르면, ① 열차의 1km당 승차 인원은 1925년도의 231.1명에서 심각한 불황과 기동차(참고 5) 운행으로 인한 열차의 단소화(短小化)에 의해 1931년도에는 126.5명(1925년도의 55%)까지 감소하였다. 그러나 만주사변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1936년도에는 149.5명으로 1925년도의 65% 수준에 이르렀다. 1936년도의 객차 1대당 승차 인원수는 1925년도의 92% 수준에 달해 있었기 때문에 열차 1대당 승차 인원이 감소한 원인은 대부분 기동차의 운행 등에 의한 열차 단소화에 따른 것이었다. 이 기간을 고빈도 열차 운행(frequent service)에 따른 여객 유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이후 기동차 운행이 점차 감소함에 따라 열차 1대당 승차 인원이 급속히 증가하였고, 여객 수송의 규제기에 접어들면서 속도 감속에 따른 열차의 장대화와 객차 1대당 승차 인원수의 증가로 1943년도는 537명까지 늘어났다. ② 열차 1km당 적재 톤수는 1925년도에 191.2톤으로 그 후 2, 3년간은 다소 증가하였지만 심각한 불황으로 점차 감소하여 1930년도에는 166.9톤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이후 증가세를 보이면서 1934년도에는 192.8톤을 기록, 1925년도 수준까지 회복하였다.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조선이 병참기지가 되면서 편중수송이 해소되자 화차 1대의 적재 톤수도 계속 증가한데다 1941년도 이후 열차의 장대화로 인하여 1943년도에는 334.3톤(1925년도의 1.75배)이 되었다. [표2-7] 1열차 1km당 승차 인원수 및 적재 톤수(단위: 명, ton) 작업 능률 : 현장 작업을 크게 운수 종사원(역, 열차구), 운전 종사원(기관구, 검차구), 보선 종사원(보선구)으로 구분하고, 대상 업무량마다 필요한 종사원수를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물론 앞에서 기술한 각 요인이 각각 크게 작용하고 있지만, 그 밖에 요원의 작업 의욕이나 최소 출석 인원의 관계도 경시할 수 없는 요소이므로 작업 능률로서 채택하였다. 각 계통을 불문하고 명·톤킬로미터당 수치를 대상 업무량의 하나로 살펴보기로 하였다. 명·톤킬로미터가 수입 대상의 업무량이며, 모든 작업은 수입을 올리기 위하여 시행되는 것이므로, 직접적인 대상 업무로 보기 힘든 부분도있기는하지만채택해보기로하였다. 조사 연도 또한 잔존 통계가 적기 때문에 자료로 남아 있는 1935년부터 1937년까지 3년간으로 정하였다. 1. 운수 종사원 : 역의 업무는 크게 열차 취급과 객화(客貨) 취급으로 나뉘며, 열차구의 업무는 열차승무로 대상 업무량을 열차 거리와 수송 인원수(정기승객은 1/2로 환산), 톤수와 이 밖에도 인·톤킬로미터당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열차 1만 km당 종사원수는 역간 거리가 길고 조차장이 없기때문에 조선철도가 훨씬 효율적이다. 다만 일본 국철이 3년간 보합 상태인 것에 반하여 조선철도는 점차 증가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객화 취급이라는 관점에서 본 수송 인원·톤수별 종사원수는 수송 밀도, 특히 여객(정기 여객)의 차이가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조선철도가 일본 국철에 비하여 훨씬 비효율적이다. 운수 종사원 작업 능률표(단위: 명) 수입 대상인 명·톤킬로미터당 종사원수는 조선철도가 상당이 좋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여객, 화물 모두 평균 수송 거리가 긴 점이 영향을 끼친 것이라고 여겨진다. 2. 운전 조사원 : 기관구는 기관차(동차 포함)의 운전과 검사 및 그 수리, 검차구는 객화차의 검사 및 그 수리를 담당하므로, 기관차 킬로미터와 객화차 킬로미터를 종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열차 킬로미터에 따라 대상 업무 량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그밖의 연인원·톤킬로미터당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운전 종사원 작업 능률표(단위: 명) 즉, 1935년, 1936년도는 열차 킬로미터나 명·톤킬로미터당 모두 양자가 거의 동일하였는데, 조선철도에서는 1937년도 이후 증가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3. 보선 종사원 : 보선구의 대상 업무량으로서 기본이 되는 것은 궤도 연장킬로미터로, 여기에 통과 중량을 가미하는 방식으로 열차 킬로미터당 수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보선 종사원 작업 능률표(단위: 명) 궤도 길이 1km당에서는 양자가 거의 동일하였으나, 광궤로 도상 면적이 넓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선철도가 매우 효율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열차 길이당 작업 능률은 조선철도가 훨씬 나쁘며, 통과 중량의 영향을 고려하면 궤도 길이 킬로미터당 수치로는 속단할 수 없다. 또한 인·톤킬로미터당의 경우에도 국철에 비하여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최저 요원의 관계가 크게 영향을 미치며, 종합적으로는 국철의 효율에는 이르지 않았다고 판단해야 한다. 4. 철도 작업비에 관련된 전종사원 : 철도의 건설 개량과 용품 개정에 소속된 인원수를 제외한 철도 작업비 관계의 종사원수(현장 종사원과 감독·후생요원)에 대해서 100만 명·톤킬로미터당 인원수를 살펴보면 다음 표와 같으며,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 필요한 인원수는 조선철도가 약간 적은 결과로 나타났다. 1935년도 . 조선철도 : 4.659명 . 일본의 국유철도 : 5.025명 1936년도 . 조선철도 : 4.599명 . 일본의 국유철도 : 4.779명 1937년도 . 조선철도 : 4.202명 . 일본의 국유철도 : 4.706명 1938년도 . 조선철도 : 4.070명 . 일본의 국유철도 : 4.323명 1939년도 . 조선철도 : 3.945명 . 일본의 국유철도 : 4.052명 1인 평균 임금: 조선철도의 경우 일본인 종업원에게는 실질적으로 40% 정도 가산된 임금이 지급되었으므로 일본의 국철 종업원보다 평균 임금이 높았다. 그리고 철도의 현장 종업원은 말단직으로, 학교 졸업생(중등학교 이상) 이외에는 각 직장의 최저 직급으로 채용되기 때문에 신규 채용자 수에 따라 평균 임금이 결정되었다. 조선철도에서는 이 밖에도 일본인과 조선인 종업원의 구성 비율이 평균 임금을 좌우하는 큰 요소로 작용했다. 1925년도 이후부터 1943년도까지의 조선철도와 일본 국철의 평균 임금을 비교하면 [표 2-8]과 같으며, 만주철도로부터 이관된 직후의 평균 임금은 일본 국철 종업원의 평균 임금에 비해 30% 이상 많았다. [표2-8] 평균 임금(연액) 비교표(단위: 명) 비고) 통계자료는 조선철도의 경우 이듬해 9월 말 기준, 일본 국철은 이듬해 3월 말 기준임. 그 후 조선철도 종업원의 증가율이 국철보다 커지면서 평균 임금 차이가 점차 감소되었고, 1933년도 이후부터 1942년까지 10% 전후의 차이를 보였다. 1943년도에는 조선철도의 일본인과 조선인 종업원의 구성비가 역전되어 조선철도의 평균 임금이 크게 줄어들면서 일본 국철보다 낮아졌다. 이 기간 동안 물가 급등에 따라 종업원 임금이 시정되었으나, 신규 채용수가 많았기 때문에 평균 임금을 상승시키지는 못하였다. 연도별 증원 상황 및 조선철도의 일본인·조선인 구성 상황은 [표2-9]와 같다. [표2-9] 연도별 증원 상황(단위: 명) 비고) 1. 조선철도 인원수는 이듬해 9월 말 기준 2. 조선인난의 왼쪽 위의 수치는 전체 인원에서 차지하는 비율 운전용 석탄 소비량 : 운전용 석탄 비용은 순영업비의 20% 전후 수준으로, 종사원의 임금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그 사용량은 경비 총액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일찍이 석탄 절약권장 운동(자세한 내용은 운전편을 참조)을 실시하는 등 소비를 절약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다. 1. 석탄 소비량: 운전용 석탄은 석탄의 혼탄(混炭), 투탄(投炭) 기술 등에 따라서 소비량이 좌우되는데, 1925년도부터 1943년도까지의 실적을 환산차량 100km당 소비량(통상적으로 기관차의 길이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1939년도경부터 열차가 점차로 장대화되었기 때문에)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환산차량 100km당 석탄 소비량(광궤선)] 1925년 : 304.17km 1926년 : 305.62km 1927년 : 303.34km 1928년 : 326.60km 1929년 : 302.54km 1930년 : 291.10km 1931년 : 273.83km 1932년 : 269.58km 1933년 : 267.38km 1934년 : 279.25km 1935년 : 278.97km 1936년 : 284.23km 1937년 : 277.25km 1938년 : 300.38km 1939년 : 319.69km 1940년 : 388.88km 1941년 : 398.60km 1942년 : 420.95km 1943년 : 460.87km 즉, 수송량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기관차 승무원을 속성으로 양성한 1925년부터 환산 차량 킬로미터당 소비량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승무원의 기량 미숙이 원인으로 해마다 소비량은 늘어났으며, 1943년도에는 460.87kg로 1923년도에 비하여 66%나 증가하였다. 2. 석탄 단가 : 조선은 운전용 석탄의 산출량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초기에는 대부분 만주와 일본에서 석탄을 조달하였으며, 조선산 무연분탄은 가공하여 연탄으로 사용하였다. 그 후 기관차의 화실이 개량되어 조선탄(갈탄)을 역청탄과 혼탄하여 사용하게되었고, 연탄과 함께 전량의 40% 정도를 조달하게 되었다. 1931년도경부터 연탄 사용이 증가하면서 조선산이 전량의 70% 정도에 이르렀고, 만주와 일본산 석탄의 비중은 감소하였다. 석탄의 1톤당 단가는 다음 표에 나와 있는 것처럼 1933년도경부터 조선철도가 일본 국철에 비해 약 20% 정도 높았다. 그러나 1934년도 이후에는 조선철도 쪽이 일본 국철에 비해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하였다. 이는 일본 국철의 경우 1935년경부터 석탄 가격의 인상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1938년도부터 급격하게 상승한 반면, 조선철도는 1938년부터 가격이 급등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시간차에 의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조선철도의 석탄 가격은 1940년 이후의 자료가 없어 확실하지 않지만, 곧바로 주요 물자에 대한 가격 통제가 이루어졌으므로 국철의 석탄 가격 상승률의 2.4배 정도 상승하였다고 가정하면 1톤에 24엔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석탄 단가표(1톤당)(단위: 엔, %) 환산 차량당 소비량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66% 증가하였고, 석탄 가격이 2.4배가 되었다고 볼 때 석탄 비용은 단위당 약 4배(1.66×2.4=3.984)나 증가하게 되므로 경영상 큰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상의 각 요인은 수송 밀도(수지와 관련)를 제외하고 경비의 사용 효율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다음은 수입의 효율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1인1km, 1톤1km당평균운임 1. 1인 1km 평균 운임: 1920년에 조선·만주 통일 운임을 설정한 이후, 조선철도와 일본 국철의 3등 기본 운임 비율은 동일하였으나, 조선철도가 국철에 비해 원거리 체감률이 작고 우등 승객에 대한 배율이 다소 낮았다. 조선철도와 일본 국철의 연도별 1인 1km당 평균 운임은 [표 2-10]과 같이 조선철도 쪽이 훨씬 높은데, 이는 정기 여객이 차지하는 비율이 차이가 나기때문으로 일본 국철의 비정기 여객의 1인 1km당 평균 운임은 조선철도에 비하여 약간 낮은 정도였다. [표2-10] 여객 1인 1km, 화물 1톤 1km당 운임(단위: 모) 2. 1톤 1km당 평균 운임 : 화물 운임은 수송 원가주의에서 벗어나 사회정책 운임이 적용되었으므로 두 철도의 기본 운임 비율을 비교하는 것이 어렵지만, 1926년도 이후의 추이를 살펴보면 10호표에 나타난 것처럼 일본 국철이 조선철도보다 높다가 점차 근접해졌으며, 1940년도 이후에는 오히려 조선철도가 높아졌다. 장기간의 경향을 살펴보면, 두 철도 모두 평균 수송 길이의 신장 및 수송 품목 변화 등으로 인하여 지속적인 하락 경향을 보였으나, 1940년도 이후 일본 국철의 하락폭이 커지면서 역전되었다. 조선철도 또한 1941년도 관동군 특별 대연습의 군사 수송 이후 일반 화물의 수송 규칙이 점차 엄격해지고 전가화물(轉嫁貨物)이 이를 대신하면서 톤당 운임은 급락했다. 순영업계수 일본 국유철도의 영업비에는 이자 및 채무 취급 제반 비용과 사설철도 보조 등 조선철도의 영업비에는 없는 경비가 포함되어 있으며, 반대로 조선철도의 영업비에는 일본 국철에는 없는 특별 급여금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양자의 내용을 동일하게 한 순영업비를 영업 수입으로 나눈 순영업계수를 근거로 살펴보려고 한다. [표2-11] [표2-11] 순영업수지와 영업계수(단위: 천 엔) 일본의 국유철도는 다이쇼(1912~1926)시대에 이미 순영업계수가 50~60대를 나타냈는데, 조선철도는 1916~17년(수입이 많았으며, 물가·임금이 급등한 것은 1918년도 이후이다)을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70대 정도였다. 1926년도 이후부터 해마다 점차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1930년 경제공황으로 인하여 수입이 전년도 이하로 내려갔을 때에도 경비를 절감한 덕분에 다소 악화된 정도에 그쳤다. 한편 불황으로 막대한 영향을 받은 일본 국철의 순영업계수가 60대로 올라가면서 1933년도에는 양자가 거의 동일해졌다. 그 후 일본 국철은 60 전후를 나타낸 반면, 조선철도는 수입이 증가하고 영업계수가 내려가면서 줄곧 55 전후를 유지하여 일본 국철을 능가하는 성적을 거두었다. 수입적인 측면에서는 수송량이 2배 가까이 신장되었으며, 여객 1명의 1km당 운임이 일본 국철보다 20% 이상 높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으며, 경비적인 측면에서는 명·톤킬로미터당 종업원수가 일본 국철에 비해 적어 임금 단가의 격차가 점차 축소되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1940년도는 물가·임금의 상승이 경비에 큰 영향을 끼쳤고, 이 밖에도 환산 차량 킬로미터당 석탄소비의 증가, 양성경비의 증가등으로 영업계수가 단숨에 63.2까지 상승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일본 국철도 마찬가지였으나 각 부문의 종사원층이 두터웠기 때문에 다행히 소폭의 영향을 받는 데 그쳤다. 1941년도에는 관동군 특별 대연습에 의한 수입 증가 둔화, 특별 경비 지출에 의한 경비 증대로 인하여 수지의 균형이 무너졌다. 이로 인해 발생한 손실 보상을 군 당국이 절충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은 경리편에서 기술한 바와 같다. 1942년에 들어와 조선철도와 일본 국철 모두 여객 운임을 인상하여 어려운 재정을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경비 증가가 큰 탓에 영업 계수가 악화되었다. 이 가운데 전쟁의 영향을 크게 받은 조선철도 측의 실적이 더욱 악화되었다. 지금까지 언급한 실적을 간단히 요약하면, 조선철도는 기업이 노력한 만큼 1934년부터 1939년까지 일본 국철을 능가하는 좋은 실적을 거두었다. 수입이 매년 증가하여 이러한 계수를 유지한다면 수익금의 절대 액이 점차 증가하여 탄탄한 재정 기반을 구축할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1940년도 이후 급속도로 수송량이 증가한 탓에 각 부문의 종사원이 부족해진 조선철도는 종사원의 속성 양성에 쫓기다 인플레이션의 심화와 자재 부족으로 실적이 악화되었다. 하지만 사업으로서 가장 중요한 수입 차익의 절대 액은 매년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 참고 5) 기동차(rail car, 汽動車) : 가솔린기관 또는 디젤기관 등의 내연기관을 장착하고 그 기관의 동력을 이용하여 운행하는 철도차량. - 역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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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경영 | |
경영 성적(1) | 2021.08.23 |
경영 성적(1) 제1절 서론 조선철도는 입지 조건과 설립 경위를 보았을 때 국방상의 요구와 개척 사명의 비중이 일본의 국유철도에 비하여 훨씬 큰 반면, 필요한 투자는 취약한 조선총독부의 재정에 지배될 수 밖에 없었다. 운영 면을 살펴보면 일본인 종업원에게 실시된 승급(1920년대 중반부터 실질 40%)제도가 인건비의 단가 상승을 초래하였으며, 사용 자재도 대부분 원거리에서 조달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사용 자재의 경우 1921년 조선 제품의 사용을 권장한 총독부의 행정 방침에 따라 1916년경 전체 구입비의 5% 전후였던 것이 다이쇼(1912~1926) 말기에는 35%까지 인상되었으나, 이는 조선 내 대형 소비자로서 다소의 비용 문제는 눈감아달라는 총독부 행정의 방침에 따른 결과였다. 이처럼 일본의 국유철도에 비하여 경영상 불리한 점이 많았지만, 경영에 있어서는 항상 일본의 국유철도를 목표로 하였으며, 각종 지표에 조금이라도 근접해지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수송량이 어느 정도까지 증가할 경우 광궤선에 의한 영업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경영에 큰 영향을 미친 사항을 2, 3가지 언급하려고 한다. 3선 연락운임 협정 : 다년간 현안이 되었으나 해결하지 못한‘조선선을 경유하는 봉천 이북행의 소형 취급품 가운데 면포 외 15품종에 대한 특별운임 할인제도’를 달가워하지 않은 만주철도를 설득하여 1913년에 협정을 체결하였다. 당시 조선철도의 화물 수송 상황을 살펴보면, 만주철도 노선을 통하여 대량의 석탄 그리고 반출되는 쌀의 대체 식품인 만주 조가 유입된 반면, 조선에서 만주로 가는 화물은 거의 볼 수 없는 극단적인 상태였다, 이러한 남행(南行) 편중 수송은 수송비용 증가라는 문제를 낳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협정 체결로 인해 남행에 편중되었던 기존의 화물 수송이 완화되었고, 이는 수송비용 절감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선철도 12년 계획 : 1927년 제52 의회에서 결의된 12개년 계획은 국방상의 문제에 못지않게 사장된 삼림 자원과 광업 제품 개발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또한 훗날 발생한 만주사변 이후 급증하는 수송 요청에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였다. 이 계획은 2억 3천만 엔의 추가 투자라는 당시 조선총독부 재정으로서는 중대한 각오를 필요로 하는 조치였기 때문에 철도와“향후 기설선의 수입 증가에 대해서는 필요 경비를 수입 증가액의 38.5% 이내로 처리한다.”라는 암묵의 양해를 구했다. 이 결정에 의해서 총독부 재무 당국은 증가하는 공채이자를 지불하고도 총독부 재정에 상당히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였으며, 철도는 그 틀 안에서 지출을 억제하기 위하여 합리화를 위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계획 성립 후 수년 동안은 어려운 경제계의 불황으로 인하여 두세 차례 정도 전년도 수입을 밑도는 등 실적이 좋지 않았지만, 1934년도 이후에는 점차 총독부 재정에 기여하는 성과를 올렸다. 만주사변 및 중일전쟁 : 만주사변의 발발로 군사 수송 외에 대륙 간의 교통량이 증가하면서 화물의 남행 수송이 크게 완화되었으며, 또한 이러한 화물수송에 의해서 농산물 수송이 차지하는 비율이 감소하고 수송의 계절파동도 완만해지는 등 보다 효율적인 수송이 가능해졌다. 전쟁이 점차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면서 조선은 병참 기지로서 중요 전쟁 물자의 공급 압박을 받았는 데, 재료·제품의 왕복 수송이 이루어지면서 바람직한 수송 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 결과 물가·노임 상승과 요원 부족에 의한 경비 증가 등 많은 경영상의 마이너스 요인을 커버하는 실적을 올렸다. 태평양전쟁 : 정세가패전 쪽으로 기울면서 조선철도는 국가적 목적에 따라서 수송만 완수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동안 몇 차례에 걸친 여객수송 규제는 조선철도 재정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나, 부동 구매력을 흡수하기 위하여 실시한 여객운임 인상으로 인하여 막대한 재정 파탄은 면할 수 있었다. 제2, 3절에서는 각종 경영 지표를 바탕으로 일본의 국유철도에 비해 조선철도가 어느 정도의 성적을 거두었는지 밝히고자 한다. 또한 제4절에서는 조선철도가 총독부 재정 가운데 어떠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조선철도가 하나의 기업으로서 성립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언급하려고 한다. 제2절 철도의 보급 영업 거리의 증가 상황 : 1910년 한일합병에 의해 총독부가 설립되었을 당시, 국철 노선은 경부·경의·경인·마산 4개 노선을 합하여 1,030.4km, 사철은 부산진~동래 구간 9.3km로 총 1,039.7km에 불과하였다. 총독부 통치가 시작된 지 15년이 경과한 1925년 3월 말에는 국철과 사철을 합쳐 총 2,706.1km로 15년 동안, 1666.4km, 1년 평균 111km가 증가하였다[표 2-1]. 그러나 같은 기간 동안 일본 철도의 증가 길이는 [표 2-2]에 나타낸 바와 같이 8,486.6km로 1년에 평균 565.8km나 증가했다. 면적비 58%를 고려하더라도 일본 내 증가분에 비하여 현저히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대의 원인은 빈곤한 총독부 재정이었는데, 당시 일본에서 군부 및 관계자 이외에는 조선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매우 적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조선철도 12개년 계획은 조선의 정부와 국민이 대대적인 홍보 작전을 펼친 덕분에 일본의 정·재계는 물론 학식자의 눈을 조선으로 돌려서 예산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계획 자체도 큰 성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 조선을 소개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 12개년 계획은 쇼와(1926~1989) 초기, 정부의 채권을 발행하지 않는 주의로 인하여 부득이하게 연장되어 1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으나, 철도의 영업거리는 기존의 2배 이상 신장되었다. 특히 계획이 실질적인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한 1935년 3월 말, 1940년 3월 말의 증가 상황은 일본 철도 영업 거리의 신장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표2-1] 조선에서의 철도 영업 거리 증가 상황(단위: km, %) 비고) 1. 영업 거리는 총괄 영업 거리이다. 2. 매수 등의 난은 1925년도 이후만 계상하였다. 3. 196.2km는 상삼봉 웅기 구간 183.3km의 양도와 북평 삼척 구간 12.9km의 업무 위탁의 합계이다. 4. 1935년, 1940년 3월 말 국철의 영업 거리에는 만주철도 위탁선 328.5km가 포함된다. [표2-2] 일본에서의 철도 영업 거리의 증가 상황(단위: km, %) 비고) 자료출처 국철은〈정거장일람〉 사철의 경우 1910~1935년 3월 말은〈철도성 철도 통계〉 1940년, 1945년 3월 말은 일본 국유철도의〈철도 요람〉 면적 및 인구당 영업 거리 이 철도의 보급 상태를 면적 1,000㎢와 인구 10만 명당으로 살펴보면 [표2-3]과 같다. 즉, 면적 1,000㎢당 철도 영업 거리는 혼슈 및 일본 내륙·홋카이도·대만과 모두 비교하여 매우 짧다. 인구 10만 명당 영업 거리의 경우 1925년 3월 말 길이는 어느 지역과 비교해 보아도 짧은 수준이며, 특히 홋카이도의 7분의 1 이하였다. 그러나 1940년 3월 말에는 일본 내륙과 비슷한 수준을 보였으며, 대만보다 상위에 올랐다. [표2-3] 철도 보급 비교표(영업 거리에 따름)(단위: km) 조선과 마찬가지로 개척 과정에 있었던 홋카이도와 비교했을 때 면적당, 인구당 영업 거리가 다소 근접해지기는 하였으나, 그럼에도 상당한 격차가 존재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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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경영 | |
제2차 총독부 직영(제2기)(1936년~종전) | 2021.08.09 |
제2차 총독부 직영(제2기)(1936년~종전) 제1절 개설 약 10년간의 직영 제2기 동안 요시다 국장은 제1기에 이어서 약 4년간 재임하였고, 그 뒤를 이은 구도 요시오(工藤義男) 국장은 병으로 1년 만에 퇴임하였다. 그 후 야마다 신주로(山田新十郞)가 새로운 국장으로 취임하여 약 4년간 재임하였으며, 1943년 12월부터 종전에 이르기까지 1년 8개월간 고바야시 리이치(小林利一)가 마지막 철도국장으로 근무하였다. 조선의 역대 국장은 창설 초기부터 대대로 일본의 국유철도에서 전출되었으나, 마지막 국장이었던 고바야시에 이르러 처음으로 조선철도부 내에서 기용되었다. 고바야시 국장은 비록 재임 기간이 짧았지만 이미 패전이 결정된 시기에서 전쟁 말기의 각종 사태에 대응하며 종전 처리의 책임자로서의 힘든 임기를 마쳤다. 조선철도의 마지막 10년을 살펴보면, 요시다 국장이 취임했을 당시는 만주국이 수립된 직후로 일본의 대륙 정책 수행이 순조롭게 진행된 시기였다. 국민은 오랜 숙원이었던 대륙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그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 육군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날로 확대되면서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국력 소모가 심각해지자 전쟁 자원을 해외에서 급히 조달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 결과 일본은 동북아시아 대륙과 동남아시아 각국으로 군사 행동을 확대하고, 1941년 마침내 태평양전쟁에 돌입하면서 전쟁지역은 동북아시아 대륙과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조선철도는 일정 기간을 제외하고는 군사정책을 우선으로 운영되었다. 이리하여 철도 경영은 급격하게 전시(戰時)적인 색채가 강화되었으며, 유사시를 대비하여 부내를 정비하고 제도를 개선하는 한편, 기존의 계획을 추진하는 동시에 신규 계획에 따른 건설·개량·차량 정비를 서둘렀다. 이미 결정되어 실시 중이던 철도 12개년 계획 가운데, 혜산선은 1937년11월 경전선(전주~순천 구간)은 1936년12월 만포선은 1939년10월 에 각각 완공되었고, 중앙선은 1942년 4월, 평원선은 1941년 12월, 백무선은 1944년 12월에 각각 전선이 개통되었다. 또한 경부, 경의선 간선인 복선 개량공사가 끝난 것은 종전 5개월 전인 1945년 3월이었다. 1939년 야마다 신주로(山田新十郞) 국장 시대에 들어와서 시국이 급박해졌으며, 결국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조선철도를 둘러싼 주위의 정세가 일변하였다. 그에 앞서 1940년 12월, 철도국 조직의 개편을 단행하여 서울, 부산, 함흥에 지방 철도국을 개설하고, 1943년 철도국을 폐지, 교통국을 설치하여 육지, 바다, 하늘의 교통 여객 기능을 향상시키고, 1945년 8월 평양, 순천에 지방 운수국을 개설하였다. 그러나 패전이라는 결과를 생각하면 모두 궁여지책에 지나지 않았다. 제2절 지방철도국 설치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의 국유철도는 건설 및 수송력 증강에 기여하는 제반 시설 정비를 서둘렀으나 국제 정세는 더욱 어려워졌고, 일본은 조선·만주를 포함하여 전쟁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철도국은 1940년 12월 대폭적인 조직 개편을 단행하였다. 서울·부산·함흥에 지방철도국을 설치하고(그 조직은 제3편 조직표와 동일), 기존의 본국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본국은 주로 종합 계획을 맡고 그 실행은 지방국을 중심으로 실행하는 지방 분산조치를 취했다. 이 조치로 유사 시 각 지방국은 독자적인 판단 하에 신속하게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제3절 대륙 물자의 육로 수송 태평양전쟁이 점차로 일본에게 불리해지던 1943년 5월, 애투(Attu) 섬 수비대가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그 무렵 군은 본토 결전에 대비해서 대륙 전략 물자를 조선의 각 항구를 경유하여 일본 국내로 수송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당시 일본 근해에는 이미 미군 잠수함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시모노세키~부산 간 최신예 연락선인 곤론마루(崑崙丸)가 적의 잠수함 공격을 받아 침몰하였으나, 군은 부산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의 각 항구를 해로의 최단 경로로 선택하고 육로 연락 수송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것이 이른바 대륙 물자의 육운전가수송(陸運轉嫁輸送)으로, 이로써 한반도와 대륙의 수송기관이 하나가 되어 대규모의 수송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중심 역할을 담당한 것이 조선철도의 수송력과 남한 항만의 중계 능력이었다. 그리하여 경부와 경의 두 간선의 복선 공사를 서둘러 완공시키는 한편, 여객열차를 대폭 줄이고, 화물 수송을 최우선으로 삼고, 항만 설비의 개축 확장을 서둘렀으나, 남쪽으로 밀려오는 대륙 물자를 처리하기란 쉽지 않았다. 중계 기지의 핵심 시설이었던 부산 부두를 비롯한 조선의 각 항구에서는 종사원들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으로부터의 선박 배치 감소와 편중으로 인하여 화물의 중계 작업이 뜻대로 이루어지 않으면서 밀린 화물이 산처럼 쌓였다. 1944년 4월 칙령 사찰사 야마시타 가메사부로(山下龜三郞)가 현지에 파견되어 업무를 독려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어 별다른 수단이 없었다. 이렇게 철도 종사원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필사적으로 수송한 방대한 대륙 화물도 전력 증강에 충분히 기여하지는 못하였다. 당시의 화물 수송량은 다음과 같다. [1944년도(1945년3월분은추정) 화물 톤수] 석탄 1,412,142 선철 590,494 강재 138,412 비철 64,597 염 416,156 대두 360,247 대두찌꺼기 175,940 기타 293,809 * 합계 3,451,797 (주) 부산부두착의마산~여수등각부두경유한것포함 제4절 북선선 일부의 직영 환원 및 위탁경영방식 변경 북선 지방은 지하자원이 개발됨에 따라 중공업이 크게 발전하였고, 만주의 발전과 함께 산업 및 교통 정세가 급변했다. 특히 전쟁시 중요 자원인 무산 철광이 개발되면서 일본제철주식회사가 청진에 제철소를 신설했다. 당시 광석 수송로에 해당하는 무산~고무산 구간(북선척식철도주식회사선 60.4km, 후에 철도국이 매수)은 협궤로 수송력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광궤로 개량하고, 복선화를 추진하여 수송력을 증가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1933년 10월 이후 만주철도에 위탁경영을 해온 북선선 가운데 상삼봉~수성 구간, 청진선 및 회령, 신계림 구간의 철도 및 청진항 종단 시설의 경영을 1943년 6월에 조선총독부에 환원하여 북선 지방의 교통을 크게 발전시키는 데 힘썼다. 이로써 만주철도 위탁 이후 6년 9개월 만에 북선선의 일부 노선과 1937년 12월 이후 철도와 함께 위탁경영 중이었던 회령~웅기 구간 자동차 노선도 총독부에 환원되었다. 이 환원 구간은 성진철도사무소 소관이 되었으며, 승계 인원은 약 1,600명이었다. 남은 위탁경영 구간인 상삼봉~웅기 구간의 철도시설에 대해서는 기존의 위탁경영 방식을 변경하여 만주철도에 대여하기로 하고, 동 구간(183.3km)에 대한 총독부 투자액 2,300만 엔에 대해서 매년 3.9%의 대출금을 납부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만주철도는 위의 구간을 사설철도로 삼고, 나진과 청진 두 항구를 중심으로 북선 및 동북 만주 지역을 하나로 묶는 교통 정비에 힘썼으나, 1945년 3월 임대 중이었던 북선의 철도시설과 웅기 항만시설은 만주철도에 양도되었다. 제5절 교통국 설치 전세가 점차 치열해지자 일본 정부는 1943년 11월 군수성, 운수통신성, 농상성을 발족시키고 전력 증강에 총력을 기울였다. 조선철도는 철저한 수송력 강화를 목적으로 교통 행정을 일원화시키기 위해 1943년 12월을 기점으로 철도국을 폐지하고 교통국을 설치하였다(조직은 제3편 조직표와 동일). 즉, 철도 운수 이외에 해운 및 육해 접속 지점의 항만 및 항공에 관한 행정을 종합 통일하여 교통국 소관으로 삼고, 아울러 통관 업무를 원활하고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세관 업무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직 개편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집중적으로 발생한 대륙 물자를 육로를 통하여 원활하게 운송하기 위해서였다. 고바야시 국장이 취임 직후인 1944년 초에 국원 전체에 전달한 연두훈시는 패색이 짙었던 전국에도 마지막까지 사력을 다하여 직무에 충실하도록 요구하는 내용이었으며, 마치 사지에 부임한 듯한 비장함이 엿보였다. 1944년 2월‘결전비상조치요강’이 제정되었으며, 노무와 자재를 중점적으로 운용하여 전력을 증강시킬 수 있도록 조기 완공이 불가능한 공사는 중지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같은 해 5월 이후 경전선, 청라선, 대삼선은 건설 시행중인 특수 구간을 제외하고 시공이 중지되었다. 그러는 동안 교통국 부내에서는 경부·경의·함경 각 노선에 걸쳐서 여객열차 감축과 화물열차 증가에 힘썼다. 1944년 4월 조선철도회사 황해선 전선(협궤 278.5km)을 매입하여 국유철도 황해선이라고 개칭하고, 사리원~하성 구간 41.7km는 광궤로 개축하는 동시에 이를 운영하기 위하여 같은 달에 해주철도사무소를 신설하였다. 이 밖에도 많은 시책이 잇달아 진행되었는데, 1945년 4월 시모노세키~부산 연락선인 고안마루(興安丸)가 어뢰에 부딪혀 운항이 정지되었고, 이어서 같은 구간의 연락선인 곤고마루(金剛丸), 덴잔마루(天山丸), 쇼케이마루(昌慶丸) 등이 적의 어뢰 공격으로 연달아 침몰 또는 운항 불능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해상 불안으로 인하여 화물들이 각 항구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태가 되면서 일본과의 운수교통은 거의 마비 상태에 빠졌다. 제6절 제2차 총독부 직영(제2기)기의 주요 업적 위의 기간의 중요 업적은 이미 언급한 사항 이외에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다. (1) 남조선철도의 전남 광주~여수 구간 매입(1936년 3월) (2) 철도국 국가 제정(1936년 3월) 철도국 국가는 집회 때마다 제창되어 정신 통일과 단결 강화에 큰 효과를 가져왔으며, 종전 후 40년이 지난 지금도 조선철도에 근무하다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인들에 의해 애창되고 있다. (3) 국우회관(局友會館) 신축 (4) 철도국 현업 공제조합의 부대사업으로 주택부를 신설하여, 1936년 10월 급증한 종업원의 주택 공급에 크게 공헌하였다. (5) 소련을 경유하여 부산, 서울, 평양과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독일, 폴란드 간 화물의 연락 수송 개시(1936년 1월) (6) 중일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북중국으로 파견하는 부대의 수송을 위하여 전노선에 군용열차 중심의임시열차 운행(1937년 8월 4일부터 같은 해 9월 30일까지) (7) 화물운임을 개정하고 운임률을 간소화하였으며, 차량 취급 최저 톤수를 15톤으로 정하고, 이 밖에도 택급(참고 3)제도를 신설하였다(1938년 2월) (8) 부산~베이징 구간 직통 급행 여객열차 운행 개시(1938년 10월) (9) 화북 교통선 간 여객 및 화물, 수하물 연락 운수에 대하여 협정을 체결함(1938년 10월) (10) 경원선 복계~고산 구간(53.9km)의 전철화공사 준공(1944년 4월) (11) 관동군 특별대연습 수송(1941년 12월) (12) 함경 본선의 일부 구간 복선화(1943년 2월) (13) 함흥에 철도병원 건립(1943년 12월) (14) 서선중앙철도회사 승호리~신성천 구간의 철도를 매입하여 평양탄광선에 추가(1944년 4월) (15) 조선철도 황해선 전 노선(278.5km)의 철도 매입(1944년 4월) (16) 조선 해상 물자의 일원적 수송 체제 확립(1941년 10월) (17) 압록강 수력발전회사의 전용 철도 만포역 구내~옥동 구간(37.1km)을 준공하고, 제방공사 자재 수송 개시(1944년 7월) (18) 교통국 공장에 현원징용(참고 4) 발령(1944년 8월) (19) 궤도 등을 철거하여 국철 공사로 전용시킴. 국유철도 광주선(21.5km), 경북선(58.2km), 사설철도 금강산전철(49.0km), 경남철도 경기선(41.4km) (20) 평양 신공장 조업 개시(1944년 11월) 제7절 지방 운수국 설치와 종전 1945년 8월 수송력 증강을 위하여 경성·부산 지방 교통국의 소관을 분할하여 평양과 순천 두 곳에 각각 지방운수국을 증설하였다. 그러나 같은 달 9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는 동시에 만주와 북한지역으로 침입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급변하면서 8월 15일 종전 조칙이 내려졌고, 지방운수국도 개설 준비를 마쳤을 뿐 제 기능은 수행하지 못했다. 이리하여 조선철도는 국유화가 된 이후 39년 만에 일본의 손을 떠나 점령군에게 계승되면서 그 막을 내렸다. ====================== 참고 3) 택급(宅扱) : 철도화물·화물수송의 일종으로, 15kg 이하의 소형 화물을 발송인의 주소에서 수취인의 주소로 배달하는 서비스이다. - 역자주 참고 4) 현원징용(現員徵用) : 주요 광산·탄광·군수공장의 노동자들을 일하고 있는 작업장에 징용하는 것으로, 무보수 노동을 강요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 역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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