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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영업 | |
영업 창고·여관 및 기타 부대 영업 | 2023.05.08 |
영업 창고·여관 및 기타 부대 영업 운수 영업에 부수하여 경영한 것에 창고·여관·식당차 및 구내식당 등이 있으며, 모두 산업 보호·화주 및 여객의 편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업 창고 기존에 조선에서는 창고 영업이 매우 유치하였으며 한 두곳의 지방을 제외하면 완비된 창고가 없었기 때문에 농업 및 상거래가 발전하지 못하고 매우 불편하였다. 그러나 점차로 일반 화주 및 지방 상인 등의 창고 이용이 증가하였기 때문에, 당 철도국은 업무의 발전 조성과 철도 화물의 수용·수송 조절 등을 목적으로 1913년 6월부터 국영의 영업 창고를 설치하고, 경부선에 경산·대구·왜관·김천·대전·조치원·천안·오산, 경의선에 개성, 경원선에 연천·철원의 총 13역을 지정하고 동년 7월 1일부터 영업을 개시하였다. 이후 신선 연장 및 연선에서의 화물 집산 상황에 따라서 중요한 역을 선정해서 창고 시설이 점차로 증가하였다. 업무의 범위 : 주요 업무는 보통 화물 보관인데, 철도 운송에 관련된 화물에는 발송보관 및 도착 보관의 편법을 마련했기 때문에, 화주는 직접 보관해야 하는 불편함에서 해방되고 또한 창고 증권 발행을 청구하여 쉽게 금융을 받을 수 있었다. 한편 철도는 이로서 운송해야할 화물의 수량을 예지하고 발송 보관에 대해서는 특별히 창고료를 징수하지 않는 등 화주·철도 모두 많은 혜택을 받았다. 또한 보관 방법은 창고 내 보관을 원칙으로 하며, 일부 야적 보관 방법도 강구하였다. 영업 성적 : 초년도의 기탁 화물 취급 건수인 1,210건에 대해서 창고 증권을 발행한 것은 807통이었으며, 그 중 은행으로부터 금융을 받은 것은 약70%를 차지하였다. 기탁 화물의 종류는 곡류, 밧줄, 가마니, 풀, 어구 등을 중심으로 총 7,639톤으로 1일 평균 재고는 1,617톤에 이르고 수입은 창고료와 잡수입을 합쳐서 4,709엔으로 1일 1톤 평균창고료는 1전 1리 5모에 해당하였다. 그 후의 영업 성적은 대체적으로 양호하였으나, 1920년 이후에는 선박 공급 과잉에 의해서 해운에 의한 수송 화물의 증가와 민영 창고가 점차 발달하였기 때문에 철도 당국은 오직 설비와 업무를 정리 긴축하는 방침으로 수년이 경과하였다. 위탁경영 및 직영 부활 : 마침 1930년 6월 조선 운송회사가 지정 운송인으로 정해진 것을 계기로 당국은 동년 9월 창고 영업을 폐지하고 동사에 위탁경영시키고, 당국으로부터 대여받은 창고에 대해서는 사용료를 징수하기로 하였다. 당시의 위탁역 및 대여 창고는 당국의 운수 영업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서 52역, 창고 81동(면적 2,7039km)이었다. 그 후 1940년 7월, 북선선의 일부 환원에 의해서 청진역에서는 부두 및 창고 영업을 개시하게 되고, 동시에 ‘조선국유철도부두영업규칙및창고영업규칙’이 제정되고 1943년 6월 청진항역 전부 및 청진역의 일부를 합병해서 청진 부두로 개칭하고 항만의 종합 운영과 부두의 정비 향상을 기하게 되었다. 기타 역에서는 여전히 창고 영업은 위탁경영을 속행하였다. 여관·식당차 및 구내 영업 1911년 압록강 교량 준공과 함께 조선·만주 연락이 완성된 이후, 조선철도는 아시아·유럽교통로의 최첩로로서 내왕하는 사람들이 점차로 증가하게 되었다. 원래 교통업과 여관은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나, 조선에는 외국인 숙박을 위한 양식 설비를 갖춘 여관은 드물었으며 여행자의 불편은 물론 철도 경영상에서도 아쉬운 점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철도가 직접 이를 경영하기로 하고 1912년 부산 및 신의주에 호텔을 개설한 이후 순차적으로 호텔 영업을 개시하였다. 부산 및 신의주 철도 호텔 : 1912년 부산 및 신의주 양 역 지상에 스테이션 호텔을 세우고(후에 각각 철도 호텔이라고 개칭), 전자는 7월 15일부터, 후자는 8월15일부터 영업을 개시하였다. 조선 호텔 : 1914년에 84만 엔의 경비를 투자해서 경성에 대규모 양식 여관인 ‘경성조선 호텔’(후에 조선 호텔로 개칭)을 건설하고 동년 10월 10일부터 영업을 개시하였는데 단순히 숙박 객 뿐만 아니라 집회, 향연 등 이용이 증가하였다. 외금강 및 내금강 산장 : 금강산의 명승지를 탐방하는 방문객이 매년 증가하는 추세였기 때문에, 관광객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 1915년 외금강 산록에 온정리 호텔(후에 외금강 산장으로 개칭)을 건설하고, 동년 8월 10일부터 조선 호텔 분관으로 개업하였다. 이어서 1932년 내금강 산록에 장안사 호텔(후에 내금강 산장으로 개칭)을 건설하고, 동년7월부터 개업하고 1938년에는 신관 개축을 완성하고 매년 5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만 개관하였는데 1944년부터는 시국으로 인해서 양 산장 모두 영업을 중지하였다. 평양 철도 호텔 : 1922년 평양부내의 야나기야 여관을 매수하고 양식 본관을 신축해서 일식 및 양식의 야나기야 여관으로 운영하였으나, 1925년 4월 철도국 직영으로 하고 동년 8월 평양 철도 호텔로 개칭하였다. 식당차 : 식당차 영업은 1913년 4월부터 경부선 제1·2·5·6열차 및 경의선 제1·2열차에 처음으로 영업을 개시하고 점차로 그 범위를 확대하여 1925년도 이후에는 만철로부터 안봉선 영업을 위탁받고(1935년 3월 위탁 해제), 1928년 9월 함경선 전선이 개통되면서 경성·상삼봉 사이에, 그 후 만철 북선선 주요 열차에도 식당차를 연결하였다. 구내 식당 : 1925년 이후 경성역 지상 및 부산부 공회당 내에서 식당 영업을 직영하고, 또한 식당차 이용객이 격증하면서 재료 보급 장소가 필요해졌기 때문에 기존에 민영이었던 대전역 지상 식당을 직영으로 하여 1940년 4월부터 영업을 개시하였다. 위탁경영 : 직영으로 운영하던 호텔·식당차·구내식당은 경비 절감 및 기타 이유에 의하여 1932년 4월 1일부터 그 경영을 조선철도 호텔 경영회사에 위탁하였는데, 만주국이 발전하면서 일본·조선·만주 간의 교통량이 급격하게 팽창하였으며 주변 환경이 직영을 허용하는 정세였기 때문에 4월 1일부터 당국으로 환원되어 다시 직영화되었으며, 차내 판매업은 민간업자에게 위임하였다. 영업 성적 : 여관·식당차 및 구내식당 영업의 업적은 한때 감소되었지만, 점차로 여객으로부터 좋은 평을 받아 대체적으로 양호하게 발달하였다. 1933년도 이후의 영업 성적은 다음 페이지와 같다. [여관, 구내식당 및 열차 식당 영업 업적표(△는 감소를 표시)] (비고) 1. 1934년도 열차 식당 수입의 증수율이 전년도에 비하여 비교적 낮은 것은 차내 판매 직영을 폐지했기 때문이다. 2. 1937년도 열차 식당의 수입이 비교적 적은 것은 특수 수송에 따른 여객열차 운전 제한 때문이다. 3. 1941년도 성적이 전년도에 비하여 전반적으로 감소한 것은 7월말부터 9월 초순에 걸친 시국 수송에 따른 여객열차의 운전 제한 및 전면적 식당차 연결정지 때문이다. 4. 1944년도 상반기에 숙박, 식사객수 모두 감소한 것은 내외 금강산의 영업 중지 및 여객열차 축소 및 식료품 입수난에 따른 제한 등에 기인하는 것으로, 고객수 감소에 반하여 수입이 증가한 것은 4월 1일부터 실시된 요금 개정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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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영업 | |
국영 자동차 운수 사업 | 2023.05.02 |
국영 자동차 운수 사업 개요 일본에서의 자동차 운수 사업은 자동차 공업의 발달과 도로 개수에 의해서 가속도로 진보하였으나, 조선에서도 자동차 운수 사업의 노선 연장은 1938년 말에 이미 49,000km를 돌파하고 철도와 함께 조선 반도 교통 기관으로 점차로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였다. 조선 반도 교통 노선 정비를 위해서는 자동차 상호간은 물론 철도와 자동차와의 충분한 연락 통제를 도모하고, 각각 견실한 발전을 도모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민간 자동차 운수 사업이 반드시 이 목적에 합치되는 것은 아니며, 국가 교통망 완성 상 필요한 노선 국경 기타 국방 경비상 필요한 노선 또는 영업 성적을 도외시해도 경비를 필요로 하는 중요 노선, 국유철도 수익 옹호상의 노선 등은 국가에서 경영하여 철도와 자동차와의 연대를 도모하고, 국가 교통망을 강화하고 지방 개발에 공헌하는 동시에 철도 자체의 기능 증진에 노력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에서의 자동차 운수 사업의 국영화에 대해서는 이미 다이쇼 시대에 상당히 연구되었으며, 1927년 이후 수차례에 걸쳐서 구체적인 계획과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실현에는 이르지 못했다. 철도국에서는 만철 위탁경영시대인 1918년 장안사 호텔이 개설되면서 금강산 관광객 유치를 위한 철원 내금강간에 처음으로 자동차 영업을 개시하고, 그 후 함경선의 일부 미개통 구간 내 여객의 연락 수송에도 잠정적으로 자동차 영업을 개시하였으나 철도의 연장 개통과 함께 그 영업을 폐지하였다. 1936년 3월 관동대지진철도회사의 철도 매수 시, 그 부대사업이었던 광려선 광주-여수 구간 외에 4선 및 화물선(총연장 300km)의 자동차 운수 사업을 계승하여 경영하고, 동년 칙령 제14호에 의해서 철도국 과제 제1조제1항이 ‘국유철도 및 이에 관련된 국영 자동차 및 이상의 부대 업무에 관련된 업무’로 개정되어서 기본 체제가 확립되고, 이에 조선 반도 최초의 국영 자동차 운수 사업을 경영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다음해 인 1937년 12월부터는 북선에서 회웅선 회령-웅기읍 구간(97km)의 자동차 노선도 운영하게 되었다. 광려선 남조선철도회사가 매수한 자동차 노선 연장은 다음과 같다. [여객선(총 229km)] 여수-광주 구간(본선) 143km 순천읍-곡천 구간(곡순선) 51km 귀엄교-동복 구간(동복선) 8km 화순읍-화순 구간(화순선) 3km 보성-수문포 구간(수문선) 24km [화물선(71km)] 화순-귀엄교 구간 ×11km 귀엄교-동복 구간 × 8km 화순읍-화순 구간 × 3km 보성-전남 장흥 구간(장흥선) 25km 배산-장평 구간 (장흥선) 4km 보성-복내 구간 (복내선) 20km 합계 연장 300km 항장 길이(여객, 화물 중복 노선 × 22km ) 278km [지도] 광려선 노선도 ======== 철도 미개통선 -------- 자동차 노선 관리 : 업무의 직접 집행 기관은 광주 자동차구로, 그 담당 구역내의 정류소·하물 취급소를 그 관하에 두고 처음에는 대전 철도사무소의 소관이었으나, 1936년 11월 화순철도사무소 소관으로 이행하고 사무 총괄은 본국 영업과 서무계에서 처리되었다. 자동차구 종사원은 남조선철도회사의 인계자 외에 새로 구장·조역·차장을 임명하고 또한 국영에 따른 사무 증가에 대응하여 사무계·기공·차장 등을 증설하고 교양 및 감독상의 관계에서 종사원 특히 승무원의 중앙 집중을 도모하여 기존의 여수·낙수·동복의 근무자를 광주 및 순천으로 변경하였다. 이렇게 1938년도 말의 자동차구 인원은 구장1명, 조역3명, 차장13명, 운전수20명, 기술계(운전수 업무)2명, 기공수4명, 기공 조수9명, 자동차 차수4명, 사무계 8명의 총 64명이었다. 운전 : 매수 당초에는 민영 시대의 운행 시각을 답습하였으나 실시에 상당한 지장이 있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개정하고, 지방 정세에 대응하여 시각과 회수를 정하고 철도와의 연결을 위해서 노력하여 정확한 운행 시간과 완전한 운전을 기하였기 때문에 민중의 신뢰가 증가하고 이용도 증대하였다. 당초의 운행 회수는 여객편 1일 1왕복 및 10왕복, 화물편 1왕복이었으나, 그 후 교통량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운행 회수를 증감하여 1938년 8월부터 철도와 병행하는 구간에는 운전을 정지하였다. 또한 중일전쟁 하에 가솔린 소비 규제를 실시하고, 다음해인 1939년 5월 이후에는 땔감, 목탄, 아세틸린 등의 대용 연료로 교체하였다. 영업 : 국영 개시 시에 새로 자동차선 화물, 수화물 운송 규칙을 제정하고, 여객의 취급은 철도 여객 규칙을 일부 개정하였으나 이들 규정은 모두 최대한 철도 취급에 준거하고 철도와 연결 운송을 조장하는 형태가 되었다. 운임은 철도와 자동차선과의 병산 주의로 하고, 여객운임률은 1km당 50km 이하는 3전, 50km이상은 2전 5리, 100km 이상은 2전으로 하여 거리 체감법으로 하였으나, 1942년 2월 1일부터 1km 4전의 2할인 및 운임의 단수 계산법은 철도와 동일하게 개정하였다. 화물운임률은 개통 당시에는 구간의 특정 운임률을 적용하였으나, 1938년 2월 철도 운임률 개정과 동시에 철도의 등급표 및 운임률표에 의하여 영업 연장 길이 3배의 운임 연장길이를 산출하고 1942년 5월 1일부터 영업거리의 7배로 산출하도록 개정하였다. 수화물운임률은 운임 계산 길이에 따라서 철도 운임률로서 산출하고, 이에 부수하는 소구급 화물의 취급은 1942년 5월 1일부터 폐지하기로 개정하였다. 당시 취급한 것은 계원 배치 취급소의 신설, 발송 차급 취급을 비롯하여 승강장 신설 및 업무 위탁 정류소 또는 하물 취급소에서의 철도와의 연대 취급 개시, 자동차에 의한 역의 화물 집화 및 배달, 택배 수하물 집화 및 배달 취급 등을 개시하였다. 또한 1938년 6월부터 지방의 요구와 취급수의 증가에 의해서 광본 기선, 조선 기선 사이에 택급·소구급 화물 취급의 연대 운수를 개시하는 등 매년 영업 성적은 양호해졌다. 보유 자동차 : 인계 당시에는 여객차 15량, 화물차 9량이었으나, 순차적으로 폐차하여 그 때마다 신조차를 배치했다. 회웅선 회령-웅기 구간에는 만철 위탁 중인 철도의 일부로서 회령에서 두만강변을 따라서 상삼봉-남양을 거쳐서 웅기항에 이르는 북선선은 있지만, 그 연장은 220km정도이므로 회령-웅기읍을 직결하는 연장 97km의 도로를 이용해서 자동차 노선으로 단락하고, 아울러 연선지역 개발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1937년 12월 1일, 당국 경영의 자동차 운수 사업 노선으로 설정하고 회웅선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동일부로 철도와 마찬가지로 만철에 위탁하였다. 그 후 1938년 3월 도로 개수와 함께 노선의 일부를 변경해서 약 3역분을 연장, 단축하여 총 영업거리는 74km가 되었다. 이어서 동년 7월 1일, 북선선 중 상삼봉 이남의 함경선 위탁을 해제하고, 본 노선도 직영으로 환원되었다. 관리 : 업무의 집행 기관으로 회령 자동차구를 설정하고, 성진 철도 사업소의 소관으로 하였다. 자동차구의 종사원은 만철의 인계자 외에 새로 구장(겸임) 1명, 조역 2명, 사무계 5명, 운전수9명, 차장4명, 기공수4명, 자동차 차수1명의 총 26명이었다. 운전 : 만철 위탁경영 당시는 1일 1왕복 운행으로 화물편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지만, 국영과 동시에 여객편은 1일 2왕복으로 하고 화물편은 필요에 따라서 임시편을 운전하기로 하고 월간 3왕복의 정기편을 운전하기로 하였다. 그 후 수송력이 증가하면서 여객 화물의 움직임은 점차 활황이 되고, 환원 직후 1개월의 실적은 양호하여 장래가 기대되는 상황이었다. 영업 : 여객, 화물의 운임 계산 방법은 광려선과 마찬가지로 원거리 체감법으로, 여객운임은 1km당 30km이하는 4전, 30km이상은 3전 5리, 60km이상은 3전으로 정하였으나, 1942년 2월 1일부터 광려선과 마찬가지로 1km당 4전 2할인하고 운임의 단수계산법은 철도와 동일하게 개정하였다. 화물운임률은 영업거리의 6배의 운임 계산 길이를 제정하여 운임을 산출하였는데, 동년5월 1일부터 광려선과 마찬가지로 영업거리의 7배로 하였다. 수화물운임률 또한 광려선과 마찬가지로 실시하였다. 보유 자동차 : 여객차는 16인승 ‘이스즈’형 3량, 화물차는 3톤적 ‘이스즈’형 9량이었으나, 그 후 광려선의 화물 증가가 현저하였기 때문에 화물차 4량을 동선으로 이동해서 5량으로 배치하였다. 자동차 교통사업의 통합 1943년 말 총독부에서는 조선 내에 자동차 교통 사업의 전면적 정비 확충을 도모하기 위해서 조선 자동차 교통 사업 정비 요강을 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음해 1944년 1월 이후 여객 및 화물 자동차 통합에 착수하고 화물 자동차는 조선 전체 일사제로, 또한 여객 자동차에 있어서는 1도 1사제로 각각 정비 통합을 추진하고, 국영자동차 운수 사업도 동1944년 3월 31일로서 직영을 폐지하고 각각 통합 회사로 이관되었다. 자동차 운수 실적 운수 실적은 다음 페이지의 표와 같다. 1936년도는 광려선의 직영 제1회째 1941년도는 광려선 및 회웅선의 합계로 광려선에는 일부 영업 중지선이 있었다. 1943년도는 사업 폐지 직전의 최종회 [자동차 운수 성적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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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영업 | |
부두 경영 | 2023.04.24 |
부두 경영 개요 해상 육로 수송의 일관적 수송력 강화의 견지에서 해상 육상 접합 지점인 부두의 업무는 단순히 항만 시설뿐만 아니라, 육상 수송 부문 외에 해사 행정 및 세관 행정을 포함한 광의적 의미를 가진다. 특히 조선에서의 항만은 그 중 중계항적 성격을 고려하여 1936년 여수항을, 1940년에는 청진 부두를 경영하였다. 1944년 교통국 기구 개정과 함께 부두국을 새로 설치하고 기존의 수송 부문에 추가하여 부두 관세 행정의 성격을 명확히 하여 부두라는 형태가 부두와 부두국의 두 가지로 구분되어서 탄생했다. 즉, 기존의 관념에서 수송과 세관은 전혀 다른 성격으로 고려하였는데, 교통국이 새로 발족할 때 양자를 합하여 종합 수송력의 강화를 단행하였다. 여수 부두 : 본 부두는 관동대지진철도(주)의 부두를, 1936년 동 철도 매수와 함께 철도국에서 관리하게 되었다. 당국은 부두 사용 규칙에 따라서 운영하고, 부두 작업에 대해서는 작업인지정제(조선 해륙 운수(주)에 한하여 인정하였다)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주 조선 내륙 운수(주)는 1943년 12월 조선 운송회사를 개칭한 것. 청진 부두 : 1933년 칙령 제258호에 의해서 북선 지대의 철도를 만철의 위탁경영으로 하고, 아울러 청진· 웅기· 나진의 제 항구도 만철에 경영시켰다. 그 후 북선 및 동북 만주 지방의 정세 변화에 따라서 1940년 7월 청진항 및 청진· 상삼봉 간의 환원 시에 청진항은 당국의 경영으로 새로운 정세의 요청에 따라서 철도와의 종합 운영과 부두를 정비하였다. 그 경영 기구는 당초 청진항역에 포함되었는데, 1943년 6월 1일부터 청진항역 전부 및 청진역의 일부를 함께 청진 부두라고 개칭했다. 부두 영업 과목 및 성적은 다음 표와 같다. [부두성적표] 영업 과목 1. 선박의 강취 2. 화물의 선내 작업 3. 화물의 육양 및 선적 4. 창고 영업 5. 기타 부대 사업 교통국 신체제에 의한 부두 행정 1943년 12월 1일 교통국의 새로운 발족과 함께 해·육·공의 일관적 수송 강화 태세하에 기존의 철도 수송에 새로 해사 행정, 관세 행정이 추가되고 부두의 성격이 명확해져 기구가 개정되었다. 기존의 부두는 수송 부문만 이루어졌는데 부두 관세 행정이 새로 부두 안에 추가되고 업무상 부두와 부두국의 두 가지로 구분되어 탄생한 것이다. 세관의 소재지였던 부산, 인천, 신의주, 청진에 부두국이 설치되었는데, 부산, 청진부두국에는 각각 철도 사업소에서 철도 수송 부문을 옮긴 것으로 수송, 해사, 관세, 행정을 포함한 전형적인 부두국이며, 신의주, 인천은 관세 행정만 취급하는 부두국이다. 또한 기존 세관 소재지에는 해사, 관세 행정을 취급하는 부두국 분국 또는 분국 출장소를 두었다. 부두 관계의 조직 기구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부두 관계 기구(1945.7.31)] 주1.※는 겸부를 나타냄. 2. 1945년 8월 1일, 기구 개정에 의해서 평양, 순천에 지방 운수국 및 원산 부두국이 신설되고, 부두 관계의 배속으로 변경되었지만 상세한 내용은 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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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영업 | |
연락 운수 | 2023.04.17 |
연락 운수 제1절 국내 연대 운수 대일 연대 조선·일본 간 연락이 근대적 교통 기관에 의해서 구체화되고 강화된 것은 멀리 노일 전쟁이 시작되고 경부철도가 전선 개통된 지 얼마 되지 않을 무렵이었다. 1905년 1월 경부철도 개통과 동시에 산요·규슈 철도 각 역 및 도카이도선 사이에 연대 운수가 시작되었으나, 처음에는 부산항 경유 산요 철도 간에 여객과 화물을, 또한 규슈 철도 및 도카이도선 간에 여객·화물 및 수하물의 연대 운수를 개시하고, 또한 1907년 12월 경의·마산 양선과 철도청선 각 지정역 상호간에 화물의 연대 운수를 개시하였으며 다음해인 1908년 4월에는 주요 지정역에 한정된 취급을 전선 각 역으로 확장하였다. 철도청선과 시모노세키-부산 연대 개시 이전의 사용 선박은 겨우 200~300톤 내지 1,000톤 정도로 그 항해에 20시간 이상을 필요로 하며, 운행빈도도 적어 그 불편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경부철도와 산요 철도와의 연대 운수 개설에 의해서 산요 철도 방계 회사였던 산요기선(주)은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여객화물선인 일지환, 대마환(1,679톤급 여객 정원 280명, 화물 적재량 300톤) 2척을 건조하고, 1906년 9월의 준공을 기다려 이키환을 야간편으로 연락을 개시하고, 쓰시마환이 동년 11월 취항함으로써 비로소 시모노세키-부산 연락이 시작되었다. 러일전쟁 후 전국가적으로 경제적 발전에 매진하기 위해서 다시 만나 시작된 이 연락 운수는 실로 조선·일본 간 교통사상 획기적인 일이었다. 양선은 매일 교대로 출항하였으며 소요 항해 시간은 13시간이었다. 1906년 산요 철도의 일본 정부 매수와 함께 철도원으로 이관되고, 다음해 1907년 3월에는 신바시-시모노세키 구간에 급행열차 운전이 시작되고 여객화물도 점차로 증가해서 이키-대마 양선만으로는 배가 부족하였다. 그러므로 1907년 8월에 회하산환(1,004톤, 여객화물선)을, 다음해 1908년에는 융마환(隆摩丸 1,900톤 여객화물선)을 용선해서 매일 주야 2편으로 상대방으로부터 출항하게 되었다. 1910년 한일 병합과 함께 여객화물이 더욱 증가하고 재래의 용선으로는 수송에 만전을 기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1911년 대형선 사쿠라환(3,000톤)을 용선하는 외에 화물선을 용선해서 수송에 노력하였다. 다음해인 1912년 6월 아시아 유럽 국제 열차를 부산-장춘 구간에 직통 운전하는데 있어서 주행편을 급행 운전으로 하였다. 본 항로는 교통의 요지이므로 철도원은 고베가와사키 조선소에서 건조한 고려환을 1913년 1월부터, 신라환(모두 3,021톤 여객 정원 675명, 화물 적재량 450톤)을 동년 4월부터 취항시키고 야간 운행 전용으로 수송에 충실을 도모하고 1915년에는 석탄 운반선인 다희환(1.200톤)을 배속하여 화물 전용으로 하였다. 그 후 수송력 증강과 속도 향상을 위해서 고속선 건조의 분위기가 고양되어 철도성은 1921년에 고속 터빈선을 고베미쓰비시 조선소에 주문하고, 제1선 경복환은 다음해 1922년 4월에, 제2선 덕수환은 1922년 10월, 제3선 창경환은 다음해 1923년 3월(3,620톤, 여객 정원 980명, 화물 적재량 250톤)을 각각 취항시켰다. 이 3척으로 주야 운행을 반복하고, 다희환 외에 고려환을 화물편으로 전용해서 용선을 폐지하고 이키환, 쓰시마환을 다른 항로에 전속시켰다. 그 후 매년 여객이 증가하면서 1935년 6월 일약 7,000톤급 대형선 2척을 미쓰비시나가사키 조선소에 주문하고 다음해인 1936년 11월부터 금강환, 1937년 1월부터 흥안환(7,080톤, 여객 정원 1,747명, 화물 적재량 900톤)이 야간 운행 전용으로 취항하고 경복환을 주간 운행으로 전용했다. 중일전쟁에 의한 동아시아의 새로운 정세에 의해서 일본·조선·만주 및 북중국 몽골 방면으로의 교통은 더욱 빈번해졌으며, 특히 연말 전후의 교통은 혼란이 매우 극심했다. 따라서 이에 대응해서 열차 운전의 증강도 필요하였으며, 편안하며 신속한 대륙여행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시모노세키-부산 연락 외에 시모노세키항과 여수항을 연결하는 시모노세키-여수항로 및 그 밖의 연락 항로 활용이 필수 정세가 되었다. 시모노세키-여주 항로에 의한 연대 운수는 1930년 12월 이래, 관동대지진철도회사와 가와사키기선 구간에 실시되었는데, 1936년 3월 남조선철도회사선을 당국이 매수한 후 이를 지속적으로 철도성선과 당국 지정역 사이에 실시한 것으로, 관련 정세에 대해서 조선철도국으로는 오랜 숙원 사업이었던 국철에 대항하도록 하고, 또한 새로 고능률의 연락 항로를 개설해서 시모노세키-부산간을 5시간 정도로 운행하는 고속선 건조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국철측은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시모노세키-부산 연락 항로의 증강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고 대형선 천산환(7,900톤) 건조에 착수했다. 또한 1940년 1월에는 일기환, 1941년 4월에는 대마환의 2화물선이 취항하고 1942년 9월에는 천산환, 그리고 1943년 4월에는 개륜환의 대형선(천산환과 동형)이 취항하고 동년 7월에 항로의 복수제를 취하게 되었다. 또한 하카타-부산 구간의 항로를 개설하였으며, 이 항로에는 덕수환과 창경환의 2척이 배속되어 연간여객 72만명, 화물 150만 톤의 수송이 계획되었다. 그러나 전세는 더욱 치열해져서 개륜환은 1943년 10월 5일에 미군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서 침몰하고, 1945년 4월 1일에는 흥안환도 어뢰에 의해서 운행이 불가능해졌다. 또한 5월 27일에는 금강환도 기뢰를 맞아서 손상되고 하카타항 내에서 좌초되었다. 마침내 7월 29일 천산환은 미 함재기의 공격을 받아서 침몰하고 이어서 다음날 30일에는 창경환도 폭격을 받아서 침몰했다. 사설철도 연대 조선 내 사설철도와의 연락은 1910년 1월 1일 부산 궤도회사선 온천장(후에 동래역으로 개칭)과 부산, 초량의 2역간에 여객 수하물 취급을 개시하였는데, 이는 조선 내 사철과의 연락 운수의 효시로 그 후 1914년 11월 전북 경편 철도와 여객 연락 운수를 개시했다. 그 후 각 사설철도와 당국 경유 철도성에서의 여객 수하물 및 화물을 일본해 기선을 통해서 연대운수하고, 철도성 오사카 상선 및 일본 우편선을 통해서 대만 국유철도 간에도 여객, 수화물 및 화물의 연대 운수를 실시하였다. 회사 기선 연대 대안 항로와의 연대는 1907년 6월 먼저 일본 우편선 회사와 협정해서 북선의 화물 연락운수를 정하고, 동년 8월 오사카 상선 회사와 그 후 요시다 회조점, 조선 우편선 회사, 아파공동 기선 회사와 각각 연락 운수 취급을 개시하고, 1918년 8월 오사카 상 선, 조선 우편선을 통해서 함경 북부선 각 역간에 화물의 연대 운수를 개시하였으나, 1928년 9월 함경선 전선 개통에 따라서 이를 폐지했다. 그 후 몇 개의 신설이 개폐되었으나, 점차로 조선 우편선, 사와야마 기선, 아와노구 니 공동 기선·조선 기선, 마쓰모토 기선, 가와사키 기선 및 일본 기선 간에 조선 내 각 항, 일본·만주 또는 중국용 화물, 일부에 여객 수화물을 취급하고 철도성을 통해서 오사카 상선 또는 일본 우편선 대만 항로간에 여객 수화물 및 화물 연대 운수를 실시 하였다. 자동차 연대 조선 내 지방 자동차와의 연대는 1921년 10월 가타쿠라 식산회사가 경영하는 진남포·용강 온천장간 자동차 노선 간의 연대 운수 취급을 효시로 이후 신설이 개폐되었으나, 이들 자동차와의 연대 운수는 주로 온천장 유람 및 요양객 유치를 목적으로 하였으며, 그밖에 일부에는 당국선 미 개통 구간 운수에 이용하였다. 경남 자동차외 27사와 여객 및 수화물을 또한 조선 운송 자동차 및 공흥 자동차회사와 수화물 및 화물의 연대 운수를 실시하였다. 항공 연대 1936년 9월 20일부터 대일본항공(주) 및 만주 항공(주)(철도성선, 대만 총독부 교통국선·일본 우편선 및 오사카 상선 기융 항로 발착 및 경유 포함)간에 여객, 수화물의 연대 운수를 개시하고, 다음해 1937년 4월 15일부터 만철 소관 철도선에, 또한 1938년 6월 1일부터는 중화 항공로에도 이를 미치고 수화물의 연대 운수도 추가하였다. 제2절 조선 만주 연락 운수 만철와의 연락 조선철도국과 남만주철도(주)는 정치 경제상 밀접한 관계이며, 조선·만주 간 교통강화를 위해서도 일찍이 연락 운수를 실시하였는데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1907년 9월 조선 내 전선 각 역과 안동현간에 여객 및 수화물의 연락 수송의 길을 열고, 안동현에 신의주역 파출소를 설치하고 압록강에 연락소 증기선(겨울철에는 썰매 사용) 운항을 개시하였으나, 조선·만주 간의 경제 관계가 밀접해지면서 1909년 4월 취급 구간을 안봉선 각 역으로 확장했다. 이어서 동년 10월 조선선 각역과 만철선 대련 외에 12역간에 여객 수화물의 연락취급을 개시하는 한편, 조선·만주 전선의 각 역에서 소구급 화물을 취급하였다. 1911년 11월 조선·만주 직통 열차 운행에 의해서 여객, 수화물 취급역을 안봉선 각 역 및 조선선 주요 역으로 확장하는 한편, 동시에 실시된 조선·만주 지정역간 화물 및 조선선 경유 만철선 안동역과 철도원선 간 여객 소구급 화물의 연락 수송 등에 의해서 발착 여객화물이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철도 총국과의 연대 1932년 3월 만주국 건국에 의해서 만주 국유철도는 만주국 철로 총국에서 경영하게 되었으며, 지정역간에 여객, 수화물 및 화물의 연대 운수(만철선 경유 포함)를 실시하고 철도성, 대만 총독부 교통국선 및 역산 기선 간에 당국선을 통과하는 것에 대해서 이를 실시하였으나, 만주국은 동국 국유철도 건설 공사 및 철도 경영을 만철에 위임하였기 때문에 만철는 다음해인 1943년 3월 1일, 만주국 정부와의 협정을 바탕으로 철로 총국을 봉천으로 옮기고, 철로 건설국을 본사내에 설치하였다. 이어서 철로 총국 신설 연장과 함께 1936년 7월 1일부터 화물 연대 운수의 범위를 만주 전 지역의 주요역과 당국선 각 역 및 당국선 경유 철로 총국선과 역산 기선 간으로 확장했다. 이어서 다음해 1936년 3월 20일부터 당국선 경유 철도성선과 철로 총국선 간에 화물을, 또한 1936년 9월 1일부터 당국선 경유, 대만 총독부 교통국선과 철로 총국간의 여객 및 소화물의 연대 운수를 개시하였다. 그 후 만철에서는 1936년 10월 1일부터 봉천에 철로 총국을 설립하고, 동시에 철도부, 북선 철도관리국 및 철로 총국을 폐지하고 이들 각 부국 소관선은 모두 철도 총국이 관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존의 만철선은 사선, 철로총국서는 국선, 또한 신설의 북선 철도사무소 소관선은 북선선이라고 부르고, 철도의 일원적 경영에 따른 영업 제반 규정의 정비통일을 계기로 1938년 1월 1일부터 기존 여객 및 수화물 취급역은 만철사선의 지정역에 한정된 것을 각역으로 확장하고, 그 날부터 당국선 경유 조선철도회사선·금강산 전기 철도회사선 및 신흥 철도회사선과 만철 소관선 각 역간에 여객, 수화물의 연대 운수를 실시하고, 나아가 1940년 10월 이후 조선 내 각 사설철도 간에 연대 운수를 개시하였다. 연락 운수 사무에 대해서는 당국·성·만철·대만철도 기타 관계 운수 사업자가 모여 일본, 조선, 만주, 대만 등에서 매년 1회 서로 연락 회의를 개최해서 사무 처리상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제3절 국제 연락 중화민국과의 연락 중국과의 교통 상태는 1913년 경봉 철도 간에 실시된 연락 운수를 효시로 하고, 이후 점차 범위를 확장해서 철도성, 조선철도국 및 만철와 북녕(경봉), 평완, 평한, 정대, 용해, 진포, 경호(베이징-상해) 및 호항용 및 교제(산동)의 각 철도 사이에 여객 및 수화물 연락 및 수화물의 대금 인환소를 인정하고, 한편 위의 중일 연락 철도와 관계가 있는 기선회사를 추가해서 중일 주유권 및 중일 순유권 발매를 협정하였다. 그밖에 중일 연락 단체객 및 왕복승객에 대하여 할인을 실시하였다. 만주 사변 발발 이래 각종 사정에 의해서 한때 그 취급을 중지하였으나. 새로 1937년 5월 15일부터 북녕 철로 관리국선의 도착화물 운송을 개시하였다. 이어서 중일전쟁을 계기로 북중국의 치안 확립과 함께 중일간의 교통 연락 운수가 부활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여객, 수화물은 조선철도국, 철도성, 만철선, 오사카상선, 근해우편선, 북일본 기선, 일본해 기선, 대련 기선의 각 항로와 북중국 사무국(화북 교통)선 간, 또한 화물은 조선철도국 철도성, 만철, 오사카 상선, 근해 우편선, 아오노구니 공동 기선의 각 항로와 북중국 사무국 선 간에 1938년 10월 1일부터 연락 운수 협정이 성립하고, 여기에서 중일 국제 여객 및 수화물 연락 운수 협정은 이를 해소하고 이후 일본·만주·중국 연락운수를 실시하였다. 이어서 동아의 약진에 따라서 여객화물의 수송량은 현저하게 증가하였으므로, 1939년 9월 20일부터 당국선과 화중 철도 간에 철도성, 일본 우편성, 상해 항로 경유의 연락 운수를 개시한 결과, 중일전쟁을 계기로 일본·만주 간의 교통은 획기적인 진전을 보았기 때문에 앞에서 기술한 이외의 새로 조선 우편선 항로 경유 및 취급역을 확장해서 대륙 교통에 기여했다. 아시아·유럽 연락 조선과 만철 직통으로 연결되어 조선의 철도는 아시아·유럽 교통의 최단 경로가 되었으며, 먼저 1914년에 일본·만주 및 일본·만주 연락을 시작하였으나 제1차 대전 발발로 인해서 중지되었다. 1925년 2월에 이르러 러·일 수교 협약이 성립되고 양국 철도 당국 간에 철도 연락 운수 복구의 분위기가 형성되고, 동년 9월부터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관계 운수 기관 대표자의 제1회 연락 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협정은 동 중국 철도 탈피에 의해서 성립되지 못하고, 1926년 10월 베를린에서 개최된 제2회 연락회의에서 소비에트 연방 외에 독일,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기타 각국의 철도도 여기에 참가하고 연락 운수 규칙 기타 사항을 결정하고 1927년 8월 1일부터 실시를 시작하였으나, 준비 기타 관계상 소비에트 이외의 각국 철도는 동시에 연락운수를 실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해 1928년 8월 30일부터 프랑스, 벨기에 철도를 제외한 관계국에서 이것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3년에 프라하에서 개최된 제4회 연락 회의에서 네덜란드, 영국 철도 및 기선도 참가해서 여객의 연락 운수에 가입했다. 이어서 1937년 1월부터 소비에트 연방을 경유해서 일본과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독일, 폴란드간의 화물의 연락 운수를 개시하고, 또한 1940년 6월 1일부터 일본과 독일 국유철도 간에 있어서 새로이 모스크바, 그라제보(Grajewo,폴란드), 프로스티기(Prostki) 경유, 모스크바, 자레바(Zarena폴란드), 마르킨 경유 및 모스크바, 프레스트리토바스크, 텔레마포르를 경유한 유럽측 신경로 화물의 잠정적 연락 운수 취급을 협정하였으나, 1941년 6월 독일, 소비에트 연방간의 전쟁 발발과 함께 연락 운수는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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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영업 | |
운수 현황 | 2023.04.10 |
운수 현황 제1절 철도 통일 당시의 상황 일본·조선 간의 경제 관계는 러일전쟁 후 현저하게 밀접해졌으며 철도 수송 실적도 점차로 양호해졌다. 1907년 4월부터 경부, 경의 직통열차 운전을 개시하고, 또한 화물운임의 통일을 도모하는 한편 화물의 속달 방법을 강구하고 주요 역에 화물 취급인을 두고 출하 권장을 위해서 환불 제도를 실시하는 등 수송상의 시설 개선을 위해서 노력한 결과, 경제계의 호황과 함께 여객 화물의 수입은 점차로 증가하였다. 1909년에 들어와 전후의 경제 반동의 영향이 점차로 감소하여 여객 화물도 감소하였기 때문에 비교적 수송이 한산한 구간 열차를 폐지하는 한편, 여객 화물의 흡인책을 강구하였으나 마침 각지에 폭도가 출몰하였으며 콜레라가 유행하다가 결국 겨울철이 되어 매우 심한 혹한으로 일반 여행자가 격감하여 전년도 대비 승차 인원은 11%, 화물 수송량은 3%, 운수 수입은 5% 감소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인 1910년 10월에 한일합병으로 제1차 직영으로 이행하였다. 1910년도의 여객 화물 운수 성적은 다음과 같다. [여객, 화물 운수 성적표(1910년도)] 평균 영업거리 : 1,050.0km (지수100) 평균 화물거리 : 1,055.8km (지수100) 여객 승차 인원수 : 2,024,490명 (지수100) 화물 수송량 : 902,999톤 (지수100) 여객, 화물 수입 : 4,411천 엔 (지수100) 1일 1km당 평균 수입 : 11.45엔 (지수100) 제2절 제1차 직영시대 한일합병 후 침체된 경제계도 차츰 회복의 징후를 보였으며, 각종 기업도 부흥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석탄·건축 재료 등 화물이 움직임이 증가하였으며 또한 풍년으로 인해 곡물 수송은 유례가 없는 호황을 보이고 평남선 개통, 이어서 경원, 호남 양선의 일부 개통과 함께 기존선의 영업 상태도 양호해지고 한편 산업 개발과 경비 기관충실에 의해서 일본으로부터의 여객수와 화물 수송량도 증가하였다. 또한 1912년도부터 실시한 여객운임 인하에 의해서 근거리 여객이 격증하고, 화물 운수는 운임 및 발착 수수료를 인하하고 저렴한 차급 제도 신설 및 항구 도착 곡류 운임 인하 등에 의해서 수송량이 증가하였으며, 쌀값 앙등으로 조선인 사이에 만주조의 수요가 촉진되는 등 1912년도의 운수 성적은 전년도에 비하여 여객 승차 인원은 81.1% 증가, 화물은 4% 증가하였다. 1913년도에는 왕복 여객의 운임 할인, 각 지역의 추계 공진회 개최, 호남선의 전선 개통 및 일본·만주 및 일본·중국 연락 운수 취급 개시 등에 의해서 실적은 더욱 향상되었으며, 또한 화물은 6월에 이르러 다년간의 현안이었던 중국 관세가 1/3 인하되고 이와 동시에 만주 무역 제품에 대한 운임 인하에 의해서 기존에 대련을 경유한 일본발 만주착의 면·면사·면포·곡분 등이 조선철도를 경유하게 되었다. 또한 7월에 조선 미곡의 일본 반출세가 철폐되고 철도국 영업 창고가 신축되면서 화물 운송이 활발해졌다. 그리고 1914년 1월부터 일본·만주 연락 화물 취급을 계기로 국제 화물 운수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만주 수출이 증가하여 운수 수입은 전년도 대비 여객 수 및 화물 톤수에서 각각 13% 및 25%가 증가하였다. 전년 말부터 경제계는 점차로 불황에 빠져 1914년도 초 소헌황태후 사망에 의해서 침체기로 들어갔으며, 이어서 7월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등 영업 상태는 약간 부진하였다. 그러나 1916년에 들어와 재계는 어느 정도 회복되고 제1차세계대전으로 인해서 오히려 일본 경제계는 호황을 맞이하였으며, 특히 선박 부족으로 인해서 철도를 이용하는 화물이 격증해서 1917년에 들어오면서 철도 수송은 공전의 성황을 띠기 시작하였으나, 1917년 8월 1일부터 조선철도는 만철의 위탁경영에 들어갔다. [여객 화물 운수 성적표] 비고) 지수는 1910년도를 100으로 하였다. 제3절 만철 위탁경영시대 위탁경영을 개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출곡기에 들어가 곡류 반출이 3만 톤을 돌파하였으며, 이를 위한 대책으로 영업 창고를 증설하였다. 다음해인 1918년 1월에는 새로 다쿠산 형제상회 기선을 통해서 부산과 오사카 구간에 연대 운수를 개시해서 체화 조절을 위해서 노력했다. 또한 재계의 지속적인 호황으로 일본-만주 간의 여객 왕래는 더욱더 빈번해졌으며, 결국 다음해 1919년 4월 전선에 대한 열차 운전 시각 개정과 동시에 경부선에 급행 여객열차를 1왕복 증설하여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으며, 그 운수 실적은 2, 3년간 전년도 대비 여객 수는 평균 32%, 화물톤수는 26% 증가하여, 여객 화물 수입은 모두 35%이상의 좋은 성적을 나타내었다. 이렇게 계속된 영업 상태의 호조도 1920년에 들어오면서 제1차세계대전 후의 반동 시기가 되어 그 영향은 즉시 철도에 미쳐서 여객의 왕래가 격감하였으며, 또한 화물 운수도 해운계의 쇠퇴로 선박 운임이 크게 하락하였기 때문에 철도 수송은 모두 근거리 항구로 반출되어 더욱더 한산한 상태가 되었으며 여객 화물 모두 불황의 늪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 후 일반 재계는 점차 회복되었으며 이에 따른 신선 개통, 사회 기반 구축, 철도 운수기관의 증가에 의해서 여객화물 수송도 어느 정도 호조를 보였으나,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으로 인해서 일시 침체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그 해는 다행히 미곡 수확이 증가하여 가격은 항상 호조를 유지하였으며, 반면 조선 내의 제철 및 시멘트 공업 등이 회복되어 수송은 약간 활기를 찾았지만 정부의 긴축 정책에 의한 제반 사업의 중지, 이월, 금융 경색 등으로 거래가 위축되어 1924년도의 여객 화물의 총수입은 전년도 대비 4.5% 감소하였다. 그렇게 1924년도 말을 보내고 만철 위탁경영은 해제되고 직영으로 환원되었다. [여객· 화물 운수 성적표] 비고) 지수는 1910년도를 100으로 하였다. 제4절 제2차 직영(제1기)시대 1925년 4월, 직영 환원 후 매년 경제계가 회복하여 쌀 반출· 조의 수입 기타 각종 건축 자재의 수송이 활발해졌으며, 1927년 4월경 일본 전국에 실시된 모라토리엄(지급 유예) 실시로 인한 충격 속에서도 호황을 유지하였다. 1928년 9월 이후에는 함경선 전선이 개통된 결과, 함북 방면에서 목재, 석탄 등이 남하하였으며, 1929년에는 이원철산선· 차호선의 영업이 개시되면서 동 연선 광석의 반출 및 함경남도 흥남 유안 공장의 조업과 이의 출하 개시 등에 의한 새로운 생산 분야 개척으로 수송량 증산을 가져왔다. 또한 동년 9월 경성에서 개최된 시정 20주년 기념박람회를 계기로 각종 회합에 의한 여객의 왕래도 빈번해져 여객 화물의 운수 성적이 양호하였다. 1930년도에는 전기 하반기 경부터 시작된 긴축 정책 및 은 가격 하락의 영향이 점차로 현저해지고 4월 1일부터 미터법 실시와 함께 일부 여객 화물의 운임 저하를 도모하여 회복을 위해서 노력하였으나, 결국 심각한 세계적 불황의 여파를 피하지 못하였다. 또한 1931년에는 전년의 불황 속에서 만주사변이 발발하여 병력이 수송되고, 그 해 12월의 정변에 따른 금 수출 재 금지 실시에 의한 일반 물가 상승이 우려되는 가운데 철도 수송은 어느 정도 활황을 띠었으나, 전반적인 불황은 1932년도 상반기에도 탈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1932년도 하반기 이후 일반 인플레이션에 의한 철도 수송의 전면적 증가는 1933년도 이후의 운수 수입에도 현저하게 반영되었다. 즉 1932년 3월에 성립한 인근 만주국의 견실한 발달에 따른 교통 증가는 일반 여객의 왕래를 빈번하게 하고, 만주 주둔 병력 교대 수송은 더욱 철도 수송을 활발하게 하였다. 한편 도문선, 혜산선, 만포선, 동해북부선, 백무선 등의 신 건설선이 경제 지점에 도달하고 새로 석탄· 목재 등의 대량 유통이 촉진되어 세계적인 경제 불황 속에서 일본만 군수 공업 경기, 만주 건국 경기, 인플레이션 경기 등으로 인하여 경제적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는 여객 화물 수송을 호황으로 이끌어 조선철도 수송 부문에서 기록적으로 발전하였다. 즉, 1935년도의 운수 실적을 제1차 직영을 개시한 1910년도에 비교해 보면 여객승차수는 14.5배, 화물수송톤수는 9.6배, 여객화물운수수입은 12.7배로 증가하였다. 당시의 1일 1km 평균수입은 11.45엔에서 4.2배 증가한 48.37엔으로 비약하여, 3배의 영업선 연장에 비하여 운수량의 증대는 괄목한 만한 것이었다. [여객·화물 운수 성적표] * 비고: 지수는 1910년도를 100으로 하였다. 제5절 제2차 직영(제2기)시대 1932년 이후 일본 국내에서 발생한 인플레 경기가 조선반도에 파급되어 조선 경제 약진의 기초적 제반 조건이 서서히 성숙하고, 일본 자본 유입이 급증하여 조선의 산업 조건은 매년 광공업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한편 농산물 가격의 앙등, 농산어촌의 경기 부흥과 함께 조선의 경기가 살아났으며, 철도 수송면에서는 계속해서 1936년도에도 호황을 띠어 전년도에 비하여 여객 승차인원은 14.9%, 화물수송톤수는 15.1%로 증가하였으며 1일 1km당 평균 수입은 처음으로 50엔을 돌파하게 되었다. 1937년도에는 중일전쟁 발발에 의한 특수 수송과 함께 병참 기지로서 군수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반도 경제도 점차로 장기화되면서 물자· 교통 동원 계획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전시 체제로 재편성되고 생산력 확충을 위해서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광공업 및 이에 따른 전기공사· 철도 건설 기타 공장 건설도 함께 대두되어 이들 건설 자재 및 생산품 수송이 약진하는 한편, 만주국· 북중국 방면의 발전에 따른 철도 운수는 현저하게 발전하여 1940년도까지 전년도 대비 성적은 여객이 25~38%, 화물은 16~22%가 증가하였으며, 1940년도의 성적은 전기말 1935년도에 비하여 여객승차인원은 2.8배, 화물수송톤수는 2.3배, 1일 1km 평균수입은 2배로 증가하였다. 1941년도에는 시국 산업을 중추로 하는 광공업의 호황을 반영해서 전면적으로 수송량이 증가하였으며, 또한 만주국· 북중국 방면의 경제 건설 진행에 따른 장거리 여객화물 증가에 의해서 전년도에 이어서 수송은 활발하였으나, 상반기의 특수 수송 및 전시 통제의 본격적인 발전에 따른 일반 경제계를 반영해서 여객 화물 모두 그 증가율은 둔화되었으며, 1942년도에도 계속해서 수송 제한 영향으로 여객 화물의 증가율은 실질적으로는 저조하였다. 1943년도에는 조선 내 산업의 비약적 호황에 의해서 여객 화물의 수송량이 증가하고 또한 장거리 수송 및 육로 전가 화물 수송이 매년 증가하여 일부 여객을 억제할 정도였다. 이를 전년도 실적에 비교해 보면 여객은 18% 증가, 화물은 6% 증가, 수입은 각각 20% 증가하였다. 화물의 증가는 미약하였지만 수송 거리 연장에 의해서 화물의 연장 톤수와 거리는 공전의 격증으로 전년도 대비 33% 증가하였다. 1944년도에는 태평양 전쟁의 영향으로 일본 국내 자급 체제 확립에 따른 대륙 전가 물자의 수송 증가 및 조선 내 전력 물자 증산에 의한 수송 증가 요청에 대응하여 전가 화물에 대해서는 전년도의 3배인 500만톤, 일반 화물에 대해서는 18% 증가한 3,100만톤으로 총 3,600만 톤의 수송과 연간 영업거리는 전년도 대비 50%가 증가한 수송력을 확보하도록 하고, 여객에서는 전년 대비 24%의 대폭적으로 규제하여 수송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화물의 수송 실적은 다음과 같으며, 계획의 86%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일반 화물 . 상반기 : 1,508만톤(97.2%) . 하반기 : 1,254만톤(80.9%) . 합계 : 2,762만톤(89.6%) 전가 화물 . 상반기 : 189만톤(75.6%) . 하반기 : 151만톤(60.4%) . 합계 : 340만톤(68.0%) . 상반기 총계 : 1,697만톤(94.3%) . 하반기 총계 : 1,405만톤(78.1%) . 총 합계 : 3,102만톤(86.2%) * ( )은 계획 대비 상반기에는 일반 화물은 순조로웠지만, 전가 화물은 선박 배치 감소에 의해서 7월이후 부산 항구의 적재 누증과 출발지의 사정으로 인해서 계획의 75.6%를 수송하는 데 지나지 않았으며, 하반기에는 남선 여러 항구 적재 누증 및 부두 하역 능력 부족에 의해서 열차 운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며, 또한 11월 하순 이후에는 운전용 석탄의 미증유의 핍박에 의해서 일부 열차의 운행을 중지하여 부득이하게 화물 수송은 극도로 위축되었다. 또한 여객 수송은 1944년 초부터 결전 비상조치에 의해서 제한을 단행하였으나, 하반기에 운전용 석탄 부족에 의해서 더욱 압축을 강화했기 때문에 전년도에 비하여 처음으로 17.2%가 감소되었다. 제2기의 운수 실적은 다음 표와 같으며, 처음으로 총독부 직영이 된 1910년도에서 35년이 지난 1944년도를 비교해 보았는데, 이 사이 사회 정세가 많이 변하긴 하였지만 철도 총연장이 4.7배였던 것에 비하여 여객승차인원은 52배, 화물수송톤수는 34배에 이르러 수송량 증대는 철도 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으며, 또한 수입 면에서는 화폐 가치를 고려해도 상당히 증대하였다. 최대여객승차인원은 1943년도의 1억 2,847만 명이며, 최대화물수송톤수는 1944년도의 3,102만 톤이었다. [여객·화물 운송 성적표] *비고: 지수는 1910년도를 100으로 함. 여객·화물 수송량의 상승 경향은 만주국 건국 이후 1934년경부터 시작하여 중일전쟁 진행에 의해서 증대한 것으로, 1932년도 이후의 누년 대비 전년도 증가율은 다음 표와 같다. 제6절 1945년초 국유철도 수송 형세와 그 실적 대일 전가 화물의 군사 수송 처리 최고전쟁지도자회의의 결정에 따라서 대일 중요 총동원 물자의 수송을 확보하기 위해서 대륙 철도 수송(대륙 중계항에서의 선박 상하역 작업 포함)을 군사 수송으로 처리하게 되어 1945년 3월 1일부터 실시되었다. 군사 수송으로 처리해야 할 중요 총동원 물자의 범위는 조선·만주·중국에서 대륙 철도를 통해서 조선 항만을 중계항으로 일본에 환송되는 것으로, 발송지에서 중계항에서 선박 탑재 작업에 이르기까지의 군수품으로, 육군의 책임 하에 처리되며 대륙 철도 수송 계획 및 처리는 대륙 철도 사령관이, 선박에 대한 상하역 작업은 선박 사령관이 담당했다. 조선철도 군사 사용에 관한 칙령 실시 조선철도는 1945년 3월 10일부터 철도 군사 사용에 관한 칙령(1942년 7월 17일)이 실시되었으며, 군사 수송 실시 시에 교통 국장은 다음과 같이 육군 관헌의 지휘 감독을 따랐다. (1) 조선철도에서의 군사 수송은 조선 만주에 일관되는 사항은 관동군 사령관에 위임하며 대륙 철도 사령관의 지휘 감독을 받는다. (2) 마찬가지로 조선·만주에 일관되지 않는 것은 조선군 관구사령관에 위임하며 대륙 철도 사령관의 지휘 감독을 받는다. 수송 실적 : 1945년 4월 공습이 치열해지는 정세 하에서 결전 수송을 개시하였는데, 4, 5, 6월의 3개월간의 수송 완수는 매우 긴박한 일대 사명으로, 전국이 필사적으로 모든 어려움을 타개하고 수송 완수를 위하여 노력했다. 본 기간에는 군의 요청에 따라서 군사 수송 완수를 제일로 대일 대륙 물자의 수송완수에 노력하는 한편, 조선 내의 중요 총동원 물자· 조선 만주 중국 교류 총동원 물자의 긴요한 수송 완수를 도모하여 수송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고, 이를 위해서 열차의 운행 시각을 변경하였다. 여객열차는 기존에 비하여 더한층 축소하여 조선 주요 구간에서도 직통 2선 정도로하고, 부산-신경 구간의 급행 1선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중지하였다. 화물 수송에서도 일반 수송은 기존 수송량을 반감하였기 때문에 조선 내의 중요 물자 소송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 내의 경제 산업 부문에는 일부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부득이하였다. 또한 군사사용에 관한 칙령 실시와 함께 철도대가 진출하여 철도 방위완비, 수송 강화에 응급적 조치를 강구했다. 대일 대륙 물자의 남선 중계 수송 경로는 공습 격화와 함께 위험성이 증대할 우려가 있었으므로 이를 북선 항만으로 전환하도록 계획하고, 이에 대응하는 항만 및 철도에 관해서 최대한 강화를 서둘렀다. 이렇게 해서 6월 하순 군사 수송과 대일 대륙 물자를 중심으로 하는 결전 수송은 순조롭게 이루어졌지만, 일반 화물 및 여객 수송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였다. 수송 실적은 다음과 같다. 4월 . 화물 수송 총톤수 : 2,364,645톤 . 그 중 대일전가 : 387,543톤 . 그 중 조선 내 군자 : 359,380톤 5월 . 화물 수송 총톤수 : 2,750,433톤 . 그 중 대일전가 : 400,869톤 . 그 중 조선 내 군자 : 453,680톤 6월 . 화물 수송 총톤수 : 2,635,558톤 . 그 중 대일전가 : 273,665톤 . 그 중 조선 내 군자 : 490,296톤 7월 . 화물 수송 총톤수 : 2,170,052톤 . 그 중 대일전가 : 258,303톤 . 그 중 조선 내 군자 : 496,391톤 여객 수송 환산 인원(통과 인원 미포함) 4월 : 7,203,174명 5월 : 7,249,347명 6월 : 6,834,076명 7월 : 6,652,06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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