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역사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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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제작사업 | 2022.12.20 |
6 | 공장작업 | 2022.12.12 |
5 | 공장설비 | 2022.12.06 |
4 | 철도공장의 연혁 | 2022.11.28 |
3 | 제2차 직영시대 이후 차량의 경과 | 2022.11.21 |
국유철도의 차량 | |
제작사업 | 2022.12.20 |
철도공장 제4절 제작사업 제조 수선비용 : 제작사업은 차량의 제작과 개조, 수선 및 교량의 상판지지거더, 그 밖의 철도 용품의 제작 수선 등인데 이들 제작 수선용 공사비는 시대에 따라 다소 감소를 보였지만, 전체적으로 점차 증가하였다. 1912년 이후 제작 수선비용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누년 비교는 [표 6-35] 참조). (단위 : 천엔) 공장 종사원 : 공장의 기술공(시대에 따라 직공 혹은 공작방이라 칭한다)의 수도 제작 수선공사의 팽창에 따라 증가하였으며, 통감부 인계 당시의 1일 평균 772명이 1912년에는 1,463명으로, 1939년에는 몇 배인 3,424명에 달하였다. [표 6-34] 1일 평균 기술공의 수 기술공 양성은 중견종사원 양성 목적으로 1919년 설립한 종사원양성소에 4년제의 도제과를 설치하고, 1922년 5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1921년 도제과를 공작과라 칭하고, 학생을 공작견습생으로 삼아 1925년 이후 매년 30명을 졸업시켰다. 하지만 1932년에 폐지하고 공장의 기술공 견습제도를 설치, 양성해 왔는데 1938년에 부산공장, 1940년에는 다른 공장들도 차례로 견습제도를 실시하였다. [표 6-35] 공장제작 수선공사 비용 누년 비교표 임금청부제도의 변천 : 기술공의 임금제도는 상비제도의 시간급을 채용하였지만,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호황으로 제작 수선공사가 현저하게 증가하였기 때문에 1922년 12일부터 로안의 프리미어시스템에 의한‘ 공장직공 할증부 작업규격’을 정하여 다음 산식에 의해 할증시간에 대한 급료를 지급하였다. B×(A-B) = 할증시수 A : 소정준공시수 B : 실제 노동 준공시수 경성공장에서 1922년 3월까지 실시하였으나 불황기에 접어들면서 중지하고, 상비작업으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차량의 제작 수선공사의 능률 향상과 공사비의 감소를 꾀하기 위해 다시 청부작업이 유리하다고 여겨 1927년 8월 새로이‘ 공장 공작방 청부작업규정’을 제정하여 경성공장에서 실시하였다. 이 제도는 능력별 지불제도에 의한 것으로 어떤 작업에 대한 지정공사 인원과 실제 노동 공사 인원의 차익 공사 인원에 대해 가산해 지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29년 다시 불황시대를 맞아 차량 수선작업도 축소되었기 때문에 이 제도도 중지하였다. 만주사변 후 다시 호황이 되어 3번째의 청부작업 제도를 채용하고 1936년 3월 하루세이식 제도에 의한‘ 공장 기술공 청부 작업규정’을 제정하여 경성공장에서 실시하였는데 공장의 제작 수선공사가 계속해서 증가했기 때문에 이것을 전반적으로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사끼야마 산이치로 발상의 사끼야마 산정식이라 하여 임금의 반은 연공, 반은 기량에 의하는 획기적인 산출방법이었다. 사끼야마 산정식 P1 = P×½(1+a/a1) a : 급료에 대한 인공 P a1 : 급료에 대한 인공 P1 표준급 a의 공작방의 작업에 요하는 소요시간, 즉 표준시간을 정하기 위하여 현장에서는 각종 테스트를 행하여 고심한 끝에 P1의 수치표를 제작하여 운영을 쉽게 하였다. [표 6-36] 공장 기술공 1일 평균 노동 수고품 및 임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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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차량 | |
공장작업 | 2022.12.12 |
철도공장 제3절 공장작업 수선작업의 개요 조선철도 철도공장의 작업 내용은 크게 구별하여 ① 철도 차량의 제작 및 수선 개조, ② 철도 용품 기기류의 제작 및 수리로 나눌 수 있지만 창시시대의 수입차량의 조립 및 교량용 거더, 전철기 등 철도 용품의 제작은 기계공업이 미숙한 시대의 조선에서는 많은 곤란을 수반하는 작업이었다. 통감부시대에 들어 각 철도가 통합되고 각 차량의 부품, 예를 들면 자동연결기의 통일, 중앙공기제동기의 채용 등 이미 제작된 차량의 개조 수선작업이 계속되었다. 1912년 무렵이 되어서 수입 기관차의 개조가 큰 폭으로 시행되고, 객차 및 화물차의 자체 제작이 시작되었다. 영업 킬로의 증가와 함께 차량의 종류와 량 수도 해마다 증가하고, 공장에서는 수선 및 개조작업도 증가하였기 때문에 수선일수를 단축하는 것이 큰 목표가 되었다. 평균 수선 일수의 단축 요소는 수선기술의 향상 외에 공장관리의 뛰어난 운용과 기계 기구의 개선에 있지만 구체적으로는 다음의 항목이 실시되었다. (1) 차량 이력카드의 채용 - 작업번호제도를 사용하여 입장 전에 예비품을 준비하고 각 공정마다 기관차는 1919년, 객차는 1933년부터 사용하였다. (2) 수선 공정의 확립과 분업제도의 진보 - 작업진행에 따라 해체 검사 부품의 제작, 조립, 검사 등의 일정을 마스터카드에 기입하고, 예정대로 완성시키는 방법으로 루칭 시스템이라 칭하였다. (3) 수선기술의 진보 - 압축 공기와 가스 및 전기용접방식을 채용하여 수선 작업, 특히 기관차 기관 수선작업을 현저하게 단축시켰다. 전기용접은 1919년부터 연구하여 다른 철도에 앞서서 1925년에는 본격적으로 사용하였다. (4) 차량 부품의 규격화 (5) 수선 한도와 수선 기준 및 작업 기준 제정 (6) 공작기계의 개량 (7) 적정 임금제 실시 (8) 기능 양성과 교육 (9) 운전 관계구에 있어서의 차량 보수 능력 향상 (10) 공장과 운전 관계구와의 협력 주) 평균은 그 연도의 각 공장 평균을 나타낸다.(단위는 일) 수선일수 : 이상과 같이 수선일수는 수리기술의 진보와 제작 기기류의 개발에 의해 현저하게 단축되었지만, 더욱이 1926년 무렵에 들어서는 수선 관리의 능률적인 운용에 의해 다음 표와 같이 경이적인 수선일수의 단축을 이루었다. 기관차의 공장수선 : 기관차검사규정에 의해 수선은 공장수선과 기관구수선으로 구분되어 있다. 공장수선은 일반수선(반수)과 국부수선(국수)의 2종류로 나뉘어 있다. 일반수선 : 기관차를 해체하여 각 부분을 검사하고 수선을 행하는 것으로, 일반수선은 약 2∼3년마다 행하여졌다. 일반수선에서 다음 일반수선으로 공장에 들어오기까지 주행하는 킬로 수(회귀 킬로미터)는 차량 성능과 상태, 수송상황, 열차 운행계획 등 제반의 조건을 감안하여 기관차 형식별로 표준회기 km표를 제작하여 일반수선 시기를 결정하고 공장에 보내었다. [표 6-31] 출장차 1량 평균 개조 수선일수 누년 비교표(1935~1939)(단위 : 일) 주) 1940년 이후는 자료 미발표로 인해 불명 [표 6-32] 차량 개조 - 수선 출장량 수 누년 비교표(1935~1939)(단위 : 량) 주) 1940년 이후는 자료 미발표로 인해 불명 국부수선 : 일반수리에 속하지 않는 수선을 국부수선이라 칭하며, 소정의 기간 도중에 고장을 일으키거나 혹은 마모한도에 달하였지만 기간구에서 수선이 불가능하거나 곤란한 경우에 공장에서 시행하는 수선을 말한다. 예를 들면 외륜 마모, 보일러 판의 균열, 대축 파손, 기통 파손 등과 같은 경우의 수선을 말한다. 사용한도 : 외륜의 플렌지나 단면의 형상 혹은 동축 경부의 직경 등이 교정이나 삭정에 의해 일정 길이 이하가 되면 위험한 한도에 도달한다. 이것을 사용한도라고 하며, 제1사용한도와 제2사용한도의 2종류가 있다. 제1사용한도는 공장에서 외륜이나 축경 등을 삭정할 때 그 길이 이하가 되어서는 안 되는 길이를 말한다. 실린더의 내경을 삭정하는 경우는 이 치수보다 커져서는 안 되는 치수를 말한다. 제2사용한도는 이 치수 이하로 사용하면 위험하다는 치수로 주로 기관구에 이용된다. 주요 부분에 대해서는 완전 보호 유지라는 관점에서 기관차 형식별로 제1사용한도, 제2사용한도가 상세하게 제정되었다. 전시 상황이 급변함에 따라 수선용 자재의 입수도 곤란하게 되어 사용한도를 완화하여 전시형 수선 규격을 제정해서 사용수명을 연장시키는 수단을 강구하였다. [표 6-33] 표준회귀 km표 주) 신조 기관차는 20% 증가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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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차량 | |
공장설비 | 2022.12.06 |
철도공장 제2절 공장설비 철도공장설비 계획 철도공장에서의 공장설비 계획은 작업 내용, 입지 조건에 좌우된다. 공장설비의 질은 작업 능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므로 장래를 예측하여 계획을 수립하지만 작업 내용의 진전이나 기계 기술의 진보에 의해 크게 변화하는 경우가 많다. 공장의 배치 계획이나 차량의 출입노선, 물품 보관 및 옥외 이동설비 등을 고려해야 한다. 공장설비는 크게 제작 기계 제조설비와 전력시설로 구분되는데, 전자는 차량 전용 제작 기계, 후자는 자가 발전을 할 것인지 전기를 구입할 것인지에 따라서 배치 계획이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다. 경성공장(구 용산공장) : 이 공장은 경부철도시대의 용산공장에 1908년 4월 인천공장으로부터 기계 35조를 이설하여 기계류가 충실화되도록 노력하였다. 1909년에는 객차 수선공장 낙성식을 하고, 자가용 화력발전소를 신설하여 이 공장의 동력원으로 삼아 기계류의 증비를 도모하였다. 수입된 차량의 수선과 개조의 작업량이 점차 증대되는 한편, 화물차와 객차의 자체 제작 능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1910년대에 들어 각 공장을 증설 및 신설하고, 1923년 6월 경성공장으로 개칭하였다. 1925년 조립공장에서는 내화실판에는 가스 용접, 연관에는 전기 용접을 사용하였지만, 그때까지 대부분의 이음매로서는 못을 사용하는 시대였다. • 1915년 : 조립공장, 선반공장 증축 / 단야공장, 제관공장 신설 • 1917년 : 칠공장 신설 • 1919년 : 동합금 주물 및 전기공장 신설 / 선반, 조립, 단야, 제관, 주물 각 공장 및 반완성품 창고의 증축 • 1921년 : 동륜 선반의 신설 유나프로(360HP)의 기관시설 • 1922년 : 완성 공장의 신축 • 1925년 : 변전시설-변전소공사 1926년 무렵부터 기계공작 기술이 진보됨에 따라 공장설비 기계의 종류도 증가하고 못을 박는 작업에서 용접작업으로 변환되어 공장설비는 최신 기술의 것이 되었다. 부산공장 및 그 밖의 공장을 확장 신설하는 동안 경성공장을 최대한 가동하여 차량의 보수를 맡아야 했다. 기관차 수선량의 수도 매월 25량인 능력을 넘어서 약 2배인 50량을 작업하게 되었다. 1939년에는 주강설비를 민간공장에 앞서 준공시켜서 주강품은 일본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강철제 객차의 축중의 문제로 평축을 대신해 축수에 롤러베어링의 사용이 결정되고, 경성공장 기술의 정수를 모아 팀켄타이프-테파 롤러 베어링의 제작에 성공한 것은 특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밖에 무연탄의 소형 용선로를 성공시킨 것도 경성공장의 기술 수준의 우수함을 말해 준다. 기관차·객화차의 신규 제작 및 수선공사와 상판지지 거더 등의 수선공사의 작업량에 따라 매해 각 공장의 확장과 설비 등을 정비했다. • 1928 : 강판공장의 신축 / 완성공장의 증축 • 1929 : 주물공장의 신축, 천장 주행 크레인 20t / 단야공장 기관실의 개축 • 1932 : 공장 내 운반 도로의 신설 / 객차 천차대의 표면식 개량 • 1933 : 기관차 제동기 부품 시험실 완성 • 1934 : 강판-단야공장 개축 / 강판-원도실의 이축, 화차천차대의 증비 / 강력압착기계-천장주행기동기(25t)의 신설 • 1936 : 외륜 천공기 등의 증비 • 1937 : 주물공장의 증축, 자동차 수리공장 신축 • 1939 : 엘식 전기로에 의해 주강작업 개시 [경성공장의 규모] 화력 발전소의 건설 : 1908년 용산공장 내에 자가용 화력발전소를 설비할 계획을 세우고, 1909년 11월 11일에 완성하였다. 기계 사양은 다음과 같다. ○ 발전기 용량 : 280 KVA - 전압 : 2,200V - 회전 수 : 150r.p.m - 주파수 : 50 - 제조소 : 독일 지멘스사, 슈케르트사 ○ 원동기기 - 횡치복식(?置複式, 응축기 부착) 렌츠기 : 2 - 도시(圖示)마력 : 400HP - 제조소 : 독일 게르리우츠철공장 ○ 기관 직경 7피트×전장 28피트 - 화상면적 : 36평방피트 ○ 절탄기 : 3인치 관×길이 9피트, 108개 이상의 발전시설에 의해서 공장 동력 외에 역사와 관사 등의 전등조명을 실시하고 1939년 8월까지 장기간에 걸쳐 역할을 다하였지만, 대수해로 인한 피해를 입어 금강산 전철회사(후에 경성전기회사)로부터 전력을 공급받았다. 부산공장 : 이 공장은 1906년 통감부 관리 철도국의 초량공장으로서 기관차의 수리와 조립 및 객화차의 신규 제작, 수리와 철도 용품의 제작 수리를 주 업무로 하였다. 1913년에 객차 전등의 충전장치를 완성하고, 종단역의 검차 업무를 실시하였다. 기계의 증설과 관련해 1915년 선박용 원형 보일러 40HP를 증설하고, 증기 기계에 증기를 공급하였다. 그 후 1923년 부산공장이라 개칭하였다. 1930년 10월 초량에서 부산진으로 신축, 이전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객화차와 도장, 목공제작공장을 보유하며, 특징으로서 재료에 중점을 두어 자재의 반출·입에 편리한 공장 배치를 하였다. 전시 상황이 긴박해 짐에 따라 일본의 발주 기관차를 수용하는 공장으로서 조립 등으로 매우 바빴다. 공장의 규모와 설비 개요는 [표 6-28]과 같다. [표 6-28] 부산공장의 규모 • 1934 : 차체 - 대차공장 신축 / 직상 선반 증비 • 1935 : 가로형 만능 포탑 선반 증비, 절단용 선반 증비 • 1937 : 선반 - 조립 - 제관공장 신설 기관차 - 객화차 - 목공공장 신설 전력은 당초에는 원동력 기기에 의한 것이었지만, 1922년 조선가스전기회사로부터 공급을 받았다. 1930년 부산진으로 이전을 계기로 전동기의 증비와 전호 용접 등의 전력 공급이 증가하였기 때문에 공장 내 전력실에 남한합동전기회사로부터 전기를 공급받아 지하 고압 케이블에 의해 각 공장에 배전하였다. 평양공장 : 1911년 11월 겸이포공장을 이전하여 개설하였다. 이설한 기계 300대 외에 새로운 선반공장에 5대, 목공공장에 1대를 증비하고, 또한 원동기로서 보일러(지름 4피트, 길이 10피트)-증기기관(150HP) 1조를 설비하였다. 공장의 규모, 기계, 기술공 수는 공사량에 따라 각각 증비되며, 전력 공급은 서선합동전기회사로부터 받아 변전소를 거쳐 각 전동기에 사용하였다. 공장의 규모와 설비 개요는 [표 6-29]와 같다. [표 6-29] 평양공장의 규모 1935년 직상(直床)선반을 증비하였다. 1942년에 새로 28만㎡의 부지를 구입하여 1944년에 건설공사 도중 일부 이전, 조업을 개시하였지만, 완성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공장장 다카하시 겐조는 이 땅에서 죽어 종말을 맞이하였다. 청진공장 : 1929년 함경선의 전선 개통에 따른 조선 방면으로의 차량 수 증가에 따라 1930년 청진분공장을 신설하였다. 신설 공장은 조립과 선반, 객차, 목공의 각 공장 및 동력소로 이루어지며, 청진기관구 내 수선고에 있던 공장 기계류를 이전하였다. 주로 기관차의 간단한 수선 및 객화차의 수선공사를 담당하였다. 특히 산악용 사타형 기관차의 타이어 다듬기 수선에는 고심하였다. 1933년 북선선의 만주철도 이관에 즈음하여 청진공장으로 개칭되었다. 공장의 규모와 설비 개요는 [표 6-30]과 같다. [표 6-30] 청진공장 규모 전력은 조선전기회사로부터 공급을 받았지만 그 후 북선합동전기회사로부터 전력 공급을 받아 변전소를 거쳐 전동기류에 사용하였다. 원산공장 : 1942년 2월 개장한 이 공장은 부지 36만㎡로 북선 방면의 기관차 제작, 수선을 주 업무로 하여 신설되었다. 기관차 부문의 천장 채광창은 적설을 고려해 용마루에 직각 방향으로 45도 경사의 삼각형을 배치한 것이나 주조와 단조공장의 통풍창은 독일식을 사용하고, 내부는 주벽의 하부 약 2m를 짙은 녹색, 상부는 노란색으로 하는 등 근대 공장 건축 형식에 최신의 기계설비를 계획했다. 기관차 부문의 천장 주행 기중기는 2단으로 하여 상단은 10톤 그리고 하단은 70톤 2대로 하였으며, 연결해서 동시에 운전이 가능하도록 한 신개념의 기계였다. 1943년경에 이르러 모든 자재의 조달이 어려워져서 전기 용접봉은 자체 제작하는 등 많은 고생을 하였다. 한편, 운전용 석탄으로 저품질의 분탄 사용이 증가하게 되어 보일러의 소연관이 매연과 미연소분탄에 의해 막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수선 시에 내·외 화실관판을 개조하여 일부 소연관을 한쪽이 막힌 관으로 만들어 밖으로 나오게 하였다. 운전 결과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전시형 설계로 공인된 이후에는 이 수선 방법을 사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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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차량 | |
철도공장의 연혁 | 2022.11.28 |
철도공장 제1절 철도공장의 연혁 조선에서의 철도공장은 1899년부터 1905년에 걸쳐 경인·경부철도 및 임시군용철도감부가 각각 수입 차량의 조립 및 재료 양륙에 편리한 항구 근처에 부지를 선정하고, 먼저 공장반을 설치하여 공작기계설비를 충실히 함과 동시에 공장을 완성시켰다. 1899. 9. 18. . 공장명 : 인천공장 . 철도명 : 경인철도 . 작업 : 차량의 조립 상판지지 거더 제작 1904. 2. 11. . 공장명 : 초량공장 . 철도명 : 경부철도 . 작업 : 차량의 조립 상판지지 거더 제작 1904. 10. 29. . 공장명 : 겸이포공장 . 철도명 : 임시군용철도 . 작업 : 차량의 조립 상판지지 거더 제작 1905. 6. 24. . 공장명 : 용산공장 . 철도명 : 임시군용철도 . 작업 : 차량의 조립 상판지지 거더 제작 이들 3개의 철도가 1906년 통감부 철도관리국에 통합되었으며, 인천공장은 용산공장에 합병되고, 1911년 총독부 철도국 관할 아래에 겸이포공장은 평양으로 이전하여 평양공장이 되었는데 설비 증설도 없이 1914년 4월 1일 용산공장의 평양분공장이 되었다. 1910년경 차량의 개수, 수선 건수의 증가와 함께 화물차와 객차의 자체 제조의 분위기가 점차로 고조되어 공장의 직장별 신축 및 제작 기계·동력설비가 증비되고, 철도공장의 모습이 충실하게 갖춰지면서 1923년에는 3등 침대차, 전망 1등 침대차가 경성공장에서 처음으로 준공되었다. 1927년에는 경성공장에서 조선 설계의 테호로형 증기기관차가 처음으로 제작되고, 조선철도의 독자적인 차량 설계와 자가 공장 제작시대의 막이 올랐다. 경인선용 경량 객차 및 미카사-파시코-마테이 등 조선철도가 자랑하는 기관차를 차례로 제조하였는데, 이들은 공장의 제작 기술의 향상, 전용 제작 기계설비 개발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1930년의 함경선 전선 개통에 따라 청진분공장을 신설하고 북선 방면 차량의 수선에 대응하게 하였다. 그 후 수송력 증강에 따라 차량 수도 증가했기 때문에 기설공장의 정비를 위하여 1930년 부산공장을 부산진으로 이전 확충하였으며, 1940년에는 평양공장을 독립시키고 1942년에 원산공장을 개설하여 차량 수선을 주요 작업으로 하였다. 전시 상황이 진행되면서 1944년 7월 1일 해주와 대전에 공장을 설치하여 차량 수선 능력 확보를 도모하였지만 실제로 가동되지는 못하였다. 공장의 주요 업무는 차량의 제작 및 수선이지만 그밖에 교량 상판 지지용 거더 용품, 전철기, 기계기구의 제작 조립 및 수리도 실시하는 한편, 국외(局外)로부터의 위탁 주문도 받았다. 이들 경리는 모두 조선철도 용품 자금 회계에서 처리하였다. 1912년 이후 1931년까지의 주요 제작 및 수선물 건표는 [표 6-26]과 같다. [표 6-26] 철도차량 수선공장 주) 이밖에 복계 기관구 내에 전기기관차 수선을 계획하였지만 작업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공장에서의 제작, 수리에 필요한 재료물품은 다양하며 차량 부품을 필두로 지금과 목재, 도료류, 못류, 전기용품 등이 있는데, 특히 차륜과 차축 등 특수 강철 제품은 야하타제철, 스미토모금속, 고베제강 등에 의존하였다. 전시 상황이 진전됨에 따라 만주∼조선 대륙 내에서의 자급자족 방침으로 전환되어 인천에 주강공장 등을 신설하였지만 공기 제동기 부품만은 일본 기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경성공장은 조선 내에 있어서 일반 기계공장으로서도 손색이 없는 우수한 기계공장으로서 차량 제작의 개발 촉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조선에서의 공장은 앞에서 기술한 것과 같이 수차례의 변천을 거쳐 차량 제작과 수리 및 철도 용품 제작 등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전시 상황의 악화, 새로운 선로 개통 등에 의해 담당구역 재편을 위한 계획을 실시하여 1944년 7월 만주공장과 대전공장을 개설하였지만 실제 가동에는 미치지 못하고 종전을 맞이하였다. 1945년 8월의 공장 계획 수선 능력은 [표 6-27]과 같다. [표 6-27] 주요 제작 및 수선물건표 해주공장은 해주기관구의 수선설비와 종업원을 이어받아 사철로부터 매수한 황해선(협궤) 기관차 보수를 목적으로 1945년 7월 1일 발족하였으며, 경성공장으로부터의 전입자 포함, 공장장 이하 154명이었다. 대전공장은 대전기관구 내의 수선설비에다 일부 경성공장으로부터 이설해 70명의 종업원으로 1945년 7월 1일 발족하였지만 실행되지 못하고 부득이하게 폐쇄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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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차량 | |
제2차 직영시대 이후 차량의 경과 | 2022.11.21 |
철도차량 제3절 제2차 직영시대 이후 차량의 경과 차량 발달의 경과 만철 위탁에 의해서 다시 철도국 직영시대가 되었다. 대륙으로의 교통량 증가와 철도 12년 계획 실시, 조선 내 산업 발달 및 군수 수송을 위하여 차량에도 속도 향상과 견인력 증가 등이 요청되었다. 기관차에서는 주요 간선 수송 증가용으로서 미카도형, 파시형, 마테형이 신규 제작되고, 또한 구배선용으로서 산타페형 외에 동양 최초로 직류, 3,000V 형식의 전기 기관차가 신규로 채용되었다. 지방선 급행용으로서 프레시를 대대적으로 개조하는 등 조선철도 자체 설계에 의한 프레나, 미카사, 파시시, 파시코, 마테이, 마테니 등의 조선철도형 기관차의 비약적인 시대로, 이 기간에 약 600량 정도가 제작되었다. 객차의 경우 특급‘ 아카쓰키’용으로 설계된 경량 객차는 조선철도가 자랑하는 차량으로 후에 표준 객차가 된 하9형과 함께 그 우수성은 차량공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화차 설계에서는 중공업의 발달과 함께 화물이 대형화되면서 40톤, 45톤 등의 대형 화차가 완성되었다. 또한 자재 절약 면에서 각종 차량의 공통 부재와 부품 활용을 도모하였다. 1941년 이후 차량의 자재 조달은 더욱 어려워져 조선과 만주 내에서의 자급자족 체제를 계획했으나 시국이 급박해져 상황이 더욱 곤란해졌다. 따라서 차량 운용 및 적재 효율 등의 향상에 더욱 노력하는 한편, 자재 절약과 대체재 연구로 타개책을 강구했다. 1942년 이후 신규 제작은 기관차 및 화차에 중점을 두었으며, 객차는 보유 자재에 의한 약간의 차량 증설에 그치고, 수송 정세에 맞추어 차량 제작을 발주했다. 일본 기업에 발주한 기관차의 감독 검사에는 소수정예주의로 감독관을 상주시켜 만전을 기했다. 정세가 긴급해지면서 일본으로부터의 해상 수송도 용이하지 않아 그 중 몇 량을 잃었으며, 부산공장에서의 조립작업이 더욱 가혹해졌다. 특급 ‘아카쓰키’ 출현 일본∼대륙 간의 수송량 증대와 함께 속도 향상이 요구되고 관부연락선의 대형화와 더불어 부산∼경성 간 6시간 운전이라는 지상 명령이 내려진 것은 1933년경이었다. 관계 기술자 사이에서 검토한 결과 선로와 교량의 강도, 기관차 축중 한계점을 감안해 객차의 경량화가 가장 먼저 거론되었다. 경인선의 라하형에서 이미 경량화 실적을 올렸던 차량 설계진은 경량화와 함께 고속열차에 적합한 형태로 개조하기 위해서 차체의 높이를 낮추고 중심을 내려서 안정도를 향상시키고, 각 차량의 끝에는 지붕을 달고 차체의 외형을 따라서 둥근 덮개를 설치하고, 밀폐식으로 1열차의 반유선화를 시도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차량 공업계의 획기적인 설계였다. 대차와 차체 구조도 한계 설계치를 채택하여 재료 절약과 자중 경감을 도모하였다. 차내 금구도 당시로서 진귀한 알루미늄제로 하고 차체의 용접방식 등을 채용함으로써 재래형인 43톤에 비하여 35톤으로 크게 경감되었다는 것은 특이할 만하다. 또한 고속진동 방지책으로서 대차는 축 스프링식으로 하고, 세컨더리 스프링은 삼중 바퀴 스프링으로 하였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최초로 대차에 유압식 완충 업소버를 설치하여 상하-종횡-전후의 진동을 흡수 감쇠하도록 하였다. 의자도 특별히 설계하여 쾌적한 승차감을 주도록 하였다. 특급‘ 아카쓰키’는 1, 2, 3등차, 식당차(기계식 냉방차), 전망 1등차의 반유선형으로 편성하였으며, 당초 파시시가 견인하였으나 선로 개량에 의해서 대형 여객열차용으로서 파시코가 사용되었다. 동륜 직경 1,850mm, 최고 속도 110km/h, 중량 196톤이라는 조선철도가 자랑하는 강대 기관차였다. 그러나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중요 물자의 수송에 모든 능력을 집중한 결과 특급 아카쓰키도 마침내 1944년에는 모습을 영원히 감추었다. 조선철도의 우등차 변천 1906년의 창업시대, 미국 카앤드펀드리 회사로부터 주방이 있는 1, 2등차를 4량 수입한 것을 시작으로 1920년 미국 부르만형 침대차(구분실식) 1등 객차 및 2등 침대차를 여러 대 수입하였다. 1910년에는 주방을 식당으로 개조하는 등 자체 제조기술이 향상되었으며, 1923년에는 조선철도 최초로 전망 1등 침대차가 경성공장에서 완성돼 조선∼만주 직통열차에 연결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우등차의 수입에 종지부를 찍었다. 1936년 상경 중인 요시다 국장으로부터 사키야마공작 과장에게 식당차 제작 명령이 전달되었다. 사키야마 과장은 극비리에 엔지니어 2명과 함께 설계를 추진하였으나 정세의 변경으로 특별차로서 1939년 경성공장에서 완성되었는데 차량기술의 진수가 집약된 우수한 차량이었다. 1937년 특급‘ 아카쓰키’용으로 설계된 경 1등 전망차는 차체의 경량화와 함께 내부 설비에도 경량 재료를 이용하였으며 진동 방지를 위해서 차량 대차 설계에 신공법을 채용했다. 전망 1등 침대차(텐이네) 전망 1등 침대차는 운전 시간이 24∼27시간에 이르는 조선∼만주 직통 급행열차인‘ 히카리’,‘ 노조미’에 연결되어서 장거리 여객에게 호평을 받고 애용되었다. 조선철도는 창업 당초부터 1,435mm의 표준 궤간을 채용하였기 때문에 전망차 내의 폭도 2,960mm로 넓고 창의 폭도 1,295mm가 되는 등 후부의 유리 칸막이와 함께 전망이 좋은 개방식이며, 가장 뒤쪽에는 출입구를 겸한 발코니를 만들어 편리하게 이용하였다. 창 측에는 안락의자와 소파를 배치하고 바닥에는 융단을 깔고 사이드 테이블을 배치하여 담화실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칸막이 벽 측에는 서가와 책상을 두어 여객의 편의를 도모하고, 서가에는 여행지도나 가이드북을 비치해 두었다. 재료는 소파에 양모 비로드를 깔고 바닥에는 털 길이 10mm의 카펫을 깔았으며, 벽면에는 모양이 새겨진 천을 붙이고, 천장에는 실크를 붙여 차내 전체의 색조를 배려하여 화려함을 강조했다. 서가와 책상의 목재부분은 티크재를 이용하여 부조로 마감하고 유럽풍 가구를 배치하였다. 벽면의 아래 부분과 문틀의 목재부분은 티크재로 통일하여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핸들, 래칫 등의 금구는 ‘Car Builder's Cyclopedia’를 참고로 하여 독자적으로 설계하고, 포금 합금의 그슬린 느낌으로 마감하여 중후함을 표현하였다. 전체적인 조명은 중앙부에 글로브식 환풍기를 달고 쌍갈래의 벽면 브래킷등으로 국부 조명을 삼았다. 또한 대차는 객차의 자중이 55톤이므로 축중을 고려해 6륜 보기차를 채용하고 속도가 향상됨에 따라서 세컨더리 스프링의 스팬을 길게 해서 스프링 진동 주기와 속도의 조화를 유지하여 차체 진동 방지에 노력했다. 전망차는 열차의 끝 부분에 연결하므로 곡선부와 구배, 분기점에서의 갤럽, 스네일링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대차 중심들보에 사하중(교량 자체의 중량에 의한 하중)을 부담시켰다. 전망실에는 전용 급사 또는 보이를 배치하여 긴 여행의 피로를 풀기 위한 음료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특별차(토크) 1939년에 경성공장에서 제조되었으며, 당시의 차량 설계기술의 진수가 집약된 호화스러운 열차이다. 실내의 금구는 도어와 핸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각을 하고 은도금을 하였다. 벽은 옻칠 바탕에 조선 공예의 자개로 표현한 산호나 사슴 모양의 상감(표면에 여러 무늬를 넣는 공법)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전망실의 내부 장식은 매우 호화로워서 소파와 둥근 의자, 책상 등의 디자인과 재료도 조선 색조를 띈 격조 높은 예술품이었다. 창의 구조는 강제 창틀의 카운터가 달린 롤업식의 이중창이며, 창유리는 외부 13mm, 내부 6mm 두께의 방탄유리를 사용하였다. 또한 상판, 외판, 지붕판의 전면에 두께 8분의 1인치의 특수 강판을 설치한 문자 그대로 특별차였다. 이 특별차는 당시 동양 제일을 자랑하였던 수풍수력발전소댐(압록강변) 시찰을 위해서 만주국 황제가 사용했다. 경 1등 전망차(라테인1) 경 1등 전망차(라테인1)는 경성∼부산 간의 특급‘ 아카쓰키’용으로 특별히 설계되었다. 1934년에 설계가 시작되었으나 고속열차에 적합한 형태로의 방침에 따라서 각 차량 모두 차단부는 삼각지붕의 형태로 만들어 속도감을 냈다. 따라서 최후미부의 전망실도 종래의 개방식을 채택하지 않고, 전망대의 후미부도 유리가 들어간 삼각지붕으로 하였다. 내부 장식은 경량 객차에 어울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속도감 있는 느낌을 주게 만들었다. 색조도 밝은 파스텔조가 많았다. 금구는 강도에 지장이 없는 한 대부분 경량의 알루미늄 합금을 채용하고, 의자의 천은 녹색과 크림색의 천으로 하였으며, 전망실의 소파와 책장도 개성 있고 참신하게 설계했다. 소파의 스프링 등에도 대차에 새로 채용된 대차 세컨드 스프링의 3중 코일 스프링과의 공진에 주의를 기울이는 등 세심하게 배려하였다. 당시 일본의 철도에서는 최초로 대차에 완충 업소버를 설치해서 진동 개선을 위해서 노력했다. 또한 경량 객차로 하기 위해서 구조와 재료 모두 경량화를 위해서 노력해 자중도 35톤으로 크게 경감되었기 때문에 당시의 우등객차로서는 드물게 4륜 보기 대차를 이용하였다. [표 6-13] 전망대의 제원 주) ( )안은 의자 수를 말한다. 산악 지대용 기관차 마테형(4-8-2)의 탄생 북선지방의 지하자원 개발과 함께 수송량이 증대하면서 급구배와 곡선이 많은 산악용의 강력한 견인력을 가진 기관차가 요청되었다. 이 요청에 따라서 설계한 화물용 기관차를 미카도형(2-8-2)으로 하지 않고 마운틴형(4-8-2)으로 한 것은 복원력이 큰 4륜 보기 대차를 가져서 선도력이 좋고 제1 동륜의 플랜지 마모를 적게 하여 여객과 화물 양 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마테이형은 주로 장거리 화물용으로, 마테니형은 장거리 화물용 및 구배용 여객용으로 선로용량(쿠퍼 하중 E50)이 허용하는 최대의 고속 중량 기관차로서 수송 증강에 앞선 조선철도가 자랑하는 전시 설계형 기관차이다. 1940년부터 매년 수량씩 증설하여 마테이형 50량, 마테니형 33량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최대 축량은 미카사형이 18톤인데 반하여 22톤으로 하고, 실린더 인장력도 미카사형 18,250kg에 대해서 22,450kg으로 강력해졌다. 또한 조선철도에서의 새로운 장치로서 자동 급탄기, 급수 온도 미터기를 설치하여 보일러의 효율성 향상을 도모하였다. 화물의 대량수송뿐만 아니라 중량 여객열차의 견인용으로서 큰 역할을 완수하였으며, 조선철도 차량 설계진이 자랑하는 마지막 기관차가 되었다. 이로써 조선철도 기관차는 수많은 변천 발달의 막을 내렸다. [표 6-14] 마테형 제작 상황 구배선용 기관차 산타페형(2-10-2) 북선의 마그네사이트와 목재를 운반하기 위해서 길주∼백암∼혜산진 간의 33‰ 급구배 노선인 혜산선에 사용하기 위해서 설계되었다. 구배선으로 터널이 많기 때문에 후진 운전이 가능하며, 견인력이 강력해야 한다는 것이 설계 조건이었다. 운전실이 밀폐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혹한에 노출되는 북선지역에서는 운전에 대한 불만이 많아 따뜻한 남한의 구배선으로 바꾸어 배치하였으며, 1939년 24대를 마지막으로 제작을 중지했다. 이 기기의 장점으로는 ① 동륜이 많기 때문에 축중이 가볍다(최대 축중 16 톤), ② 제1, 5 동축은 횡동식으로 급구배에 적합하다, ③ 탱크차이므로 후진 운전이 가능하다는 점 등에서 조선 최대의 탱크 기관차였다. 화물용 대표 기관차(미카도형) 화물용 기관차로서 1919년에 볼드윈사로부터 미카이형 12량을, 아메리칸 로코모티브사로부터 미카니형 12량을 수입했다. 그러나 선로 연장, 수송력 증대를 위한 차량 공업계 발전의 분위기와 함께 조선철도의 독자 설계의 기관차를 일본 국산화하기로 결정했다. 1926년 미카이형·미카니형의 개량 설계에 착수해 조선산의 저칼로리 갈탄을 사용하기 위해서 화상 면적을 넓게 하여 최대 연소율을 향상시키고 연소실을 두어서 보일러 효율을 향상시키는 등 획기적인 설계에 성공했다. 이 미카사형은 1926년 기차회사에 최초로 발주되어 화물 전용의 대표 기관차로 친숙해져 충분히 그 역할을 수행, 총 313량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표 6-15] 미카도형(2-8-2) 기관차의 발달 변이 차량 냉방·냉동장치 철도 차량의 냉방장치 중 오래된 것으로는 인도에서 사용한 지붕에 두꺼운 면을 덮고 물을 뿌려서 증발열에 의해서 차내의 온도를 내리는 원시적인 방법이 그 시작이었다. 조선철도국에서도 1918년경부터 연구를 시작해서 1924년 오다카식 냉풍장치가 고안되어 시험을 실시하였다. 차체 벽 아래쪽에 구멍을 뚫어 차량이 주행할 때 공기가 들어가도록 해서 얼음기둥으로 냉풍을 일으키는 방식인데, 실용화되지는 못했다. 1926년에는 빙식 냉방장치를 식당차에 설치했으나, 그 후 냉방장치의 기술이 진보하면서 본격적인 공기 청정과 냉방을 겸한 쿨링 샤워식 빙식을 완성하고 1937년 여름 경성∼부산 간에서 시운전을 하여 좋은 성적을 얻은 뒤 식당차 전차에 설치해서 호평을 얻었다. 단, 짧은 정차시간 중에 얼음을 보급하기 어렵다는 결점이 있었다. 한편, 만철에서 특급 ‘아시아’호의 전 차량에 증기 분사식 공기 정화장치를 완성하자, 조선철도에서도 1939년에 직접 기계식 냉방장치를 채용했다. 이 방식은 메틸 크로라이드를 냉매로 하며, 압축기의 구동은 차량이 주행할 때 차축에서 빗살형 V벨트, 기어장치 및 KM 전자 이음매를 거쳐서 구동된다. 차축의 회전은 열차 속도에 따라서 변화하므로 KM 전자 이음매에 의해서 회전이 일정하게 조정되도록 되어 있다. 차내에 설치된 서모스탯(온도 조절기)이 이 이음매에 연동해서 냉동기의 회전을 자동으로 조정한다. 또한 정차 중에는 운전이 정지하므로 장시간 정차하는 역에서는 차내의 온도 상승을 방지하기 위해서, 차량 아래에 보조 전동기를 매달아 수은 정류기를 거쳐서 외선 전력에 의해 장치를 운전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결국 시국이 긴박해지면서 식당차 냉방 장치는 폐지될 운명에 처했다. 종래 생선과 야채의 수송에는 수냉식 냉장고를 사용하였으나 군수품 수송 목적을 위해 직접 기계식 냉동장치를 설계하고 완성하였다. 냉동장치는 가와사키중공업의 KM-N형으로 냉매에 암모니아가스를 사용하고 차축에서 빗살형 V벨트, 기어, 전자 이음매에 의해서 압축기를 구동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냉동방식은 직접 팽창식으로 천장 한 면에 증발관을 장치하고 차량 아래에 압축기를 매달았다. 냉동 능력은 기준 상태에서 약 12냉동톤의 경우 차내 온도를 영하 15℃로 유지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냉동화차도 정세에 의해서 운전 개시를 보지 못하였다. 화차의 변천 경인·경부철도시대에 미국으로부터 수입한 화차는 23톤 및 27톤의 목조차인데 대차는 4륜 보기차를 사용하고, 유개차와 무개차, 무측차의 3종류가 있었다. 1912년에 이르러 적재 하중도 30톤을 표준으로 하고 철골목조로 하였으나, 1925년에 들어와 속도 향상과 견인차량의 증가와 함께 대차도 1935년에는 자중 경감을 위해서 강제 어복형에서 중심들보 ㄷ자형 강제로 설계를 변경했다. 1937년경에는 30톤 적재 유개차(바시브)와 무개차(토시브)가 철도국 내의 공장 및 조선 내의 차량 회사에 다수 발주되고, 새로운 수송 증강을 위해서 강제 40톤 유개차 및 반강제 45톤 무개차가 제작되었다. 이들은 조선과 만주, 중국 설계 기준에 따른 전시(戰時)형 공동 설계였다. 특수 화차로서 1929년 이후 냉장차와 가축차, 수조차, 보온차, 통풍차, 유조차 등이 각각의 목적에 따라서 제작되었다. 특히 북방 자원 운반용으로서 광석차와 석탄차가 설계되었는데 화물용으로서 밑면 오픈, 측면 오픈 장치가 개발되었다. 무산광산에서 청진제철소까지 습식 부유 선광법에 의한 분광용 광석차에는 동결 방지용으로 증기 난방장치의 특수 설계를 하였다. 무측차는 1927년에 50톤 6륜 보기차를 1량 제작하였는 데, 1933년에 장척물 운반용으로서 50톤, 길이 20m의 6륜 보기차를 제작하여 목재 반출용으로서 활약했다. 그밖에 압록강 수풍댐 수차 운반을 위한 특수 운반용으로서 중앙부에 저부(낮은 부분)를 설치한 65톤 저상차(치로브) 1량을 설계했다. 또한 유개차는 군인용으로 선반을 설치하고, 그 위에 짚을 깔아 침대 대용으로 사용하였다. [표 6-16] 화차의 하중과 대차 국영(局營) 자동차 조선철도는 지방 보조 운수로서 여객 및 화물을 취급하는 자동차 영업 선로를 2곳 보유하고 있었다. 광주∼여수 간 143km를 본선으로 하는 광려선과 회령∼웅기 간 94km의 회웅선의 두 선로이다. 관영이지만 민간 지도도 겸하여 새로운 업무에 대응시켰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가솔린 대용 연료 문제가 발생하였으나, 조선 철도에서는 일찍이 1930년에 목탄 자동차 시험에 착수하고 가스 발생기를 구입해서 주행시험을 하였다. 1939년에 가솔린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서 다시 목탄 가스와 장작 자동차가 등장하여 일반적으로 보급되었으나, 새로 아세틸렌가스 자동차가 개발되어 1943년 겨울 회령∼웅기 간에서 대체연료 자동차의 내한 운행시험을 실시해 영하 29℃의 극한에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조선에서는 사철 자동차 선로가 건설되고 활약하였으나, 1936년에 광주자동차구가 설치되고 민간 지도의 입장을 취했던 철도국영자동차도 1944년 이후 여객 및 화물 자동차의 통합을 도모하여 민간에 양도되고 막을 내렸다. [표 6-17] 조선 국유철도 경영 자동차 노선 명칭(1936. 2. 고시 제82호, 개정 1937년 고시 896호) 나키하(2-8-2), 협궤(762mm) 기관차 1934년 북방 삼림 개발 노선으로서 건설된 백무선에 전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미카도형 탱크 기관차가 설계되고, 차륜 배열은 미카사와 마찬가지로 2-8-2로 주행 성능도 좋고 수송력도 증대하였다. 백무선은 분기 곡선 반경 40m, 구배 33‰의 악조건인 산악선이라 선륜의 진동도 등에 주의를 기울였다. 1944년 철도국 선으로서 매수된 황해선을 달리던 나키하 762mm 텐더협궤 기관차(기차회사 제품)의 성능은 세계 최고급으로 해외에까지 소개되었다. 이 기기는 발열량 4,500kcal의 저질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화격자 면적을 2.1㎡로 넓게 취하기 때문에 화실 설치에 특별히 배려하였다. 최고 속도 70km/h(동륜 회전 수 340r.p.m)로 하기 위해서 동륜 지름을 900mm에서 1,100mm로 확대하였다. 전기 기관차 계획 1937년 7월 중일전쟁의 발발로 인해 경부·경의선의 복선 계획과 더불어 경원·함경선의 수송 증강이 요청되어 가장 좁고 험하며 25‰의 연속 구배를 가진 복계∼고산 간 53.9km 구간에 조선철도 최초로 간선 철도의 전철화가 계획되었다. 이에 앞서서 1936년에 공작과에 전력계를 두고 전기 기관차 설계를 담당시켰으며, 1937년에는 전기과가 신설되어서 전철화설비의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효율성과 보안성 유지면에서 검토한 결과 전철화방식에 있어서 동양 최초의 직류 3,000V방식이 채용된 것은 특기할만하다. 전기 기관차 설계에는 각 전기 기기의 내구, 내전 성능 등 첫 경험인 만큼 제작측도 신중하게 시작시험을 거듭한 결과 제1호기가 완성된 것은 1943년 6월이었다. 복계∼고산 구간에서의 전철화 운전은 성적이 좋았으며, 수송력이 증대되고 매연과 증기 압력 미상승의 문제도 해소되어 획기적인 직류 3,000V의 기관차가 탄생했다. 운전의 보안도 향상을 위해서 공기 제동 및 수제동 외에 전력 회생 제동을 채용하였다. 이것은 전력의 절약과 제륜자의 소모를 억제하는 일석이조의 방법으로 기관차와 전차선, 변전소의 3자가 삼위일체로 협동 작동하는 설계이며, 회생 제동과 공기 제동의 상호 작용을 통해 보안상 운전 속도를 감속하지 않고도 운전을 유지할 수 있는 장치가 되도록 하였다. 전차선의 최고 전압은 3,600V, 최저 전압은 1,800V로 정하여 완전한 운전을 확보해 두었다. 이 전기 기관차에 설비한 보조장치 중 주요한 것은, 가. 정전압 전동 발전기 점등 및 제어 회로용 나. 전동 송풍기 주전동기 냉각용 다. 공기 압축기 단위 스위치 및 제동용 라. 자기(磁氣)화용 전동 발전기 회생 전동기 자기화용 등이다. 전동기는 모두 복(複)정류자 구조이다. 직류 3,000V의 주 회선을 개폐하고 전기 기관차의 속도를 제어하는 단위 스위치에는 전자 공기식을 채용하고, 개방 시에 발생하는 전호(電孤, Arc)를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서 강력한 전호 취소 작용을 가진 특수한 아크 슈트가 이용되었다. 전기 기관차의 주요 제원은 [표 6-18]과 같다. [표 6-18] 조선철도 전기 기관차 주요 제원표 조선철도국(선철)의 기관차 발달 개요 1899년 경인철도에 미국으로부터 모가형 포화식 기관차를 제1호기로서 수입한 이래 시대의 변천과 함께 산악이 많은 지형과 선로 상황에 좌우되어서 독자적인 변천 발전을 이루었다. 창업 당초부터 American Archtype를 답습하여 기관차를 국산화한 후 복잡한 지리적 조건에 따른 급구배·소곡선이 많은 궤도상에서 요구된 수송 목적의 시대적 변천에 따라서 설계된 기관차는 광궤 철도로서 다른 국가에서는 예를 찾아볼 수 없는 특수한 발달의 역사를 거쳤다. 경부철도와 임시군용철도시대에는 프레리형(2-6-2) 탱크 기관차, 테호형(4-6-0) 텐더 기관차를 미국에서 다수 수입해서 사용했다. 1906년 통감부 철도관리국으로 통합되어 관영에 의한 신선 부설이 활발해져서 경원·함경·호남선 등의 지방 간선을 연장한 결과 다수의 기관차가 필요하게 되어 특수한 4-4-0형 텐더를 포함한 설비 증설이 1914년까지 계속되었다. 1912년에 제작된 아메이부터 바르샤트식 밸브장치(Walschearts Valvegear)를 채용하고, 테호코의 기관을 과열식으로 한 것 등 개량에 진보적인 모습이 엿보였다. 프레형은 비교적 큰 견인력과 속도감이 있고 전후진이 편리했기 때문에 단구간의 객화 모두에 적당하였다. 테호형은 넓은 화실을 비교적 동륜이 큰 대차의 아래에 두기 때문에 강력한 기관차로서 간선 객화 열차의 견인에 적합한 형식이었다. 1912년 무렵에는 간선의 연장과 함께 비교적 고속으로 길게 편성된 열차 운행이 요청되어 테호코형이 탄생하여 근대 기관차의 기초가 되었다. 1919년 간선 장거리용 기관차의 필요성에 의해서 미카이-미카니(2-8-2) 및 파시이-파시니(4-6-2)의 4형식을 미국에 발주했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기관차의 국산화 분위기가 고조되고 조선철도에서도 파시이-파시니의 설계를 기준으로 일본 기업에 최초로 발주했다. 즉, 국산 파시이 및 파시사는 미국제인 모계와 거의 동일한 구조와 형태를 가진 채 1925년에 본격적으로 국산 기관차 파시시-미카사에 이용되었는데 그 후의 국산 기관차의 형태가 미국의 형태, 특히 Baldwin제와 Alco. 제 기관차의 절충적인 요소를 다분히 포함하게 된 커다란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철도 기관차의 본격적인 국산화는 1920년 무렵부터 시작되었으며, 1927년에 제작된 조선철도 설계의 국산 기관차는 파시이-미카사 테호로의 3형식이었다. 조선철도 공작계의 기술 수준이 상당히 높아 테호로-미카사는 경성공장에서 제작하였으며, 특히 파시시 미카사형에 대형 기관차에 걸맞는 능률적인 연소실을 설치하는 등 참신한 설계가 국산화의 초기에 이루어진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 후 세계적인 불황으로 인해서 기관차의 신규 제작은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1931년 포화식 프레형을 과열식으로 개량한 프레나 및 도시 간 소단위 고속용으로 경성공장에서 제작한 프레하 기관차가 경인선 쾌속 열차에 등장했다. 또한 1934년 북선 동부산악지대의 33‰ 급구배의 혜산선에 사타이형(2-10-2) 기관차가 조선철도 공작진의 설계에 의해서 경성공장에서 제작되었다. 이 형식은 독일에서는 많이 볼 수 있지만 국산으로서는 진귀한 신형 기관차였다. 만주사변으로 인한 전세의 영향으로 대륙 연락 수송의 필요성이 증가하였으며, 이 시기를 기점으로 조선철도에서의 기관차의 발달이 달라짐에 따라 대형 기관차의 신속한 제조가 요구되었다. 그 결과 조선철도의 표준적인 기관차인 테호로-파시시-미카사가 일본 차량 업체에 다수 발주되었다. 특히 미카사는 경부·경의 양 차선의 중량 열차에 중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 간선에도 진출하였으며, 테호로는 지방 간선의 중견으로서 각 선에 널리 이용되었다. [표 6-19] 기관차 일본 업체 외주표(1923~1945년간) [표 6-20] 연도별 차량 보유량 수 조사표 주) 1933~1945년간은 차량 수 미발표로 인해 자료 불분명 [표 6-21] 1945년 8월의 차량 보유량 수 주) 동차는 객차에 포함 [표 6-22] 조선철도 차량 공장 변천표 [표 6-23] 762mm 궤간 탱크 기관차 요목 일람표 그 후 지리적 사정과 1급 선로에 증대한 대륙 연락 수송에 중점이 놓였기 때문에 조선반도 종단의 두 간선인 경부·경의선에서의 고속·중량의 열차 운행을 위해서 복선화 선로가 강화되었다. 동시에 초대형 기관차 설계가 진행되어 파시시형을 근본적으로 개량해서 고속·중량 여객용 파시코형 2량을 시험 제작하여 특급‘ 아카쓰키’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1939년에 파시코의 주요 설계를 기본으로 기존의 미카사형의 차륜 배열을 (4-8-2)로 변경한 고속·중량 화물용으로 마테이형이 새롭게 제작되었다. 파시코는 급행 여객용, 마테이는 급행 화물열차를 견인하여 경부선을 달리는 기관차로 모습이 새로워졌다. 이 두 형식은 선로상태에서 허용되는 한계로 여겨져, 경부·경의 양 선의 선로가 강화된 뒤에 종단선의 주요 열차의 대부분을 견인하게 되었다. 따라서 기존의 미카사-파시시는 경원·함경선 및 기타 지방 간선에 배속되어 조선철도의 수송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수송량의 증대와 더불어 사고도 많아졌기 때문에 복구용으로 1943년 75톤의 레킹 크레인을 구입하여 기존의 30톤을 포함 총 2대가 되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풍부한 전력을 이용해 구배선구의 수송력 증강을 도모하기 위해서 동양 최초로 직류 3,000V에 의한 전기 기관차 데로이-데로니가 경원선에 계획되었다. 또한 지방 간선 경원·함경선에는 선로 상황상 테호형이 최적이며, 화물용에는 미카사를 점차로 증가시키는 정도였으나 정세가 어려워지면서 동해안의 대륙 연락선으로서의 중요성이 더해져 열차 편성의 장대화를 위해 여객용에 파시시, 화물용에 미카사를 배치하게 되었다. 또한 수송량 급증에 대비해서 파시시-미카사-마테이의 중간적 성능을 가진 마테니형(4-8-1)을 설계했다. 이 기기는 동륜 직경이 1,520mm이며, 급행 여객용으로서 경부선에 배치되었다. 조선철도 최초의 전시 설계형인데 조선철도 기관차의 마지막 형식으로써 막을 내렸다. 기관차 견인정수 중량 등 측정 계산법 제1 기관차 기관차의‘ 텐더 기관차’란 특별히 명기하는 경우 이외에는 탄수차를 포함한다. 제2 기관 (1) 통의 동체는 연실의 차위 부분을 제1동체로 하고, 차례로 화실로 향하여 제2, 제3동체라 한다. (2) 기관의 직경은 특별히 명기하는 경우 이외에는 제1기통의 외경으로 한다. (3) 화실의 길이란 화실 내의 길이와 폭의 수평 거리로 한다. (4) 화상 면적은 화실의 길이와 폭의 상승 합으로 한다. (5) 굴뚝 및 대 굴뚝의 길이는 양 관판 사이의 내측 거리로 한다. 굴뚝 직경은 굴뚝 중앙부의 외경으로 한다. (6) 전열 면적은 내화실, 화실 저틀 상면 이상의 부분 및 굴뚝, 수관 내의 물과 접하는 면적으로 한다. 이 경우 예비는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대소 굴뚝 및 분구공의 면적은 제외한다. (7) 과열 면적은 과열관이 대 굴뚝 내에 삽입된 부분의 외측 면적으로 한다. (8) 길이는 mm, 면적은 ㎡로 표시하고, 전열 면적 및 과열 면적에서 소수점 둘째 자리 이하는 사사오입하고, 화상 면적에서는 소수점 셋째 자리 이하를 사사오입한다. 제3 중량 (1) 기관차 및 탄수차 중량과 한 쌍의 차륜의 레일이면 압력은 수평선상에서 운전 정비 시와 공차 시에 측정하여 표시하고, 소수점 셋째 자리 이하는 사사오입한다. 단, 공차 시 측정에서의 스프링장치는 운전 정비 시에 조정한 상태로 두고 측정하지 않는다. (2) 형식도에 기입하는 중량은 실지 측정한 결과에 따라서 차량 담당이 이를 사정한다. (3) 운전 정비 시에는 운전에 필요한 제 조건을 구비하고, 중량 배치를 적당히 조정한 경우에 다음 각 항에 적합해야 한다. (가) 보일러 내의 수위는 항상 최고 기압에서의 내화실 최고부에서 광궤는 190mm, 협궤는 130mm로 한다. (나) 화상에서의 연료, 중량 및 재를 받는 용기에서의 재의 중량은 화상 1㎡에 대해서 195kg으로 한다. (다) 모래 상자에는 모래를 가득 채운다. 모래의 중량은 1㎥당 1,600kg으로 한다. (라) 수조에는 물을 가득 채우고 연료차에는 지정한 연료를 적재한다. (마) 승무원의 중량은 150kg으로 한다. (바) 도구류는 운전에 필요한 것을 적재한다. (사) 외륜 및 기타 마모 부분은 설계와 동일한 상태로 유지한다. (4) 공차 시란 운전 정비 시부터 보일러관 내의 물, 수조 수, 연료, 재, 도 구류, 모래 및 승무원을 제외한 경우를 말한다. 제4 차륜 및 차축 (1) 차륜의 직경은 외륜이 새 것인 경우 바퀴 한 쌍의 중심선에서 750mm 거리에서의 답면의 직경으로 한다. (2) 연결봉으로 연결할 차륜 차축을 동륜 직경이라 하며, 앞쪽에 있는 것부터 순서대로 제1동륜, 제2동륜 등이라고 한다. 직접 주연봉에서 운전하는 차륜 차축을 주동륜 주동축이라 한다. (3) 축경의 길이는 축상과 축수 금구의 길이에 동륜에서는 3mm, 그밖에는 6mm를 더한 길이로 한다. (4) 윤좌 치수란 차축의 보스 내에 끼우는 부분의 직경 및 길이로 한다. (5) 축상의 위치는 모든 차축을 통해서 최 전부 우측에서 좌측으로 순차적으로 제1위, 제2위로 한다. 제5 수조, 연료고의 용적 및 최대 치수 외 (1) 수조, 연료고의 용적은 ㎥로 표시하고 소수점 둘째 자리 이하는 사사오입한다. (2) 연결기의 높이는 운전 정비 시 레일 면에서 연결기 중심까지의 높이로 한다. (3) 최대 길이는 연결 상태에서 연결기두 외면간의 거리로 한다. (4) 최대 높이는 외륜이 새 것인 경우 운전 정비 시 최고부의 레일면으로 부터의 높이로 한다. (5) 최대 폭은 측부에서의 가장 돌출된 부분과 기관차 중심선과의 거리의 2배로 한다. (6) 이 형식도에 기입하는 치수는 특기한 것을 제외하고 공작 도면에 기재된 바에 따른다. 제6 견인력 및 견인 중량 (1) 최대 기통 견인력 계산은 다음 식에 의한다. T=0.85Pd2S/D 2기통 단식 T=최대 기통 견인력(kg) P=상용 최고 기압(kg/㎠) D=동륜 직경(cm) d=기통 직경(cm) s=행정(cm) 3기통 단식, 4기통 복식의 경우에는 각각 적합한 계산식을 이용할 것. (2) 견인 중량은 상당 길이의 100의 1 상행 구배를 아래의 속도로 주행하 는 경우로 한다. (가) 여객열차 - 35km/h (나) 혼합열차 - 25km/h (다) 화물열차 - 15kmh/h (3) 객차 및 화차 1량의 중량은 43.6톤으로 하고, 주행 저항은 다음 식에 의한다(일리노이대학 슈미트 씨의 식에서 환산). 객차 ----- R=2.53+0.008V+0.00016V2 화차 ----- R=1.83+0.0085V+0.00027V2 R=저항kg/t V=속도km/h (4) 기관차 저항은 다음에 의한다. (가) 내부 저항 12.5kg/톤(동륜상 중량) (나) 주행 저항 속도 25km/h 이상은 객차, 15km/h는 화차 저항과 동일하게 한다(대차 및 탄수차 중량). (다) 공기 저항 R=0.042V2 R=저항 kg/톤 V=속도 km/h(기관차 단면적은 11.2㎡로 한다) (5) 견인력이 점착 중량의 제한을 받는 경우의 점착 계수는 4.5 로 한다. 제7 협궤 기관차의 견인력 및 견인 중량 (1) 최대 기통 견인력은 제6의 (1)에 의한다. (2) 견인력이 점착 중량의 제한을 받는 경우의 점착계수는 6.5로 한다. (3) 견인 중량은 상당 길이의 100분의 1 상행 구배를 1시간 15km의 속도로 주행하는 경우에 따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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