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역사 블로그
블로그
전체 4개의 글 (현재 1 페이지 / 1 페이지)
4 | 신의주역의 변화와 발전 | 2019.09.30 |
3 | 폐역의 위기에서 문화의 공간으로 거듭나다! 경부선 황간역의 변화와 그 인문학 | 2019.09.09 |
2 | 철도를 중심으로 한 교통의 요지 대전역의 변화와 발전 | 2019.07.24 |
1 | 우리나라 철도의 효시 - 서울역 | 2019.06.26 |
국내 철도역 | |
신의주역의 변화와 발전 | 2019.09.30 |
신의주역의 변화와 발전 북한은 2019년 신년사에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의 재개를 강조한 바 있으며, 2018년 말 <로동신문> 자료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중국과의 연결 통로인 신의주의 철도역을 대대적으로 개축할 것을 언급했다. 신의주역의 역사와 발전사에 대해 살펴봤다. 북한의 중심 도시, 신의주 먼저 북한의 행정구역을 보면 평양직할시, 라선특별시, 특별구로 신의주특별행정구, 금강산 관광지구, 개선공업지구가 있으며 인구가 많은 주요 도시를 순서적으로 보면 평양, 함흥, 청진, 신의주, 원산, 남포, 사리원, 개성, 강계, 순천 등이 발달했다. 평양인구는 300만 명, 함흥과 청진이 각각 50만 명을 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볼 때 주요한 교통 인프라 건설 방향은 개성공단, 금강산, 신의주 특별행정구를 중심으로 하고 이를 연결하는 교통망이 주가 될 것이다. 이 중 신의주역은 중국과 연결하는 한반도 국경역의 하나다. 서울에서 중국으로 가는 최단 경로는 평양과 신의주를 거쳐서 압록강 철교를 지나는 길이다. 신의주는 지형적으로 중요해 역사적으로 많은 역할을 했다. 신의주의 위치는 평안북도이며 도 소재지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연결되는 도시로, 북한에서 가장 큰 국경도시다. 중국과 철교가 연결되어 평양~베이징열차가 정상적으로 운행하고 있다. 신의주 화장품공장은 북한 최대의 화장품공장이고 제지공장, 방직공장, 화학공장이 있는 경공업이 발전한 도시다. 원래 평안북도 지역은 중국과 인접한 곳으로 의주가 발달했는데 읍성, 남문, 통군정, 금강산 등 유명한 관광지가 있다. 의주는 지형상 고구려 이래로 국경을 수비하는 지역으로 성을 쌓아서 방비했다. 이것이 의주읍성이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이 통군정으로 압록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략적인 곳에 자리했다. 그러나 철도가 부설되면서 중국의 단둥 지역과 가까운 신의주 지역이 발달하게 되었다. 신의주는 현재 인구 34만 명으로 북한에서 평양, 남포, 함흥, 청진, 원산에 이어 6번째로 큰 도시이며 서울~평안~신의주~중국으로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가 되는 도시다. ▲1912년 신축된 신의주역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3층 건물이다. 신의주역의 시작 신의주역은 경의선 부설과 함께 시작되었다. 경의선은 1905년에 개통되었지만 1911년 11월 압록강 철교가 완공되고 경의선 개량 공사도 마무리되면서 만주철도 안봉선의 광궤 개축과 함께 조선~만주 간 직통열차가 운행되었다. 1913년 당시 신의주 인구는 5,827명이었다. 러시아 · 중국과 철도로 연결됨에 따라 대륙 철도가 운행되었다. 그사이에 평남선 · 호남선 · 경원선의 전 노선이 개통되면서 남북 종단 간선과 항구의 연락이 가능해졌고, 함경선 일부 노선도 개통되었다. 신의주 역사는 조선과 만주를 연결하는 데 있어, 그 중요성에 따라 1911년 10월에 신축했는데 3층의 기와 구조로 호텔을 겸업하는 설비를 신축했다. 신의주역은 종단역으로서 처음에는 임시 역사가 있었는데 압록강 가교 공사에 따라 수하물 취급소 자리로 이전했으며 1911년 10월, 현재 위치에 공사비 9만 엔(건물만)을 들여 서양식 3층 벽돌 구조, 석면 슬레이트 지붕, 연건축면적 387평(1,279㎡) 건물을 신축했다. 건축 양식은 르네상스식을 채택했으며 구조는 외부 벽돌에 내부 칸막이벽이며, 2층과 3층 바닥의 파라페트 등은 모두 목조다. 당시 건축 양식을 보면 북쪽 지방은 일부에 벽돌을 이용해 어느 정도 보온을 하는 구조를 채택했다. 한편 구미의 건축 양식을 도입한 신의주를 비롯해 르네상스의 부산 역사, 고딕 양식의 용산 역사, 북유럽 양식에 조선 취향을 가미한 조선 호텔 그리고 서양식 주택 건축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철도 국장 저택 등도 이 시대의 건축이었다. 신의주역 1층을 역사로 이용하고 2, 3층은 서양식 호텔을 설치했는데 설비 면에서는 당시 부산역에 다음가는 수준이었다. 1912년 8월에는 신의주 스테이션 호텔로 개업했다.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설비는 완벽했다. 후에 명칭을 철도 회관으로 변경하고, 1941년 4월 철도 호텔이라고 개칭했다. 개통과 함께 예전의 종단역 역사는 수하물 취급소로 이용하고, 기관차고 및 기타 관사 등은 옛 위치에 그대로 존속했다. ▲1911년에 완공된 압록강 철교 건설공사 경의선과 연결 된 다사도 철도 신의주까지의 최초의 급행열차는 1908년 4월 1일의 열차 운전 시각 개정 시 ‘급행열차취급수속’을 제정하고, 부산~신의주 간 융희호가 운행되었다. 1933년 자료에 따르면 대륙까지 달리는 국제 철도의 경의선 구간 평균속도는 53.5km/h였다. 신의주와 관련해 경의선과 연결된 노선 중 하나가 다사도(多獅島) 철도다. 다사도 철도(주)는 1935년 1월 21일 국철 경의선의 종단인 신의주와 평안북도 다사도를 오가는 구간 거리 39.3km, 궤간 1.435m의 철도 부설 면허를 얻었다. 신의주와 건너편인 만주 측 안동은 모두 압록강 유벌(流筏, 베어낸 나무를 강물로 띄워 보냄)의 집산지로, 황해로 통하는 배로 연결되는 교통편 덕에 번영해왔는데, 약 12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의 겨울 기간은 압록강의 결빙으로 경제활동이 모두 정지되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하류 30km 정도 되는 다사도 부근은 혹한일 때도 얼지 않아 이곳을 이용할 수 있다면 1년 동안 경제활동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점에 착안해 철도 부설을 하게 된 것이다. 1940년부터는 다사도의 항구 건설도 진행되었다. 이 회사는 12월 10일 같은 철도의 양시(楊市)에서 분기해 경의선 남시(南市)까지 이르는 18km 구간 지선 부설면허를 얻었다. 이것으로 다사도 철도는 경의선 양쪽으로 접속이 가능해져 경의선의 복선적인 역할도 수행하게 되었다. ▲현재 신의주 청년역 ▲2018년 11월 30일에 출발한 남북철도 현지 공동조사단이 탄 열차(© 한국철도관광공사) 북한 철도의 변화 신의주역은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후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지금은 단층의 2면 3홈으로 국제 열차의 세관검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역이다. 현재 경의선은 225km에 달하는 평양~신의주 구간을 6시간에 운행하고 있다. 향후 신의주역은 크게 발전할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에서 경의선을 통해 중국 단둥으로 갈 경우 반드시 거쳐야 하는 주요 역이다. 현재 북한의 무역 상대로 중국은 2016년에 83.7%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기 때문에 중국과의 연계를 중시하는 것은 당연한 전략이라고 하겠다. 반면 러시아는 무역 비중이 같은 해를 기준으로 1.2%에 그친다. 향후 무역 등을 고려한 국경도시가 중점적으로 개발될 것이므로 신의주역은 이를 활성화하는 교통 인프라가 갖추어질 것이다. 현재 국경도시로서 기능을 하고 있는 주요한 도시는 단둥과 연결하는 신의주, 중국 지안과 연결하는 만포, 중국의 투먼과 연결하는 남양 등이 있다. 신의주역과 단둥을 연결해 대륙으로 철도 운행이 가능하다. 단둥을 통해 베이징, 친양, 다롄, 창춘, 칭다오로 직통 운행하는 여객 운송 열차와 화물 운송 열차가 있으며, 모스크바~베이징~평양의 국제 공동 운영 열차도 운행한다. 단둥 철도는 평양까지 220km, 서울까지 420km, 부산까지 871.5km 떨어져 있으며, 중국과 유럽, 아시아 대륙 및 한반도를 연결하는 주요한 육로 통로다. |
|
첨부파일 :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
댓글 0 ▼
국내 철도역 | |
폐역의 위기에서 문화의 공간으로 거듭나다! 경부선 황간역의 변화와 그 인문학 | 2019.09.09 |
폐역의 위기에서 문화의 공간으로 거듭나다! 경부선 황간역의 변화와 그 인문학 "1905년 경부선 개통과 함께 문을 연 114년 역사의 황간역. 흑연 수송용 화물열차가 정차했던 큰 역이었지만 점차 이용객의 수가 줄어들면서 한때 패쇄 위기를 맞기도 했다. 다행히 황간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를 극복하고 현재 문화공간이자 추억의 고향역으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2대 황간역. 6.25전쟁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56년 12월 30일에 복구되었다. ▲3대 황간역. 1988년 3월 3일 모습 황간역의 114년 역사 ▲국토지리정보원 고지도에서 본 황간역.(1918년) 도로와 모서면 득수광산표시가 있다.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하옥포2길 14(마산리 42번지)에 위치한 황간역은 경부선의 중간지점으로, 서울기점 227km, 부산기점 217.4km, 해발 223m에 위치해 있다. 1905년 1월 1일 경부선 개통 당시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한 황간역은 1926년 4월 20일 역사를 확장·개량하였다. 1940년 4월 1일에는 경부선 복선 공사와 더불어 역사가 신축되었지만,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1950년 9월 28일 9·28서울수복*1) 후 가역사에서 영업을 개시한 뒤 1956년 12월 30일에 6·25전쟁으로 소실된 역사를 복구하였다. 황간역의 현재 모습은 1988년 3월 3일에 준공된 것이다. ‘황학산’의 ‘황’자와 ‘산골물’의 ‘간’을 따서 ‘황간’이라고 명명된 황간역은 일대 지역이 ‘황간금광지’로 불릴 정도로 금의 매장량이 풍부했다. 황간역에 대한 기록은 「조선철도역세일반」*2)(1914년)에 나와 있다. 황간역은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소재이며 역은 황간 군청 소재지 읍내와 10정 떨어진 곳에 있고 부근은 사방이 산으로 둘려 쌓여 농지가 적고 농산물이 많지 않으며 목탄, 흑연의 산지로 이름이 나 있다. 호수는 총 402호로 조선인이 356호, 일본인이 46호이다. 인구는 1,881명으로 조선인이 1,727명, 일본인이 154명이었다. 주변의 관공서는 헌병 파견소. 우편소(우편, 전신사무). 공립심상고등소학교. 공립 보통학교. 황간면 사무소 등이 있었다. 교통상황은 상주, 영동, 추풍령, 청산 지방에 통하는 도로가 있어도 대부분 험악하여 교통이 나쁘다. 철도이용객은 1일 평균 21명으로 주변 역으로 이동하는 사람이 많고 주로 동절기에 많았다. 황간역에서 주변 역까지의 이동을 보면 영동역에서 승차인원이 11인, 하차인원이 9인, 추풍령역에서 5인, 하차가 6인, 김천이 승차 8인, 하차가 8인으로 되어 있다. 역세권 내의 중요한 생산물을 보면 1913년 통계로 흑연 6,035톤, 보리 6,328석, 목탄 1,004톤, 콩 2,531톤, 장작 394톤, 목화 5,044관, 쌀 9,600석이었다. 통감부철도관리국(統監府鐵道管理局) 「한국철도선로안내(韓國鐵道線路案內)」(1908년)에 보면 역의 약 5리에 청산군 월명동에 광산이 있어 흑연을 생산한 한국흑연회사출장소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산의 오토미(小富万次郞) 씨가 경영 채굴권을 가진 흑연광산이 있고 5갱, 인부 60명을 사역하며 1일 최대 채굴량은 70톤으로 광산에서 정거장까지 손으로 미는 경변철도를 부설하여 운반하였다. 팔음산 광산(상주군 모서면 득수동(옥서리)에서 약 13마일 황간역까지 1913년 11월에 19.6km 거리에 궤간 640mm의 경편철도를 부설하였다.*3) 운반은 무동력의 광산토목용 소형무개화차를 이용하였다. 건설비는 10만 5천 원이었다. 판로가 구주로 이 광산은 전쟁의 영향을 받아 일시 사업 중지하였다. 황현(黃炫)의 「매천야록(梅泉野錄)」 중 융희 4년(1910년)에도 황간역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황간군에 거류하는 일본인들이 흑연을 채취하기 위하여 철도 간선을 부설하였다. 그것은 황간서면에서 상주 득수면까지 33리의 거리이다’라고 쓰여 있다. 통계로 보는 황간역 황간역의 1913년 운수성적을 보면 여객의 경우 1일 평균 승하차 인원이 67.2명이었다. 화물 취급품목과 수송량을 살펴보면 곡류의 반입은 주로 부산, 인천, 김천에서 들어오고, 식염은 인천에서, 석유·해산물·건어물·명태는 부산 등에서 들어왔다. 반출은 대구, 인천, 김천으로 과일이 운반되었는데 호두와 감이 특산물이었다. 목탄과 장작은 대구와 김천으로, 흑연은 초량으로 반출되었다. 황간역 주변에는 정거장에서 동쪽으로 10정(약 1,090m) 떨어진 곳에 시장이 있는데, 음력 2일과 7일에 오일장이 열렸다. 하루 거래량은 약 170원, 시장세로 거래량의 100분의 1을 거두고 도량형은 모두 신법에 의한 것을 사용하였다. 수륙운수의 관계를 보면 시장과 정거장 간 외에는 물자 운송에 특히 기록할 관계는 없고 정거장과 시장 간 화물운반은 지게꾼에 의했는데 지게꾼의 운임은 약 100근에 5전이었다. 1912년 황간역 주변 공업 등의 상황을 보면 정차장 주변에 기와공장이 있어 연간 65,000개의 기와를 생산하였으며 철도를 이용해 대구, 김천, 왜관, 조치원으로 수송되었다. 또한 역의 동북 5마일에는 부산흑연회사가 경영하는 흑연광산이 있었다. 생산된 흑연은 일본의 미쓰비시물산에 판매를 위탁하여 독일로 수출되었다.*4) 한편 1927년 반출화물은 콩류, 목탄, 흑연이었으며, 쌀과 흑연은 부산으로 반출되었다. 반입화물은 밤, 소금 등이었다. 인구는 증가하여 조선인이 1,625호 8,364명, 일본인이 48호 137명이었다. 주변에는 소학교, 보통학교, 금융조합, 우체국 등이 있었다. 1906년 3월 15일에 개교한 황간공립보통학교는 현재 황간초등학교의 전신이다. 이를 통해 보면 1913년에 비해 1927년에 승하차 인원은 약 3배 이상 증가하였고 반출화물, 특히 반입화물이 4배 이상 증가한 것은 황간역 주변의 인구가 증가하고 그만큼 경제활동이 활발해졌다는 증거다. 「조선풍속대계」(1932년)에도 황간의 지역적 특성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경부선은 추풍령(秋風嶺)을 넘어 충북으로 들어가 쌀의 적출이 풍부한 황간(黃澗), 영동(永同), 옥천(沃川)을 지나 대전에 이른다. 겨울에 추풍령을 북으로 넘으면 대륙적 기후가 되어 기온이 급강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영동의 이동(以東) 황간을 중심으로 하는 일대지역은 황간금광지로 불려 금의 매장량이 풍부한 지방이다.*5)" 이처럼 황간 지역은 지하자원이 풍부하였고, 교통이 발달하여 자동차로도 쉽게 이동이 가능했다. 현재 황간역에서 상주역까지 54분(43.49km), 영동역까지 18분(15.43km), 보은시외버스터미널까지 57분(49.99km), 추풍령역까지 13분(8.97km)이 각각 소요된다. <표 1> 황간역 운수성적(1913년) <표 2> 화물 취급품목과 수송량(1913년) <표 3> 황간역 운수성적(1927년) 문화 플랫폼, 황간역 해방 이후 황간 지역은 교통의 요지였지만 산업이 발달하지 못하면서 인구가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역이 위치한 황간면의 인구는 1972년 10,694명에서 1996년에 6,513명으로 감소하였고 2006년 5,052명, 2017년 4,646명으로 점점 줄어들었다(인구밀도 53명/㎢, 임야 78%). 철도이용객이 계속 줄면서 1996년에는 황간역에 대한 고민이 커져갔다. 고속도로 개통과 대체 교통수단의 발달, 지역 인구의 감소로 인해 2013년도에 이르러 황간역은 폐지 대상으로 검토되면서 존폐 위기까지 맞았다. 하지만 2013년 당시 황간역의 강병규 역장과 황간중학교 35회 동기 모임인 ‘황간마실’의 정태경 회장이 주축이 되어 고향역 지키기에 뜻을 모으고, ‘지역주민과 함께 가꾸는 아름다운 문화영토’라는 슬로건 아래 황간역을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업을 ‘문화 플랫폼 황간역’이라고 명명했다. 황간역에서는 지속적으로 음악회를 개최하고 있는데, 노래와 연주, 시낭송 등이 어우러지는 음악회를 위주로 때로는 연극, 동화구연 등 이색 무대를 연출한다. 황간역 음악회는 어린이와 학생, 주부, 이장 할아버지 등 마을 주민과 타지에서 온 연주단, 때로는 전문 음악인도 함께하는 소박하고도 따뜻한 정을 나누는 음악회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2013년 8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59회를 진행하는 동안 연인원 1천 명이 넘는 출연자가 순수 재능기부로 음악회를 이어오고 있는 것 자체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맞이방 일부를 전시공간으로 리모델링한 황간역 갤러리에서는 매달 전시회가 열리는데 이미 올해 말까지 월별 전시 예약이 다되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이곳도 주민들이 자치활동 프로그램으로 만든 생활공예품이나 그림, 서예작품 전시는 물론 전국 각지의 지명도가 높은 작가들의 작품전이나 철도문화전 등으로 연중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지금까지 48회 전시회를 열었다. 이처럼 황간역은 작은 시골역이지만 지역과 사람, 문화가 서로 만나 교류하는 문화 플랫폼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각종 언론매체에서도 황간역의 변모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황간역은 2013년도 8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TV에 50여 회, 신문과 잡지 등에 190여 회나 소개되었다. 황간역 인근에는 월류봉, 반야사, 백화산, 노근리평화공원 등 관광 명소도 많다. 이와 연계한 관광 여행 프로그램이 ‘황간마실여행’이다. 황간역과 황간마실 여행이 SNS 등 각종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지면서 기차를 이용해 황간 지역을 찾는 여행객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기차를 이용한 여행객들은 주로 도보나 30대의 노랑자전거를 이용해 지역 답사여행을 한다. 이들은 주민들이 준비한 향토 음식으로 식사를 하고 지역농산물과 특산물을 구입한다. 황간역은 지역의 문화 플랫폼이자 여행관문으로서 국내외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테마역이 되고 있다. ▲황간역의 문화 축제 =============== (주석) *1) 6 ·25전쟁 과정에서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수도 서울을 한국군과 유엔군이 같은 해 9월 28일 탈환한 일. *2) 1914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발행한 서적 *3) 선교회 「조선교통사」 1984년, P.954. 허가는 1909년 4월 10일, 개업은 1913년 11월이다. *4) 조선총독부철도국 「조선철도연선시장일반」 1912년 *5) 「조선풍속대계」 1932년 신광사 =============== (참고문헌) · 「세종실록지리지」 · 통감부 철도관리국 「한국철도노선안내」 1908년 · 조선총독부철도국 「철도역세일반」 1914년 2월 · 조선총독부철도국 「조선철도연선요람」 1927년 · 「조선풍속대계」 1932년 신광사 · 국토지리정보원 고지도 |
|
첨부파일 :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
댓글 0 ▼
국내 철도역 | |
철도를 중심으로 한 교통의 요지 대전역의 변화와 발전 | 2019.07.24 |
철도를 중심으로 한 교통의 요지 대전역의 변화와 발전 대전은 1904년 역이 건설되고,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도시가 형성되었다. 당시만 해도 대전은 한적한 농촌이었지만 대전역이 생기면서 주변에 마을이 들어서고 우체국, 학교, 시장 등 삶의 터전이 마련되었다. 1910년에는 경부선과 호남선의 분기점이 대전으로 결정되면서 역 일대가 더욱 발전하였고, 이후 대전은 우리나라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8년 대전역 개축 철도 부설로 시작된 대전의 역사 대전의 시작은 철도 부설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00년 초에는 충청도 중에서도 공주에 많은 인구가 거주하였다. 일본은 경부선을 공주로 통과시키려고 했지만 그곳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고, 철도의 부설 위치를 한국인과 일본인의 큰 갈등이 없었던 대전으로 바꾸었다. 일본이 경부선 철도를 계획할 당시 대전은 ‘아무것도 없는 넓은 밭’이라는 뜻의 ‘한밭’으로 불렸다. 그만큼 사람도 얼마 살지 않는 지역이었다. 당시의 자료를 보면 1904년경에 철도 정거장 소재지 주변에는 일본인의 가가옥(假家屋)이 1~2가구밖에 없었다.(1) 그런데 대전이 철도 부설지로 결정되면서 일본인 철도 기술자 188명이 대전에 거주하게 되었다.(2) 1908년 자료를 보면 대전에는 인구 1,400명이 거주한다고 기록되어 있다.(3) 관련 신문기사를 보면(4)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1904년 6월에는 사무실과 대합실 하나에 조그만 창고와 숙직실이 함께 붙은 태전역(대전 이전의 지명이 태전)이 세워졌고, 이 철도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일본인들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앞장세워 싼값으로 역 앞의 논판을 사들였다. 본토에서는 하급의 노동자에 불과했던 그들이 대전의 미래에 대한 꿈을 부풀리면서 하나둘 몰려들더니, 1904년 역이 세워질 때는 불과 188명에 지나지 않았던 일본인들의 수가 불과 5년 뒤인 1909년에는 역전 일대에 완전한 일본인 촌이 형성되어 그 인구는 무려 2,500명에 이르렀다.” 대전역의 개축 대전역은 원래 목조 건물의 간이역이었다.(5) 그러다 보니 1914년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늘어난 승객과 화물을 처리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기존 역의 위치였던 대동에서 1918년에 지금의 대전역이 있는 중앙동으로 옮기면서 서양 중세풍(르네상스)의 새로운 역사를 건축하게 되었다. 일본식 중세풍 건물은 외관과 내관 모두가 당시 한국의 정서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6) 건축면적은 약 373평(1,233㎡)으로 대구역과 비슷하였으며 외벽은 최초로 시멘트벽 인조석으로 마감하였다. 1920년 5월에는 대전역에 지하도를 설치하였는데 한국 내에서는 최초였다.(7) ▲1905년 초기 대전 정거장 ------------------------------ [주석] (1) 統監府鐵道管理局(1908) 『韓國鐵道線路案內』 p.4 4 (2) 田中麗水(1917) 『大田?展誌』 2000년 경인문화사, p.8 (3) 統監府鐵道管理局(1908) 『韓國鐵道線路案內』 p.45 (4) 焦土(초토) (2) 1977.07.22. 경향신문 5면 생활/문화 (5) 『사진으로 보는 대전시사』 대전광역시 (6) 『사진으로 보는 대전시사』 대전광역시 (7) 『조선교통사2』 철도문화재단, p.176 ------------------------------ 대전역 주변의 발전 대전 인구가 증가하면서 주변도 발전하였다. 경전선 송정리∼마산 구간, 장항선 천안∼군산 구간이 개통되면서 대전과 연계한 교통량도 증가하였다. 쌀은 군산 방면에서, 건축 자재는 안동, 신의주, 승호리 방면에서, 석탄 등은 만주 등지에서 운반되어 왔다. 대전역 구내에는 운수사무소를 비롯하여 차량, 보선, 통신, 열차, 검수구가 있었다. 구내에는 식당 등이 완비되었다. 대전역 동쪽 지역인 소제동 주변은 대전이 전통 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변모해온 역사적 과정을 증명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남아 있다. 1907년에는 솔랑산에 태신궁이라는 일본 신사(神社)가 세워졌고, 1920년대부터는 소제호 주변에 일본인 관리들을 위해 지은 관사로 촌이 형성되었다. 철도관사촌은 철도가 개통되고 수송 및 관리인원이 증가하면서 점차 확대되었다. 1927년에 소제호를 매립하면서 주변의 풍광이 이전과는 크게 다른 모습으로 변해갔다. 대전역 동쪽의 소제동과 삼성동 일부에 걸쳐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지어진 40여 채의 철도관사가 밀집되면서 하나의 마을을 형성한 것이다. 당시에 지어진 관사촌은 현재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관사촌으로 전형적인 근대 관사 건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매우 큰 규모의 관사촌이며 내부는 많은 부분이 변형되었으나, 외형은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 있다. 대전역이 건설되면서 역 주변에는 인구가 집중되었다. 1926년 당시 대전에 한국인은 1,536호에 8,314명이 거주했으며, 일본인은 1,574호에 6,414명, 다른 외국인은 35호에 202명이 거주하여 합계 3,145호에 인구 1만 4,930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대전역 화물의 수와 승객도 증가하였다. 1926년 자료를 보면 대전역 발송화물은 2만 9,439톤, 도착화물은 8만 7,775톤이었으며, 주요한 처리화물은 쌀, 콩, 목재, 석탄, 가죽 등이었다. 여객의 수도 증가하였는데, 승차인원은 24만 1,225명, 하차인원은 24만 1,792명이었다. 화물수입은 11만 9,933엔, 여객수입은 35만 0,457엔이었다. 공공시설로는 관청, 면사무소, 학교조합, 법원지청, 보병 80연대 3대대, 경찰서, 형무소, 헌병대대, 전매출장소, 우편국, 곡물검사소, 중학교, 고등학교, 소학교, 보통학교 등이 있었다. 관광지는 소제공원, 유성온천, 계룡산 등이 유명했는데 소제공원은 근처에 대전 신사가 있었으며, 300여 년 전에 우암 송시열 선생의 서당이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1919년 대전역 전경 ▲1924년 대전역 주변 동서축으로 발전한 대전 1914년 호남선의 개통은 대전의 도시 발전을 남북축에서 동서축으로 바꾸어 놓았다. 대전역의 발전 축이 서쪽으로 확산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충청남도 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한 것이었다. 도청 이전 당시의 대전은 공주 지역보다 인구나 도시 기반 시설 측면에서 불충분하였으나, 한반도를 엑스(X)자형의 종관 철도망으로 연결하면서 철도가 통과하는 지점인 대전에 도청 소재지를 이전시킨 것이다. 충청남도 도청의 이전으로 대전은 크게 발전하였는데 1년 사이에 인구가 45%나 증가하였다. 행정적으로는 1914년 대전군에서 1917년 대전면과 1931년에 대전읍을 거쳐 1935년에는 대전부로 승격되었다. 그 후 대전역은 1950년 6·25전쟁 때 폭격을 받아 파괴되었으나 1958년에 다시 신축되었고 고속철도 개통과 함께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표 1] 대전역의 변화 [표 2] 근대 대전의 변화 ▲1958년 대전역 신축 ▲2018년 최근 대전역 모습 정리하며 철도가 부설되고 철도역이 들어서면서 대전도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대전정거장 주변인 원동과 인동이 발달하였지만 충남도청이 대전에 입지하면서 발전축이 동서로 바뀌어 현재 대전 시가지의 골격을 형성하였다. 해방 이후 대전의 큰 변화는 1974년 대전연구단지의 개설과 1990년대 둔산 개발, 1997년 정부2청사 이전, 2004년 경부고속철도 개통 등이며 그 발전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대전은 우리나라의 중심부에 위치하는 곳으로, 철도가 부설되면서 변화하고 발전했다. 향후 대전은 교통의 편리성을 살리면서 과학 도시로 자리매김하는 동시에 4차 산업을 기반으로 국제 도시로의 성장을 도모한다면 지금보다 더 높은 위상을 지닌 도시로 성장해 갈 것이다. ==================== [참고문헌] 이용상 외, 『한국철도의 역사와 발전3』 2015년 BG북갤러리 統監府鐵道管理局(1908) 『韓國鐵道線路案內』 田中麗水(1917) 『大田?展誌』 2000년 경인문화사 조선총독부철도국 『조선 철도연선요람』 1927년 『조선풍속대계』 1932년 신광사 『조선도읍대관』 1937년 민중시론사 일본선교회 『조선교통사』 1986년 삼신사 홍이표, 홍승표 『대전제일교회 100년사』 2008년 |
|
첨부파일 :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
댓글 0 ▼
국내 철도역 | ||||||||||||||||||||||||||||||||||||||||||||||||||||||||||||||||||||||||||||
우리나라 철도의 효시 - 서울역 | 2019.06.26 | |||||||||||||||||||||||||||||||||||||||||||||||||||||||||||||||||||||||||||
우리나라 철도의 효시 - 서울역 ▲1925년 지어진 구 역사 1900년 남대문역으로 영업을 시작한 서울역 서울역 역사는 경인철도로부터 시작되었다. 미국인 모스에게 경인선 부설권을 넘겨받은 경인철도인수조합은 1899년 4월 4개 공구로 쪼개 공사를 시작했다. 인천~노량진 구간을 우선 완공해 1899년 9월 18일에 영업을 시작했고, 한강철교를 준공한 1900년 7월 8일 남대문역(현재 서울역)에서 개통식을 가졌다. 경인선이 개통되자 서울부터 인천까지의 12시간 걸리던 것이 1시간대로 단축되었다. 가히 교통 혁명이었다. 경인철도의 역은 초기에는 서대문역(경성역), 남대문역, 용산역, 노량진역, 영등포역, 오류동역, 소사역, 부평역, 우각동역, 유현(축현)역, 인천역 총 11개였다. 서대문역의 경우는 1919년 폐역이 되었지만 그 역사를 보면 매우 흥미롭다. 경인선이 개통된 후 경성역으로 1900년 7월 18일 역사 업무가 시작되었으며 1905년 1월 1일부터는 경부선의 종착역이 되었다. 그해 3월 27일 경성역에서 서대문역으로 개명되었고 현 서울역은 남대문역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따라서 1905년 경성역이 서대문역이 된 후 남대문역이 경성역이 된 1923년까지 경성역이라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1919년 3월 말 서대문역을 폐지하고 남대문역을 경부선의 기점으로 삼았다. 또한 경의본선의 일부를 개량해 경성 서부의 아현리터널 등을 준공하고 1920년 11월 수색~남대문 구간을 직통으로 연결해 남대문역을 경의선의 기점으로 하면서 서울역은 우리나라 간선의 기점역으로 자리 잡았다. 1922년 7월경부터 경성역(구 남대문역) 개축에 착수해 1925년 10월 15일 신역에서 영업을 개시했다. 철도역은 건축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경성역(서울역)의 경우는 르네상스식 혹은 절충식이라 불리며 새로운 건축 양식으로 소개되었다. 비록 일본인이 지은 건축물이지만 우리나라의 건축 양식에 영향을 미쳤다. 건축가는 쓰카모토 야스시였고 시공은 시미즈건설, 건립 주체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였다. ▲1924년 경성역 공사 현장 ▲1976년 서울역 모습 [근대 서울역과 연계 철도교통] 서울 동쪽 . 전차 : 동대문역 . 지역 간 철도 : 경춘선(성동역), 경성궤도(동대문) 서울 서쪽 . 전차 : 서대문역 . 지역 간 철도 : 경인선(서대문역), 경부선(서대문역) 서울 북쪽 . 전차 : 용산역 . 지역 간 철도 : 경의선, 경원선 국제 여객수송 기능을 갖춘 서울역 서울역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나라 철도의 효시였다. 새 역사는 승강기, 증기 난방 같은 근대적 설비를 완비했으며, 기능적으로도 당시로서는 신식으로 간판 역에 걸맞은 당당한 위용을 갖추었다. 서울역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 열차도 수시로 왕래해 국제 여객수송에도 기여햇다. 1942년 10월 1일 현재 조선ㆍ만주ㆍ중국 직통여객열차의 1일 운전 횟수를 보면 부산~베이징 구간 2왕복, 부산~하얼빈 구간 1왕복, 부산~신경 구간 1왕복, 부산~봉천 구간 1왕복, 서울~목단강 구간 2왕복을 했다. 개업 후 얼마 동안은 여객수도 별로 많지 않았기 때문에 역구내에 여객유도장치를 설치할 필요성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 후 매년 증가하는 여객을 질서 있게 유도하기 위해 이 장치의 필요성이 점차 높아졌다. 1925년 7월 조선철도에서는 처음으로 서울역 대합실 및 여객용 홈에 확성장치를 설비해 여객의 정리 유도용으로 사용한 결과 여객으로부터도 호평을 얻어 양호한 실적을 올렸기 때문에 이후 급속하게 주요 역 구내에 설치되었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에는 등화관제 실시 시 여객유도와 더불어 관제하의 역 구내 입환 작업의 능률 저하 방지라는 새로운 목적을 위해 여객 역 구내뿐 아니라 조차장 구내에도 각 장소에 설치되었다. 설치를 시작한지 불과 십수 년 후인 1939년도 말에는 설비수가 53대가 되고 확성기 수도 200대를 넘었다. 역 구내 조명은 1932년에 서울역 구내에 남북으로 30m 철탑 2기를 건설해 일광등 각 5등을 설비했으며 동시에 용산역 구내에도 같은 철탑 1기를 건설해 일광등 5등을 시설했다. 우리나라 교통 역사에 크게 기여한 철도 서울역의 경우 지역 간 철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도시 교통사에도 크게 기여했다. 1899년 개통된 전차는 서대문역 인근 서대문에서 청량리 간 운행으로 대중교통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계층을 초월한 시민들의 운송기관으로 시민들의 필요에 의해 노선 연장과 복선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전차 수도 증가해 서울의 대중교통수단으로서 그 위치를 확고히 했다. 노선의 신설은 성곽의 파괴를 유도했고 성 밖까지 연결되는 전차 노선은 서울의 공간구조를 변화시켰다. 시내 대중교통 수단으로 시민들의 환영을 받아 노선을 증설해야 했던 전차는 조선 시대 500여 년 동안 지속되어 오던 서울의 모습을 크게 변모시켰으며 전차 노선의 부설은 성문 개폐 및 인정과 파루까지도 폐지하게 했다. 남대문에서 구용산, 서대문에서 마포까지의 전차노선의 연장은 새로운 주거지 및 시가지 확장을 가져왔고 이는 서울의 수평적 공간 확장에 박차를 가하게 만들었다. 또한 서울이 확대되면서 서울역은 광역 교통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 1929년 이후에는 용산~서강~당인리 간 및 서강~신촌 간 용산선에 열차 운전이 시작되었다. 또한 1940년도에는 용산~서강 간(4.3km) 및 서강~성산천신호소(수색조차장 내) 간 복선과 서강~신촌 간(1.6km) 선로 개량공사에 착수했다. 이에 따라 직통 화물열차는 경부선 용산역에서 경성역을 통과하지 않고 직접 경의선 수색조차장으로 직결되는 한편 용산역부터는 서강~당인리~신촌 또는 서강~신촌을 거쳐 서울로 통하도록 도시 환상선을 형성하는 열차 운전이 개시되어 도시 주변 교통은 한층 편리해졌다. 아울러 서울역을 기점으로 경의선, 경부선이 통과했고, 이를 통해 국제 열차가 운행되었으며 경춘선과 경성궤도 등 수도권의 거점 교통역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근대 서울역과 연계 철도교통]을 보면 경춘선, 경성궤도 등도 서울역(전차역명은 서울역 앞) 전차로 연계되어 이동 공간을 확대시켰다. 서울역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것은 2004년 고속철도의 개통이었다. 서울역의 고속철도 이용객 수는 2005년 1,200만 명에서 2017년 2배인 2,400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이제 서울역은 고속철도의 거점역으로 중심에 있다. 1일 승하차인원도 2018년 1월말 기준 6만8,115명으로 가장 많은 여객이 이용하고 있다. 이제 서울역은 수도권고속철도를 통해 더욱 발전할 것이다. GTX 노선 중 가장 빠르게 진행되는 A노선은 2023년 말에 개통될 예정으로 지하 50m 깊이에서 최고 속도 시속 200km로 운행하므로 완공 시 일산?서울역 14분, 동탄?삼성 20분에 돌파하는 등 우리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을 것이다. 그동안 서울역은 우리나라 철도교통의 거점역으로 발전을 거듭해왔다. 서울역은 지리적 위치와 경제적 위상은 물론 향후 한반도 철도망 계획에서도 그 중요성이 더욱 확대ㆍ강화될 것이다. ▲ 현재 서울역 맞이방 전경
* KTX 이용인원 : 역별 KTX 승차인원 + 역별 KTX 강차인원 (역 기준 / 일반열차 제외)
|
||||||||||||||||||||||||||||||||||||||||||||||||||||||||||||||||||||||||||||
첨부파일 :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
댓글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