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역사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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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건물의 시공 및 보수 | 2022.10.31 |
4 | 청사 및 기타 시설의 개축 | 2022.10.24 |
3 | 기관차고 및 공장 건축 | 2022.10.17 |
2 | 역사 및 관사 건축 | 2022.10.11 |
1 | 건축 양식 및 표준 | 2022.10.04 |
국유철도의 건축 | |
건물의 시공 및 보수 | 2022.10.31 |
건물의 시공 및 보수 제1절 시공 및 보수 각종 건물의 신·개축공사는 모두 하청공사로 시행하고, 기존 각종 건물 보수에 따른 수리 등의 영선공사는 대체적으로 직할 또는 하청공사로 시행하였다. 신선 건설 및 개량공사에 따른 건물(청사와 병원 등의 일부를 포함)의 신·개축공사는 각각 당해 건물비 또는 개량비로 지불하고, 특히 풍수해 등의 재해에 의해서 상당한 규모의 이전 신·개축을 요하는 경우에는 임시재해비로서 의회의 승인을 얻어서 시행하였다. 1925년의 한강 대수해에 의한 용산 관사 일부의 금정 이전, 신·개축공사는 그 한 예이다. 기존 건물의 소규모 수리와 관사의 다다미 교체, 창호지 교체 등의 영선공사는 경상부(철도 작업비) 보존비의 건물 수선비로 지불하였다. 보존비에 대한 건물 수선비의 비율은 대체적으로 10% 내외(보존비의 대부분은 선로 수선비가 차지)이며, 건물 수선비 내역의 개요는 [표 5-2]와 같다. 소규모 공사에 대해서는 경상부 보충비에서 지불하여 시행하였다. [표 5-2] 건물 수선비 비고) 기타 건물은 사무실, 창고, 잡건물 등 내역 중 기계장, 여관, 기기, 운송, 고용인 임금 및 비율은 생략 제2절 관리기구 건설사무소 및 개량사무소에는 건축과를 두고, 필요에 따라서 건축 현장에 건축구 또는 건축공사계를 두어 현장감독을 시켰다. 기설 건물의 보수는 각 철도사무소 소관으로 하여 철도사무소에는 건축과를 두고, 소관 사무소의 소재지에는 건축구를 설치하여 보수 관리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건축구에는 현업 종사원으로서 구장과 조역, 서무계, 기술계, 목수장, 목공수, 기공수, 도공수, 창고수, 고용원을 배치하였다. 1945년 3월 현재의 건축구는, 부산지방교통국 관내 4구(부산-대전-경북-안동-순천) 경성지방교통국 관내 4구(경성-평양-강계-해주) 함흥지방교통국 관내 5구(원산-함흥-성진-청진-원산공장) 경성건설사무소 소속 수색조차장 건축구 부산건설사무소 소속 부산조차장 건축구 평양건설사무소 소속 평양공장 건축구 등이었다. [건축 관계의 제반 규정] (설명 생략, 제4편 제4장 참조) 조선국유철도 건설규정 건축도 조정 요령 공사 수량 계산 요령 역사, 관사, 독신자 기숙사의 표준도 부채꼴 및 장방형 기관차고 표준도 방폭, 방공설비 표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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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건축 | |
청사 및 기타 시설의 개축 | 2022.10.24 |
청사 및 기타 시설의 개축 제1절 청사 건축 창업 초기의 청사 경부철도회사의 본점은 도쿄에 있으며, 경성지점 사무실은 1900년 3월 경성 이현(충무로 부근, 종전 시의 혼마치)의 나카무라(中村再造) 저택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그 후 두세 곳을 전전하다 1902년 5월 남대문 부근에 가건물을 세웠다. 그러나 위치가 좋지 않아 1904년 5월 남대문 밖 도동 제1호지에 다시 건설하였으나 이 또한 목조 가건물이었다. 부산출장소는 1901년 8월 입강정(남포동 근처, 용두산과 용미산 사이에 있던 지역의 일제강점기 지명)에 있던 명택상회의 가옥을 빌려서 사용했으며, 건설사무소 또한 이 임대 건물로 충당했다. 다음해 1902년에 양식 목조 2층 기와 47평을 초량에 신축하였는데, 당시로서는 이색적인 건물이었다. 다음에 임시군용철도감부는 인천 전동(종전 시의 산근정) 전환국 자리에 벽돌조로 청사를 건축했는데, 이는 후에 인천고등여학교 교사가 되었다. 통감부 철도관리국 청사는 철도 통일 후 경성 남대문 밖의 구 경부철도 경성지점 내에 있었는데, 1908년 용산역 앞 광장의 남쪽에 있었던 임시군용철도의 건축반 건물에 신막 및 마산 건축반의 건물 등을 부설해서 같은 해 11월 11일에 이곳으로 옮기면서 처음으로 중앙기관으로서 청사가 출현하고, 이후 총독부 철도청사 낙성까지 이어졌다. 본국(本局) 청사 : 메이지(1868∼1912) 말에 건축에 착수하여 1912년 9월 용산역 앞 광장 남쪽에 공사비 약 15만여 엔으로 낙성하였다. 본관 건축면적 3,619㎡, 연면적 6,425㎡의 양식 목조 2층 페인트도장으로 국장실 및 제1회의실은 벽지를 부착하고 격자 천장인데 내부는 모두 페인트로 도장하고, 바닥은 널빤지 부착과 함께 리놀륨을 깔았다. 정면 거실에는 기둥을 세워서 위용을 갖추고 각 실은 부흥식 수법을 채용해서 관내 주요 지점에 벽돌조의 방화벽과 강판제 셔터 및 일부에 방화용 지하수조 설치와 고압식 증기난방을 설비하였다. 그리고 외부에 콘크리트조의 수위실을 부설(후에 철거)했다. 이는 당시 용산의 웅장한 건축물 중 하나였으며, 목조 건축물로서는 비교적 정비된 시설이었다. 증기난방이 설치된 청사는 당시로서는 드물었다. 이 청사의 건축에 의해서 지금까지 산재하였던 철도국의 기구(용산역 북쪽의 가건물에 건설공무사무실, 그밖에 국장 관사 부지 내 및 남대문역 구내)가 모두 여기에 통합되었다. 그 후 1925년의 한강 대수해를 거울삼아 남쪽에 도로를 사이에 두고 2층의 중요 서류 창고를 세우고 철골조의 복도로 연결하였으며, 후에 사업 팽창에 따른 증원에 의해서 점차 증축되었다. 제1회의 증축은 1933년 11월로, 공사비 약 6만 9천엔으로 기존 청사 뒤 서쪽에 연면적 2,577㎡를, 제2회는 1937년 공사비 약 4만 엔으로 청사 뒤 동쪽에 연면적 1,987㎡를, 그리고 제3회는 같은 해 12월 공사비 약 2만 9천엔으로 청사 앞 북쪽에 연면적 582㎡를 각각 증축하였다. 1939년에는 철도 종업원양성소 구내에 공사비 약 14만 3천엔으로 연면적 2,571㎡의 2층 벽돌조의 청사 분관을 신축했다. 지방 청사 : 호남선 건설 시인 1910년 대전에 목조 단층의 건설사무소를 신축하고 같은 해 용산에 경원선의 건설사무소를 설치하였는데, 이 건물은 경부철도회사 시절의 사무소를 초량에서 일부 이축한 것이었다. 1911년 건축한 원산 및 목포건설사무소와 1914년 함경선 북부 건설을 위해서 건축한 청진건설사무소는 모두 임시청사이며, 1927년 1월에 준공한 경성운수와 경성공무사무소는 목조 2층으로 1층을 운수사무소, 2층을 공무사무소에 할당했다. 1933년 철도사무소 설치에 있어서 부산은 역 건물 2층을 재정비해서 청사로 충당하고, 대전은 구 건물을 증축하였다. 경성은 1937년 및 1938년에 각각 증축하고, 평양과 원산, 성진은 모두 기존 건물을 충당하였다. 그러나 순천과 원산은 1936년 각각 5만 1천엔으로 목조 2층 스트레이트 기와 건물을 신축하고, 대전과 성진도 1937년과 1938년에 각각 증축 또는 재건축을 실시하였다. 강계철도사무소는 1940년 4월 개설되었으며, 그 건물은 목조 2층 스트레이트 기와의 이중창으로, 특히 난방에 유의해서 신축했다. 그 후 1944년 4월 1일 조선철도회사 소속의 황해선을 매수하면서 해주철도사무소가 개설되었는데, 그 청사는 같은 회사의 해주영업사무소 건물을 그대로 계승하여 청사로서 사용했다. 또한 1940년 12월 기구 개정과 함께 부산과 경성, 함흥에 지방 철도국이설치되었다. 부산지방국은 부산부 범일동에 목조 2층 시멘트 기와지붕을 본관으로 하고, 복도로 연결되는 목조 단층 시멘트 기와지붕 4동과 함께 건축면적 약 5,200㎡을 신축했다. 경성지방국은 기설의 본국 자(子) 청사(1939년 철도 종업원양성소 구내에 신축)의 일부를 이용했다. 함흥지방국은 함흥부회상정(咸興府會上町)에 부산지방국과 완전히 동일하게 신축했다. 1935년 이후 각지에 건설사무실이 설치되었는데, 청사로서 평양은 목조 슬레이트지붕을 신축하고, 성진은 구 초등학교 교사를 빌려서 사용하였다. 경성은 1936년 청량리역 부근에 임시건물을, 경북 안동은 목조 슬레이트지붕을 신축했다. 강릉은 1937년 임시창고로서 충당하였는데, 1939년 목조 2층 슬레이트지붕으로 신축했다. 또한 청진은 1942년 8월 개설되었으며, 한때는 강덕의 용품창고 1동을 충당하였으나 다음해 같은 지역 부근에 목조 2층 슬레이트지붕을 신축했다. 또한 1943년 9월에 개설된 진주건설사무소는 민가(목조 총 2층 건물 기와지붕)를 빌려서 청사로 하였다. 경성건설사무소의 임시건물은 그 후 다소의 개수 및 증축을 실시하면서 종전 시까지 건설사무소로서 이용되었다. 1937년 이후 개량공사를 시행하면서 각지에 개량사무소를 설치하였는데, 경성은 1940년 3월 경성철도사무소 청사와 연결해서 공사비 약 5만 9천엔으로 목조 2층의 연면적 1,236㎡, 지붕은 철판 부족으로 인해서 석면 슬레이트 건물로 신축했다. 부산은 초량역 북측 전찻길에 면하는 관사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목조 2층 석면 슬레이트지붕에 연면적 1,171㎡, 부속건물과 함께 공사비 약 6만 5천엔으로 1938년 1월에 준공하였다. 평양은 부산과 동일한 것을 1937년 10월 평양역 구내에 건축하고 1939년 12월 증축하였는데, 공사비는 총 약 12만 3천여 엔이 소요되었다. 또한 함흥은 1942년 8월 개설해 목조 단층 파형 슬레이트지붕을 신축하고, 벽은 강재 부족으로 인해서 대나무 라스 모르타르로 도장했다. 1943년 12월 기구 개정에 의해서 철도국이 폐지되고 교통국이 되었으며, 소관 업무도 철도 관계 외에 해사와 항공, 항만, 세관 등 다양한 부문에 걸친 업무를 소관하게 되었다. 이에 따른 현장 기관의 각 건물도 모두 그대로 이관되었다. 특히 부산과 청진에서는 세관과 철도사무소가 병합, 편성되어서 부두국이 되고, 철도사무소는 폐지되었다. 부산에서는 구 세관건물(유명한 건축가 와타나베 세츠(渡部節)가 설계한 것)이 부산부두국 본관이 되고, 구 부산철도사무소가 있었던 부산역사 2층은 부산지방교통국 분실이 되었다. 또한 점차 전쟁이 심화되면서 1945년 8월 1일 평양과 순천에 지방 운수국이 개설되었으나 철도사무소가 폐지되면서 이를 대체한 것으로, 건물만 수리했을 뿐 특기할 만한 사항은 없었다. 제2절 기타 시설 건축 중앙(철도)종사원양성소 1919년 4월 만주철도 위탁경영 당시 경성철도학교로서 용산 관사의 동쪽 끝에 설치한 벽돌조 2층의 아름다운 건물로 강당은 목조로 이루어졌다. 본관 외에 목조 2층의 기숙사와 무도장, 병기고 등이 있었으며, 연면적 6,278㎡이었다. 후에 종업원양성소로 바뀌고, 그 일부는 철도박물관으로서 이용하였다. 구내에는 도서관도 설치하였다. 1943년 8월 1일 중앙종사원양성소로 개칭되었다. 교통(철도)병원 및 진료소 경성교통병원 : 처음에는 용산철도병원이라고 하였으며, 이어서 경성철도병원이 되고, 그 후 1943년 12월 경성교통병원으로 개칭되었다. 임시군용철도감부는 1904년 4월 철도 촉탁의 제도를 마련해서 건설선의 주요 지역에 의사를 파견하여 진료를 보게 하였는데, 조선철도 통일 후인 1907년 12월 경성에 설치된 동인병원을 철도의 촉탁으로 하여 먼저 용산 철도관사의 5등 관사 2동 4호를 연결해서 의무실로 사용하고, 실내의 일부를 수리해서 그 중 2호를 치료소 및 병실로, 나머지 2호를 촉탁의의 주택 및 의료 종사원의 숙박실, 식당 및 기타 용도로 사용해서 진료에 임하도록 한 것이 병원으로서는 시작이었다. 그 후 1911년 용산 관사지역 내에 새로 진료소를 설치해서 동인회에 위촉하였으나, 진료소 건물은 평양의 창고와 계정역사를 이전 개축한 것으로 목조 단층 건물에 기와지붕으로 매우 조잡하였다. 그 후 1913년에 목조 2층, 온수난방이 가능한 본관을 신축하고 동인병원으로서 진료에 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용산철도병원으로 개칭하였다. 이어서 1918년 본관은 화재로 인해서 소실되었기 때문에 다음해인 1919년 벽돌조 2층, 건축면적 697㎡, 공사비 약 8,200엔으로 같은 곳에 본관을 재건축하여 이전의 본관과 동일한 규모로 복구되었다. 1926년 4월 이를 철도국직영으로 변경하였는데 종업원 수 증가로 인하여 의료설비 확충이 필요해졌으므로 1928년 부근에 새로 벽돌조 2층의 신 본관을 건축하고, 구관은 내부를 수리하여 병실 및 수술실의 일부에 충당하였다. 신 본관은 연건축면적 1,147㎡, 양식은 간편한 근대식으로 하고, 현관에는 스테인드글라스를 이용하였다. 내부 각 실의 벽은 회반죽 칠, 지붕은 철근 콘크리트로 하였다. 지하는 약국과 사무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피부과 등 각 실로 구분하고, 지상은 소아과, 치과, 이비인후과, 안과 등 기타 각 실로 그리고 수술실과 시험실, X-ray실을 마련하였다. 공사비 총액은 약 10만 4천엔이었다. 그 후 1937년 6월 본관 뒤쪽에 3층 건물의 병실을 증축하였는데, 철근 콘크리트조였으며, 벽체는 벽돌, 외부 마감은 컬러크리트로 하였다. 이는 연면적 724㎡, 병실 수는 1층 및 2층 각 7실, 3층에 10실이 있으며 그밖에 일광욕실, 분만실을 두었다. 또한 부대시설로는 난방과 가스, 수도, 전기 승강기 및 방독설비 등을 구비하였으며, 공사비 및 부대설비를 합쳐서 약 23만 4천엔이 소요되었다. 마산보양소 등 : 장기 요양을 필요로 하는 결핵환자를 수용하기 위해서 기후가 온난하고 바다에 면하여 일조와 경치가 뛰어난 경상남도 마산 산등성이의 경사지를 이용해서 종업원공제조합 자금으로 세워진 국영요양소로 본관 1동(진료동)과 일광욕실이 있는 2동(병동)으로 이루어졌으며, 1941년 5월 준공해서 같은 해 11월 보건소로서 개설하였다. 건물은 모두 목조 단층 건물로 병동은 일조를 고려하여 남쪽을 개방하고 크림색으로 마감하였다. 특히 본관보다 남쪽으로 낮게 하여 계단형 복도로 각 동을 연결했다. 각 사무소 소재지 및 기타 주요 지역에는 각 과를 설치한 상당한 규모의 국영 또는 민영에 위촉한 진료소를 두었다. 그 중에서 부산 및 평양의 민영 위촉 진료소를 매수해서 1944년 4월 국영의 교통병원으로 하였다. 이는 모두 목조 건물로 부산은 2층 건물, 평양은 단층 건물이었다. 또한 1943년 2월 함흥지방국 부근에 국영의 함흥교통병원을 개설하였다. 건물은 목조 일부 2층 건물의 시멘트지붕이었다. 교통(철도)회관 용산철도관사 지역 내에 있었기 때문에‘ 철도클럽’이라고 부른 용산국원집회소는 1909년 경부철도회사시대에 쓸모가 없었던 사무소를 이축한 것이었다. 본국 청사 동쪽과 도로를 사이에 두고 1913년경 사용하지 않던 건물을 이전하여 충당한 낡은 바라크 건물의 본국 식당과 함께 개축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어 재단법인 철도교양조성회(1925년 6월 설립)가 식당 자리에 23만엔으로 1935년 8월 기공하여 다음해인 1936년 7월 준공된 건물을 국원집회소로서 기부한 것이 이 철도회관(당초 국우회관이라고 하였다)이다. 시설의 개요는 재해에 대비해서 불연 구조인 벽돌 및 철근 콘크리트조, 일부 목조 2층 일부 지하실, 지붕은 흑색 석면 슬레이트지붕으로 연면적 2,795㎡, 건축 양식은 밝은 서양 근대식이며, 지상에는 내빈 접대실과 대집회실, 중식당, 국원 숙박실을 갖추었다. 대집회실은 특히 음향을 고려해서 방음장치를 설치하고 고정석 등을 합쳐서 약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또한 지하는 320명을 일시에 수용할 수 있는 대식당과 당구실, 바둑실, 이발실, 욕실, 조리실, 휴게실, 사진실 등이 있었으며, 지하실은 기계실로서 기타 부대시설인 위생과 급수, 급탕, 증기난방, 냉동장치 등 전기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정원 주위를 정돈하여 이 건물 신축에 의해서 부근 일대가 일신된 모습이었다. 연선의 사무소 소재지 및 주요 역 소재지에는 소규모이지만 국원집회소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모두 상당한 인원수가 사용할 수 있는 거실 및 장기 기타 소집회용으로서 1∼2실과 당구실(1∼2대) 등을 구비하고, 또한 간단한 무대 및 영사시설도 있었으나 건물은 대체적으로 목조 단층 건물이었다. 호텔 및 산장 조선호텔 : 최초의 철도호텔 건설계획으로 실시된 것으로, 당시 구미 제국의 호텔 건축을 참고하고 조선과 일본의 관습과 풍속 등도 고려하여 외관 및 관내의 설비 장식도 경박한 분위기로 흐르는 것을 피하여 장엄하고 견실함을 중심으로 설계하였다. 양식은 북구 근대식을 따르고 여기에 동양 고유의 취향을 배려한 것으로 조선 양식 건축 중 가장 특징적인 것 중 하나이다. 원 설계는 독일인인 데라란데가 하였는데 운영상의 필요성에 의해서 일부 개조되었으며, 특히 식당과 콘서트 등은 원안을 완전히 고쳤다. 부대설비의 대부분은 철도 당국의 설계에 따랐는데 가구와 집기류에는 외국제가 많이 사용되었다. 호텔 부지는 경성 장곡천의 전 남별궁터 6,750평(약 22,300㎡)에 본관을 건축하고, 그 후 정원에 구 원구단의 팔각탑(1900년의 건축으로 천신지기와 태조대왕 제사를 지낸 곳)을 남기고 석고단의 석고를 이설 보존함으로써 조선 고건축의 육각당과 균형을 이루었다. 이 호텔이 실현됨으로써 완벽한 설비와 뛰어난 환경으로 격조 높은 호텔로서 유명하였다. 본관은 지하화 1층에서 5층으로 구성되었는데 건축 면적 1,927㎡, 연면적 7,018㎡의 벽돌조로, 벽 아래 부분과 중요한 곳에는 돌을 이용하고 그 밖에는 흑갈색 유약을 사용한 화장 타일을 활용, 안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주요 설비로서 정면 로비 중앙에 회전문을 설치하였으며, 현관 뒤쪽의 넓은 홀에는 일반객의 휴게실 또는 대합실로 실내 분수와 디자인에 신경을 쓴 벽난로와 조선의 저명한 화가의 풍경을 그린 벽화가 주위에 걸려 있었다. 식당은 약 300명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으며, 그 밖에 독서실과 당구장, 술집 및 음악실이 있었는데, 음악실은 전부 동양적인 분위기로 장식하고 무대설비도 갖추어져 있었다. 2층 이상은 몇 개의 방을 제외하면 모두 침실 및 그 부속실로 총 111실이었는데, 그 중 귀빈 응접실과 급사실 등이 있었기 때문에 침실은 결국 59실이었다. 지하실은 사무실과 조리실, 제빙실(얼음을 만드는 곳), 세탁실 등이 배치되었다. 세탁기는 미국제, 제빙 기계는 영국제로 탄산가스를 이용해서 1일에 3,000파운드의 제빙 능력이 있었다. 승강기는 오티스사 제품의 표준형으로 여객 및 화물용 각 1조를 장치했다. 건축공사는 1913년 3월 기존 건조물을 부수고 4월에 기공해서 다지기와 율석 다지기 및 콘크리트작업을 끝내고 벽돌 및 돌 쌓기, 각층 철근 보 가설, 목재공사 등을 착착 진행하여 같은 해 11월 25일 상량식을 거행하고 지붕과 피뢰침 설치, 동판 부착 등의 작업을 계속하였다. 겨울철 결빙 기간에도 임시 난방장치를 활용하여 바닥 콘크리트 타설과 벽 도장, 계단석 설치, 전등 배선 등 순차적으로 공사를 진행하였다. 다음해 해빙기를 기다려 3월 20일부터 외부화장 벽돌 부착공사를 개시하고, 7월 12일부터 각 부 마감 및 장식 공사로 이행하였다. 그리고 1914년 9월 30일에 부속공사도 전부 준공하였다. 이 건축에 소요된 공사비 총액은 약 84만 2천엔이었다. 그리고 10월 10일 경성조선호텔이라고 명명해서 개장하였으나, 후년 1939년 4월 1일 조선호텔로 개칭하였다. 1926년 8월 호텔 구내의 서남쪽에 순조선식 건물 3동(1동 약 48㎡)을 신축하고 실내를 온돌식으로 하여 조선 정서를 표현하였는데, 그 후 건물이 상당히 노후화되었기 때문에 1940년경부터 사용을 중지했다. 그 밖의 호텔 및 산장은 다음과 같다. 부산철도호텔 : 부산역 본관의 2층 이상을 개장해서 1912년 7월 부산스테이션호텔로 개업했다. 호텔의 출입은 본관 내 광장을 통해 출입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 후 역사와 연결, 벽돌조 2층 건물을 신설하여 출입구를 밝게하고 침구 등을 갖추었다. 그러나 직통열차의 운행으로 이용자가 격감하였기 때문에 운영방식을 변경하였다. 1934년 4월부터 명칭도 부산철도회관으로 바뀌었으며, 1938년 4월 이후에는 철도호텔이라고 개칭하였다. 신의주철도호텔 : 신의주의 신 역사 신축과 함께 그 2, 3층에 설치된 양식호텔로, 1912년 8월 신의주 스테이션호텔로 개업했다.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설비는 완벽하였다. 후에 명칭을 철도회관으로 변경하고, 1941년 4월 철도호텔이라고 개칭하였다. 평양철도호텔 : 평양 내의 야나기야 여관을 1922년 10월 매수하여, 그 앞쪽으로 연결해서 벽돌조 양관 2층 건물의 연면적 490㎡ 본관을 신축하고, 2층 이상을 객실, 지하를 식당과 대합실로 하고 매수한 일식 방과 함께 양식과 일식이 조화를 이룬 야나기야 여관으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1925년 4월 철도국의 직영이 되었으며, 같은 해 8월 평양철도호텔로 개칭되었다. 외금강산장 : 금강산의 경치가 국내외에 선전되면서 외국인 방문객수가 점차로 증가하였다. 관광객의 숙박 편의를 위해 성수기 중에만 개방하는 호텔로서, 금강산의 동쪽 기슭 온정리에 1915년 8월 온정리금강산호텔이라는 명칭으로 서양식으로 개업하였다. 본관은 목조 2층 건물, 지붕은 아연피복 철판의 임시구조로 목재가 그대로 드러나게 하였다. 건축면적 255㎡로, 지상은 204㎡로 객실을 배치하였으며, 지하에는 사무실과 식당, 오락실 등을 배치하였다. 당시에는 원산 이남에는 아직 철도가 없었으며 육상 교통이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재는 모두 원산항을 경유하여 배로 장전항에 상륙한 후 사람과 말의 등에 싣고 운반되었는데, 주재료인 목재는 대부분 부근 산림의 나무로 조달하였다. 당초 이 지방에는 곰 등의 맹수가 출몰하여 관계자를 불안하게 하였으나, 점차로 이용객도 증가하여 1934년 4월에는 외금강산장이라고 개칭하였다. 내금강산장 : 금강산 전철의 종점인 내금강역과 유명 사찰인 장안사의 중간 지점에 간소한 목조 건물의 본관을 세우고, 1918년 7월 양식의 장안호텔로 개업하였다. 성수기에만 영업하며 1920년에 방갈로 86㎡의 3동과 욕실을 증축하고 또한 1924년 529㎡의 목조 건물로 석면 슬레이트지붕의 신관을 세웠다. 그 후 1928년 7월 통나무 코티지풍의 53㎡ 크기의 임대용 5동을 신축해서 등산객에게 제공하고, 1934년 4월에 내금강산장이라고 개칭하였다. 방위 목적의 건물 태평양전쟁이 점점 치열해지면서 철도 운영 및 방위를 위해서 교량사무실과 지방교통국에 방위사령실 및 전철화 교환소 분실용의 청사 지소를 신설하였다. 압록강교량 부속건물 : 압록강의 복선형 교량건설에 수반되는 것으로, 기존 교량의 부속건물은 강 아래쪽은 안동에, 강 위쪽은 신의주에 있었으나 새로운 교량이 기존 교량보다 50m 강 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안동 쪽의 강위에 철근 콘크리트 및 벽돌조 4층 건물, 연면적 160㎡의 건물을 신축했다. 건물의 평면은 타원형으로 1층은 창고, 2층은 취사 및 가면실, 3층은 탄약고, 4층은 전투소로 하고, 네 모퉁이와 사방, 즉 8곳에 기관총용의 총 구멍을 설치하고 그 사이에 입사용(서서 쏘는) 총구와 슬사용(무릎 꿇고 쏘는) 총구가 교대로 설치되었다. 벽은 흡음재로 마감하고, 탑은 감시소로 3층과 4층 사이에 전성관이 있었다. 그리고 각층의 연결은 철 사다리를 이용하였다. 옥상에는 고사 기관총좌 2기가 있었으며, 주위의 벽은 슬사가 가능하도록 시공되었다. 건물 출입구의 철문에도 입사와 슬사를 위한 총 구멍이 각각 1곳 설치되었으며, 총구멍의 개구부는 세로 10cm, 가로 20cm로 중기관총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확대 가능하였다. 총 구멍 및 철문 모두 경성공장에서 제작하였다. 2층의 바닥면은 압록강의 최대 홍수면보다 여유를 주고, 3층 바닥면은 경의 본선의 기반면을 기준으로 하였다. 이 건물은 1층과 2층은 큰 타원형, 3층과 4층은 작은 타원형과 같은 평면이며, 3층 주위에는 감시용으로써 손잡이가 장착된 복도가 설치되었다. 이 건물은 원래 관동군이 사용할 예정이었는데, 만주철도의 구 시설에 비하여 손색이 없도록 하라는 요청에 의해서 열하성(熱河省)의 새로운 부속건물을 견학하여 설계한 것이었다. 만포교량 부속건물 : 압록강교량 부속건물과 동일한 것이 만포진 측에, 상부만 동일한 2층 건물이 집안 측에 각각 만포교량에 신설되었다. 부산지방교통국 청사 지사 : 철근 콘크리트조 2층 건물로 일부 단층의 평평한 지붕에 연면적 약 250㎡이다. 지붕 및 지붕차양은 방공법에 의한 내탄 구조(바닥판 두께 50cm, 직경 25mm인 주 철근을 15cm 간격으로 종횡 및 상부와 하부에 배치하고, 연결 철근의 직경 12mm로 하여 주 철근, 연결철근의 모든 접점을 용접해서 대형 보에 조립)로 출입구 및 창에는 법규에 의한 방호 철문을 설치하고, 지하 방탄층도 시공하였다. 지방국 부지 내에 1944년 1월에 착공해서 다음해 1945년 2월에 준공하였다. 경성과 함흥의 양 지방국에서도 부산과 동일한 것이 시공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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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건축 | |
기관차고 및 공장 건축 | 2022.10.17 |
기관차고 및 공장 건축 제1절 기관차고 건축 형식·구조의 추이 개요 : 기관차고는 1899년 가장 먼저 인천에 설치된 후 신설 부설과 함께 각지에 세워졌는데, 열차의 운행과 설치 장소 등에 따라서 그 규모도 다양하였다. 그러나 선로 부설 당시에는 대체적으로 임시 목조 장방형(직사각형) 차고였으며, 후에 점차로 항구적인 자재인 벽돌로 개축되는 경우가 많았다. 경부철도회사 시설이었던 남대문(후에 경성)과 대전, 대구 등의 차고도 장방형(직사각형) 벽돌조였다. 그 후 화기 예방을 겸한 철골 장방형 벽돌조가 표준 설계로 설정되고, 점차로 3∼5선로를 수용하는 신막과 용산 등에 대형장방형(직사각형) 차고가 신·개축되었다. 또한 차량의 출입구에는 셔터를 설치하였으나, 고장이 많았다. 감아올리는 데 상당한 시간을 요하였기 때문에 1937년에 건축된 혜산진 차고 이후부터는 4장으로 접는 방식으로 개량되었으며, 또한 창고 내에 불가결한 난방설비는 기존에는 석탄난로를 이용하였으나 점차로 증기 또는 전기난방으로 개선되었다. 장방형 차고는 기존에는 편리하다고 여겨져 건축되었으나, 시세의 변천과 배연 등의 사정에 의해서 항구성을 요구하는 차고에 대해서는 부채꼴 차고가 유리하다고 하여 1933년 대전 및 원산의 양 기관차고를 부채꼴로 개선하였다. 그 후 1936년에 부채꼴 차고에 갑형 및 을형의 건물 기준이 설정되어 갑형을 경부선의 대구와 경의선의 신막, 경경선의 청량리차고에 각각 신·개축하고, 을형은 일반형으로서 경의선의 정주와 경경선의 경북 안동 및 경주, 만포선의 만포진에 신축하였다. 또한 경경선 및 경원선의 일부 전철화에 의해서 전자는 제천에, 후자는 복계에 각각 장방형 전기 기관차고를 신축하고 모두 철근 콘크리트조, 증기 또는 전기 난방을 설치하였다. 태평양전쟁이 전개되면서 적기에 의한 차고와 전차대의 폭발 파괴를 고려해서 기관차를 창고 밖에 대피시키기 위한 방호시설을 설치하게 되었다. 또한 차고에 부수되는 사무실 및 기타 시설은 일반적으로 목조 건축이 많았다. [표 5-1] 부채꼴 기관차고의 건물 기준 부채꼴 기관차고의 건물 기준 : 갑형은 수용선이 많은 차고로 검수선 2선을 설치하였으며, 을형은 일반 보통 차고로서 검수선을 1선으로 하고 부속 건물을 함께 건설했다. 건물 기준은 [표 5-1]과 같다. 용산기관차고(장방형) : 용산기관차고는 1919년 8월 남대문에서 용산으로 이전할 때였는데, 당시로서는 최초로 철골 및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건설되었으며 5선로에서 텐더형 30량을 수용하였다. 당시의 오카무라(岡村)공무과장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서 5선로로 1스팬(보의 사이 102척(30.6m), 건축면적 1,100평(363㎡))의 초대형 장방형 차고를 신축했다. 기초는 철근 콘크리트 말뚝을 타설하고, 측벽은 철근 콘크리트조, 지붕은 반원형으로 하였다. 당시에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보 사이의 광대한 규모의 건축물이었다. 이 건축에 사용한 철근은 이형철근이며, 차량 출입구에는 스틸 셔터를 설치하고, 바닥은 콘크리트 그리고 차고에는 증기난방시설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기관차고에 난방을 설치한 것은 이것이 최초였다. 대구기관차고(부채꼴) : 기존의 벽돌 및 목조 장방형 차고는 그 후 수송력 증가에 따른 구내 확장에 따라 1941년 2월 철근 콘크리트 및 벽돌조의 갑형 부채꼴 기관차고(수용선 17선 및 검수선 2선, 건축면적 4,350㎡) 신축에 착공하였으나, 시멘트와 강재 등의 할당 지연으로 인해서 공기가 지연되다가 1943년 9월에 드디어 준공되었다. 검수설비로서 단축의 회갱(차에 남은 석탄을 처리하기 위한 재 구덩이)과 전축의 회갱, 천장 주행 기중기, 모노레일 등을 설치하고 매연으로 인한 강재의 부식을 막기 위해서 아스팔트계의 형광 도료를 사용하였으며, 또한 차내 조명을 위한 내벽의 색채 및 청소 시의 위험 방지 등에도 유의하였다. 또한 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기계실에 폭발 방지공사, 옥상에는 위장도색을 하여 긴급 시 대비에 만전을 기했다. 제2절 공장 건축 공장 건축의 개요 창업시대에는 1899년 9월 인천에 처음으로 철도공장이 신설된 이래 초량과 용산, 영등포, 겸이포 등에 신설되었으나, 당시에는 주로 목조 건축으로 소규모의 임시시설이 많았다. 철도 통일 후에는 대부분 철거 또는 다른 곳으로 이전, 개축되고 철도가 연장되면서 각 주요 지역에 크고 작은 규모의 공장이 신설되었다. 공장의 시설 계획은 공장 사무실을 비롯하여 각 공장은 물론 부대설비와 복지시설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획은 본국 소관과(공작과)에서 수립하고, 그 기획에 따라 각 건축에 대해서 구체적인 설계와 시공을 진행하는 것이 통례였다. 즉, 각종 공장은 중량물을 취급하기 때문에 대부분 철골 구조였으며, 특히 기관차 조립 및 수리공장은 철골 구조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내부에는 100여 톤을 매달고 이동하는 크레인이 있었으며, 이를 지지하는 철주의 부담 하중은 상당한 것으로 이를 위한 기초공사는 설계·시공상 가장 고심하는 부분이어서 준공 후 가동의 안전성을 확인할 때까지는 한시도 안심하지 못했다. 경성을 중심으로 부산과 평양, 원산, 청진 등에는 대규모 공장시설이 상당히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원산은 1942년 2월 최신예 시설로서 업무를 시작하였고, 1945년 7월 대전과 해주의 양 공장이 개설되었다. 경성공장 : 1905년 6월 임시군용철도감부가 소규모 용산공장반을 신설하였으나 순차적으로 설비를 증대하여 1923년 6월 경성공장으로 명칭을 바꾼 조선 유수의 공장이다. 각종 공장 구조의 주체는 철골조이며, 지붕은 철근 콘크리트 또는 석면 슬레이트였다. 그러나 그 중 기관차공장이 가장 오래되었는데 1912년 6월 준공되고, 1915년 증축되었다. 공장 건축용 철재는 당시에는 전부 미국 제품을 사용하고, 조립은 주로 이공장에서 실시하였다. 기초는 철근 콘크리트 말뚝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천장에 이동 크레인을 설치하기 위해서 하중은 크지만 부지가 매립지로서 지반이 약하였기 때문이다. 건구(건물의 개구부에 채광, 환기, 출입을 위해 설치하는 각종 창이나 문)는 모두 강제를 이용하였으며, 창은 미국의 트러스콘 회사의 스틸 섀시를 이용하고, 차량 출입구에는 스틸 셔터를 사용하였다. 조선철도 건축에 철근 콘크리트 말뚝 및 강제 건구를 사용한 것은 이것이 효시였다. 말뚝 박기에는 상당히 고심하였다. 그 후 시설 확충에 의해서 부지는 28만㎡가 되었다. 부산공장 : 1904년 2월 경부철도회사가 초량공장을 초량역 구내에 설치하고, 1923년 6월 부산공장으로 개칭하였다. 업무 확충에 의해서 1930년 10월 부산진에 용지 면적 약 18만㎡의 토지를 구입하여 이전하였다. 공장 건물의 구조는 철골 중심으로 측벽에는 철판을 부착하였으며, 지붕은 석면 슬레이트(동력소·용품고 및 목공공장은 철골 콘크리트조)로 하고, 크레인 철주용 수평재 및 주요 철관 담당계에서 강재를 구입해서 자체 공장에서 제작, 공사 하청업자에게 지급하였다. 자재 공장 등 기타 시설은 순차적으로 신설되었다. 철근 콘크리트조의 화차공장은 건축면적 3,360㎡로 1941년에 착공하였으며, 철골류는 경성공장에서 가공하였으나 시멘트 등의 공사 재료 입수가 지연되어 1944년에 준공되었다. 48m×70m의 대형 건물이었기 때문에 옥상을 통해서 채광이 이루어지는 신공법이 채택되었다. 철골 콘크리트 및 벽돌조의 주물공장은 건축면적 1,400㎡로 1943년에 착공하여 1945년 3월 준공되었다. 대형 주물로 2기를 설치하였다. 벽돌조 2층 건물의 부속의 목형 창고는 건축면적 900㎡로 2층보는 강재 입수가 어려웠기 때문에 목재를 끼워 맞추는 구조를 채용하였다. 공장 사무실은 철근 콘크리트 및 벽돌조 2층이며, 일부 지하의 건축면적은 약 1,500㎡로 1943년 개축하였으나 자재 입수가 어려워서 보 사이가 9m인 2층 보는 못 박기 공법으로 하여 1944년 10월 준공되었다. 평양공장 : 1911년 11월 겸이포공장을 이전해서 평양공장으로서 개설하였으나 1914년 4월 용산공장의 자(子)공장이 되었다가 1940년 12월 평양공장으로서 독립한 후 업무 확충에 따라서 서평양조차장 옆에 용지 면적 28만㎡를 구해서 이전, 확충하였다. 철골조 건물로서 공사를 진행하였으나 건설 순서가 원산공장 다음이었기 때문에 자재 부족을 초래하여 화차공장의 기둥은 부득이하게 철근 콘크리트조로 하였다. 건설공사 중인 1944년 11월 일부 조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공사와 조업을 병행하는 중에 전쟁이 끝났다. 청진공장 : 1930년 8월 경성공장의 자공장으로서 개설하였는데, 1933년 10월 청진공장으로 개칭하였다. 철관 철근 콘크리트조로, 지붕은 콘크리트조로 하고, 큰 창에는 연속 개폐식 오퍼레이터를 사용한 현대적인 건물이었다. 그러나 부속건물 및 사무소 건물은 목조로 하였다. 그 후 공장 근처에 청진역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지역이 협소하여 이전 확장을 계획하고 약간 떨어진 지역에 35만 ㎡의 토지를 구해서 토공공사에 착수하였으나 자재 부족으로 완성되지는 못하였다. 원산공장 : 공장 용지 면적은 36만 ㎡로 공장 중 가장 넓다. 원산만 연안에 있어서 지반이 연약하고, 특히 기관차공장이 위치한 곳에서는 13m의 깊이에서 연질 바위에 닿았다. 따라서 기초 말뚝에는 길이 13m의 콘크리트 파일을 이용하고 그 선단을 구근 모양으로 하여 지지력을 증대시켰다. 건물은 철관 철근 콘크리트조로 하고, 철관류는 자재를 구입해서 경성공장에서 제작하였다. 천장 채광창은 건물에 직각 방향으로 45도 경사진 삼각형 형태로 배치해서 강설의 위험을 제거하였다. 건물 높이 23m, 폭 27m. 기중기는 상하 2단으로 하여 하단은 70톤×2대, 상단은 10톤×1대로 서로 연결하면 혼자서 동시에 운전할 수 있었다. 또한 주조공장과 단조공장의 통풍창은 독일의 예를 참조해서 배치했다. 건물의 내부는 주벽의 하부 2m를 진한 녹색, 그 위는 전부 노란색으로 도장했다. 신설 공장 중 최신 설비로서 1942년 2월에 기관차 수선 조업을 개시하였으며, 1943년에는 화차공장도 준공되었다. 대전·해주공장 : 양 공장은 모두 1945년 7월 개설되었다. 대전공장은 대전기관차고 근처에 위치하며 목조 건물 2동과 블록조의 대형 건물 1동이 차례로 완성되는 정도였다. 또한 해주공장은 1944년 4월 매수한 황해선의 해주 기관차의 일부를 수리하는 공장으로서 조업을 개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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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건축 | |
역사 및 관사 건축 | 2022.10.11 |
역사 및 관사 건축 제1절 역사 건축 경인선의 역사 인천역사 : 이 건물은 조선철도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경인철도회사시대인 1900년 5월 건축되었다. 구조는 흑색 벽돌 구조 단층으로 아연을 댄 파형 철판지붕이며, 건축 면적은 91평(300㎡)이었다. 대합실은 1, 2등 및 3등으로 구분되었으나, 그 후 1, 2등실은 폐지되었다. 당시 경인구간의 시발역으로서 가끔 귀빈의 왕래가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귀빈실이 설치되었다. 역사 뒤쪽의 역장 관사도 같은 시대에 건축되었다. 중간 역사 : 철도 통일 후 선로 개량과 함께 개축되었으며, 상인천역은 서 쪽으로 위치를 옮겨서 신축하고 구 역은 축현으로 개칭하였다. 경부선의 역사 초량∼서대문 구간에는 당초 경부철도회사에 의한 각종 건축시설이 있었으며, 초량역을 제외한 중간 역사 중 김천 부근까지는 일식 목조 건물, 그 이북은 대체적으로 같은 양식 목조 건물의 크고 작은 시설이 있었다. 후에 용산역은 군용철도의 시발역으로서 가건물을 개축하였으며, 중간 주요 역인 대구와 대전역의 개축 그리고 영등포역 및 기타 중간 역사도 선로 개량과 함께 순차적으로 새로운 기준형으로 개축하여 경성역사의 대 개축과 함께 역사 건축은 어느 정도 정비되었다. 특히 수원역은 조선 건축 양식을 채용하여 개축, 현지에서 환영받았다. 종점인 서대문역은 경성 이북의 경의선에 직통으로 연결되면서 1919년 3월말 폐지되고, 구내는 관사 부지로서 남대문 부근에 소재하였던 관사를 이전하였다. 초량역사 : 이 역사는 양식 목조 페인트 도장으로 근처에 기관차고 및 기타 많은 건축시설이 있으며, 사무실은 양식 목조 2층 페인트 도장 건물로 대부분이 계속해서 유용되었다. 부산역사 : 이 역사는 처음에 가건물이었으나 1910년 10월 공사비 약 97만엔으로서 잔교선, 잔교 지붕과 함께 준공하였다. 이 건물은 벽돌조 2층 천연 슬레이트 기와의 건축면적 약 689평(2,238㎡)으로 지하에는 역, 지상에는 호텔이 건설되었다. 건축 양식은 고전적인 부흥식(르네상스식)으로 다쓰노-가사이건축설계사무소가 설계한 것으로, 당시는 다쓰노식이라고 하였는 데 선이 굵고 호탕한 풍격을 지녔다고 하여 구조와 건축방식 모두 당시의 조선철도 역사 중 백미였다. 부산잔교 차량-선박 간 연락설비 : 부산에서의 차량-선박 간 연락시설은 1905년 창설 당시 초량의 소형 선박 및 임시잔교시대부터 점차 발전하여 부산역사 낙성식이 거행된 다음해인 1912년 부산잔교 및 돌제공사가 준공되었으며, 다음해인 1913년 4월 돌제 위에 철골 구조를 건설하고 건물 안에 창고와 대합실, 역장 및 귀빈실을 설치함으로써 해상과 육상 연락설비가 완성되었다. 또한 시모노세키∼부산 연락 항로에 신라환(3,000톤)이 취항함으로써 처음으로 주요 열차의 부산 발착을 신 잔교에서 취급하였다. 돌제 위의 건물 면적은 254평(762㎡), 총 공사비는 26만 4천엔 정도였다. 이 설비는 대형 증·개축 없이 그대로 계속 사용하였는데, 1936년 11월 수송량이 격증하고 7,000톤급 대형선인 금강환 및 흥안환이 취항하면서 설비의 일부를 개조하였다. 계선 위치는 제1잔교 북쪽으로 하고, 일본 철도성 소속 창고 위에 승선 공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폭 4미터의 다리를 가설하고, 중간 플랫폼에 철골 구조의 우산식 승강장을 설치하였다. 누수에 의한 화물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서 제1, 2, 3의 화물 장치장을 증설하고 그밖에 연결상 필요한 설비를 마련하였는데, 총공사비는 18만 2,900엔 정도였다. 그 후 제2돌제의 준공과 더불어 화물 관계의 취급시설이 순차적으로 충실화되었다. 이들 증·개축에 의해서 부산에서의 선박과 차량 간 연락은 어느 정도 완화되고 그 설비가 새롭게 되었다. 대구역사 : 역사 건물은 1915년 4월 준공되었는데, 구조는 목조 일부를 2층으로 만들고, 승강장은 철골조의 작은 건물에 철판 기와지붕이다. 외관은 세부적으로는 부흥 식 기법을 채용하였으나 당시 목조건축물로서 위용을 갖추었다. 건축면적은 약 373평(1,233㎡)으로 2층 66평(220㎡)을 식당 및 조리실로 사용하였으며, 나중에 대합실 확장 등이 필요하여 증축하였다. 대전역사 : 역사는 1919년 개축하였으나 대략적인 규모는 대구역과 비슷하며, 바깥쪽은 당국으로서는 최초로 가와사키 철망을 친 시멘트벽 인조석으로 마감하였다. 1920년 5월 지하도를 설치하였는데, 조선철도에서는 최초였다. 용산역사 : 1900년 개통 당시는 겨우 3.5평(12㎡)에 지나지 않는 소형 건물이었으나, 군용철도 경의선의 시발역으로서 1906년 11월 목조 2층 건물(일부 3층 건물)로 개축했다. 얼마 후 화재로 인해 대부분 구형 설계에 의해서 재건축되었다. 건축면적 약 480평(1,587㎡)으로 지붕은 슬레이트이며, 건물 각 부에 정밀하게 고딕 수법을 도입한 서양식 건축을 모방한 건물로서 당시로서는 조선철도 역사 중 위용을 갖춘 건물 가운데 하나였다. 1912년 12월 과선교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조선철도에서의 효시였다. 경성역사의 대 개축 경성부의 현관격인 역사 본관은 당초 남대문역이라고 하였으며(1923년 1월 1일 경성역으로 개칭), 1900년 경부철도회사에 의해서 개설되었다. 그 부지의 지반은 남행 승강장과 같은 높이이며 양식 목조 단층 건물로 귀빈실이 설치되었다. 이 역사는 1910년대에 한 번 개축이 추진되어 양식 벽돌조 2층 건물로 설계되었으나, 개축이 취소되고 그 후 만주철도에 위탁경영되었다. 이와 동시에 설치된 총독 관방 철도부에서 국유철도의 개량과 역사의 개축 계획이 진행되었다. 한편, 만주철도 경성관리국에서도 개축 계획을 검토하였으나 역사의 위치가 협소하였기 때문에 개축 계획 시 상당히 고심하였다. 그 형식도 통과역과 시발역‘ 두 역’을 겸비할지, 단순히 통과역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 검토되었으나, 결국 통과역 형식을 채택하기로 하였다. 개축된 건물은 1925년 9월 총공사비 약 1,945천엔으로 38개월이 소요되어 준공되었으며, 1921년 10월 14일 조선신궁의 진좌제를 기점으로 사용을 시작해 다음 날인 15일부터 역을 개방하였다. 그러나 개축 설계는 경비 관계상 최초 계획의 약 3분의 1정도로 축소되었다. 건축 양식은 부흥식을 채택하고 벽돌조에 타일을 깔고 곳곳에 화강암을 병용하였다. 좌우 양 날개 및 정면의 둥근 창 등 전체적으로 통일된 형태를 표현한 건물로 정면에서 보면 2층 건물, 선로 측에서 보면 3층 건물의 귀빈 대합실을 부설한 건축으로 상당히 광대하여 당시에는 동양 제2위라고 하였다. 각층의 용도로는 1층은 역무와 식당 관계, 2층은 승무원 사무실과 찻집, 식당 등으로 위생 및 난방, 전기설비가 완비되었다. 각 실의 마감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하면 1층 중앙 로비 바닥은 화강암이 깔려 있으며, 중간부는 석재, 벽은 인조석, 일부는 회반죽으로 칠하였다. 돔에는 유리가 부착되었는데 일부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이용하고, 그밖에는 돌의 결 모양의 유리를 부착하였다. 반원의 창은 철강제 창틀에 불투명 유리로 되어 있었다. 개찰구 카운터는 대리석을 사용하고, 소화물 취급실은 리그노이드 도장, 카운터는 화강암 갑판을 정교하게 갈아서 완성하였다. 1, 2등 대합실의 바닥은 리그노이드 도장(후에 타일 부착)으로 하고 벽과 바닥의 이음새 부분의 마감재는 대리석, 벽의 아래쪽 부분은 타일, 벽 및 천장은 회반죽으로 칠하였다. 그리고 귀빈실은 바닥을 견목으로 모자이크해 부착하고, 바닥과 벽의 이음새 부분과 벽의 아래 부분은 모두 티크재, 벽의 일부에는 실크를 붙였다. 일부에는 천장과 함께 회반죽 칠을 하였다. 2층 식당 바닥은 리그노이드 도장, 바닥과 벽의 이음새 부분과 벽의 아래 부분은 견목재, 바닥과 천장은 회반죽 칠을 하였다. 정면 입구 좌측면 요석에 삽입한 정초석의 문자는 당시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이 쓴 것이다. 또한 정면 측 지반을 높인 것은 부지 이용상 역사의 입체화와 역의 전망을 고려한 것이다. 이어진 전방 도로의 이동 확충과 부근 도로의 개수와 더불어 역사는 당당한 위용을 띠었다. 또한 견고한 과선교의 신설과 소화물설비 완비, 철근 콘크리트 승강장 지붕 신축 등의 정비를 통해 기능적으로도 신 기축을 이루게 되었다. 과선교는 여객, 화물 병용과 소화물 전용의 2곳이 있으며, 모두 철골 철근 콘크리트구조이다. 승강기는 소화물 전용으로 2톤용 10대를 설비하였으며, 제1승강장 지붕은 건축면적 6,300㎡로 철근 콘크리트구조, 제2, 제3 승강장 지붕은 건축면적 3,570㎡의 목조이다. 건물 면적은 부속건물과 승강장 지붕, 과선교를 합해 17,269㎡이며, 그 중 이 건물은 지하가 2,747㎡, 1층이 637㎡, 2층이 1,452㎡이다. 경성역사 본관 준공과 동시에 목조 단층 화물 장치장도 준공하였는데, 그 건축면적 중 발착 장치장은 2,145㎡, 도착 장치장이 2,798㎡였다. 그밖에 영업 창고 7동, 화물 취급소, 경찰관 거주소 등을 건축하여 운전 영업상의 설비를 완성시켰다. 참고로 경성역 개량 계획 당시에는 방대한 예산 규모가 문제가 되었으나, 미래의 경성을 생각하면 오히려 너무 작은 것이 아닐까 우려하면서 과감하게 착수하였는데, 이 우려가 적중하여 공사 준공 시에는 규모가 너무 작아서 장래 대책을 고려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차후의 역사 뒤쪽의 발전을 예상해서 앞뒤로 문을 두었으며, 여객 관계는 승강장 등의 상부에 마련하여 구내의 입체적인 이용을 도모하였다. 경의선의 역사 용산∼신의주 구간은 러일전쟁 시에 임시군용철도감부에 의해서 급히 건설된 것으로, 건축시설은 대체로 목조 단층 골함석지붕과 백색 회반죽 벽 마감으로 방한을 고려하였으며, 벽의 바탕에는 수수껍질 같은 것이 많이 사용되었다. 신의주역사 : 종단역으로서 처음에는 임시역사였는데 압록강 가교공사에 따라 현재의 수하물 취급소로 이전하여, 1911년 10월 현재 위치에 공사비 9만엔(건물만)으로 양식 3층 벽돌 구조, 석면 슬레이트지붕, 연건축면적 387평(1,279㎡)을 신축하였다. 부흥식(르네상스식)을 채택하였는데 구조는 외부 벽돌에 내부 칸막이벽이며, 2, 3층 바닥의 파라페트 등은 모두 목조이다. 1층을 역사로 이용하고, 2층을 서양식 호텔시설을 갖추었는데 설비 면에서는 당시 부산역에 다음 가는 수준이었다. 개통과 함께 예전의 종단역은 수하물 취급소로 이용하고, 기관차고와 기타 관사 등은 옛 위치에 그대로 존속했다. 중간 역사 : 경의선의 초기 개량과 함께 신안주 외에 2, 3역사는 목조 단층 건물 페인트 도장으로 새로 개축되고 기타 중간 역사도 어느 정도 개수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벽의 박리를 방지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다른 선에 비하여 지세상 약간 적막함이 느껴졌다. 그 후 1919년 5월에 개성과 사리원역, 1924년 5월에 선천과 신막역 등이 개축되었는데, 이는 모두 서양식 벽돌 건물이었다. 마산선의 역사 당초는 임시군용철도감부의 소관으로서 역사는 대부분 일식 목조 단층 건물이었는데, 후에 마산역사만은 목조 단층 페인트 도장의 반영구적인 건물로 개축되었다. 그 밖에는 표준 설계를 따른 건물이 많이 건축되었다. 호남·경원선의 역사 호남과 경원 양 선은 1910년을 전후해서 건설에 착수하였다. 각종 건축시설은 당시의 표준 설계에 준한 것으로 호남선의 목포와 군산 및 경원선의 청량리∼원산은 갑형으로, 그 밖의 중간 역은 을 또는 병형 역사인데 이후 역의 변화에 따라서 점차로 증·개축을 실시하였다. 특히 호남선의 이리역은 군산 지선 및 경전선의 분기역으로서 1937년 7월에 대 개축을 실시하여 건축면적 556㎡, 벽돌 및 철근 콘크리트구조로 하고, 외장은 타일, 대합실의 벽 아래 부분은 테라조를 부착하고 예비실 화단에 목포석(木浦石)을 사용하는 등 근대 양식을 채용했다. 기타 건설·개량선의 역사 각 선 모두 경원선과 마찬가지로 대체적으로 표준 설계에 의해서 건축되었다. 함경선의 함흥과 나남 양 역사는 단층 벽돌 건물이며, 신북청과 명천의 양역사는 유서 깊은 지점으로서 지방적 색채를 가진 조선 양식을 채택하였는 데, 목재의 원산지인 북부 방면에서는 목조 건축이 채용되고, 특히 방한과 동해(추위로 얼어 붙어서 생기는 손해)에 유의했다. 도문선의 웅기역사는 1929년에 준공되었는데, 강풍지대로서 특히 방풍, 방한에 유의하여 철근 콘크리트 및 콘크리트 블록 구조로 하고, 일부는 2층 건물, 지붕은 석면 스트레이트를 이용해서 장중한 분위기를 표현, 북선에 어울리는 건물로 건축하였다. 또한 혜산선 및 만포선 건설과 함께 혜산 및 만포역사는 웅기역사를 모방하여 각각 국경의 역사에 적합한 건물로 하였다. 동해북부선의 외금강역사는 1932년 준공되었는데, 이 역은 관광지로서 조선 유일의 세계적 명승지인 금강산의 동쪽 현관에 해당하므로 이에 적합한 근대식 건축으로 역사로서는 드문 고탑을 건설해서 쇄신의 분위기를 나타내었으며 지하 식당 등을 갖추었다. 탑 및 지하실은 철근 콘크리트구조이며, 외벽면 곳곳에는 현지의 돌을 박아 장식하고, 지붕은 천연 슬레이트로 하였다. 석재는 주로 고저산(庫底産)을 사용하였고 석재공사에는 중국인 석공을 고용했는데, 당시 중국인 활용은 허가제였다. 건축면적 400㎡, 공사비는 약 4만 1천엔이 소요되었다. 그 후 선로 개량 및 복선화에 의해서 구 역사를 이설 또는 개축한 역사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함경선 함흥역은 1944년 함경선 본선의 일부 변경에 따라서 역사도 이설했는데 목조 단층 건물의 가건축 역사였다. 조선 양식의 역사 개요 : 역사는 철도의 현관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특히 유서 있는 지역을 소개할 때는 조선 정서를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1925년 5월 오무라 다쿠이치(大村卓一) 철도국장 취임 이래 역사적인 배경을 가진 지역의 역사는 조선식 건물의 외관과 색조를 채용해서 신·개축하였다. 그러나 동양 고대의 건축은 구조미의 관점에서 중요한 곳에는 굵은 가공 목재가 드러나게 하고 처마를 넓게 만들었기 때문에 공사비 상승을 초래하였다. 따라서 이 형식의 건축 설계에는 각종 어려움이 수반되었다. 먼저 경부선의 수원역사를 조선 양식으로 개축한 것을 필두로 경의선의 서평양, 경전북부선의 전주와 남원, 도문선의 남양, 함경선의 신북청과 군선 그리고 명천, 동해 중부선의 경주와 불국사 등의 역사를 신축 또는 개축하였다. 참고로 조선 정서를 나타낸 역사의 사진이 후에 일본 국철인 다이샤역과 나가노역 건축 설계 시에 지역색이 있는 역사 건축의 안내서가 되었다고 한다. 수원역사 : 구 역사는 경부철도회사시대의 시설로 양식 목조 단층 건물이었으나, 1928년 8월 개축되었다. 수원은 예부터 유서 깊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조선 후기 정조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 시대의 형식에 따랐다. 벽돌 구조 단층 건물과 조선기와 지붕의 외관은 순수한 조선식을 모방한 건물로, 벽체는 두꺼운 목재 대신에 벽돌조의 기둥형으로 하고, 모르타르를 도장하였다. 부속건물은 둥근 기둥을 세우고, 작은 건물들은 서양식 트러스를 도입해서 굵은 목재를 대신하였다. 내부 대합실 천장은 격자 천장으로 문양을 그리고, 창호는 조선식 문살을 사용했다. 건축면적은 대략 갑형 역사이므로 본건물 570㎡, 부속건물 56㎡로 경부 본선에서 특이한 존재였다. 서평양역사 : 1929년 11월 신축한 벽돌조 건물로 지붕은 천연 슬레이트에 조선식을 다소 근대화한 건물이다. 전주 및 남원역사 : 양 역사 모두 1931년 9월 준공되었다. 전주는 조선의 발상지로서 그 시대의 건축 양식을 도입하였으며, 구조를 간소화하여 벽체는 벽돌조, 지붕은 검은 기와, 평면은 장방형으로 단일화하였다. 남원역사 외관은 대체적으로 수원역사와 유사하지만, 역사의 아래 부분 벽에 남원 성벽의 돌을 이용해서 역사적으로도 의의가 깊다. 경주 및 불국사역사 : 양 역 모두 사철 경동선 매수 후 선로 개량에 의해서 1936년 11월에 신축하였다. 이 지역은 신라 천년의 고도로서 유적이 많으며 내방객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따라서 신라의 건축 양식을 표현하고자 기획하였다. 현관 입구와 지붕의 모양, 격자 천장 모양 등에 출토품의 양식과 모양을 참고하여 가능한 한 신라의 수법을 채용했다. 한편, 건축비를 낮추기 위해서 벽체는 벽돌조 인조석을 붙이고, 넓은 처마는 서까래가 밖으로 보이는 형식을 버리고 회반죽 칠로 마감하여 간소화했다. 그러나 기와지붕은 이 형식상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파와(巴瓦)-정문(正吻, 기와지붕의 양식)의 모양 등은 당시의 것을 모방하였으며, 회녕산 유약기와를 사용해서 균형을 유지하도록 노력했다. 이 유약기와의 소성(가열하여 경화석 물질을 만드는 작업)에는 일부러 북선 회녕의 가마를 이용했다. 이렇게 해서 역사 건축은 신시대적인 신라 건축으로서 위용도 당당하였으며, 본관 건물 정면 좌측에는 신라시대의 유적인 석탑, 우물석 등을 함께 배치해서 관광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제2절 관사의 건축 관사의 개요 경인·경부철도시대의 사택 및 군용철도시대의 관사는 모두 목조 단층 건물의 매우 간단한 구조이며, 중간역의 사택은 대부분 역사에 연결되어 설치되었다. 북부지역에서는 보온시설을 다소 추가하였으나 전체적으로는 일본식 가건축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임시군용철도감부에서는 항구적 관사를 계획하여 3등에서 8등까지 등급제를 설정하고 일부에서 실시하였다. 1906년 철도의 통일 경영 후에도 위의 기준을 계승해서 등급제를 실시하여 이미 각 역에 시설되어 있던 사택도 이 기준에 준하여 등급별로 정리하였으며, 또한 군용철도시대에 설치한 백색 벽 숙사는 순차적으로 보수되어 7, 8등 관사로 삼았다. 이 등급제는 총독부 직영 하에서도 계속되었다. 사무소 소재지에는 4등 이하 각 관사, 기타 중간 역에는 6, 7, 8등 정도의 관사를 여러 채 설치하고 거주인원이 많은 곳에는 독신자 거주용으로 합숙소(만주 철도 위탁경영 이후에는 익제숙사라고 하였다)를 건축했다. 관사의 건축면적은 4등이 50평(약 165㎡), 5등 10평(약 99㎡), 6등 25평(약 83㎡), 7등 20평(약 60㎡)∼15평(약 50㎡), 8등 10평(약 30㎡) 정도였다. 2등 관사는 벽돌조 건물이 기준이었으나,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또한 6등 이상의 관사에는 각 호마다 욕실을 설치하였다. 기준 관사의 구조는 목조 단층 기와(단, 8등은 아연피복철판기와)와 일식 다다미(3등에는 양실 설치)로 하였다. 또한 추운 지역에서는 방한을 위해서 잡석 또는 옥석을 넣은 점토로 외벽을 두껍게 하고(이를 중국식 벽이라고 하였다), 출입구는 양쪽 여닫이 그리고 창문은 유리 및 창호지를 붙인 이중창으로 하고, 마루의 일부에 고타쓰(일본식 난방기구)를 설치하였다. 이 중국식 벽은 후에 눈과 비, 동해 등으로 인해서 붕괴되었기 때문에 순차적으로 개수되어 판자벽으로 바뀌었다. 이어 1933년 건설과 설치 후에는 각 건설선의 관사 건축시설을 통일하고, 기존의 관사 건축 표준을 지역별로 순차적으로 개정하였는데, 인원이 많은 집단지에 대해서는 공동 목욕탕을 설치하고 그밖에는 각 호에 욕실을 설치했다. 한랭지역에는 조선식 온돌 및 지하실을 설치하는 등 거주자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한랭지역의 각 등급의 관사 구조는 목조 단층 건물로, 지붕은 대부분은 석면 슬레이트를 이용하였으며, 외부는 방한, 방화를 고려하여 철망 피복 시멘트·모르타르로 도장하였다. 또한 벽지에 근무하는 하급 종사원에게는 9등 관사를 마련해주었다. 본국 국장 관사 : 국장 관사는 경성역 앞의 남산 기슭에 있었으며 구관과 신관으로 이루어졌다. 구관은 경부철도회사시대의 중역 사택으로 벽돌조에 일부 지하실이 있으며, 양식 응접실과 일식 다다미방이 있었는데 그 후 일부를 개조하였다. 신관은 1910년대에 신축한 것으로 안팎이 양식 벽돌조 2층 건물, 골재로서는 벽돌 그리고 목재는 재활용재를 사용하였으며, 표면 마감재는 대만 붉은 노송 자재를 이용했다. 구관과는 목조 복도로 연결되었다. 난방은 처음에는 가스난로를 사용했으나 후에 온수난방을 설치했다. 집단 관사 : 초량, 용산, 평양 및 기타 사무소 소재지 등의 주요지에는 집단적으로 관사가 설치되었으며, 그 중에서 용산은 가장 큰 관사군을 이루었다. 용산 관사 : 1906년부터 3개년 계획으로 용산역 앞 한강거리 남쪽에 3등∼8등의 6종류의 관사가 건축되고, 그 후 점차적으로 증가하여 1925년에는 774호가 되었다. 같은 해 7월의 한강 대수해로 인해 그 중 200여 호를 구용산 금정 부지로 이전, 개축하였다. 용산 관사 중 상급의 것은 1채 또는 2채, 하급의 것은 4채∼10채가 연속되게 건축하였다. 구조는 모두 목조 건물로 외벽은 방한을 고려해서 중국벽의 점토 구조, 표면은 회반죽 또는 시멘트와 모르타르로 도장하였다. 후에 1940년경부터 각 호 모두 1실을 조선 온돌로 순차적으로 개조하였다. 금정 관사 : 효창원의 이조 왕실 소유지를 양도받아 수해를 입은 용산 관사의 일부 약 200호를 이설 개축한 것으로, 1926년부터 1928년에 걸쳐서 6, 7, 8등급 관사를 개축하고, 또한 아파트식 2층 건물 2동(4호 1동, 8호 1동)을 신축했다. 개축 건물은 모두 목조 스터코 도장(소석회에 대리석 가루와 찰흙을 섞은 마감 벽 재료)과 1호 또는 2호 건물로 하고, 지붕은 시멘트 기와 또는 석면 슬레이트로 하였다. 그리고 겨울철 보온을 위해서 조선식 온돌 1실을 설치한 것을 특징으로 하며, 외관도 밝고 경쾌하여 집회소와 공동 목욕탕 및 물품 배급소와 함께 하나의 문화촌을 형성하였다. 1928년에는 용산역전 북측 부근에 사무소장 관사(4등) 2동(1동의 건축면적 220㎡)의 목조 건물을 신축하였는데, 외부는 스터코 도장 마감, 지붕 기와는 특제 이탈리아 형식을 이용하여 전체적인 분위기를 스페인식으로 하였다. 합숙소(익제숙사) : 사무소 소재지 및 다수의 젊은 종업원이 종사하는 기관구의 소재지에는 독신자 주거지로 합숙소를 설치하였는데, 방은 3∼4평에 2∼3명이 거주하는 것을 표준으로 하였다. 수용 인원이 많은 대표적인 것은 용산 익제숙사이다(익제숙사라는 명칭은 만주철도시대에 명명되었다). 용산 익제숙사 : 용산 익제숙사의 제1, 2, 3동은 임시군용철도감부에서 인천의 월미도에 설치된 목조 건물의 합동 합숙소를 그대로 이전한 것으로 방은 3평∼4평의 다다미방이고 난방설비는 고타쓰(일본식 난방기구)를 사용했으며, 이후 오랫동안 내부를 수리하면서 존속되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면서 미흡한 점이 노출되어 개축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한편, 난방설비도 극한 지역인 혜산진과 강계, 만포진 등에는 증기난방을 설비했다. 1939년 이후 종업원이 급증하면서 각지에 합숙소를 신설하였으나, 시설 표준은 대체적으로 기존 기준과 동일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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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건축 | |
건축 양식 및 표준 | 2022.10.04 |
건축 양식 및 표준 제1절 건축 양식 건축시설의 개요 원래 철도는 업무 성격상 각종 업종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지역에 따라 혹은 잦은 변경에 따라 규모도 크고 작고 다양하다. 또한 전반적으로 대부분 건축을 수반하고, 항구적 가설의 구별도 있어 건축시설의 종별, 구조도 천차만별이며 복잡하고 다양하였다. 철도 부설은 반도 전역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며, 지세상 남북 양 지역의 기후 풍토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일반 통념상 건축시설에는 방한이 필요하기 때문에 설계 시공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방한 - 냉해 - 난방 - 틈새바람까지 생각해서 그 점을 중점적으로 고려해야 했다. 그러나 남한의 일부 지역에서는 따뜻한 지방에 적합한 시설이 요구되었으므로, 이후 한·난지에 대한 시설 요구를 지역별로 규정하고 그것을 기준 내규로 하였다. 건축시설의 진행 방법은 각각의 설계에 따르는 것이 통례적이지만, 보통 중간에 위치하는 역사와 관사 등 변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반적인 건물은 설계상의 번잡함을 피하기 위해서 미리 준비한 표준 설계를 기준으로 그때의 추세와 지방 상황 등을 감안하여 실시하였다. 이들 시설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목조였으며, 주요 재료는 조선 산을 사용하였다. 또한 선로와 관련된 건축시설에는 건축 정규·차량 정규로서 한계가 규정되어 있었는데, 후년 이와 관련해서 대형 역의 경우 지붕이 높아서 차량과의 틈새에서 눈비가 들어 치고 차 위에서 물이 흘러내린다는 불평이 제기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차량의 대부분을 덮어야 했으나 공사비 문제도 있어서 결국 그 대책은 미결로 끝났다. 철도 통일 경영 이전의 시설 : 경인철도시대의 건축시설은 철도 운영에 직접 필요한 경우에만 한정하며, 건축 양식은 인천역의 중심 역사는 벽돌이었으나 대부분 목조 단층의 간소한 것으로, 지붕은 아연 도금의 파형 철판이었다. 외부는 백색 회반죽을 칠하였으나 그 후 대부분 보수 및 개축되었다. 경부철도시대의 건축도 가건물이었으며 사무실 건물의 대부분은 임시임대건물을 사용하였다. 역사는 10평(33㎡) 내외이며 역원의 숙사가 병설되어 있는 점이 특색이다. 대구·초량 등 주요지의 기관차고는 1동 1선 2량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에 지나지 않았으나, 1902년 6월 준공한 부산철도사무소는 서양식 목조 2층 기와 건평 47평(155㎡) 건축물로 당시로서는 독특한 형태였다. 군용철도 건설 또한 전시의 어수선한 시기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건축시설도 목조 단독으로 일관(一貫)하였으며, 건축반의 감독 하에 제반 재료를 지급하여 하청으로 공사를 맡긴 급조한 가건축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들은 군대식 시설 방법을 따랐기 때문에 일정한 규격으로 방한시설도 설치하였다. 철도 통일 경영 이후의 양식 : 철도 통일 이후의 건축시설은 당시의 방침 및 전통에 따라서 대부분은 간단한 목조 가건물 구조를 이용하였다. 남한지방은 대체적으로 일식의 간이 양식이 많았으며, 북선지방은 일부에 벽돌을 이용하여 어느 정도 보온을 위한 구조를 채택하였다. 한편, 구미의 건축 양식을 도입한 신의주와 부산역사의 부흥식(르네상스식), 용산역사의 고딕 양식, 조선 호텔의 북유럽 양식에 조선 취향을 가미한 양식 그리고 서양식 주택 건축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철도국장 저택 등도 이 시대에 건축되었다. 1917년 이후의 경향 : 만주철도 위탁경영 이후, 즉 다이쇼(1912∼1926) 및 쇼와시대(1926∼1989)에 들어온 이후에는 서양식 건축 또는 일식 건축을 소화, 흡수하여 조선 풍토에 적응시키는 동시에 조선 재래 건축 양식을 가미한 양식을 창조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건축사적으로 상당한 중요성을 가지는 것으로 일반 건축 사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1925년에 준공된 경성역사는 당당한 근세 부흥식으로 당시 동양 제2라고 하였다. 수원역사는 조선 색채를 잘 나타내었으며, 경주역사는 신라시대의 건축 양식을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제2절 건축 표준 건축 표준에 관해서는 경부와 군용 양 철도시대에 이미 역사 및 관사에 대해서 실시되었으며, 후에 경원·호남 양 선 건설 시에 이를 정비해서 크기와 구조를 여러 종류로 구분하고, 역사는 갑·을·병 3타입, 관사는 4등 내지 8등으로 통일하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시대의 영향과 토지 상황, 사용 재료의 변천 등에 따라서 다양하게 변모하였다. 1925년에 조선 전역에 걸쳐서 여러 노선의 건설공사가 실시된 것을 계기로 특히 건설용으로서 한난 지대별 표준을 규정하고, 1937년 전선을 난·한·엄한의 3지대별제로 각각 표준 개정에 착수하였다. 혜산, 백무, 만포, 평원선 중 특히 혹한지방의 우물 및 가건물은 동계의 어려움을 배려하여 벽돌과 콘크리트, 블록 등으로 축조하고, 창 입구도 이중창으로 방한 및 보온을 하였다. 또한 역사의 건축 표준에 대해서는 그 후 경부와 경의 복선공사에 따른 역사 개축과 건설선 및 기타 각 선 역사 개축에 대해서 1938년 4월 관계자의 협의 하에 이를 다시 고쳐 각각 새로운 표준을 정하였다. 건축공사 시방서는 1918년에 제정해서 직접 공사에 사용하고 설계 자료로 삼았으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개정이 필요하게 되어 1938년 4월에 이르러 수년에 걸쳐서 비로소 완성되었다. 그러나 중일전쟁으로 인한 경비 절약, 자재난 등으로 애써 만든 시방서도 충분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또한 다양한 건축물의 공사 종류와 명칭, 수량 및 구조 등의 취급에 대해서는 시방서와는 별개로 공사 종류 기재 예 및 공사 건명 기재 예를 제정해서 수년간에 걸쳐서 실시하였으며, 이로써 종류와 구조 등의 통일은 물론 수고를 던다는 점에서 많은 이점이 있었다. 구조 및 설비는 기존의 것은 목조와 건물 기둥이 드러난 벽이 많았고 기초도 간편하였으나, 그 후 점차 벽돌 구조에서 철근 콘크리트 구조 및 철골 구조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여관이나 병원 기타 특수한 시설에는 각종 신재료를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공장과 기관차고 등에는 철강제 용구(스틸-섀시)를 사용하고, 지붕창에는 연속 개폐식 오퍼레이터를 채용해서 채광과 환기에 유의하였으며, 증기난방과 온돌 등의 각종 장치를 설비하였고, 전기 조명 등도 점차로 개량되었다. 1936년 이래, 총독부에서 조선 전체 주요 도시에 대한 조선 시가지 계획령이 시행됨에 따라 철도 건축시설도 이에 준하여 설계 시공했으나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시설에 각종 자재를 제한하는 한편, 방공상의 필요성을 고려하여 설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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