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역사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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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운전 관계 법규류 발췌 | 2023.03.06 |
5 | 운전 시설 | 2023.02.27 |
4 | 차량(2) | 2023.02.20 |
3 | 차량(1) | 2023.02.14 |
2 | 열차 | 2023.02.14 |
국유철도의 운전 | |
운전 관계 법규류 발췌 | 2023.03.06 |
운전 관계 법규류 발췌 제1절 운전규정과 운전 취급심득 1900년 12월 경인철도 시대에 최초의 운전규정 및 신호규정이 규정되고, 이어서 경부철도 시대를 맞이하면서 1904년 12월 새로운 운전규정으로 이를 개정하였다. 그 후 국유화로 통일 경영 체제가 구축되면서 1908년 2월 통감부 철도관리국에서 운전규정 및 신호규정을 제정했다. 이 규정은 국철 산요선의 전신인 산요 철도 주식회사에서 제정한 운전 및 신호규정과 철도성을 철도 작업국으로 불렀던 시절의 운전규정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으로 1910년대를 거쳐서 시대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200여에 이르는 단행 규정을 정하여 운전규정의 미비함을 보충하였다. 철도성에서는 1924년 12월에 운전규정 및 운전 취급심득을 개정하고, 1925년 5월부터 실시하였다. 이에 개정이 시급하여 선로 기타 시설면을 고려하는 한편, 조선 만주 직통 운전 관계상 만철의 규정에 저촉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철도성 규정에 준거하여 개정하고 1927년 8월 양 규정을 통합하여 조선 국유철도 운전규정이 제정되고 조선총독부령 제82호로서 공포되었다. 이와 동시에 시행 규칙으로 운전 취급 요령이 1927년 8월, 달제549호로서 시달되고 동년 10월 1일부터 이를 시행하였다. 조선 국유철도 운전규정은 제1편 총칙, 제1장 통칙2조, 제2장 선로8조, 제3장 차량 11조, 제2편 운전, 제1장 운전32조, 제2장 폐쇄31조, 제3장 신호35조 계119조로 이루어졌다. 운전 취급심득 운전 취급심득 제1장 총칙 (1~2조) 제2장 운전 제1절 열차의 조성 (3~22조) 제2절 열차의 운전 (23~49조) 제3절 입환 (50~59조) 제4절 운전 속도 (60~68조) 제5절 유치 차량 (69~73조) 제6절 선로전환기 취급 (74~78조) 제7절 탈선기 취급 (78의 2~78의 3조) 제3장 폐색 제1절 통칙 (79~90조) 제2절 쌍신폐색기식 (91~95조) 제3절 통신 폐색기식 (96~97조) 제4절 통표폐색기식 (98~108조) 제5절 표권식 (109조~119조) 제6절 지도법 (120~131조) 제7절 격시법 (132~133조) 제4장 신호 제1절 통칙 (134~138조) 제2절 상치신호기 (139~155조) 제3절 임시신호기 (156~159조) 제4절 수신호 (160~172조) 제5절 발전 신호 (173~175조) 제6절 승무원의 신호 (176~185조) 제7절 표지 (186~197조) 제5장 사고의 처치 제1절 열차의 사고 (198~208조) 제2절 폭풍우 (209~210조) 제3절 차량 및 선로의 사고(211~216조) 제4절 폐색의 사고 (217조~222조) 제6장 잡칙 (223~227조) 제2절 관계 달시(達示) 조선국유철도선로종별(1927년 11월, 달 제882호) [조선 국유철도 선로 종별] 갑종 선로 : 경부본선, 경인선, 경의본선 을종 선로 : 동해선, 경전남부선, 진해선, 전라선, 경경선, 호남본선, 군산선, 경원선, 평남선, 함흥본선, 평원선, 만포본선, 혜산선, 청진선, 도문선 병종 선로 : 갑종 및 을종 이외의 선 열차 운전 명령 통보 및 정리 수속(1934년 4월달 제327호) 제1장 총칙 (1~2조) 제2장 운전 명령 제1절 운전 명령 송달 (3~9조) 제2절 열차 운전표 및 승무일지 (10~12조) 제3절 열차에 승무중인 차장 및 기관사에 대한 운전 명령 고지 방법(13~18조) 제3장 열차 운전 정리 및 관련 사항 통보 방법 제1절 운전 정리 방법 (19~24조) 제2절 열차 운전 정리에 관한 통보 (25~28조) 제4장 보고 (29~34조) 입환 수속(1927년 12월, 달 제1140호) 제1장 통칙 (1~4조) 제2장 열차의 조성 (5~7조) 제3장 종사원간 연락 (8~15의 2조) 제4장 입환 작업, 신호 및 선로전환기 취급(16~28조) (참조) 화물 수송 수속 및 운전 취급심득 운전 속도 기타 제한 본 선로의 운전에 허용되는 기관 차종별 제한(1929년 1월, 달 제37호) ■ 표준궤선 경부본선 : 각종 경인선 : ‘미카’ 및 ‘파시’형을 제외한 각종 경의본선 : 각종 용산선 : 소형 탱크에 한함 겸이포선 및 박천선 : 동 평양탄광선 및 신의주강안선 : ‘미카’ 및 ‘파시’형을 제외한 각종 평남선 : 동 호남선 : 동 경원선 : 각종 함경본선 : 각종 천내리선 : 소형 탱크에 한함 북청선·철광선 및 차호선 : ‘미카’ 및 ‘파시’형을 제외한 각종 혜산선 : 동 경전남부선(삼랑진·마산 구간) : ‘미카’ 및 ‘파시’형을 제외한 각종 경전남부선(마산·진주 구간) : 소형 탱크에 한함 진해선 : ‘미카’ 및 ‘파시’형을 제외한 각종 경전서부선(순천·전남 광주 구간) : 소형 탱크에 한함 동(전남 광주·송정리 구간) : 테호형 및 소형 탱크에 한함 광주선 : 소형 탱크에 한함(단, 당분간) 전라선 : ‘미카’ 및 ‘파시’형을 제외한 각종 동해남부선 : 동 동해북부선 : 동 평원서부선 : 동 만포본선 : 동 용등선 : 동 ■ 협궤선 백무선 : 협궤 기관차 각종 동해중부선(대구·경주 및 학산구간) : 동 개천선 : 동 주) 소형 탱크란 ‘바루’ ‘사타’형을 제외한 석탄 수조 장착 기관차를 말함. 곡선 및 전철부 통과 허용 최대 속도 표준에 관한 건(1927년 4월, 달 제211호) [본선곡선] [정거장 구내 및 전철부 분지 곡선] [차량 최대 속도 제한(운전 취급 요령 제60조)] 공기 제동기 취급 수속 공기 제동기 취급 수속(1925년 9월, 달 제355호) 제1장 총칙 제1절 개칙 (1~2조) 제2절 열차 조성 및 차량 해체 (3~9의 2조) 제3절 열차의 공기 제동기 검사 (10~11조) 제4절 객화차에 장치하는 공기 압력계 취급 및 사용 방법(12~18조) 제5절 제동 장치에 고장이 발생한 경우의 취급 방법(19~23조) 제2장 제동기 사용 방법 제1절 공기 압축기의 운전 (24~27조) 제2절 공기 제동기 사용 방법 (28~37조) 제3절 보조기관차 및 회송 기관차 (38~40조) 제4절 공기 제동기 사용상의 주의 사항 (41~52조) 차량 칭호 규정 차량 칭호 규정(1931년 5월, 달 제256호) 제1조 차량은 크게 기관차· 동차· 객차 및 화차로 구분한다. 제2조 기관차의 명칭 및 기본 기호는 아래와 같다. 제3조 동차의 명칭 및 기본 기호는 아래와 같다. 1. 명칭 및 기본 기호 증기동차 : 제 경유동차 : 케 중유동차 : 지 2. 여객 취급 설비가 있는 동차는 그 등급을 붙여서 ‘몇등 증기동차’ ‘몇등 경유동차’ ‘몇등 중유동차’라 칭하고 등급에 상당하는 기호(이·로·하)를 기본 기호 옆에 부기한다. 3. 선로 감사용의 경유동차는 직무용 경유동차라 칭하고, 그 기호를 ‘케시야’로 한다. 제4조 객차의 명칭 및 기본 기호는 아래와 같다. 1. 명칭 및 기본 기호 귀빈차 : 키히 특별차 : 토쿠 전망차 : 텐 1등차 : 이 2등차 : 로 3등차 : 하 침대차 : 네 식당차 : 시 수화물차 : 테 우편차 : 유 직무용차 : 시야 2. 침대차는 그 등급을 붙여서 ‘몇등 침대차’라 칭하고 기호에는 몇 등에 상당하는 기호를 부기한다. 3. 합조차는 합성하는 등급 및 용도에 상당하는 호칭을 제1호 명칭의 순서로 배열하여 칭하고 기호도 동일하다. 4. 경객차는 ‘경 몇등차’ 또는 ‘경 몇등 무슨차’라고 칭하고 ‘라’를 기본 기호에 붙인다. 제5조 화차의 명칭 및 기본 기호는 아래와 같다. 제6조 차량의 형식 기호는 아래 문자 중 1을 이용하여 순서에 따라서 기본 기호의 가장 말미에 오른쪽부터 부기한다. 단 기관차는 형식을 구별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만 그것을 부기하고 귀빈차 및 특별차는 부기하지 아니한다. 기관차 및 화차 이 니 사 시 코 로 나 하 쿠 치 동차 및 객차 1 2 3 4 5 6 7 8 9 10 제7조 화차(차장차 제외)에서 수용 제동기를 구비하는 것은 ‘부’를 형식 기호 다음에 부기한다. 제8조 차량 번호는 기관차에 있어서는 형식별로 적절하게 기준 번호를 정하여 순서에 따라서 부기한다. 단, 각 형식에서는 동일한 번호를 사용하지 않는다. 동차, 객차 및 화차에서는 명칭별로 1호부터 순서대로 부기한다. 형식이 동일한 차량은 가능한 한 연속하는 번호를 부기하고, 형식이 다른 차량 간에는 향후 증가할 동 형식 차량에 부기해야할 상당하는 번호를 보류한다. 제9조 당국 선내 소재의 연대선 소속 차량에 대해서는 아래의 선명 약자를 그 기호에 붙여서 구별 호칭으로 한다. 단, 남만주철도주식회사선 소속의 유개차 및 무개차에 대해서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선 : 마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북조선철도사무소선 : 호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소관 만주 국유철도선 : 코 조선철도주식회사 충북선 : 치 동 경북선 : 케 조선경남철도주식회사선 : 나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선 : 테 열차 운전 사고 처치 요령 열차운전사고처치요령(1930년 6월, 달 제410호) 제1절 통칙 (1~6조) 제2절 사고의 처치 (7~14조) 제3절 사고 상황 통보 방법 (15조) 제4절 사고의 원인 조사 (16~18조) 부칙(19조) 별표1 사고 복구 용구 일람 기관구의 부 검차구의 부 별표2 비상차 배치 장소 및 적재 품명 일람표 비상차 배치 장소 각선 주요 기관구 별표3 사고의 경우 사용 가능한 기중기 소재 장소 및 상태 일람표 기중기 소재 장소 부산·평양·청진 각 공장, 용산기관구, 백암역 별표4 복선기 소재 장소 일람표 각 기관구· 검차구· 보선구 참고 부록표1 철도 소재지, 담당 구역 및 구급상자 비치 열차 및 위치표 참고 부록표2 전기수 근무지 및 인원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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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운전 | |
운전 시설 | 2023.02.27 |
운전 시설 제1절 운전 보안 설비의 변천 폐색 시설 1906년 국유화 이전까지 경부철도의 열차 보안 방식은 폐색식을 원칙으로 하였는 데, 폐색기 설비가 정비되지 않았으며 1구간 1열차주의를 실행하기 위해서 전화 통신을 병용하여 명령권을 대용하였다. 단, 영등포-서대문 구간의 4구간만 평정식 쌍신폐색기(참고 9)를 사용하였다. 또한 군용철도 시대의 경의·마산 양선에서는 표권식을 이용하였는데, 1906년 5월 경의선에 폐색식을 병용하고 먼저 무산-서정(장단)간 기타 19구간에 고교식 쌍신 폐색기를 채용하였다. 통감부 철도관리국이 열차 업무를 통일한 이후, 이들 폐색 장치를 통일하기 위해서 단선 구간에는 타이어씨 터블릿식 단선용 폐색기에 의한 폐색식 보안법을 실행하고, 운행이 한산한 구간에는 표권식을 존속시키기로 하였다. 폐색 장치 교체 시에는 선로 상태와 열차 운전 회수를 고려해서 순차적으로 시행하고, 1908년 1월에는 경인선, 4월에는 경부선, 다음해 8월에는 경의선을 전부 타이어씨 터블렛식 폐색기로 교체했다. 영등포-노량진 구간은 통일 이전부터 복선으로 평정식(길게 뉘어 쌓는 방식) 쌍신폐색기를 사용하였으나, 1908년 3월 용산-남대문간, 동년 11월, 부산-초량 구간을 비롯하여 그 후 운전 횟수가 많은 구간을 대상으로 1939년 7월 대전-경성 구간, 1940년 4월 부산진-삼랑진 구간, 1942년 5월 경성-평양 구간을 복선화하고 각 구간 모두 쌍신폐색기 사용을 개시하였다. 지선에서는 당초 대부분 표권식을 채용하였으나, 점차로 통표폐색식(참고 10)으로 변경하였다. 1927년 이후 사설철도를 지속적으로 매수하였는데, 그 때마다 회사 시대의 명령권을 폐지하고 통표폐색기식 또는 표권식(통신 폐색식 병용)으로 변경하였다. 신호 시설 상치신호기는 처음부터 완목식 신호기를 채용하였다. 1908년 3월 신호규정을 제정하고 상치신호기를 장내·원방·출발·측선·입환 신호기의 5종류로 구분하고 장내 신호기 바깥쪽 일정한 거리에서 그 현시 신호를 투시할 수 있는 지형에서는 원방 신호기를 생략할 수 있다고 규정되었다. 그 후 측선 신호기를 폐지하고 엄호·유도 신호기를 추가하여 6종류로 하였다. 신호의 현시 방식은 구 신호규정에서는 열차를 정지시키는 경우를 위해 신호, 열차를 진행시키는 경우를 무난 신호라고 하였으나, 1927년 8월 운전규정 제정시 ‘정지신호’ ‘진행 신호’로 개칭하였다. 신호기 중 특수 설비를 설치한 곳은 다음과 같다. 브래킷식 신호기 : 상치신호기가 2개 이상이며 건식인 경우 지형 및 기타 사유에 의해서 지장이 있는 경우에는 브래킷식으로 하고, 1913년 12월 남대문역(현, 경성역)을 비롯하여 용산역, 부산역 등에 설치하였다. 방호 신호기 : 1913년 11월, 압록강 북안에 선별기를 장착한 남행 방호 신호기를 설치하고 압록강 개폐교와 복식 연동을 장치하여 안동역에서 신의주역을 향하여 출발하는 열차에 사용하였으나, 1934년 3월에 한시적으로 압록강 철교 개폐가 중지되어 본 기기의 사용도 중지되었다. 1917년 10월부터 겸이포역 구내에 본 기기를 한때 설치했다. 복식 신호기 : 부산역은 구내가 길며 곡선이고 대향 선로전환기 전부에 연동 장치를 설치하는 것이 곤란하기 때문에 1925년 12월 2일부터 잔교 본선장 내 및 출발 신호기를 복식 즉 제1장내, 제2장내 및 제1출발, 제2출발 신호기를 설치하여 운전 취급상의 불편을 크게 완화하였다. 전기식 원방 신호기 : 원방 신호기로 비교적 먼 곳에 설치되며, 와이어의 조절이 곤란한 경우에는 전동기 및 선별기를 장치해서 전기식으로 하고, 1927년 원산역 구내의 함경선 남행 및 용산역 구내의 경원선 남행 원방 신호기를 비롯하여 그 후 필요한 곳에 설치하였다. 접근 점등식 상치신호기 : 전원이 없고 유등을 이용한 역에 채용한 것으로, 전원으로 1차전지를 사용하고 전지의 소모를 피하기 위해서 접근 점등식으로 하고 평소에는 소등하고 열차가 있는 지점까지 접근하면 신호기의 전등이 자동으로 점등하고 열차가 통과하면 소등하도록 되어있다. 1937년 경부선의 신호소에서 시험적으로 이용하였다. 기존에 신호기는 완목식(참고 11) 밖에 없었으나 보안도 향상을 위해서 장내·출발·엄호·원방의 각 신호기에 색등식 신호기를, 유도 및 입환 신호기에는 등열식 신호기를 채용하도록 하고, 1939년 12월 이들에 관한 규정을 운전 취급 요령에 추가하였다. 자동 신호 시설 : 경부·경의 본선의 복선 공사는 1936년 6월부터 시작하고 1939년 7월 1일, 대전-경성 구간, 1942년 5월 7일, 경성-평양 구간의 복선 운전을 개시하였다. 이를 계기로 자동 신호화를 계획하고 1940년도 대전-경성 구간, 1941년도 경성-평양 구간의 자동 신호설비 예산이 의회를 통과, 즉시 공사를 진행하였다. 용산의 계전 연동 장치, 대전역의 전기연동 장치, 천안·수원의 제1종전 기기의 설치를 끝내고 1942년 경부본선 대전-경성 구간의 자동 신호 설비를 완료하고 자동폐색식을 시행하였다. 경의본선 경성-평양 구간은 종전에 의해서 공사는 미완성으로 끝났다. 반응 장치 : 상치신호기의 반응 장치로서는 처음부터 소형 완목식 반응기를 사용하였으나 그 밖에 특수한 것으로 전기 원판 반응기 및 출발신호기 반응표지를 사용한 적이 있다. 전자는 1918년 7월 남대문역, 1924년 3월 부산역 잔교에 설치하였는데 매우 비경제적으로 남대문역은 반응 표시에, 부산역 잔교는 완목식 반응기로 변경하였다. 또한 후자는 3개의 등열식(참고 12)으로 1922년 11월 경성역에, 그 후 용산역에 설치하였다. 선로 보안 시설 연동 장치 : 1908년 4월 연동기 장치에 착수하여 순차적으로 각 역에 간이 연동기를 설치하였다. 1912년 8월 용산 및 남대문역에 최초로 제1종 연동기를 설치하고, 이어서 다음해 8월에는 영등포역에, 그 후 점차로 운전이 복잡한 역에 설비하고 기존의 간이 연동기는 이와 구별하여 제2종 연동기로 개칭하였다. 계전 연동 장치 : 1942년 자동 신호 설비 공사의 일환으로 용산역에 계전 연동 장치 사용을 개시하고, 동시에 대전역에 전기 연동 장치, 천안역, 수원역에 제1종 전기기를 설치하였다. 피난선 및 안전측선 : 피난선은 1914년 경원선 삼방역에, 안전측선은 1916년 호남선 황등역에, 이어서 경부선 구미역에 설치한 것을 비롯하여 그 후 필요한 역에 차례로 설치하였다. 안전쇄정기 : 1913년 9월 이래 곡선 또는 구배 등으로 인해서 열차 진입시 위험의 우려가 있는 정거장의 대향 선로전환기에 안전 쇄정기를 설치하기로 하고, 먼저 초량·영등포·장단의 3역에 설치하고 그 후 점차로 다른 역으로 확대하였다. 탈선기 : 탈선기는 안전측선 시설을 대신하여 1935년 용산·경성역 등에 설치하였으나 취급에 관한 규정은 1936년 8월 탈선기에 관한 규정을 일괄적으로 제정하였다. 표지 : 1908년 3월 제정된 신호규정에는 전철 표지만 있었는데, 1927년 8월에 제정된 운전규정에서는 선로전환기 표지·차지 표지·열차 표지의 3종으로 구분하고 1936년 8월에 탈선기 표지를 추가하였다. 선로전환기 표지는 구 신호규정에서는 원판 및 그 등은 짙은 보라색, 널빤지 및 그등은 연한 주황색이었으나 1927년 8월 개정 후에는 중앙에 백색선을 그린 군청색 원판에 보라색 등을, 중앙에 흑색선을 그린 주황색 널빤지에 주황색 등을 사용하였다. 차지 표지는 본 선로의 종단·반환선·입환이 빈번한 측선 및 전차대 등의 정지선에 설치하고 철도부 타입을 채용했다. 열차 표지는 구 신호규정에서는 ‘열차 신호’라고 하였으나, 개정 후 ‘표지’로 하였으며 전부(前部)의 표지는 주간에는 걸지 않고 야간에는 기관차 전두의 중앙 상부에 백색등 1개를 달고 후부 표지는 주간에는 후부차의 양측 상부에 전방 백색, 후방 적색의 원판 각1개, 야간은 후부차의 양측 상부에 전방 백색, 후방 적색등을 각각 1개씩 점등했다. 제2절 기관구·검차구의 설비 증강 기관구 설비 차량은 공장에서 수선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당초 기관구의 설비로서는 기관차 보온상 기관차고와 약간의 공작 기계 외에 수선선에 설치된 피트 정도였다. 기관차고는 목조 사각형 차고에서 항구성 벽돌조 사각형 차고로 변경되었으나, 결국 입출고의 편의와 배연 등을 고려하여 부채꼴형 차고로 개조되고 1933년 대전·원산양 기관구가 새로운 형태의 차고를 선보이는 무렵부터 점차로 검수 설비도 정비되었다. 그러나 그 후 차량의 정지 일수를 줄이기 위해서 정기 검수에 중점을 둔 기술 향상과 설비 확충을 도모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점차로 甲檢중심의 검수 방식으로 이행하게 되었다. 1941년에는 운전 관계의 설비 증강을 도모하기 위해서 운전과에 설비 담당 차량 제2계가 탄생하고, 1945년 및 1950년 완성을 목표로 계속 사업으로 3억 6천만 엔의 예산으로 방대한 계획이 수립되었으나 이 중 1945년을 목표로 경부·경의 본선의 기관구 관계의 계획안을 대략적으로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신설) 부산 조차장·부산 입환·천안·수색 조차장·서평양 조차장·신의주 (증축 및 합리화) 대구·대전·평양 (개량) 부산·용산 (개축) 신막·정주 부산 입환 기관구 이외에는 A급 기관구로 하고 차고는 부채꼴로 중장비를 갖추었다. 부산 조차장 및 부산 입환 기관구 이외에는 착착 공사가 진행되고 1943년 9월에는 대구기관구의 갑형 부채꼴 차고가 준공, 1944년 가을에는 대전 ·평양 기관구에 점차로 빔잭이 신설되었다. 급탄 설비는 1932, 1933년경의 불황 시대에 이어서 교용 정책의 일환으로 기계력을 이용하는 급탄 설비는 억제되었다. 그러나 그 후 업무량이 급증하면서 점차로 요원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구에 따라서는 1일당 석탄 반출량이 700톤에 이르러 작업에 지장을 초래하였다. 응급조치로서 각 곳에 벨트 컨베이어를 설치했지만 이로서 충분한 것은 아니었으며 대전기관구에 도어형 크레인이 설치된 것은 종전 직후로 그때는 이미 뒤늦은 느낌이 들었다. 급수 설비는 다른 분야에 비하여 상당히 진행되었는데, 기관차의 장거리 승계 운전과 급행열차의 정차 시간 등을 고려하여 경부·경의 본선을 주요 간선, 경원·함경 본선 및 경경선을 간선, 기타 본선을 준간선으로 하고 각선 모두 승계역의 기관차 1분당 급수량을 각각 8㎥, 6㎥, 5㎥으로 정하고 이를 기본으로 저수조, 급수지의 위치, 도배 수관의 구경 등을 정비하였다. 검차구 설비 검차구도 설립 : 당초에는 특별한 설비가 없었으며 중요한 검수선도 역의 유치선을 이용하였으며 검사 수선에 적합한 선이 아니었다. 차고도 오래된 기관차고를 이용하는 정도로 대부분은 노천 작업이었다. 검사 및 취급에 불가결한 물, 공기, 증기 배관만큼은 필요 최소한도로 설치하고 기계 설비로서는 공기 압축기와 보일러 정도로 공작 기계도 대단한 것은 거의 없었다. 구에 따라서는 입환기를 사용하여 제동 시험 및 난방의 예열 작업을 실시하는 곳도 있었다. 단, 객차 세척과 충전 설비는 불충분하였지만 상당히 오래전부터 설치되었으며, 주요구에는 트롤리선을 이용하여 진공청소기를 사용하였다. 그 후 차량 검수 설비의 충실화가 도모되면서 점차로 현장 설비도 정비되고 종전 전에 신설된 수색·경북 안동 등의 검차구는 매우 참신하게 정비되었다. 직영 연탄 공장 건설 계획 철도용 연료 사정 : 조선에서는 철도용 연료에 적합한 유연탄의 현지 생산이 부족하여 일본탄(규슈탄, 홋카이도탄) 및 만주·북중국탄 등을 수입하여 조선 내에서 산출되는 갈탄은 본국 운전과에서 시험 연구를 거듭하여 가장 효과적인 혼탄 기술에 의해서 열량 증가상 사용하도록 하고 조선 내에서 산출되는 무연탄은 분탄이었기 때문에 피치 연탄을 만들고 약 7,000kcal의 우수한 연료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점점 치열해지는 전황과 함께 선박 부족에 의해서 일본탄 이입이 어려워지고 북중국탄의 수입도 원활하지 못하여 외래탄 입수가 극도로 어려워지고, 한편 조선 내에서 산출되는 무연탄 점결제에 사용되는 피치는 전시 하에서 긴요한 항공기용 경금속 제조용에 사용되어 연탄생산이 여의치 않아 철도 연료 공급은 위기에 빠졌다. 1941년도의 조선 내 연료의 사용량은 조선산 유연탄 280만 톤, 무연탄 400만 톤, 수입탄 239.4만 톤으로 총 919.4만 톤이었는데, 태평양 전쟁 발발 후인 1942년도에는 조선산 유연탄 273만 톤, 무연탄 393만 톤, 수입탄 290만 톤 총 956만 톤이었으며, 1943년도가 되면 조선산 유연탄 243만 톤, 무연탄 415만 톤, 수입탄 290만 톤 총 948만 톤으로 약3분의 1의 262만톤은 철도용탄으로 사용하였다. 전가 화물의 수송과 여객열차 삭감 : 1943년 전쟁이 격화되면서 이미 해상 수송 물자의 육상 전가 및 기타 중요 물자의 조선 경유의 대량 수송이 강력하게 요청되고 어려운 연료 사정 하에서는 여객열차 감축은 피할 수 없었다. 즉 1943년 4월의 운행 시각 개정으로 부산-봉천 구간 직통 여객열차 1왕복을 폐지하고 여객열차의 속도 저하, 연결차수가 증가하여 10월에는 경성-부산간 급행여객열차 ‘아카쓰키’의 운행을 중지하였다. 1944년도에 전가 화물 380만톤을 요청하고, 10월의 운행 시각 개정에서는 부산-북경, 부산-하얼빈, 경성-목단강 각1왕복씩만 남기는 등 여객열차를 대폭으로 축소했다. 이로서 1942년 10월에는 여객열차 대비 화물열차의 주행 길이의 비율이 45% 대 55%였는데, 1944년 10월에는 15% 대 85%로 철도 수송도 결전 태세를 갖추었다. [1944년도 철도용 석탄 수급 계획](총계 306.0만톤) ○ 외래탄 규슈 57.0만톤 사할린 11.0만톤 만주 39.3만톤 북중국 23.7만톤 계 131.0만톤 ○ 조선탄 유연 87.0만톤 무연 38.0만톤 연탄 50.0만톤 계 175.0만톤 1945년도에는 366.0만톤으로 추정되었으나, 석탄의 수요 대비 공급 실적은 1943년도에 88%였던 것이 1944년도에는 76%, 1945년도에는 65%로 저하되었다. 이렇게 1944년도에 들어와 철도용 석탄 입수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즉, 8월부터 규슈탄의 생산 감소로 인해서 조선으로의 이출 정지, 선박 사정에 의한 가라후토탄(사할린) 삭감 및 북 중국탄의 발송 정지 등 악조건이 겹쳐서 보유 저탄 소비, 해군 연탄 및 예비 발전용 탄의 일시 차용 등으로 열차의 계획 운전을 속행하였는데 11월에는 저장한 3만 톤이 바닥이 드러나 철도용탄 1일 소요량 약8,300톤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입수량은 겨우 약6,000톤으로 떨어져 열차가 크게 지연되고 일부에서는 부득이하게 운행을 정지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연탄의 대 증산 계획 : 1945년도에는 연료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공무·자재·전기·공작 운수과에서 연초부터 연탄 대 증산 계획에 대해서 협의를 거듭하여 정부군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노력했다. 계획의 골자는 교통국 기술 연구소에서 연구한 대용 점결제를 사용하여 연탄의 대량 증산을 도모하는 것으로, 피치를 사용하지 않고 니탄과 시멘트 제조 과정에서 다량으로 배출되는 더스트(고체입자)와 소량의 시멘트를 혼합해서 제조한 것으로 다량의 제조가 가능하며 이 연탄은 대압, 대수 및 연소 상태에서도 좋은 성적을 나타내었다. 한편 무연탄의 대 증산 계획이 수립되어 1944년도 이미 발열량 6,400~6,800cal의 무연탄이 고원·삼척에서 총 75만톤 산출되고, 1945년도에는 덕천·단양도 추가하여 총 315만톤을 예상하였다. 연탄 공장 건설 계획 : 당초 계획으로는 1945년도 말을 계기로 일거에 300만톤을 제조하여 철도용 연료의 조선 내 자급자족을 계획하였다. (1) 현재 민간 공장 시설의 전력 운전에 의한 연간 생산량 64만톤 (2) 제1차 연탄 공장 건설 계획 36만톤 (3) 제2차 연탄 공장 건설 계획 100만톤 (4) 제3차 연탄 공장 건설 계획 100만톤 합 계 300만톤 회의를 거듭하여 1945년도에는 (1), (2) 를 특히 교통국으로는 직영 연탄 공장에 총력을 기울여 연간 36만톤을 목표로 돌파 공사를 진행하였다. [제1차 연탄 공장 건설 계획] ○ 부산 지방 교통국 김천 : 10톤 1기(홍중) 8월 중순 대전 : 8톤 1기(송촌) 10월 말 이리 : 10톤 2기(홍중) 10월 중순 1기/11월 중순 1기 ○ 경성 지방 교통국 신막 : 10톤 2기(홍중) 9월 중순 1기/10월 중순 1기 사리원 : 10톤 1기(홍중) 9월 중순 정주 : 8톤 2기(송촌) 11월말 1기/12월말 1기 ○ 함흥 지방 교통국 원산 : 8톤 2기(송촌) 9월 말 신북청 : 10톤 1기(홍중) 8월 중순 달시 : 1945년 7월 28일 조선총독부 교통국 공보 제494호 달갑 제434호로서, 1945년 9월 1일부터 지방교통국 운전부 차량과의 사무 분장에 연료 및 윤활제를 추가하고 달갑 제435호로서 1945년 9월 1일부터 철도사무소 운전과의 사무 분장에 연탄 제조를 추가하고, 또한 달갑 제436호로서 1945년 9월 1일부터 현업 종사원직제 제1조 중에 연탄 공장을 추가하고 연탄 공장장 이하 11직종을 열거하였다. 제2조 중에 다음과 같은 조직을 추가하였다. 연탄 공장장-사무조수-사무계-공장수 연탄 공장장-사무조수-조도계-창고수 연탄 공장장-사무조수-경비계 연탄 공장장-기술조수-기술계-조기수 연탄 공장장-기술조수-기술계-연탄수 이하 각 종사원 업무 내용에 대해서는 생략한다. 운영은 지방국 소속으로 하고, 소재 기관구장이 연탄 공장장을 겸임하고 자재과 업무를 겸무하여 원료의 입수 등을 배려하고 1기당 종사원 약80명으로 준비가 진행되었다. 김천·신북청에서는 4월경부터 기초 공사에 들어가 기계 입수 계획을 수립하고, 자재 공여에 대해서도 입수가 어려워 관계 각과에서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이렇게 관계자의 노력이 결집하여 철도국 직영 36만톤, 민영 64만톤으로 총 100만 톤의 제1차 계획, 나아가 제2차, 제3차 건설 계획으로 총 300만톤의 연탄을 생산하여 조선 내 자급을 목표로 하였으나, 8월 15일 종전을 맞이하여 꿈으로 사라졌다. =============================== 참고 9) 열차의 추돌 위험을 막기 위해 선로에 적당한 구간을 만들어 한 구간에 한 개의 열차만을 운전하도록 하는 방법을 폐색방식이라 한다. 가장 일반적인 상용폐색방식은 단선운전구간에는 자동·연동·통표식이 쓰이고 복선운전구간에는 자동·연동·쌍신식이 쓰인다. 이 중 쌍신폐색식은 인접 역간의 열차발착을 전화통고하며 이를 상호 협동동작으로 쌍신폐색기에 기록하는 방법이다. 국내에서는 1905년 10월 영등포~서대문구간에 처음 쌍신폐색기가 설치되어 1932년까지 사용되었다. 나무와 철로 만든 전화기 모양의 이 폐색기는 440×300㎜ 정도였다. 그런데 이 폐색기는 상대역 사이에 송착전류 없이 신호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열차를 출발시키기 때문에 보안도가 낮았다. 따라서 1932년에 전기 수선장에서 고안된 한국철도형 특수 쌍신폐색기가 보급되자 사용이 중단되었다. 참고 10) 통표식은 과거 사용하던 폐색 방식의 하나로, 통표라 불리는 운행 허가증을 특정 철도역 간에 1개를 지정해 구비하고, 이 통표를 가진 열차 만을 해당 구간에 운행시킴으로서 열차의 안전을 담보하는 방식이다. 통표는 말 그대로 허가증으로서의 기능만 하며 기계적인 역할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해당 구간의 허가증임을 구분 가능하기만 하면 족하며, 그래서 원반형이 아닌 바톤이나 코인, 메달 같은 형태여도 무방하다. 이런 이유로, 구 일본 국철에서는 통표식이라는 명칭을 썼으나, 스타프(지팡이, 봉) 폐색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참고 11) 기둥의 상부에 직사각형의 완목을 설치하여, 완목(가로대)의 각도에 의해 신호를 나타내는 신호기(信號機). 사람 손으로 레버를 움직이고, 그 운동을 케이블로 전달하여 신호기의 가로대를 움직이는 기계식으로 되어 있다. 철도 창업기에 영국에서 고안되어 세계적으로 채용되었으나, 배경(背景)이나 역광(逆光) 등에 의해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곤란하다는 등의 결점 때문에 색등식 신호기(色燈式信號機)의 채용에 따라 최근에는 희귀하다. 참고 12) 2개 이상의 백색등(白色燈)을 사용하여, 등(燈)의 배열이 수평·경사·수직으로 되도록 점등(點燈)하여 신호(信號)를 현시(顯示)한다. 주로 입환신호기(入煥信號機) 등에 사용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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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운전 | |
차량(2) | 2023.02.20 |
차량(2) 제3절 객화차 객화차의 증비 객차 : 1906년 통감부에 인계된 객차 수는 155량이었다. 인계 객차의 대부분은 미국제로. 그 후 수차례 개조되어 2,3등차 로하3, 로하4형 기타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차종을 변경하였다. 그 밖에 러일전쟁 시 노획하여 개조한 객차에 귀빈차, 3등차 등의 10량이 있었다. 1911년 조선-만주 직통 열차의 운전이 시작되고, 급행여객열차 증설 등에 의한 객차의 수요 증가에 의해서 동년에 3등 객차 6량, 우편 수화물 완행차 6량, 수화물 완행차 14량 및 1,2등차 6량을 증비하였다. 이어서 1913년에 특별차 2량, 1914년 식당차가 달린 1등차를 수입하고 만주철도에서 3등차 수하물차 등 26량을 구입하였다. 그 결과 1913년도 말 운용차는 268량이 되었으며, 1914년 67량, 1915년 2량, 1916년 23량, 1917년 47량 등 매년 증비하여 1917년도 말에는 407량을 보유하기에 이르러 1910년에 비하여 248량이 증가하였다. 그 후에도 다음과 같이 매년 설비를 증비하여 1929년에는 742량(그밖에 협궤 75량)에 이르렀다. [객차 증비 량 수(1918~1929년)] 1918 : 13 1919 : 3 1920 : 7 1921 : 41 1922 : 23 1923 : 46 1924 : 24 1925 : 28 1926 : 26 1927 : 33 1928 : 33 1929 : 58 증비차 중 중요한 것을 들어보면 전망 1등 침대차 5량, 1등 침대차 5량, 2등 침대차 17량, 3등침대차 5량, 식당차 6량, 3등차 65량으로 조선-만주 직통여객열차 기타 여객열차의 증비에 대비한 것이다. 1932년 12월 운전을 시작한 경인선의 경쾌 열차용으로 라하1, 라로하테형 등의 경 객차를 증설하는 동시에, 그 후 열차의 속도 향상, 설비 개선을 위하여 주요 여객열차에 편성된 전망 1등 침대차, 2,3등침대차, 3등차, 식당차, 수하물차 등을 증설하였다. 1936년, 특급 ‘아카쓰키’의 운전을 시작으로 조선-만주 직통열차가 대폭으로 증설되고, ‘아카쓰키’용으로는 경전망 1등차, 경2등차, 경3등차, 경식당차, 경수하물차 등의 경객차 및 국제 열차용 공출차로 전망 1등 침대차, 1등 침대차, 3등침대차, 식당차, 수화물 등의 각 편성차를 대량으로 증설했다. 화차 : 1906년 통감부 철도관리국에 인계한 화차는 총 636량이었다. 그 밖에 러일전쟁 시 노획한 소형 무개차 및 수조차 총 346량 및 26톤 유개차 100량이 차량 자급 방침의 제일보로 철도공장에서 제작되는 등 1,186량이 운용되었다. 1911년 149량, 1912년 110량, 1913년 93량, 1914년 64량, 1915년 2량, 1916년 170량, 1917년 100량으로 매년 증설되어 유개차 712량, 무개차 1,162량, 총 1,874량에 이르렀다. 1918년 이후 1925년 9월까지 당국 공장에서 990량을 새로 제작하고, 소형 무개차 98량을 폐차한 결과 유개차 1,567량, 무개차1,199량으로 총 2,766량이 되었다. 10톤형 소형 무개차는 1921년에 342량이 남아있었으나, 이 사이에 76량을 사철에 양도하고 1925년 9월말에는 266량이 되었다. 그 밖에 화차는 모두 보기차로 적재량도 18톤에서 26톤으로 증설되었으며 공기 제동기 또는 열차관(列車管)을 갖추었다. 1925년경 노후된 유개차 21량, 무개차 7량을 폐차하였으나 1917년부터 매년 120량, 153량, 162량, 140량, 131량으로 증설되어 1917년 말에는 유개차가 1,799량이되어 232량이 증가하고 무개차는 1,645량으로 446량이 증가하였다. 1932년 이후에도 주로 유개차, 무측차, 석탄차, 차장차 등을 증설하고 새로 1934년 가축차, 1935년 제설차를 배치했다. 협궤선에서는 1927년 전북철도, 1928년 경동선을 매수함으로써 1927년 유개차 21량, 무개차 32량으로 총 53량이 추가되고, 1928년 말 유개차 102량, 무개차 120량 총 222량이 되었다. 이어서 1931년 말에는 유개차 167량, 무개차 152량으로 총 319량이 되었다. 또한 백무선 영업을 개시하면서 백무선용 유개차, 무개차 특히 장척 목재 수송용 15톤형 무측차를 증비하였다. 1935년경부터 화물 수송량이 격증하여 1940년에는 화물수송톤수 866.8만톤, 환산 화차운행 거리 103.6백만km로 모두 1935년에 비하여 2배 정도 증가한 수치를 나타내었다. 이에 대응하여 화차 신규 제작도 점차로 활발해지고 화차수도 1933년 3,997량이었던 것이 1938년에는 6,634량으로 연평균 527량이 증가하였다. 종전 시에는 15,247량으로 이 사이 연평균 1,230량이 격증하였다. 증설된 차종은 유개차, 무개차, 무측차, 석탄차, 광석차, 차장차, 가축차, 보온차, 통풍차 및 협궤선용의 유개차, 무개차 무측차 등 다양하였다. 객화차의 배치와 운용 객 차 대륙의 가교라는 사명을 짊어진 철도로서 열차의 설정은 물론, 이에 따른 객차 배치 운용은 모두 간선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즉, 조선·만주·중국 직통 열차의 시발역인 부산과 경원·함경선 담당의 경성역을 중심으로 호남선 담당의 대전역, 만포·평원선 담당의 평양역 등 주선구 여객열차 담당 역을 우선으로 각각 소요 객차를 배치하고 수송 요청에 따른 운용 계획을 수립하였다. 따라서 우등차는 경성역에 배치한 경원·함경선용의 침대차, 식당차 및 경부·경의선용 예비차 이외에는 거의 부산역에 항상 배치하였다. 준간선·지선구에는 구형의 3등차, 2·3등차 및 수화물·우편차 등의 합조차 등이 배치되는데 지나지 않았다. 1940년도 말의 검차구별 담당 객차 량수는 다음 표와 같다. ( )안은 분구·주재소 담당을 외역으로 표시. 조선·만주·중국 직통열차에 사용되는 객차는 직통열차 운전 선구의 영업거리에 따라서 각 철도에서 공출하도록 하고, 열차 운행 시각 개정 시마다 편성 객차의 담당 분담을 결정하였는데, 조선철도의 객차로서는 1925년경의 대표적인 3등차 하7형 및 특급 ‘아카쓰키’용 차량처럼 경량화된 하9형 및 조선철도가 자랑하는 3등침대차 및 우등차 등이 주로 투입되었다. 조선 내 여객열차용으로는 경인·평남선 등의 근거리 열차에서 호평을 받은 경객차 라하1형, 구간 열차용으로 좌석 정원을 늘리기 위해서 창설 당시의 3등차 하3형처럼 팔걸이를 배치하고 차체를 하9형의 구조로 한 하4형 3등차 등이 있었다. 이 밖에 과거에 조선·만주 직통 열차용으로 활약한 하5.6형 3등차 및 주로 안전을 위주로 제작된 강제 3등차 하8형 등을 조선 내 직통 여객열차용으로 충당하였다. 화 차 화차는 상비역이 정해진 차장차, 비상차, 제설차, 각종 조차, 기타 특수차 및 운전 보안상의 제한 차 이외에는 운용상 어떠한 규정도 없이 공통으로 사용하였는데, 중일전쟁 후 조선·만주·중국 직통차에 대해서 격렬하게 논의되어 직통 화차는 와시프형 유개차, 토시프 형 무개차, 치사프 형 무측차 및 석탄차 등 주로 조선·만주·중국 차량 설계 기준에 따라서 설계된 반강제 화차로 한정되었으며, 남은 목제차는 조선 내 각 선에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조선 내 및 국지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특수차에는 치코프형 50톤형 무측차, 티로프형 저상차, 호퍼식 석탄차·저개 광석차·탱크차·냉장차·통풍차·가축차·제설차 등이 있었다. 또한 백무선에는 협궤이면서 표준궤선 화차와 동일한 장비를 갖춘 적재량 15톤급의 유개차와 무측차가 목재 수송에 이용되었다. 또한 차장 차에 대해서는 전기 장치 및 난로 취급, 청소 관계상 특히 운용을 엄수하도록 하였다. 객화차의 검사 및 수선 객화차의 검사는 당초에는 공장에서 실시하는 정기검사와 역구내에서 실시하는 보통검사의 두 가지였으며, 보통검사에서는 구 소재지의 역에서 발착하는 열차마다 차량의 주행 부분을 중심으로 검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축상에 오일을 보충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검차구를 창설할 무렵에는 제작시의 입회검사와 부분 정기검사의 두 가지 정기검사가 추가되고, 제작 시 검사에서는 일단 있는 모습 그대로 차량별로 전반적으로 면밀하게 검사하도록 하고, 부분 정기검사에서는 제동 장치, 연결 장치 등 중요 부분을 분해 검사하도록 규정되었다. 그 후 차량 구조의 현저한 개량 진보와 함께 보수 기술 향상이 강력하게 요청되었으며, 기존의 검사 규정에도 불합리한 점이 지적되었다. 동시에 대륙 철도의 직통 운전과도 관련되어 1938년 대륙 4철도(조선철도, 만주철도, 화북, 화중)간에 규정 통일을 도모하여 수차에 걸친 타협 결과 일반 갑·을·병의 4종의 정기검사와 시발·종착·도중·체류의 4종류의 열차검사로 구분하고 검차 업무로서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일반검사는 객차 1년, 화차 3년마다 공장에서 실시하는 정밀검사이며, 갑종검사는 18개월마다 화차의 주행장치, 연결장치를, 을종검사는 6개월마다 제동장치, 급수장치, 냉방장치, 전기장치, 객차 축상, 화차 회전축을 검사 확인하도록 정하였다. 병종 검사는 기존의 제작 시 검사에 필적하는 것으로 객차 30일, 화차 45일 이내에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 밖에 겨울철의 난방 장치 취급과 증기식 냉방 장치차를 도입한 열차를 대상으로 승무 검사를 실행하였다. 또한 대륙 철도 간 직통 차량의 입회 검사는 열차검사에 한정되며, 정기검사는 모두 차량의 소속 장소에서 시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따라서 직통차의 다음 번 검사 기일에 특히 유의하는 한편 입회 차는 우선적으로 수리하도록 명하였다. 열차의 운행이 혼란해진 종전, 관동군의 특별 명령으로 화차의 병종검사에 한하여 인입철도측에서 시행하도록 하여 긴박한 수송 요청에 대응했다. 또한 객화차의 수선도 기관차와 마찬가지로 정기검사에 따른 일반 수선과 돌발 고장에 의한 임시 수선의 2가지 태세 하에 보수에 만전을 기하였다. 검차구에서의 수선 범위는 규정에 의해서 한정되었는데, 입장 및 기타 관계로 당초에는 요원 및 자재면에서 상당히 여유가 있어서 윤축·자련 교체는 물론 객차의 차체 이외의 부분에 대해서도 수선을 실시하였다. 객화차 고장 중 가장 주의한 부분은 차축 발열과 냉난방 고장이었는데, 모두 겨울철에 많이 발생하였으며 여름과 겨울철의 차축 오일 교체, 축상의 뚜껑 개조 기타 제반 대책을 강구하였다. 객화차의 청소 객차 청소는 여객 서비스를 위한 것으로 당초에는 열차 종착역장의 책임 하에 시행되었는데, 차량의 보수와 청소에 시간적 차이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청소와 검수를 동일한 부서가 책임을 지고 실시하기로 하고 담당 구역을 변경하였다. 그 후 객차 청소 업무에 대해서 규정하여 대청소·간단한 청소·특별 청소의 세 가지로 구분하고 대청소·간단한 청소는 시행 장소와 시기를 객차 운용표에 따라서 실시하였다. 대청소는 일정한 거리를 주행한 경우 차를 세척선에 넣어서 외부 세척을 중심으로 유리창, 의자, 세면대, 화장실 등을 전반적으로 청소하는 것이며, 간단한 청소란 열차 종착시마다 승객이 접촉하는 부분이나 눈에 잘 띄는 부분을 중심으로 실시하는 청소이며, 특별 청소란 평소에 자주 손이 가지 않는 부분(천장, 측판측)의 약품 세척 및 바닥 세척 등을 실행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차장차 청소는 객차에 준하여 실시하였으나, 기타 화차에 대해서는 냉장차의 외부 세척 이외에 하역 후 역의 책임 하에 간단한 청소에 준하여 실시하였다. 객화차 부속 장치의 취급 난방 장치 열차의 증기난방은 1910년대 경부·경의 본선의 여객열차에 채용된 것을 시작으로 당시에 대부분의 객차에 고압식 난방 장치를 설치하였다. 이 장치는 구조가 간단하며 난방 효과도 좋고 예열에 필요한 시간이 짧다는 이점이 있지만, 열차의 연결 차량수가 많아지면 후부 객차의 난방 효과가 떨어지고 응결수가 동결하고 가압 밸브 취급이 어려운 점 등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 후 점차로 대기압식 난방 장치로 바뀌었다. 대기압 식 난방 장치의 결점은 예열에 시간을 요하기 때문에 예열 설비가 불완전한 장소에서는 발차 전까지 소정의 실내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 상당히 곤란하였다. 또한 객차 내의 최고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동시에 증기의 낭비를 억제하기 위해서 1921년 일부 객차에 골드식 전기 정온 장치를 설치했다. 경부·경의·경원·함경 기타 주요선구의 급행 여객 및 여객열차 이외에는 난로를 사용했다. 난방 장치의 취급 방법에 대해서는 1924년 5월 철 운 갑 제39호의 ‘객화차 난방 및 급수 장치 취급 요령’에 지시되었다. 즉, 난방 사용 기간은 혜산선·백무선은 10월 1일부터 익년 6월 30일까지, 그 밖에 경성을 중심으로 북부는 10월 1일부터 다음해 5월 31일까지, 남부는 10월 15일부터 다음해 4월 30일까지로 하고 난방 호스 및 난로 설치는 사용 1개월 전부터 개시하여 철거는 사용 폐지 후 1개월 이내에 종료하도록 정했다. 운전 중의 차실내의 표준 온도는 섭씨 15~20도로 하고, 기관차에서 열차에 공급하는 증기 압력은 최고 7kg이며 연결 차량수와 외기 온도를 감안하여 상황에 따라서 표준 압력을 제시하였다. 급수 장치 급수 장치의 수조는 당초에는 천장에 설치하였으나 객차의 운용 거리가 증가하면서 용수 부족을 초래하여 점차로 압력 공기를 이용한 바닥 수조식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식당차에 대해서는 열차에 연결되지 않는 경우 물의 이용을 고려하여 천장 수조를 함께 설치하였다. 수양(水揚) 장치의 공기는 제동용 공기 저류소에서 보내지므로 도중에는 역지 밸브, 감압 밸브 등을 설치하였는데, 공기 제어에 대한 영향을 고려하여 밸브류 검사에 특히 주의하였다. 또한 수조의 급수·배수시의 취급, 특히 배수관의 배수에 대해서는 동결 고장방지를 위해 면밀하게 지시하였다. 냉방 장치 냉방 장치로서는 1931년경 빙수식 장치가 설치되었다. 이는 냉수 분무 중에 공기를 통과시켜서 차내를 순환시키는 간단한 장치였다. 1935년경에는 기계식 냉방 장치가 시험되었다. 그 무렵 만주철도에서는 특급 ‘아시아’의 전 차량에 캐리어식 증기 분사 냉방 장치를 설치하였는데 마침 북경 급행열차에도 동일한 타입의 냉방 장치를 설치한 만주철도의 식당차와 전망 1등 침대차를 도입하고, 조선·만주·화북 3자 간에 수차례에 걸쳐서 협의와 현장 강습회를 개최하는 등 취급에 신중을 기하였다. 그러나 증기관에서 누설은 없었지만 배기 밸브나 최후부에서 분무하는 증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열차 전부의 고객의 고통은 컸다. 전기 장치 차량의 조명은 당초에는 초가 이용되었으며, 그 후 유등에서 전등으로 바뀌었다. 유등은 1920년대 중반까지 혼합 열차용 객차 및 차장차에 상당히 많이 사용되었다. 차량의 전등 장치는 1912년 12월 경부·경의 직통여객열차 및 경인선의 객차에 사용한 것을 시작으로 당시에는 스톤식 AZCZ형 발전기와 7, 9, 11장 정도의 축전지가 중심이었는데, 그 후 차량의 개량과 함께 부하 전류도 점차로 많아지고 발전기에 리리프트식 L3, L4, L5형 등이 채용되고 축전지도 19, 21장으로 용량이 큰 것을 이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구형 객차는 L3형 발전기와 11, 13장 정도의 축전지를, 일반차는 L4형 발전기와 15, 17장의 축전지를, 우등차는 L5형 발전기와 19, 21장형 축전지를 설치하였다. 당시로서는 전 차량에 발전 장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발전기, 축전지를 설치한 객차를 모차, 무장비차를 자차로 구별하고 각 차마다 출력과 부하 전류를 산정한 전등계산율을 제정했다. 열차 조성 시에는 이 전등 계산율을 기준으로 운전 상황을 고려하여 과부하 또는 과충전이 되지 않도록 모차(전원이 공급되는 기본적인 차)와 자차(전원이 공급되지 않는 차)를 적당하게 조합하여 객차를 편성하도록 하였다. 그 후 전기 장치가 현저하게 발전하여 경부선 여객열차에 일제히 점멸 장치를 사용한 것을 비롯하여 특급 ‘아카쓰키’에는 차내 방송 장치를 설치하는 등 여객 서비스 면에서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 특수 화물의 취급 산업의 발전과 함께 철도 화물에도 대형품 및 귀중품 등이 점차로 증가하고 이들 특수 화물 수송의 안전을 기하기 위해서 화물운송규칙에 화물폭 제한, 하중 부담면 제한 등 화물적재에 관한 조항을 마련하였다. 화물 수송 신청을 받으면 역에서 검차구에 연락하고, 검차구는 적재 전에 미리 화물의 중량, 치수, 형태 등에 따라서 적재 화차, 적재 치수 및 적재 후의 윤곽 치수 등을 결정하고 이를 철도사무소에 보고하였다. 철도사무소는 철도국을 통하여 수송을 수배하는데 이 경우 경유선, 운전 속도 지시, 선로 주변의 장해물 철거 등 임시 조치를 강구하여 수송에 안전을 기하였다. 상황에 따라서는 수송 화물의 모형을 화차에 설치하여 시운전을 실시하였다. 제4절 운전 성적 통감부 철도관리국 인계 당시에는 시설 및 기타 면에서 영업거리에 비하여 열차수가 적어서 1906년의 기관차 거리는 332만km에 지나지 않았다. 그 무렵의 기관차는 소형으로 운전 속도도 낮았으며, 연료는 주로 일본탄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기관차 1km당 석탄 소비량은 15.05~17.87kg으로 비교적 적고 기통유의 소비량도 100km당 0.50~0.65ℓ 로 모두 양호한 성적을 남겼다. 제1차 직영시대에 들어오면서 열차 증설, 신선 영업 개시에 의해서 1910년에는 영업거리가 1,085.6km가 되고, 기관차 거리도 동년에 420만km, 1917년에는 931만km로 2배로 증가하였다. 따라서 석탄 소비량은 총량으로 2.6배로 증가하고 1km당 기관차의 형식, 탄종의 변화, 견인 차량수의 증대에 의해서 16.60~19.53kg으로 증가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또한 기름소비량도 1910년부터 6년간의 증가율은 총량으로 기통(참고 8)유 2.9배, 기계유 1.8배, 기관차 100km당 기통유 1.3배, 기계유 0.9배였다. 1916년경부터 제1차세계대전의 영향으로 경제계가 활황을 띠었으며, 만철에 위탁경영된 3개년간은 철도 수송도 공전의 활황을 보였다. 기관차 운행 거리는 1917년부터 3개년에 각각 931,977,993만km이었으며 1919년에는 1910년에 비하여 2.36배가 되었는데 1920년경부터 그 반동기에 들어가 여객, 화물 모두 격감하였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정기 화물열차의 일부 운전이 중지되고 1920년의 기관차 거리는 약 844만km로 전년보다 약 150만km 감소하였다. 그 후 수년간에 걸쳐서 재계도 점차로 정리기에 들어가고 열차의 운전도 견실하게 보조를 되찾아 1925년도의 기관차 운행 거리는 1,054km로 1910년에 비하여 251% 증가하였다. 동시에 환산 객차 거리, 환산 화차 거리도 1912년에 비하여 각각 230%, 223%로 상승하였다. 한편 석탄 소비량은 총계로 1910년에 비하여 1917년이 261%, 1925년이 330% 증가하였으며, 기관차1km당 사용량은 1917년 19.53kg, 1925년 21.86kg이었다. 기관차1km당 사용량은 1917년이 가장 적고 1919년에는 25.98kg으로 근래에 없는 높은 수치를 나타내었으나, 이는 동년에 대형 화물기 24량이 도입되고 화차 운행거리가 급증한 것에 기인한다. 또한 1925년의 기름 소비량은 총계로서 1910년에 비하여 기통유는 약 3.8배, 기계유는 약 1.8배, 기 100km당은 기통유 약 1.5배, 기계유는 약 0.7배가 되었다. 이어서 제2차직영시대에 들어온 이후 10년간 기관차 운행 거리는 약 2배가 되었다. 이 사이 1929년부터 1932년까지 불황기였지만, 만주국 성립 후 다시 여객과 화물의 수송이 활발해져 1935년에는 단 1년 동안에 기관차 운행 거리가 57%가 증가하였다. 즉 1910년 대비 기관차 거리는 514%, 환산 객차 거리는 491%, 환산 화차 거리는 464%로 증가하였다. 석탄 소비량도 1935년에는 협궤선을 포함하여 총 50만톤을 초과하였으나, 기관차 1km당 사용량은 석탄 절약 권장 내규를 실시한 1929년 이후 감소 경향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1910년을 기준으로 1935년의 각종 소비량 증가율을 나타내면, 운전용 석탄 총량 약 6.58배 운전용 기관차1km당 약 1.29배 기통유 총량 약 6. 8배 기통유 기관차100km당 약 1.34배 기계유 총량 약 2.9배 기계유 기관차100km당 약0.54배 1936년도 이후에도 영업 운행 거리의 연장과 함께 차량의 주행 거리가 더욱 증가하였으며, 1910년을 기준으로 한 1940년의 기관차 운행 길이는 1,101% 증가하였다. 또한 동년의 환산 객차 길이 및 화차 길이는 1912년에 비하여 각각 1,014%, 971% 증가하였다. 이를 1935년과 비교하면 겨우 5년간에 2.1배로 증가하고, 1937년부터 1940년까지의 기관차 운행 길이의 연도별 실제 운행 증가 길이는 318, 418, 537, 834만km로 경이적인 상승을 나타내었다. 석탄 소비량은 1937년 이후 더욱 증가하여 연도별 실제 증가량은 15, 20, 40만톤으로 품질 저하 대책과 함께 연료 확보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또한 기름 소비량도 1940년도에는 1910년도에 비하여 기통유 22.9배, 기계유 8.8배로 모두 증가하였다. 그 후에도 신선 건설, 사철 매수에 따른 영업 운행 길이 연장, 그리고 태평양 전쟁 진전에 의한 수송량 증가가 매년 그 도가 심해졌으며, 열차 길이, 차량 길이는 아래 표와 같이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이 사이 대형 기관차는 증설되었지만, 기관차의 운용 효율 향상을 위해서 각 기관구는 부단한 노력을 계속했다. 즉 조선 전체의 기관구가 부담하는 평균 거리는 130km로 매우 길었으며, 여객열차에 있어서는 부산-경성 구간, 경성-안동 구간, 원산-성진 구간 등의 장거리 운용도 계속되었다. 따라서 기관차 1량당 운전 길이도 1일 평균 190km로 높았으며, 때로는 200km를 초과하기도 하였다. 반면 연료 및 유지의 사용 성적은 석탄의 질의 저하, 대형기의 운용 증가, 장거리 운전 등에 의해서 단위당 사용량도 순차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을 띠었다. 차량 주행 길이 석탄·유지 사용량 경부선 속도 조사 열차 운전 성적 개요 Ⅰ. 계획 본 조사는 미래의 고속 열차를 상정하여 실시한 것이다. (1) 기일, 구간, 열차 및 시간 1935년 7월 3일 경성-부산 구간 상행선 제1100 열차 경성발 오전 7시 35분 - 부산착 오후 1시 35분 6시간 운전 1935년 7월 4일 부산-경성 구간 하행선 제1101 열차 부산발 오전7시 - 경성착 오후 1시 6시간 운전 (2) 편성 장래 출현할 특급 열차에는 경쾌차를 충당할 방침이므로, 본 시험에서도 경쾌차를 충당하고 현차 6량, 환산6량, 즉 여객 2등 90명, 3등 450명, 수하물 90㎡에 식당차1차 정도를 목표로 이를 파시형기로 견인하도록 하고 다음과 같이 편성하였다. 파시기-시야-라하-라로하 라유-라하테-라하테-라하테-라하 (3) 연료 마섹스 연탄 (4) 운전 속도 상하행 모두 경성-대전간은 평균 80km/h, 대전-부산간은 선로 상태에 따라서 평균 75km/h를 표준으로 규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 속도로 하고, 현행 규정의 각종 속도 제한은 이를 준수한다. 상행 열차는 가능한 한 계획 시간을 따르고, 하행 열차는 규정 속도를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상행 구배를 최대한 속도를 올리는 방침으로 운전하도록 하였다. (5) 정차역 및 정차시분 상하행 열차 모두 대전·대구의 2역만 각각 4분간 정차하였다. (6) 통표 수수 기관차에 통표 수수 설비 (7) 기타 본 시험을 이용해서 선로 및 차량의 강도 성적을 조사하고 열차 전등시험 실시 Ⅱ. 운전 실적 (1) 운전 시간 및 속도 운전 시간에서 상행은 7분 25초, 하행은 17분 15초를 사정 시간보다 단축했다(단, 하행 열차는 용산역 구내에서 기관차의 종륜 1축이 탈선하였기 때문에 용산-경선 구간의 운전을 중지하였는데 편의상 상정대로 운전한 것으로 산정했다.) 운전 속도는 상하 구배 모두 그 속도에 접근하고, 제한 속도를 초과한 곳도 다소 있었다. 또한 정거장 구내 통과 속도는 대체적으로 50~60km/h였다. (2) 연료와 물 석탄과 물 소비량은 현재의 제1,2열차의 소비량에 비하여 경성-부산 구간 1왕복에서 연탄은 약1,896kg, 즉 기1km당 약2kg 많으며 환산 차량 100km당 석탄 소비량은 약2.5배이다. 소비 수량은 오히려 약370ℓ감소하였다. 이는 상행 구배에서 속도를 향상시켰기 때문에 견인 중량에 대해서 평상시보다 2배 이상의 석탄과 물을 소비하였으며, 한편 소비 석탄 증가에 의해서 증발효율이 저하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3) 운전 방법 발차 속도 및 속도 변화를 매우 급속하게 하여 운전 시간을 단축하였다. 상행 구배 속도를 최대한 높이고, 하행 구배는 이를 억제하여 평균 속도를 유지하도록 노력한 결과, 석탄 소비 성적은 상당히 불량하였지만 충돌은 적었다. 초과 속도의 제한 조절은 기술 성숙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4) 진동 경쾌차는 일반 객차에 비하여 진동이 적고 좌석에 착석하고 있을 때는 속도가 90km/h전후라도 커다란 충동을 느끼지 않는다. 단, 큰 물결과 같은 상하동이 약간 증가하고 곡선에 의한 경사가 급하기 때문에 보행 시에 변조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5) 소음 소음 방지에 대해서는 더욱 고려할 여지가 있다. (6) 선로 시운전 결과 다소 개량을 요하는 곳은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양호하였다. Ⅲ. 결 론 (1) 환산 6량까지는 견인 가능하다고 인정된다. (2) 운전 시간에 대해서는 6량 견인으로 할 경우 경성-부산간 현재 선로에서 6시간 운전은 최대로 단축한 시간으로 날씨, 계절, 차량 상태 기타 지연 회복 등을 고려하면 6시간 15분~6시간 20분 운전으로 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된다. (3) 선로전환기 통과 속도를 향상시키기 위한 선로 개량이 필요하다. (4) 경량 통표를 사용하고 기관차에 통표 수수기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 ==================================== 참고 8) 압축기·펌프·엔진 등에 사용되는 것으로 피스톤에서 유체에 에너지를 공급하거나 피스톤에 동력을 전달하는 장소, 피스톤의 왕복운동을 하는 원통형 부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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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운전 | |
차량(1) | 2023.02.14 |
차량(1) 제1절 기관차 기관차의 설비 증설 1906년 통감부에 인계된 기관차는 경부철도에서 40량, 군용철도에서 54량, 총 94량으로 탱크 기관차 74량, 텐더 기관차 20량이었다. 그 후 경의선 급행 여객열차 운전 및 수송력 증강에 따라서 강력한 텐더 기관차가 요청되었으며,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서 테호형 기관차 21량을 증비하고 이어서 1912년 6월 경부·경의선에 국제 열차가 탄생하고 급행 여객열차 기타 열차의 증편 및 신선의 영업 개시가 대응하고, 1916년까지 탱크 기관차 프레사 14량, 바루이 12량, 텐더 기관차 아메이 6량, 테호니(2)·시(4)15량, 테호코(5) 15량 총 62량을 새로 배치했다. 인계차 포어홀은 노후화로 1914년에 폐기 처분되었기 때문에, 1917년 말의 운용기관차는 탱크 기관차 100량, 텐더 기관차 75량으로 175량이었다. 1916년경부터 경기 상승에 따른 수송량의 급증에 대처하고, 기존의 가장 많은 테호형 기관차보다 견인력이 뛰어난 대형기관차 여객용 퍼시픽형, 화물용 미카도형이 계속해서 출현하여 수송력은 비약적으로 증강되었다. 즉 1919년 미카이(1), 미카니(2) 각 12량, 1921년 파시이(1) 12량, 1922년 파시니(2) 6량, 1923년 국산 파시사(3) 6량, 파시이(1) 6량, 총 미카형 기관차24량, 파시형기관차 30량을 각각 추가배치 하였다. 이 밖에 1914년부터 증비 획 중인 테호코(5) 36량의 나머지 21량이 1918년에 16량, 1919년에 5량이 각각 완성되었다. 1924년 경인선 여객열차용으로 구입한 포어홀탱크 기관차 3량은 선로를 손상시켰기 때문에 1927년에 이를 코로이(1)로 개조하였다. 1925년도 말 운용 기관차수는 다음과 같다. ○ 탱크 기관차(계 97량) : 시그 1량, 푸호 3량, 모가(모갈) 4량, 프레(푸러) 77량, 바루(발틱) 12량 ○ 텐더 기관차(계 150량) : 아메 6량, 테호(터우)(참고 2) 84량, 소리 6량, 미카 24량, 파시 30량 1925년경 경제 불황은 철도 수송에도 영향을 미쳐 차량 증설도 중지되었으나, 이 사이에 경부· 경의 본선용 신예 급행 여객열차용 파시시(4) 및 신예 화물열차용 미카사(3), 경원· 함경본선 신예 여객열차용 테호가 각각 배속되었다. 즉 1927년~1934년에 파시이(1) 10량, 1927년~1929년에 테호로(6) 21량, 1927년~1935년에 걸쳐서 미카사(3) 35량을 추가 배치하였다. 동시에 도시 근교의 경량쾌속 열차용으로 프레하(8) 6량, 사철 매수에 의해서 국철로 편입된 프레로(6)·나(7) 14량 외에 새로 제작한 프레니(2)·사(3) 14량, 혜산선 사타이(1) 4량, 백무선용 협궤 나키하(8) 7량 및 매수 사철선으로부터 나키하(8) 6량이 새로 추가되었으며, 이 밖에 1928년에 배속된 사고 복구용 35톤 기중기를 합치면 1935년 말에는 표준궤 352량, 협궤 38량 총계 390량의 기관차가 배속되었다. 그 후 경제 호황 및 중일전쟁에 의한 수송 상황의 격변에 의해서 대형 기관차의 수요가 더욱 절실해져, 파시·미카형을 중심으로 테호로(6)· 사타이(1)· 프레하(8)· 나키하(8) 등의 기관차를 중심으로 차례로 추가 배치하였다. 파시형(참고 3)으로는 파시시(4)가 특급 ‘아카쓰키’용으로 1936년에 4량을 완성하고, 이어서 1937년 6량, 1939년 26량, 1940년 26량으로 총 62량 및 파시코(5)형 10량이 1940년에 출현하고 파시형은 72량을 증설하여 총수 114량으로 1935년의 약 2.8배가 되었다. 테호로(6)형기는 1937년 18량, 1939년 15량, 1940년 10량으로 총 43량을 증설하였다. 미카사(3)형은 1936년 7량, 1937년 19량, 1938년 22량, 1939년 26량, 1940년 80량 총 154량으로 급증하였으며 총수 220량으로 3.7배로 증가하였다. 이 밖에 사타이(1)형은 14량을 늘려서 총수 24량이 되었으며, 프레형은 11량의 신조 프레하(8)형과 사철 매수선의 10량을 추가하여 총수 162량이 되었다. 또한 협궤용의 나키하(8)형은 백무선의 연장과 함께 10량을 늘려서 총 17량이 되었다. 그 결과 1940년도 말에는 표준궤 기관차 703량, 협궤 기관차 35량 외에 레키 1량을 추가하여 합계 739량이 기관구에 배속되었다. 수송 요청이 급증하는 중에 운전용 연료의 상태 악화와 차량 보수 자재의 부족은 운전 보수의 양면에 악조건을 미치고, 재래 차량의 운전 정지율이 점차로 높아져 열차 운행의 혼란을 조장하는 사태가 되었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화물열차용 기관차를 중심으로 급속한 증산 계획을 추진하여 각형 기관차의 증가하였다. 기관차의 배치와 운용 통감부 인계 당초, 경부선에서는 탱크 기관차 모가이(1) 4량이 경인선 열차용으로 인천기관고에, 프레이(1)·니(2) 18량이 경부선, 4량이 마산선 구간 열차용으로 경부선 각 기관고 및 마산기관고에, 급행 여객열차 기타 주요 열차용으로 테호이(1) 6량, 테호니(2) 6량, 소리이(1) 6량이 초량· 대전· 남대문의 각 기관고에 각각 배치되고 경의선에는 탱크 기관차 프레이(1)·니(2) 48량, 텐더 기관차 푸호 2량이 각 열차용으로 경의선 각 기관고에 배치되었다. 테호형은 견인력이 크고 운전 성적도 양호하여 매우 효율적으로 사용되었으며, 1920년대까지 대표적인 기관차로서 운용되었다. 특히 1910년대에 배속된 과열 증기를 사용하는 테호코(5)는 급행 여객열차의 견인에 충당하고 경원· 호남선 전선 개통 후의 여객열차용으로도 활약했다. 또한 그 무렵 인천 기관구에 배속된 아메이(1)는 경인선의 급행 및 여객열차를 견인하여 속도와 수송력 향상을 위해서 노력했다. 1919년 수송량의 격증에 대비하여 증설된 대형기 파시형 및 미카형은 여객 및 화물용의 대표적인 기관차로서 파시형은 초량· 대전· 용산· 평양, 미카형은 대구· 대전·용산·신막· 평양·정주의 각 기관차고에 배치하였다. 1925년 무렵에 경부·경의 본선 급행 여객열차용으로 파시시(4) 또는 화물열차용으로 미카사(3) 및 경원·함경 본선 여객열차용으로 테호로(6)의 각 신예 기관차가 도입되었으며, 1931년, 1932년에 걸쳐서 도시 근교의 경쾌 열차용 프레하가 경인선을 비롯하여 경성· 부산· 평양 근교의 구간에 배속되는 등 수송력이 크게 증가되었다. 이 밖에 구배선용 최대 탱크 기관차 사타이를 혜산선에, 마찬가지로 협궤선용 최대 탱크기관차 나키하(8)를 백무선에 배치했다. 사타이형기관차는 복계-고산 구간, 길주-명천 구간 기타 구배 구간의 강력한 보조 기관차였다. 나키하(8)형기는 미카도형으로 황주선의 미카도형 텐더 기관차와 함께 협궤선의 대표적인 기관차로 활약했다. 1937년 이후 함경선에 미카형기의 사용이 인정되어 경원·함경선의 미카형기 운용은 점차로 증대하였다. 또한 특급 ‘아카쓰키’용으로 1936년에 배치된 파시시(4)형기에 이어서 조선 만주 간의 여객 수송 요청에 따라서 설계된 가장 균형을 이룬 대형 기관차로서 파시시(4)와 같이 조선·만주·중국 직통급행열차용으로 활약했다. 마테이형은 파시코(5)형과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구배선 여객용으로 마테니(2)형이 새로 제작되었는데, 종전으로 인해서 그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1940년 주요 선구에 사용된 주요 기관차 및 기관구별 배속 량 수는 다음과 같다. ○ 경부·경의선 - 급행여객열차 : 파시시. 파시코, 파시사 - 직통여객열차 : 파시시. 테호코, 파시이, 테호니 - 혼합열차 : 테호코, 프레하, 미카사, 프레나, 바루이 - 화물열차 : 미카사, 마테이, 파시이 - 지선구열차 : 프레나, 프레하, 프레시, 테호코, 바루이 ○ 경원·함경선 - 급행여객열차 : 파시시, 파시사 - 여객열차 : 파시시, 테호로, 파시사, 파시니 - 화물열차 : 미카사, 테호로, 사타이 - 지선구열차 : 사타이, 바루이 ○ 호남·경전선 - 여객열차 : 테호코, 테호로, 테호사, 프레하 - 혼합열차 : 테호로, 테호니, 프레사, 프레하 - 지선구열차 : 프레하, 프레나, 코로이 ○ 평원·만포선 - 여객열차 : 테호코, 테호니, 테호사, 바루이 - 화물열차 : 미카사, 테호로, 테호코 * 참고: 테호는 터우, 프레는 푸러, 바루는 발틱, 코로는 고로 그 밖에 경북선 김천-상주 구간, 경전남부선 삼랑진-마산 구간에 프레나(7), 경원선 복계-고산 구간에 사타이(1)· 미카사(3)· 프레나(2), 함경선 성진-청진 구간, 길주-명천 구간에 미카사(3)· 사타이(2), 북선선 고무산-회령 구간, 고무산-전거리 구간에 만철 미카로(6) 등을 보조기관차로 사용하였다. [기관구별 기관차 배속량수(1940년도 말 현재)] - 부산 41 - 신막 36 - 대전 46 - 정주 24 - 경성 62 - 순천 23 - 평양 63 - 동경성(청량리) 25 - 원산 54 - 복계 24 - 성진 43 - 함흥 31 - 대구 24 - 청진 29 * 그 밖의 기관구는 10-17량 기관차의 검사·수선 기관차 보수관련 규정이 완성된 것은 1910년대 이후로, 그 이전에는 운전규정 및 기존 관행에 따라서 적절하게 실행되었다. 그 후 운전규정 개정에 의해서 3년마다 실시하는 공장 수선 외에 6개월 또는 1개월마다 기관구에서 실시하는 정기 검사가 새로 추가되었는데, 이 규정도 검사 장소 및 정도, 기간 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지시된 내용은 없었다. 1926년 처음으로 기관차 검사규정이 제정되고 점차로 명확한 검수 방식이 실시되었다. 검사종별은 일반 검사 및 갑·을·병 3종의 정기 검사와 시업 전후에 실시하는 시업 검사 및 사고 기타 사용 시에 면밀한 검사가 필요할 때 실시하는 임시 검사로 구분되었다. 일반 검사는 3년마다 공장에서 세밀하게 실시하는 분해 검사로, 중요 부분에 대해서는 재질의 강도 검사 및 면밀한 작동 상태를 조사하였다. 또한 갑·을·병의 3종 검사는 각각 소정 기한과 주행 거리에 도달한 차량에 대해서 주로 기관구에서 실시하는 검사이다. 즉 갑종검사는 6월마다 사용 상황에 따라서 보일러 내부를 제외하고 전반적인 상태에 대해서 실시하고, 을종 검사는 무화(無火)검사로 1개월마다 운행 거리를 감안하여 보일러 관계에 대해서 주로 실시하며, 병종 검사는 15일마다 주행 부분을 중심으로 외견을 실시하는 검사이다. 이 경우 보일러 세척을 비롯하여 면밀 검사를 실시하는 것이 관례였다. 또한 보일러 세척 효과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펌프에 의한 수압 향상, 온수, 청정제를 사용하는 등 매년 보일러 세척의 회귀 거리 및 일수가 연장되어 기관차의 운용 효율이 향상되었다. 기관구에서 실시되는 검수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갑종 검사이지만, 을종· 병종 검사 시에도 각각 정해진 수선 한도에 따라서 부품 교체는 물론 검사계가 적출한 불량 개소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수선하였다. 정기 검사에 중점을 둔 검수에 의해서 일상의 부담을 경감시키고 기관차의 운행 중지를 감소시키는 것은 당연하지만, 임시로 발생한 고장에 대해서도 열차 운행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도록 각각 보수 대책을 강구하였다. 기관차 고장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겨울철 배관 누설과 축소(축상 발열로 인한 발화)었는데, 특히 전시에는 기관차 운용상 보일러의 유화(有火) 수선 및 동축 베어링의 응급 수리 등 기관구에 근무하는 기공의 어려움이 컸다. 기관차의 연료 및 유지 조선철도 운행에는 각종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어려움은 기관차용 유연탄의 조선 내 산출량이 적어 그 대부분을 만주 및 일본의 우량 유연탄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1925년 무렵 경제계 불황 시에는 용이하게 입수할 수 있었지만, 점차로 사용량이 증가하고 만주사변이 발발한 1931년경부터는 점차로 입수가 어려워졌으며 태평양 전쟁이 진행되면서 더욱 부족해졌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조선 내에서 비교적 산출량이 풍부하며 열량도 높은 무연탄을 원료로 한 연탄을 기관차용으로 사용하는 분화 방법이 여러 가지로 연구되었는데, 당초에는 석탄에 비하여 착화가 늦고 한번 실패하면 분화가 쉽지 않으며 클링커(굳은 덩어리) 발생이 많은 등 연탄의 사용상 문제가 많았다. 그 후 연탄의 특성을 이용한 분화 방법 연구가 진행되어 점차로 사용량도 많아져 1928년 1만 톤정도였던 것이 1944년에는 50만톤으로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본래 조선 무연탄은 고세대의 생성에 속하며 2차괴인 경우가 많으며 채탄 시에는 탄이 가루가 되어서 기관차용으로는 단독 사용이 어려웠기 때문에 (가) 연탄으로 사용, (나) 연탄과 유연탄을 섞어서 쓰는 방법밖에 없었으며 부득이한 경우에 한하여 단독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채용하였다. 연탄과 유연탄의 혼소(참고 4)에는 분화 기술이 필요하였으며, 혼합하는 유연탄의 품질에 따라서 사용량에 현저한 차이가 발생하므로 최대한 우량탄을 선택해서 혼소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성질이 다른 유연탄의 혼소 시험도 수차례 실시하여 모두 양호한 성적을 거두었다. 마침 1931년 런던 세계 동력 회의에 참석한 당국 운수과의 사세 기사가 ‘2종 및 3종 혼탄 기술 이론’을 발표한 결과 철도성에서도 이 보고를 바탕으로 실험을 실시하여 그 성과가 인정되었다. 한편 연탄 공장은 1928년에는 평양의 해군 사동 연탄 및 조선무연회사의 전흥 연탄의 두 공장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제품을 시험적으로 사용하는 정도였는데 그 후 점차로 증설되어 조선 내의 공장 수는 16군데를 초과하기에 이르렀으며 생산 능력도 약100만톤에 이르렀다. 무연탄분의 점결제로서는 당초 석탄 피치(참고 5)를 사용하였는데 연탄 사용량이 점차로 증가하고, 또한 만주사변 발발 이래 석탄 피치가 알루미늄 제조에 필요한 피치 코크스용(참고 6)에 공급된 결과 석탄피치의 입수가 어려워졌다. 따라서 최초의 피치 혼입률 12%를 점차로 줄여서 8%이하로까지 줄여도 부족하였기 때문에. 피치 대체용 점결제를 연구하게 되어 연료 연구소를 설립하고 수색에 연탄 공장 및 건조로를 설치하고 각종 대용 점결제를 시험 제작하였다. 대용 점결제(참고 7)는 분말 또는 액체였기 때문에 제조 직후에는 수분이 많고 경도도 낮았기 때문에, 충분히 건조시켜도 운반 중 또는 우천 시에 다시 부스러질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효과적인 대책으로 각 기관구에 직영 연탄 공장을 설치하고 연료 문제를 조급히 해결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갑자기 종전이 되어 실현되지 못했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에는 만주 및 일본으로부터의 유연탄 확보가 더욱 어려워져서 경도와 내수성에 문제가 있는 대용 점결제를 사용한 연탄과 무연분탄에 의지하는 방법밖에 없었으며, 기관구 내에서 물로 반죽한 무연탄을 기관차 위에 벽돌크기로 던져서 문제를 극복하였다. 연료와 물 다음으로 중요시되는 각부의 윤활유 규격은 각각 사양서에 규정되어 있으며, 각부마다 적당한 급유 방식을 이용하였다. 즉 기통용에는 과열 기통유, 축상에는 기계유, 주 연봉에는 경 그리스와 기계유를 사용했다. 기통의 급유는 급유기에 의해서 양질의 오일을 사용하였는데 전쟁 말기에는 기름의 공급부족과 급유 방식 결함이 겹쳐서 패킹에서 고장이 발생하였다. 축상의 급유는 상부 통면 급유, 하부 패드 수급유에 의하였는데 통면(通綿) 급유에 문제가 많아 그 후 하부 급유 방식으로 변경하였다. 새로 제작한 파시5형에는 상부 기계 급유 방식을 채용했다. 또한 주연봉 대부분의 급유는 대형 기관차에는 경 그리스, 중형 이하의 기관차에는 기계유를 사용하였는데 특급 열차가 운전된 이후부터는 경 그리스는 부적절하다고 판명되어 연그리스를 기계적으로 밀어내는 방식으로 변경했다. 그 밖의 습동 부분에는 모두 통면 급유 방식을 채용하였다. [탄종별 석탄 사용 성적](1936~1940년, 단위:만톤) [종전시 조선 내 연탄공장 및 생산 능력] 비고: 생산 능력은 1일 12시간, 1년 300일 가동으로 계산. 전기기관차 운전 1944년 4월 1일부터 경원선 복계-고산 구간에 운전을 개시한 전기기관차인 데로1·데로2의 양 타입은 중량 135톤, 350kw의 주전동기 6대를 비치하고, 복계-고산 구간 53.9km, 25‰의 구배를 중련 운전으로 화차 1,200톤을 시속 42km의 속도로 견인하여 얻을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으며 동양에서 직류 3,000V 전기기관차의 효시가 되었다. 이 기관차는 구배선 운전에 대비하여 공기 제동 장치 외에 회생 제동 장치를 장착하였으며, 상호작용에 의해서 보안상의 감속 없이 운전을 유지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전철화 운전에 의해서 수송력이 중대하고, 매연·증기 온도 상승 등의 문제는 해소되었지만, 이 지역은 겨울철에 영하 35℃정도로 기온이 내려가며 강설량이 상당히 많기때문에 기관차에 히터를 설치하였으며, 기관실 복도에는 방한 막을 쳐서 창으로부터 들어오는 눈보라를 막았다. 또한 터널 내 고드름 방지 장치를 지붕에 설치하는 등의 대책도 강구하였으나, 증기기관차를 함께 운전하였기 때문에 가선에 매연이 섞인 얼음이 붙어 일부 지장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제2절 동 차 증기동차의 운용 1923년 7월 3등 증기동차(지하, 후에 제하1로 개칭) 4량을 경인선 여객 수송에 충당하였다. 제하1은 소형 기관차의 후부에 객실과 수하물실을 설치하고 3등 객차 1량을 견인하였는데, 속도 향상과 함께 진동이 심하였기 때문에 이를 지방지선(신의주 강안선)에 교체하여 배치하고, 그 후 순차적으로 기관차부와 객차부를 분리하여 시구이형 기관차와 하2 및 하테형 객차로 개조하였다. 이어서 1925년 영국 센티넬 회사 제품의 3등 증기동차 제하2 4량을 구입하여 당초 경인· 경전북부선에 운용하였으나 1930년 7월에는 평남선 등에 교체하여 배치하였다. 제하2형은 객차의 한끝에 기관실이 있었으며, 역행하는 경우 승무원간의 연락은 전령이 담당하였다. 이 동차는 승차감이 양호하고 특히 그 경쾌한 차체 구조로 단거리 승객 수송에 호평을 받았으며, 1일 1차 평균 주행 거리도 150~210km 정도로 동차의 선구차가 되었다. 내연동차의 배치와 운용 경유동차는 1928년 7월 조선철도회사가 경동선을 매수하여 동해중부선으로 개칭하였는데, 대구-학산 구간 및 경주-울산 구간을 운전한 협궤 3등 경유동차 나케하1 5량으로 시작하였다. 나케하1형은 승합 자동차형으로 상당히 쾌적한 동차였다. 1929년 이후 2량, 4량, 2량으로 매년 증설하여 1931년에는 13량이 되고, 주행거리도 1929년 25.6km, 1934년 59만km를 최고로 1938년 7.5만 km를 달리고 그 사명을 다했다. 표준궤 3등 경유동차인 케하1,2형은 1930년에 6량을 도시 근교 열차에 충당한 것을 시작으로 1931년 15량, 1932년 6량으로 증설하여 27량이 되었다. 운용선구는 경성·부산·평양 근교를 비롯하여 호남·경원·경전북부· 동해중부선 등 거의 전선에 걸치며, 주행 거리도 1936년에는 165만km에 달하여 이 때 도시 근교 수송 기관의 꽃으로 활약했다. 1938년 마지막 경유동차인 케하5형 6량을 이리· 순천기관구에 배속하고 대전-정읍, 이리-순천 구간에 사용했다. 기관이 강력하여 기존 동차에서 나타난 구배선에서의 속도 급감 또는 기관 과열의 우려를 일소했다. 1940년에는 경유동차 41량을 보유하게 되었으나, 1938년 이후 가솔린 규제가 강화되어 한때 대체 연료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졌으나, 연료 입수가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1941년 12월 1일 열차 운전 시각 개정 시에는 도시 근교 열차에 일부 남아있던 동차도 거의 운전을 중지했다. 운전 중지된 동차의 일부는 승무원과 함께 군용으로 북중국으로 전출되거나, 일부는 엔진을 제거하고 앞뒤에 데크를 장착하여 대용객차로 사용하였다. 독특한 형태의 동차에 직무용 경유동차인 게시야가 있었다. 1935년 경성 공장에서 제작하여 선로 심사 및 기타 직무용으로 필요에 따라서 각선을 운전하였다. 경유동차에 이어서 1930년경부터 중유동차(지하) 운전이 계획되어 1933년 6월부터 시험적으로 사용을 개시하였는데, 취급상 보수 면에서 부적절하여 3년간의 짧은 기간 사용 후 운전을 중지하였다. ============================== 참고 2) 국내에서 운행되던 터우-5형 증기기관차는 1914년 미국 아메리칸 로코모티브사에서 제작, 1919년 3월 서울공작창에서 조립, 경부선에서 주로 활약하였고, 최고속도는 95km/h까지 낼 수 있었다. 현재 철도인재개발원에 전시된 열차는 1935년 전시 목적으로 제작되어 용산 철도전문대학 교정에 전시되어 있다가 1986년 9월 현재 위치로 이전되었다. 현재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증기기관차는 혀기형 1기, 미카형 3기, 파시형 1기 등 총 5기이며 그 외에 현재 잔존하고 있는 증기기관차는 미카형, 혀기형 등이 추가로 존재하나 터우형 증기기관차로는 해당 차량이 유일하므로 당시 운행하던 증기기관차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어 보존 가치가 있다. 참고 3) 의왕철도박물관 1층에 전시되어 있는 파시-1 4288 증기기관차 모형에 대해 설명해 보자 1930년 경성공장에서 최초의 파시형 증기기관차 제작을 기념하여 제작되었으며 동일한 형식을 1/5의 크기로 축소하여 보일러계통과 탄수차까지 완벽하게 재현해 놓았다. 과거에는 실제 증기의 힘으로 구동이 가능한 상태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증기압력을 조절하여 실제 구동이 가능했던 점으로 보아 당시의 정밀한 증기기관차 제작 기술을 가늠할 수 있고 현재 철도박물관 내에 보존된 철도모형 중에서 가장 스케일이 크고 오래된 모형이다. 1930년대에 제작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철도모형으로, 파시형 증기기관차 생산을 기념하여 경성공장에서 제작하였다. 실제 운행이 가능하였다는 구체적인 사실이 최근 밝혀졌는데, 1955년 10월 당시의 창경원에서 열린 광복10주년 기념 박람회 때 용산에 있던 이 차량을 교통부에서 파시1-4288이란 이름으로 출품하여 많은 인기를 끌었다. 4288이란 단기 4288년 즉 1955년을 의미하며, 1955년 10월 2일자 동아일보 보도를 보면 이 꼬마 열차는 어린이 40명을 태우고 400m정도의 궤도를 달렸다. 량은 1955년 10월의 박람회 행사가 끝난 후 다시 서울 공작창으로 돌아와 계속 전시되고 있다가 1988년 철도박물관 건립 시 이곳으로 옮겨져 박물관을 상징하는 얼굴이 되었다. 참고 4) 2종류 이상의 연료를 연소시킨 경우를 혼소라고 한다 참고 5) 석탄, 목재, 그 외에 유기 물질의 건류에 의해 얻어지는 타르를 증류할 때에 얻어지는 흑색의 탄소질 고형 잔류물의 총칭이다. 원료의 종류에 의해 콜타르 피치, 나무 타르 피치, 로진 피치 등으로 구분되지만, 그것들 중에 콜타르 피치가 대표적인 것으로 타르 피치 또는 간단하게 피치라고 부른다. 참고 6) 피치를 탄화하여 얻어지는 탄소를 주성분으로 하는 다공질 고체. 흑색이고 다공질(多孔質)이며 단단하다. 휘발성분은 1% 이하이고 나머지는 고정 탄소이다. 제강용 전극, 알루미늄 제련용 전극의 원료이다. 참고 7) 점결제는 건코크스를 제조할 때 배합탄의 점결성을 개선하기 위해 첨가하는 고체 혹은 반고체상의 역청 물질. 점결제를 제조하는 원료에 따라 석탄계, 석유계, 석탄·석유 혼합계 점결제로 분류된다. 건류는 공기를 차단한 상태에서 석탄, 목재 등의 고체 유기물을 가열 분해해서 휘발분과 탄소질 잔류분으로 나누는 조작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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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운전 | |
열차 | 2023.02.14 |
열차 제1절 열차의 운전 창업시대 개황 : 1906년 7월 1일 경부철도로부터 경부와 경인선을 매수하고, 이어서 같은 해 9월 1일 군용철도인 경의와 마산선을 인계받아서 통감부 철도관리국이 국유철도를 총괄 운영하게 되었다. 당시의 열차 운전은 모두 인계 이전의 상태를 유지하였는데, 경부와 경의선 모두 야간열차는 운행하지 않고 직통열차로서 초량~서대문 간을 11시간 운전하는 급행 여객열차만 1왕복하였다. 그밖에 경부선에는 혼합열차 2왕복과 기타 구간 열차 2왕복만이 운행되었다. 경의선에서는 직통열차가 운행되지 않았으며, 각 열차는 모두 평양을 종점으로 하였다. 즉, 용산~평양 구간 여객열차 1왕복, 혼합열차 1왕복, 용산~개성 구간 혼합열차 1왕복, 평양~신의주 구간 혼합열차 1왕복, 그밖에 부정기 화물열차 1왕복 정도가 운행되었다. 운전 시간도 최단인 남대문~평양 구간 10시간 20분, 평양~신의주 구간 8시간 30분을 필요로 하였으며, 부산~신의주 구간은 도중에 2박을 필요로 하였다. 그 후 1907년 4월 20일 경부~마산선의 열차 운행시각 개정, 1908년 11월 11일 부산~초량 구간의 복선운전 개시를 필두로 수송력 강화와 수송 계통의 개선, 열차의 배치 교체 등에 의한 운행시각을 개정하여 운수 교통의 편리 증대를 위하여 노력하였는데 각 선의 경과 개요는 다음과 같다. 경부 및 경의선 : 1907년 4월 20일의 운행시각 개정으로 초량~서대문 구간에 혼합열차 1왕복을 증편하는 동시에 기존 급행열차의 운행시간을 단축시켰다. 1908년 4월 1일부터 경의~무산선의 일반 운수 영업 개시와 부산역 신설 및 부산~시모노세키 간 연락선의 주간 운항 개시에 따라 새로이 부산~신의주 구간을 26시간에 운행(평균 시속 37.7km)하는 직통 급행 여객열차 ‘융희’가 설치되었다. 이로써 경성~부산 간에 최초로 야간열차 운행을 개시한 이래 2박이 소요되었던 무렵에 비하여 현저한 진보를 보였다. 그 후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1909년 2월 1일부터 연락선의 주간편이 격일제로 운행되고, 부산~신의주 구간 직통 급행 여객열차를 부산~남대문 간 격일제 운행으로 변경했다. 경인선 : 통일 당시에는 서대문~인천 간에 혼합열차가 7왕복 운전하였으나, 1907년 4월 20일의 개정으로 급행 여객 1왕복, 혼합 2왕복을 증설하여 총 10왕복으로 하였다. 같은 해 10월 16일에는 황태자의 방한으로 경성~인천 간에 궁정열차를 운행하였다. 마산선 : 1907년 4월 20일 운행시각 개정으로 기존에 설정된 삼랑진~마산 구간 혼합열차 2왕복에 초량~마산 구간의 혼합열차 1왕복을 추가하고, 1908년 4월 1일부터 혼합열차 1왕복을 증설하여 총 4왕복으로 하였다. 겸이포선 : 철도감부 인계 당시에는 황해 황주~겸이포 구간 혼합열차 1왕복만 운전하였으나, 1907년 7월 1일부터 2왕복, 1908년 4월 1일부터 3왕복으로 점차 증설하였다. 평양탄광선 : 1909년 9월 1일 준공 당시에는 한국 정부의 농상공부에 소속되었으나, 열차 운행은 통감부 철도청이 담당하고, 당초에는 평양~사동 구간에 혼합열차 1왕복을 운전하였다. 제1차 직영시대 개황 : 1911년 11월 1일 경의선 개량공사 및 압록강 가교공사, 만철 안봉선 광궤 개축 준공 등에 의해서 조선~만주 간 선로가 연결되고, 차량 직통 실현을 위해서 일본과 중국 양국 간에 중일협약이 조인되어 차량 통과와 수화물 및 화물의 수출입에 관한 검사 및 절차 등이 정해졌다. 이에 따라 각 열차의 발착을 안동역으로 정하고, 동시에 조선~만주 직통열차 운전을 개시하였다. 이어서 1912년 6월 15일 철도원이 시모노세키~신바시 간 특별 급행 여객열차를 신설하고 부산~시모노세키 연락선의 운항 시각을 개정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만주 직통 급행열차의 운전 구간을 부산까지 연장하고, 1913년 4월 1일부터 부산~신잔교 준공과 함께 주요 열차의 발착을 잔교에서 취급하게 되어 선박과 기차의 연결에 편리를 도모하였다. 1912년 9월 1일부터 한강 제2 다리가 준공되면서 영등포~남대문 구간이 복선운전을 개시하여 경부 본선과 경인선의 중복 구간 운행이 완화되었다. 1908년 4월 1일 이래 사용된 한국 표준시가 1912년 1월 1일부터 일본과 마찬가지로 중앙 표준시로 개정되고, 열차의 운행시각도 이에 준하게 되었다. 국제열차 : 1911년 11월 1일 중일 협약 조인과 함께 남대문~장춘 구간에 주 3회의 조선~만주 간 직통 급행열차 운행을 개시하였는데, 대륙 교통의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철도원의 운행시각 개정과 함께 1912년 6월 15일의 열차 운행시각 개정 시에는 운행 구간을 부산~장춘 구간으로 변경하였다. 이때 열차의 운전 소요시간은 부산~안동 간 19시간 20분(평균 시속 약 49km), 부산~장춘 간은 33시간 50분이었다. 1914년 11월 1일에 일본과 만주, 러시아 여객 및 수하물을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유럽과 연결하는 길이 열려 장춘보다 먼 지역을 연결하는 국제열차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는데, 같은 해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시베리아철도 및 동청철도 급행열차의 운전이 불확실해진 한편, 아시아와 유럽 여행객도 현저하게 감소하였기 때문에 1916년 6월 15일 이후 주 1회로 운행을 변경하였다. 조선 내 각 선의 열차 경부 및 경의선 : 조선~만주 직통열차 이외의 열차 운행 상황을 살펴보면, 종래에 격일제로 주간에만 운항하던 부산~시모노세키 간 연락선이 1911년 12월 1일부터 매일 주야 2회 발착하면서 경부선 야간열차인‘ 융희’가 다시 매일 운행으로 변경되고, 1913년 4월 1일 부산~신잔교 완성과 함께 경부선 급행열차가 경의선까지 연장되어 부산~안동 구간에 급행 여객열차 2왕복이 운행되었다. 이로써 경의선에 최초로 야간열차를 운행하였는데, 이때 열차 운행시간은 최단 안동~부산 간이 21시간 20분이었으며, 평균 시속은 약 44.4km였다. 그 후 운수 상황이 변화하면서 수차례 개정되었는데, 1915년 말 현재 급행열차 이외에는 부산~남대문 간 직통 혼합열차 1왕복, 부산~남대문 간 통산 2왕복, 용산~개성 간 2왕복, 개성~정주 구간 통산 3왕복, 정주~안동간 2왕복의 혼합열차, 부산~대전 간 1왕복의 화물열차가 운행되었다. 경인선 : 1900년대의 경제계 불황의 영향으로 열차 운행 횟수는 종전의 10왕복에서 운행시각 개정 시마다 수차례 감소되었다. 1910년대에 들어와 경제계도 불황의 늪을 약간 빠져나오는 한편, 1912년경 구입한 기관차‘ 모가이형’보다 강력한‘ 아메이형’ 텐더 기관차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견인력이 증가하였기 때문에 열차 운행 횟수를 늘리지 않고 1914년 5월 1일의 전선 열차 운전시각 개정 시에 급행 여객열차 3왕복, 여객열차 3왕복, 혼합열차 2왕복의 총 8왕복에 새로 화물열차 1왕복을 추가하여 총 9왕복으로 하였다. 마산선 : 1912년 6월 15일의 개정으로 기존에 운전하였던 혼합열차 4왕복에 1왕복을 증설하여 총 5왕복으로 하였다. 평남선 : 평양~진남포 구간은 1910년 10월 16일부터 운수 영업을 개시하고 당시 2왕복의 혼합열차를 운전하였으나, 그 후에 1왕복을 증설하여 3왕복으로 하였다. 겸이포선 : 평남선 개통 및 겸이포공장의 평양 이전 등에 의해서 교통이 한산해져 1911년 12월 10일부터 1왕복을 줄였으나,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1912년 6월 15일에 3왕복으로 하여 과거로 복귀하였다. 평양탄광선 : 총독부 소관으로 이행한 후 평양~사동 구간 1왕복을 늘리고 조석으로 각각 1왕복의 혼합열차를 운전하였다. 호남선 및 군산선 : 1911년 7월 10일 대전~연산 구간의 영업 개시로 시작하여 구간 영업 당시는 각 구간 모두 대체적으로 혼합열차 2왕복으로 객화수송에 충당하였으며, 군산선도 마찬가지로 3내지 4왕복을 운전하였다. 1914년 1월 11일 호남선 전선 개통 시에는 대전~목포 구간 직통 여객열차 1왕복 외에 대전~정읍 구간 2왕복, 정읍~목포 구간 1왕복의 혼합열차로, 군산선과 마찬가지로 5왕복을 운행하였다. 경원선 및 함경선 : 1911년 10월 15일 경원선 용산~의정부 구간의 영업 개시 이래 1914년 8월 16일 전선이 개통될 때까지 수차례 구간 영업을 실시하였다. 구간 영업 당시는 각 구간 모두 2왕복의 혼합열차를 운전하였으나, 전선이 개통된 후에는 남대문~원산 구간에 직통 여객열차와 혼합열차 각 1왕복을 운전하였다. 함경 본선도 원산~문천 구간은 1915년 8월 1일, 청진~창평 구간이 1916년 11월 5일에 준공되어서 구간 영업을 개시하였는데 모두 혼합열차 2왕복을 운전하였다. 만주철도 위탁경영시대 개황 : 만주철도 위탁 후 운수상의 제반 규정과 각종 제도는 총독부 직영시대를 그대로 답습하였지만, 조선철도와 만주철도 양 철도의 경영이 일체화되었으므로 기존에 신의주와 안동에 양립하였던 운수 기관을 병합하였으며, 또한 경부와 경의 본선의 여객열차는 가능한 한 만주까지 직통시키는 등 원활한 수송과 경비 절감을 위해서 노력했다. 1916년경부터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경제계가 활황을 띠기 시작하였으며, 만주철도에 경영이 위탁된 이후 3년간은 철도 수송이 크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1920년경부터 반동기로 들어가 경기 불황은 즉시 철도 수송에 반영되어 여객과 화물 모두 격감하였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정기 화물열차의 운행을 일부 중지하게 되었다. 그 후 재계도 한동안 정리기에 들어가고 열차 운행도 견실하게 리듬을 회복하며, 그 사이에 다음과 같이 개선되었다. 1919년 8월 남대문기관고를 용산으로 이전(용산기관고로 개칭)하고 화물열차 및 부정기 열차는 모두 용산 발착으로 변경하였으며, 1920년 10월 5일 경부 본선 초량~부산진 구간의 복선공사를 준공하고 부산~부산진 구간의 복선 운행을 개시하였다. 이어서 같은 해 12월 21일에는 남대문~수색 구간이 직결되고 화물열차 이외에는 신선을 운전하게 되었다. 1923년 이후에는 단거리를 경쾌하게 운전하는 기동차를 경인선에 배치하여 여객 수송에 충당하였으며, 이후 이를 각 선의 구간 열차로서 운전시켰다. 또한 여객열차의 증기난방장치는 기존 경부 및 경의선에 한정되었는데 1921년부터 호남과 경인, 경원선 및 함경선 남부 및 앞에서 기술한 각 선의 일부 혼합열차에도 사용하기로 하고, 1923년 2월부터 경부선 급행열차에 사용한 3등 침대차를 1924년 5월부터는 부산~봉천 구간의 직통 여객열차에 연장하여 사용했다. 한편, 부산~시모노세키 구간에 경복마루(慶福丸)와 덕수마루(德壽丸), 창경마루(昌慶丸) 등의 새 선박이 1922년 5월부터 1923년 3월에 걸쳐서 취항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조선과 일본, 만주철도의 열차 속도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1923년 7월 및 1924년 5월에 열차 운행시각을 변경하였다. 당시 열차운행시각 개정은 정황에 따른 것으로 1917년 이후 대부분 매년 전선에 걸쳐서 실시되었다. 위탁경영시대 각 선의 열차 운전 상황을 대략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만주 간 직통열차 : 1917년 11월 1일 전선의 열차 운행시각 개정 시경부와 경의 본선의 직통 여객열차를 부산~봉천 간 직통 운전으로 하여 향후 연락 운수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 후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아시아~유럽 간 연결을 중단하고, 1916년 6월 15일 이후 매주 1회 운행하던 부산~장춘 간 급행열차가 다음해인 1916년 10월 일시 중단되어 1918년 5월 12일까지 중지되었다. 한편, 부산~시모노세키 간 연락선의 고속 운항 개시와 함께 1923년 7월 조선~만주 간 철도의 운행시각을 개정하였다. 이로써 다년간의 현안이었던 부산~봉천 구간 직통 급행열차 1왕복을 부활시키고, 동시에 열차 속도를 향상시켜 도쿄~봉천 구간에서 약 8시간을 단축시켰다. 또한 1924년에 들어오면서 부산~시모노세키 간 연락선의 야간 이용객이 많아졌기 때문에 이와 연결하여 경성~부산 간을 운행하던 급행열차를 5월 1일부터 봉천까지 연장하고, 그 대신 주간 운행에 연결하였던 급행 여객열차 1왕복을 폐지하였다. 이로써 부산~봉천 구간은 급행 여객열차 1왕복, 직통 여객열차 2왕복이 운행되었다. 조선 내 각 선의 열차 경부 및 경의선 : 위탁경영 당초 일본의 경제계는 미증유(未曾有)의 활황을 띠었으며, 조선 내의 객화 수송량도 급증하였기 때문에 1918년 7월과 1919년 4월 전선에 대한 열차 운행시각 개정 시 경부선에 급행 여객열차 1왕복을 증설하는 한편, 화물열차를 증설하였다. 주간에는 여기에 객차를 연결해서 단거리 여객의 교통 편의를 도모하는 등 수송량 증가에 대응했다. 이 증설에 의해서 경부 본선 화물열차 정기 7왕복, 부정기 2왕복, 경의 본선 화물열차 정기 9왕복, 부정기 2왕복에 이르렀다. 그런데 1920년경부터 재계의 불황에 의해서 객화 수송도 점차 부진해져 7, 8, 10월의 3회에 걸쳐서 정기 화물열차의 운전을 일부 중지했다. 1921년경부터 불황도 회복의 징후를 보이면서 같은 해 6월에는 부산~안동 구간에 중간 차 화물열차 1왕복을 증설하였으며, 그밖에 1924년 5월 1일의 운행시각 개정 시에는 화물열차의 속도를 향상시켜서 경제계의 요청에 응하였다. 경인선 : 1919년 4월 기존의 급행열차를 폐지하고 여객열차 4왕복, 혼합열차 5왕복 등 총 9왕복으로 하는 한편, 이용객이 적은 1등차의 연결을 중지했다. 1920년 7월 다시 급행열차 2왕복을 마련하고 기존의 1시간 20분을 30분 단축해서 50분으로 하였다. 또한 1923년 7월부터 기동차 6왕복을 운전하여 급행 여객열차 2왕복, 여객열차 4왕복, 화물열차 2왕복과 함께 14왕복으로 하고 양 지역 간 교통의 편리를 도모하였다. 호남선 : 당초 대전~목포 구간의 직통 여객열차 및 혼합열차 각 1왕복 외에 대전~이리, 송정리~목포 구간의 혼합열차 각 1왕복을 운행하였으나, 1918년 7월 이리~송정리 구간에 여객취급 화물열차 1왕복을 증설하여 호남전선에 총 3왕복을 운행하였다. 이 중 직통 여객열차는 기존보다 1시간 단축하여 8시간 30분 소요되었다. 1922년 5월 직통 여객열차 1왕복을 증설하고, 직통 운전시간을 7시간 30분으로 하여 1시간 단축해서 평균 시속을 34.8km까지 향상시켰다. 1924년 5월 일부 열차의 운행시각을 변경하고, 전 구간을 통해서 여객열차 2왕복, 혼합열차 2왕복으로 하여 노선 주변 화물의 반출과 교통의 편리를 증대하였다. 경원선 : 당시 노선 주변 산업은 커다란 발전이 없었다. 운수도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으나 조선 중앙부에서 동해안으로 나오는 유일한 경로였다. 또한 노선 주변에 금강산과 석왕사, 원산해수욕장 등이 있어 이들 탐방객과 해수욕객수송을 위해서 봄, 여름, 가을에는 매년 임시열차를 운행하거나 객화를 증설 연결하였다. 만주철도 위탁경영 후 한동안은 기존대로 운전을 계속하였으나 1919년 11월 이용자가 적은 1등차의 연결을 폐지하고 또한 1921년 6월부터 급구배로 인해서 견인정수가 적은 복계~고산 구간에 화물열차 1왕복을 증설했다. 그 후 경기도 회복되고 객화도 점차 증대하였으므로 1923년 7월 경성~복계 구간에 여객화물열차를 1왕복, 이어서 10월 복계~고간 구간에 화물열차 1왕복을 증설했다. 함경선 : 위탁경영 후 남부는 1924년 10월 양화까지 개통되고, 열차는 경성 발 직통 여객열차 1왕복을 개통할 때마다 북쪽으로 연장 운전하였다. 그밖에 원산 이북에 대략적으로 2왕복의 혼합열차를 운전하였다. 중부는 1924년 10월 길주~단천 구간이 개통되고 성진을 중심으로 혼합열차 2왕복을 운전하였으며, 북부는 1921년 11월까지 봉강~회령 구간이 개통되어 청진 이북은 대략 2왕복, 청진 이남은 3왕복의 혼합열차를 운전했다. 마산선 : 위탁 후 수차례 운행시각을 개정하였으나 열차의 배치를 변경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1923년 7월 여객화물열차 1왕복을 증가하여 총 6왕복으로 하였다. 겸이포선 : 기존대로 3왕복의 혼합열차를 운전하였는데 1918년 7월에 4왕복, 1919년 12월 5왕복으로 하고 그 중 1왕복을 평양까지 직통으로 운전하였다. 평양탄광선 : 1918년 5월 5일 오노다 시멘트 전용선이었던 미림~승호리 구간을 매수해서 일반 영업을 개시하여 평양~미림 구간에 혼합열차 2왕복, 평양~승호리 구간에 혼합열차 1왕복을 운행하고, 후에 1919년 12월 전 구간을 혼합열차 3왕복으로 하였다. 그 후 1922년 5월 다시 객화 취급 열차 1왕복을 추가하였다. 평남선 : 1918년 7월 기존의 혼합열차 3왕복을 5왕복으로 하고, 1919년 12월 1왕복을 줄이고 화물열차 2왕복을 증설하였다. 그 후 1924년 5월에 처음으로 여객열차 1왕복을 마련하였다. 군산선 : 1918년 7월 기존의 혼합열차 4왕복을 5왕복으로 하고, 1922년 5월 7왕복으로 하였다. 군용열차 운전 군용열차 운전 : 1918년 9월 9일부터 약 2주간 시베리아 출정 부대 수송을 위해서 함경선 북부를 제외한 전선에 걸쳐서 전시 운행체제를 실시하고, 10개 열차 중 8개 열차를 군용에 충당하는 대수송이 이루어졌다. 이때 일반 수송에 미치는 영향을 가능한 한 최소화하도록 특별한 배려를 하였다. 제2차 직영시대([표 8-2] ‘열차 운행 횟수표’ 참조) 개황 : 1925년 4월 직영으로 환원할 때 만주철도 간에 조선~만주 간 열차 직통 운전에 관해서 각종 협정을 실시하는 한편, 운전에 관한 제반 규정은 한동안 종전 제도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기존 운전 및 신호규정은 1908년에 제정되었기 때문에 현 상태를 따라가지 못해서 1927년 8월 근본적으로 개정을 실시하여 양 규정을 통일하여 조선철도 운전규정을 제정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경제계는 불황 상태에서 만주사변까지 이어지고, 철도 운수도 이를 반영해서 특별한 진전은 없었지만 당국은 수차례의 열차 운행시각 개정을 통해서 수송의 합리화를 도모하였다. 한편, 조선의 산업 개발을 위해 조선 탄을 사용하면서 각종 방법을 강구하여 연료 절약을 위해서 노력했다. 그 후 함경선의 전선 개통을 시작으로 1927년 이후 발족한 철도 12년 계획에 의한 도문과 만포, 혜산, 동해, 경전 5선의 건설과 기설선 개량 및 사철의 매수 및 개축이 착착 진행되어 조선철도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또한 경제계의 불황 속에서도 조선의 산업 개발이 진행되어 객화가 현저하게 증가하였으며, 기존의 수송 방법을 아주 새롭게 바꿔서 이에 대응할 필요가 대두하였다. 즉, 위탁경영시대에 경인선 및 기타 단거리 구간을 운행하던 기동차를 비롯 그 후 도시 근교에서 활약한 경유 동차를 대신해서 수송이 번거로운 구간에 대해서 고속도의 ‘프레하형’기관차 및 경중량의 신제 ‘라하형’객차로 편성된 경쾌(輕快)열차를 운전하고 객화 분리를 실시하였다. 이 경쾌(輕快)열차는 당시 여객의 호평을 받았으며, 경인선부터 점차로 경성~대전 구간, 경성~신막 구간, 경성~복계 구간 및 평양과 부산 부근 등으로 운행 구간을 확대하였다. 1931년 9월 만주사변 발발 후의 조선을 둘러싼 외적 상황 및 조선 자체 각 방면에서의 획기적인 발전과 함께 객화가 급격하게 증가하여 수시로 전선의 열차 운행시각을 개정해 운수 계통의 개선과 수송 합리화를 도모하였다. 각선 열차의 증설과 북선, 동북 만주와 북중국 방면의 직통열차 설정, 전라선 및 여수항을 경유하는 내선 연락선 증설 등을 실시해 어려운 수송 완화에 대비하였다. [표 8-2] 열차 운행 횟수표 경부·경의 본선 국제열차 경부 본선 경의 본선 경원·함경 본선 기타 노선(1935년 1월 현재) 한편, 조선 경유의 대륙 노선은 종래 안동 경유의 1선밖에 없었지만, 만주국의 확립과 중일전쟁 후 대륙의 치안 회복에 따라 조선과 만주 연락로 강화의 필요성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1933년 10월 청진 이북의 철도를 만주철도에 위탁하였다. 또한 만주철도에서는 나진항을 축항하고 경도선과 도령선을 건설하여 대련항을 경유하는 노선과 함께 만주국 동쪽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항구로 삼았으며, 조선 측에서는 만포선을 연장하여 만주철도의 매집선과 연결, 이 3경로로서 조선과 만주 연락로를 강화하였다. 즉, 경도선은 1933년 10월 15일 도문강교량으로 도문선과 연결하고, 만포선은 1939년 12월 1일 만포철교로 매집선(梅輯線)에 연결해서 안봉선과 함께 3경로의 근간을 마련하였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에도 일본과 만주, 중국 간의 교통량은 계속 증가하였는데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해상 수송이 어려워지고, 육군 물자 수송으로 인해 여객 수송은 점차로 축소되었다. 따라서 여객열차는 속도를 저하하여 수송력 증강을 도모하는 동시에 순차적으로 운전을 중지하고 모든 잉여 수송력을 화물 수송에 사용하였다. 안동구의 완화와 신호장 신설 : 1943년 4월 1일 다사도 철도 소속의 신의주~남시 구간 33.9km를 매수하여 경의 지선인 양시선으로 운수 영업을 개시하는 동시에 신의주~남시 구간이 복선화되어 본선의 선로용량이 크게 완화되었다. 또한 같은 해 10월 1일에는 신의주~의주 간의 운수 영업을 폐지하고, 경의 본선 석하~신의주 구간에 남신의주정거장을 설치하였다. 이어서 12월 20일에는 신의주 강안선의 운전을 중지하는 등 안동구의 열차를 수용하였다. 1943년 12월 30일 경부 본선 대전~회덕 구간에 오정신호장과 1944년 6월 1일 경부 본선 삼랑진~임천 구간에 미전신호장을 신설하였으며, 경부 본선과 호남 본선 및 경전남부선을 각각 직접 연결해 운행함으로써 여수와 마산 양 항을 더욱 많이 활용하였다. 대륙철도수송협의회 설립 : 대륙 물자 수송의 육운 전가에 의한 대륙 각 철도 및 국유철도, 관계부처간의 종합적인 조정을 위해서 1943년 6월 1일 대륙철도수송협의회가 발족하고, 사무국을 만주철도 사내에 두었다. 사무국은 운수와 운전, 시설, 해사의 4계로 구분되고 조선철도와 만주철도, 화북, 화중 각 철도 및 선박 운영회에서 각 계에 파견된 담당자가 3개월마다 수송회의에서 결정한 수송 계획에 의하여 열차의 운전과 자재 준비 등의 기타 조정을 실시하였다. 국제철도로서의 열차 운전 1927년 아시아~유럽 연결선의 부활과 1932년 만주국의 성립과 대륙의 치안이 회복됨에 따라 일본~만주 교통의 요지로서 조선철도의 사명은 더욱 더 중요시되었다. 이에 1933년 4월 1일 관계 연락 철도와 협력하여 조선~일본 간 교통 소요시간의 단축을 목적으로 운행시각을 개정하고, 철도성 측에서 부산~시모노세키 간 연락선의 운항 시간을 단축하여 당국은 부산에서의 선박과 차량 연락 시간의 단축을 도모하였다. 즉, 기존의 연결 시간인 1시간 40분을 40분 내지 50분으로 단축하고, 또한 부산발 만주행 급행 여객열차의 속도를 경부, 경의선에서 선로 강도가 허용하는 한 향상시켜 재래의 각 열차에 비하여 부산~안동 구간에서 2시간 내지 4시간 정도를 단축하였다. 개정의 요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경성~시모노세키 구간에서 2시간 내지 2시간 40분, 신경~시모노세키 구간에서 3시간 5분 내지 5시간 50분 단축 (2) 종래 부산~봉천 구간을 운전하는 급행여객 제7·8열차를 경성까지 운행하고, 부산~경선 구간을 운행하던 제3·4열차를 제1·2열차로 고쳐서 이를 부산~봉천 간 직통 급행여객열차인‘ 히카리’라고 명명하고, 부산~시모노세키 간 주간 연락선에 연결하였다. 이렇게 속도를 향상시킨 결과 기존보다 부산~안동 구간에서 하행 2시간 15분, 상행 4시간 15분 또한 부산~신경 구간에서 상하 각각 5시간 30분을 단축하였다. 이 때의 평균 시속은 경부선 52km, 경의선 53.5km였다. (3)‘ 히카리호’외에 2왕복의 부산~봉천 구간 직통 여객열차도 부산~안동 구간에서 하행 4시간 10분, 상행 3시간 45분을 단축하였다. 그 후 철도성 단나터널 및 암덕선 개통을 계기로 1934년 11월 1일 일본과 조선, 만주철도가 협동하혀 운행시각을 개정하고 제1·2열차 ‘히카리’의 속도를 향상시켜서 이를 신경까지 직통 운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부산~시모노세키 간 연락객의 약 70%가 야간 편을 이용하는 종래의 실적을 고려하여 야간 연락선에 연결하는 부산~경성 간 급행여객 제7·8열차‘ 노조미’를 봉천까지 연장하고, 봉천에서 신경 및 대련 방면행 열차와 연결하였다. 이 개정으로 부산~안동 간 소요시간을 2시간 내지 5시간 단축하고, 도쿄~신경 구간을 55시간으로 하여 개정전보다 10시간 내지 12시간 단축되었다. [참고] (만주 24시간제, 시차 1시간) 북중국 방면의 치안 회복과 함께 일본과 만주, 중국 간의 교통량이 격증하여 1938년 10월 1일 일본~만주선에 맞추어 전선의 열차 운행시각을 개정하는 한편, 부산~북경 간 급행 여객열차 1왕복을 신설하고 부산~경성 구간 급행 여객열차를 2왕복으로 늘려 조선과 만주, 중국의 교통 역사에 신기원을 수립했다. 또한 1939년 11월 1일 부산~시모노세키 간 야간 연락선에 연결하여 부산~북경 간에 급행 여객열차 1왕복을 증설하였는데, 이 북경급행열차를‘ 흥아’, 전년에 설정한 급행열차를‘ 대륙’으로 각각 명명하였다. 이 열차의 부산~북경 간 소요시간은 38시간 40분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멈출 줄 모르는 일본과 만주, 중국 간의 객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다음 해인 1940년 10월 관계철도와 제휴하여 열차 운행시각을 개정하여 대륙 교통 황금시대가 출현하였다. 즉, 함경선에 경성~목단강 구간 직통 여객열차 1왕복, 평양~길주 간에 만포선을 경유하는 직통 여객열차 1왕복을 신설함으로써 1920년대 초부터의 만주로의 3경로가 전면적으로 개통되었다. 이 상태는 태평양전쟁 발발 후에도 여전히 계속되어 1942년 5월에는 경성~목단강 구간 직통 여객열차를 2왕복으로 늘리는 한편, 같은 해 8월에는 부산~신경 구간 급행 여객열차 중 1곳의 열차를 하얼빈까지 연장 운행하였다. 1942년 10월 1일 현재 조선과 만주, 중국 직통 여객열차의 1일의 운행 횟수는 다음과 같다. 부산~북경 구간 : 2왕복 부산~하얼빈 구간 : 1왕복 부산~신경 구간 : 1왕복 부산~봉천 구간 : 1왕복 경성~목단강 구간 : 2왕복 평양~길림 구간 : 1왕복 그 후에도 수송량의 증가 경향은 여전하여 수송력 증강을 필요로 하였지만, 요원 및 자재 관계로 인해 필요한 만큼 열차를 증설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하의 해상 수송 물자의 육군 전가 및 기타 중요 물자의 수송 증강을 위해서 부득이하게 여객 수송을 축소해야 했다. 1943년 4월 부산~봉천 구간 직통열차 1왕복을 폐지하는 한편, 기타 직통열차에 대해서는 속도를 낮추고 연결 차수를 증가시켜 종전과 같은 수송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1943년 10월 9일 부산~시모노세키 간 야간 연락선의 운행이 중지된 같은 날부터 부산~경성 구간 급행 여객열차인‘ 아카쓰키’의 운행을 중지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25일을 기하여 여객열차의 배치를 교체하여 부산~북경 간 급행 여객열차 1왕복을 경성~북경 간으로 변경하였다. 그러나 육군 전가 물자와 기타 중요 물자의 수송 요구량이 계속 증가하는 데다 여객열차를 축소해야 했기 때문에 1944년 2월 1일 부산~신경 구간 1왕복, 경성~북경 구간 1왕복 및 경성~목단강 구간 1왕복의 각 급행 여객열차를 폐지하고, 같은 해 4월 1일에는 조선 내 여객열차를 축소하는 동시에 화물열차를 증설하여 수송력 확보를 위해서 노력했다. 그 결과 1944년 10월 1일 조선과 만주, 중국 간의 직통 여객열차는 부산~북경 간, 부산~하얼빈 간 및 경성~목단강 구간의 각 1왕복만 남았다. 조선 내의 열차 운전 조선철도는 국제 연락 철도로서 활약하는 한편, 조선 내 산업 개발과 문화향상, 국방상의 중요한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점에 입각하여 정치, 경제, 문화 등 시대의 요청에 따르도록 적시에 열차 운행 횟수 및 그 배열을 개정하고 속도를 향상시켜 객화의 속도 달성을 위해서 노력하였으며, 노선 주변의 통학 아동 및 통근자를 위해서 특정 열차를 설치하였다. 또한 매년 준공하는 신선의 영업 개시와 사설 철도 중 중요 물자의 수송 선로 매수 및 정거장 증설 등 각종 사정을 참작해서 운행시각을 개정하여 사명을 달성하였다. 주요 열차 운전시각 개정 및 특별 열차의 운전 현황 등에 대해서 기술한다. 1933년 4월 1일 운행시각 개정 : 만주국 성립과 함께 일본~만주 간 교통의 요충지로서 중요성이 더해져 관계 연락 철도와 협의하여 일본과 조선, 만주 간 교통 소요시간의 단축을 목적으로 열차의 운행시각을 개정하였는데 조선 내 열차 관계의 주요 개정 사항을 들면 다음과 같다. (1) 종래 경성~목포 구간에는 직통열차가 없고 일부 객차가 직통으로 운행되었는데, 새로이 경성에서 호남선으로 직통열차를 설정했다. (2) 일본~만주 간 연락 화물의 속달을 위하여 부산~안동 간 직통 화물열차의 속도를 향상시켜 약 6시간 단축하였다. (3) 경성~상삼봉 구간 직통 여객열차의 속도를 향상시키고 경성~주을 구간에 경원~함경선 최초로 급행열차를 운행하여 종래의 소요시간을 6시간 30분 단축했다. (4) 앞에서 기술한 여객열차가 경성~주을 간 급행 여객열차가 되었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경성~함흥 간에 여객열차 1왕복을 신설했다. (5) 화물열차의 계승 연결을 원활히 하여 경성~청진 구간에서 상행 13시간, 하행 15시간으로 화차 속도를 단축시켰다. 1934년 11월 1일 운행시각 개정 : 전년도의 운행시각 개정에 이어서 간선 주요 열차의 속도 향상을 위해 국제열차를 중심으로 운행시각을 개정하였다. 이와 동시에 개정된 각 선 열차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1) 대전~신막 구간 객화 분리의 제1 계정으로서 대전~개성 구간 화물열차의 여객 취급을 폐지하고, 경성~개성 구간 2왕복(그 중 1왕복은 동차)을 3왕복으로 하고, 별도로 경성~신막 구간에 여객열차 2왕복을 증설한다. (2) 대구~김천 구간에 동차 1왕복, 평양~정주 구간에 동차 2왕복을 증설한다. (3) 경성~상삼봉 구간의 급행열차(주을까지 급행)를 도문선의 광궤 개축 준공에 의해서 웅기까지 연장 운전한다. (4) 경성~원산 구간 혼합열차 503·504열차를 여객열차로 바꾸고, 503열차는 동 구간에서 1시간 25분 단축한다. (5) 성진~청진 구간에 화물열차 1왕복을 증설하고, 경성~청진 구간에 직통 화물열차를 운전한다. (6) 경성~복계 구간의 객화를 분리하고, 경성~복계 구간의 여객열차 2왕복(그 중 1왕복 동차)을 3왕복으로 한다. (7) 기타 일부 구간 열차를 증설한 결과 국제열차를 포함하여 1일의 열차 주행거리가 약 5,400km 정도 증가하였다. 1936년 12월 1일 운행시각 개정 : 부산~시모노세키 간 대형 연락선 취항과 여객 화물 증가에 대한 수송 열차 조정 및 수송 계통의 개선, 만철선의 운행시각 개정과 함께 전선 열차의 운행시각을 개정하였다. 조선~만주 직통열차 이외의 개정 요점은 다음과 같다. (1) 경성~부산 간에 특별 급행열차 제17·18열차를 신설하고 ‘아카쓰키’라고 명명하였다. 기존의 급행 ‘노조미’제7·8열차는 경성~부산 간 운행에 7시간 50분이 소요되었으나, 아카쓰키는 6시간 45분으로 단축 운전하고 정차 역은 대전, 대구의 2역으로 하였다. (2) 부산~안동 구간에 부정기 급행 여객열차를 신설하고, 연말연시 등 기타 여객 수송 성수기에 대비하였다. (3) 부산~안동 구간에 직통 급행화물열차(하행 편도)를 신설하고, 부산~안동 구간에서 11시간 55분을 단축하였다. (4) 경성~함흥 구간에 여객열차 2왕복을 증설하였다. (5) 12월 16일의 전라선 개통과 함께 이리~여수항 구간에 여객열차 1왕복을 신설했다. (6) 부산~경주 구간 여객열차의 속도 향상을 도모하여 기존에 4시간 12분이 소요되던 것을 3시간으로 단축하였다. 1938년 10월 1일 운행시각 개정 : 객화 증가에 따른 수송력 증대와 수송계통 개선 및 만철선의 열차 운행시각 개정에 따라서 전선의 열차 운행시각을 개정하였으나, 조선 내 열차로서는 북선과 동만주 방면과의 교통량 증가에 대처하기 위해서 함경선에 중점을 두었다. 즉, (1) 경성~청진 구간에 급행 여객열차를 증설하고, 수성에서 청진~나진 구간을 왕복하는 여객열차에 연결하였다. (2) 경성~웅기 구간의 직통 급행여객열차의 속도를 향상시켜 경성에서 신설 급행여객열차에 연결하였다. (3) 대전~평양 구간 2왕복, 경선~복계 구간 1왕복, 복계~영안 구간 2왕복, 영안~청진 구간 3왕복, 평양~희천 구간 2왕복으로 화물열차를 증설하였다. (4) 이 개정으로 1일당 열차 km는 광궤선 76,983km, 협궤선 2,781.3km, 총 79,764.3km가 되어 1933년 4월 1일의 개정에 비하여 33,226km의 증가로 5년간에 71% 증가하였다. 1941년 4월 1일 운행시각 개정 : 평원서부선 양덕과 평원동부선 성내 구간 58.7km가 개통되고, 여기에 조선 북부의 유일한 중요 횡단선인 평원선이 전선 개통되었다. 또한 본선의 주요 업무인 조선 서부지역의 주요 자원의 북선 공업지대 및 일본 방면 수송, 서북 구간의 수송거리 단축을 위해서 평원선 전선에 걸쳐서 열차 운행시각을 개정했다. 그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평양~원산 구간 직통 여객열차 2왕복 신설 (2) 평양~원산 구간 직통 화물열차 2왕복 신설 (3) 평양~순천 구간의 객화 분리 이 개정에 의해서 1일당 열차 운행 길이가 2,106.2km 증가하였다. 1941년 12월 1일 운행시각 개정 : 1941년 7월 1일 경경남부선 경북 안동~영주 구간 38.7km 및 원주~제천 구간 46.8km이 개통되고, 또한 같은 해 9월 1일 용문탄광선 어룡~용문탄광구간 7.1km가 개통되어 각각 열차의 연장 운전과 일부 열차의 운행시각을 수정하였다. 같은 해 12월 1일 함경 본선 수성~고무산 구간의 복선공사가 완성되어 이 구간의 복선운전을 개시하였다. 동시에 나남~청진 구간 직결선의 개통을 계기로 주로 경원·함경선과 이에 관련된 제 선의 열차 운행시각을 개정했다. 선로용량과 자재 부족 등의 관계로 필요한 만큼의 증설은 이루지 못하였다. 열차 증설은 북선 방면의 중요한 물자 수송에 중점을 두어 증설 가능한 운행 킬로미터는 대부분 화물열차에 충당하였으며, 여객열차는 배치 교체, 열차 단위 증대를 통해 여객 수송에 대처하였다. 이 개정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여객열차 관계] (1) 부산~경성 구간 제103·104열차를 급행화하고 이를 평양까지 연장 운전 (2) 경원·함경선 제307·308·309·310열차를 병행 운전하고, 그 중 제 307·308열차를 주간 운행으로 재배치 (3) 경원·함경선 야간 급행열차가 1개 열차가 되어 여객 폭주 우려가 있으므로 경성~청진 구간에 보조 기관차를 사용하여 열차 단위의 증대 도모 (4) 가솔린의 소비규정에 수반하여 동차의 운전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부산 근교와 용산선, 평남 평원선 및 호남 전라선 등 일부에 남아있던 동차에 의한 열차를 모두 증기 열차로 교체 [화물열차 관계] 북선 방면에서의 중공업 발흥(發興)에 따른 자재의 원료나 제품 수송 격증에 대응하기 위해서 원산~상삼봉 구간, 함흥~청진 구간, 함흥~신북청 구간, 성진~청진 구간, 순천~고원 구간, 길주~혜산진 구간에 각각 1왕복, 청진~고무산 구간에 5왕복의 화물열차를 증설하였다. 이 개정에 의해서 1일당 열차 운행 km가 3,393km 증가하였다. 1942년 10월 1일 운행시각 개정 : 1942년 4월 1일 경경선 영주~제천 구간 62.3km가 개통되어 경경선 전선이 운행되었으며, 같은 해 1일 경선~평양 구간의 복선공사가 완성되어 이 구간의 복선운전을 개시하였다. 또한 같은 해 9월 21일 서선중앙철도의 평남 강동~신성천 구간 30.3km가 개통되고, 승호리~북창 간이 직통으로 운전되는 등 순차적으로 애로점을 타개하였다. 그러나 객화의 격증은 여전히 감소하지 않아 이에 대응하기 위해 열차를 증설하는 동시에 만주철도와 화북교통 양 사의 시각 개정에 협조해서 전선의 시각을 개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증설이 필요한 운행 길이는 상당하였지만, 바퀴 관련 자재 관계로 소요 길이를 조달하지 못하고 주로 화물열차의 증설에 그쳤다. 이번 운행시각 개정 후 10월 11일부터 24시간제를 실시하였다. 이 개정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여객열차 관계] (1) 부산~경성 구간에 준급행열차 1왕복 증설 (2) 경성~목단강 구간 급행 제301·302열차의 속도를 청진 이북부터 향상시켜 여행 시간을 약 3시간 30분 단축 (3 경성~북경 구간 제3·4열차의 속도를 저하하고 수송력 증가 (4) 경성을 중심으로 근교 도시 구간에 6개 열차의 지방 여객열차 증설 [화물열차 관계] (1) 부산~대구 구간, 대전~용산 구간, 신막~안동 구간, 고산~명천 구간, 고무산~삼상봉 구간, 평양~만포 구간, 평양~운곡 구간, 길주~혜산진 구간, 대전~송정리 구간, 원산~고성 구간에 각각 1왕복씩 화물열차 증설 (2) 복계~고산 구간, 운곡~고원 구간, 청진~고무산 구간에 각각 2왕복의 화물열차 증설 (3) 안동~부산 구간에 2개 열차, 용산~상삼봉 구간에 1개 열차의 부정기 화물열차 신설 이 개정에 의해서 1일당 열차의 운행 km가 6,816km 증가하였다. 1943년 11월 25일 운행시각 개정 : 부산~시모노세키 간 야간 연락선의 운행 중지에 따른 여객열차의 배치 변경을 위하여 주로 경부·경의 본선의 열차운행시각을 변경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부 산~경선 구간 급행 여객열차‘ 아카쓰키’제17·18열차를 폐지하고, 주간 연락선과 연결하는 부산~경성 구간 급행 여객열차 제11·12열차 신설 (2) 부산~북경 구간 급행 여객열차 제9·10열차를 경성~북경 구간으로 변경이 개정에 의해서 1일당 열차 운행 길이가 740.7km 감소하였다. 1944년 2월 1일 운행시각 개정 : 대륙 전가 물자 및 중요 물자의 급격한 수송 요청량 증가와 함께 수송력 확보를 위해서 일부 여객열차의 운전을 중지하는 동시에 침대차 축소와 열차 속도의 대폭적인 저하에 의한 견인정수 증대 등 비상조치를 강구하였다. 이로써 발생한 여력을 모두 화물열차 증설에 충당하고, 경부·경의 본선 및 호남, 전라, 경전, 평남, 겸이포 각 선의 열차운행시각을 개정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객열차 관계] (1) 부 산~신경 구간‘ 노조미’제7·8열차, 경성~북경 구간‘ 대륙’제9·10열차 및 경성~목단강 구간 제309·310열차의 각 급행열차 폐지 (2) 부산~봉천 구간 수화물열차 제53·54열차 폐지 [화물열차 관계] 안동~부산 구간 1왕복, 안동~부산 구간 1왕복, 안동~여수 구간 1왕복, 이리~여수 구간 2왕복, 황해 황주~겸이포 구간 2왕복의 각 화물열차를 증설였다. 이 개정에 의해서 1일당 열차 운행 km가 3,418.7km 감소하였다. 1944년 4월 1일 운행시각 개정 : 1944년 4월 1일 대망의 경원선 복계~고산 구간 53.9km의 전철화공사가 완료되어 동양 최초로 직류 3,000볼트의 전기 기관차에 의한 열차의 운전을 개시하여 경원선의 수송력이 더욱 증강되었다. 같은 날 조선철도 황해선 전선 278.5km, 서선중앙철도 승호리~신성천 구간 68.4km, 북선척식철도 고무산~무산 구간 60.4km, 또한 같은 해 5월 1일에는 부산임항철도 부산진~감만리 구간 6.1km의 각 철도를 매수하여 각각 황해선, 평양탄광선, 무산선, 부산임항선으로 개칭하고 운수 영업을 개시하였다. 이상 각 사철선 매수와 함께 중요 물자의 수송 요청 증가를 예상, 수송력 확보를 위해서 전선의 열차 운행시각을 개정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객열차 관계] 부산~안동 구간 제47·48열차, 경성~청진 구간 제303·304열차, 부산~청량리 구간 제507·508열차의 각 여객열차 폐지 [화물열차 관계] 안동~부산 구간, 신막~부산 구간, 이리~순천 구간, 안동~마산 구간, 안동~수색 구간, 안동~황해 황주 구간, 황해 황주~겸이포 구간, 안동~평양 구간 각 1왕복 및 평양~문천 구간 4왕복의 화물열차를 증설하였다. 이 개정에 의해서 1일당 열차 운행 km가 7,448.5km 증가하였다. 1944년 10월 1일 운행시각 개정 : 대륙 전가 물자 및 기타 중요 물자의 수송량 증가에 대응한 수송력 확보와 부산~시모노세키 구간 연락선의 착발 시간 변경에 따른 직통 여객열차의 배치 변경 및 황해 본선 사리원~하성 구간 41.7km의 광궤 개축공사의 준공, 경북선 점촌~경북 안동 구간의 영업중지 등에 의해서 전선의 열차 운전시각을 개정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객열차 관계] (1) 부산~경성 구간 제11·12열차를 평양까지 연장 (2) 경성~청진 구간 제311·312열차 신설 (3) 부산~경북 안동 구간 제501·502열차를 청량리까지 연장 (4) 이상과 더불어 지방 여객열차의 일부 폐지 [화물열차 관계] (1) 안동~부산 구간, 안동~마산 구간, 안동~여수 구간, 안동~목포 구간, 이리~순천 구간, 삼랑진~마산 구간, 안동~평양 구간, 황해 황주~신막 구간, 수색~부산 구간, 평양~문천 구간 각 1왕복, 이리~목포 구간 2왕복으로 화물열차 증설 (2) 이상과 더불어 선로용량 관계상 하행 화물열차의 일부 폐지 [여객열차의 운전 중지]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여객열차를 일부 증설하였으나, 우량탄 공급 실정을 고려하여 개정 전보다 증설되지 않도록 당분간 다음과 같이 여객열차를 운전 중지한다. 경성~평양 구간 급행 여객 제11·12열차 함흥~청진 구간 여객 제305·306열차 제천~경북 안동 구간 여객 제501·502열차 이 개정에 의해서 1일당 열차 운행 길이가 5,213.2km 감소하였다. 종전 직전의 열차 운행 상황 : 1932년 착공된 이래 계속해서 부분 개통한 백무선은 1944년 12월 1일 마지막으로 연사~무산 구간 54.8km의 공사가 준공되어 전선이 개통되었다. 또한 1936년에 시작한 경부·경의 본선의 복선 개량공사도 1945년 3월 1일에 준공되어 부산~안동 구간의 복선운전을 개시하였으며, 기존에 애로사항이었던 역 구내의 유효장과 선로의 곡선, 구배 등도 완화되어 수송력이 현저하게 향상되었다. 한편, 전시 상황이 진전됨에 따라 수송 요청이 나날이 증대하여 여객열차 축소와 일부 지선구의 운전 중지까지 요구되었으며, 열차 운행시각 개정 시마다 전가 화물 및 중요 자재 수송 중심으로 운행시각이 변경되었다. 그러나 열차 운행이 선로의 최대 수용량을 기준으로 짜여 졌기 때문에 약간의 지연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연료 질의 저하와 차량 보수 자재 부족, 중견 승무원 징집 등이 겹쳐서 열차 운행에 점차 혼란이 가중되었다. 부득이하게 기관차의 견인정수를 일시적으로 증가시키고, 열차 본수를 감소하는 방안을 강구하였으나, 이것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일반 화물열차 등은 수 시간 지연되기에 이르렀다. 열차의 지체는 급수소의 물 보급을 곤란하게 하였으며, 이로써 지연을 더욱 가중시키는 악순환이 반복, 마침내 열차사고의 원인이 되어 종전 전의 열차 운전은 실로 최악의 상태였다. 만주국 황제 열차 운전 1943년 5월 5일 만주국 황제의 압록강 상류에 부설된 수풍발전소 댐 시찰을 위해서 안동~정주 구간과 평북철도 정주~수풍 구간에 열차를 운전했다. 황제 열차는 견인기‘ 파시시’976호, 어소 열차 신제‘ 토크’7호 및 부수차 1량으로 편성되었으며, 열차에는 야마다 국장을 비롯하여 관계자가 동승하고 정주에는 임시운전사령부를 설치하여 열차 운전에 만전을 기하였다. 평북철도 본선인 수풍에서 수풍댐 제방까지의 1km 미만의 구간은 트롤리식 화차만 운행되는 연약한 선로로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고 운전하였다. 아침부터 비가 왔지만 열차가 평북철도에 들어갈 무렵부터 날씨가 맑아져 무사히 운전을 끝마칠 수 있었다. 군용열차 운전 1937년 5월 2일과 3일 양일간 부산발 만주 파견부대 수송을 위해서 4월 28일부터 5월 4일까지 수송 처리 기관으로서 부산에 임시철도관리부를 설치했다. 마찬가지로 7월 7일 중일전쟁 발발에 따른 이 지역의 파견부대 수송을 위해서 7월 16일부터 계속해서 경부·경의 본선에 군용열차를 운전했다. 당초에는 일반 열차에 전혀 제한이 없었으나, 8월 4일부터 장기간에 걸쳐서 집단 수송을 실시하게 되어 부득이하게 일반 영업에 상당한 수송 제한을 두어 평상시의 열차 운전은 일체 중지하고 그 사이에 전선에 걸쳐서 임시열차를 운행하였다. 이 군용열차 집단 운행은 9월 말에 일단 종료하고 10월 5일부터 평상시 운행으로 복귀하였다. 관동군 특별 대연습 열차 운전 1941년 7월 15일 봉천에서 조선과 만주 특수 긴급 간사회가 개최되어 이미 계획되어 있던 군사 수송 운행시각에 따른 수송을 실행하게 되었다. 일본으로부터의 군대와 군수품은 부산과 마산, 여수에 상륙하여 경의·함경 양 선을 북상해서 만주로 수송하였다. 부산 상륙을 중심으로 7월 21일부터 매일 10여 개의 열차가‘ 미카형’기계 견인과 화차 40량, 환산 24량의 편성으로 수개월에 걸쳐서 60만 내지 70만명의 병사와 이에 부수하는 병기 군수품을 만주를 향해서 수송하였다. 수송은 철도국 전체의 노력으로 함경선 영흥역 부근의 수해로 인한 함경선의 일시 두절 외에는 커다란 사고 없이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제2절 열차 속도와 견인정수 조선·만주·중국 직통 운용 차량은 모두 조선·만주·중국 차량 설계 기준에 의해서 제작된 객차 및 화차인데, 이들 공통의 차량 중에서 가장 많은 자중 13.5톤, 하중 30톤 총 43.5톤의 보기 화차를 표준 차량으로 하고 이를 환산 1량으로 하여 조선· 만주 간 협정으로 정해졌다. 표준역 간의 열차 운전시분은 특급, 급행, 여객 갑·을, 혼합 갑·을, 화물 속도로 구분하고, 각 선구에 설정되는 열차 종별에 따라서 필요한 운행 시간을 산출했다. 견인정수는 위의 표준 차량에 의한 환산 양수로 나타내고 선로 종별에 의해서 운전이 허용된 기관차가 결정되면 그 선로의 구배와 곡선 조건에 의해서 운전 속도 종별마다 등판 속도· 강판속도· 곡선· 선로전환기의 통과 속도 제한 등의 제요소를 고려하고 특정 구간을 정해서 견인정수와 표준 운전 시간을 상관적으로 결정했다. 특히 신기종· 신선에 대해서는 시운전을 실시하여 검토하였다. 예를 들어 특급 ‘아카쓰키’ 운전을 계획하는 경우에는 부산-경성 구간 6시간 운전을 목표로 견인정수를 6량으로 하고 속도 시분선도를 그리고, 시운전 결과 구배 10‰의 등판 속도는 70~80km/h를 확보할 수 있으며 6시간 운전 가능성을 실증했다. 실제로는 여유운전 시간을 부여하여 6시간 45분으로 열차 운행 시간을 짜고 견인 정수도 부산-경성구간 ‘파시시(3)(참고 1)’로 8량으로 하였으나, 1940년의 실적은 환산 양수의 평균은 7.2량이었다. 급행 속도에서 견인정수는 ‘파시’형으로 12량으로 하였으나, 실적에서는 부산-경성 구간 8.8량, 경성-안동 구간 9.8량, 부산-대전 구간 10.3량, 대전-경성 구간 10.2량, 경성-평양 구간 10.4량, 평양-안동 구간 10.5량이다. 여객 속도에서는 견인정수를 14량으로 하고, 실적의 평균 11.3-12.0량을 나타내고 급행 화물 속도로 경부선의 ‘파시’ ‘미카’형의 평균 12.8량, 화물 속도로 ‘파시’형 평균 15.6량, ‘파시코(5)’형 16.0량, 미카사(3)형 18.0량, 마테이(1)형 23.4량의 실적을 나타낸다. 관동군 특별 대 연습시의 수송에서는 ‘미카’형으로 화차 40량, 환산 24량을 견인했다. 견인정수는 여름, 겨울을 구별하지 않으며 연료도 열차에 따라서 다른데, 특급 등에 사용하는 7,000cal 연탄에서 한쪽에서는 5,600cal의 혼탄을 사용하는 열차도 있으며, 그 때의 연료 사정에 따라서 변화하는 것은 부득이하므로 전쟁 말기의 연료 상태 악화로 열차별 변동이 현저하였다. 한편 화차의 하중 면에서 보면 쌀과 석탄, 광석은 정미 30톤을 적재하고 때로는 초과되는 수도 있었으나 일반 화물의 경우에는 표기된 하중보다 가벼운 경우가 많은 등 열차 편성 차종에 따라서 견인정수에 탄력성이 있었다.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하여 철도사무소에서는 요청에 따라서 다소의 초과는 특별히 허용하였다. 만주로부터의 전가 화물이 급증하던 무렵, 장대한 열차를 기관차의 중련 운전으로 견인했는데 비상수단으로 견인정수 계산의 안전율을 낮춰서 견인정수의 20% 증가를 특별히 허용하고, 중련 운전을 중지했기 때문에 경부·경의선에서 ‘미카’형 25량의 정수를 30량까지 특별히 허용한 경우도 있다. 또한 계획적으로 구간을 분할해서 심한 구배 구간만 보조기관차를 연결하고, 기타 구간의 정수를 대폭 증가하는 방법을 실행하는 등 전시 하에 총력으로 평상시에는 생각할 수 없는 모든 비상조치를 강구하여 수송력 증강을 위해 노력했다. ========================= 참고 1) 증기기관차는 해방이후에도 계속 사용되었는데 모가는 초기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도입된 모갈이었으며 해방이후는 북한에서 운행되었다. 프레는 푸러, 바루는 발틱, 테호는 터우로 불리웠는데 터우은 현재 의왕 철도인재개발원에 남아있다. 마테 기관차는 장단역에 유일하게 남아 있다. 이는 마테2형으로 무게80톤, 길이 15미터, 폭 3.5미터, 높이 4미터의 제원이다. 파시시의 경우는 파시형의 3형을 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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