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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 철도투자액과 수지차익 | 2023.06.12 |
193 | 철도건설, 개량 및 수해복구비 등 계속비 | 2023.06.05 |
192 | 영업수지와 수지차익 | 2023.05.30 |
191 | 회계제도와 경리개요 | 2023.05.22 |
190 | 소운송 | 2023.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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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와 도시 | |
부산 - 근대 부산의 교통, 개항 | 2024.10.18 |
3. 부산 우리나라의 도시발전은 교통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조선 시대엔 수운을 중심으로 인구가 밀집하고 이를 통해 이동이 빈번하였고, 근대에 들어서는 개항으로 그리고 철도가 개설됨에 따라 내륙 교통이 발달하면서 근대적인 의미의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번에는 개항과 함께 도시가 형성되었고 철도 개통으로 크게 성장한 부산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지리적으로 부산이 인접한 낙동강은 저산성 산지를 경계로 배후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이 계곡은 한반도 교통의 요지이다. 부산은 한반도의 돌출 부분에 위치해 좁은 강을 끼고 이어지며, 후방 가까운 곳에는 중요 교통로가 되는 낙동강 계곡이 위치한다. 이러한 위치상의 특징은 부산이 조선 내 교통의 요충지, 한반도 제일의 무역항, 더욱이 동아시아의 관문으로서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근대 교통요지인 부산은 1930년대에 이미 국제적인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부산과 시모노세키 간에는 오전과 오후 두 차례의 철도 연락선이 왕복하고 내륙의 경부선은 부산을 기점으로 경성(京城, 서울), 봉천(奉天, 지금의 심양)에 직통열차가 운행하였다. 하코다테(函館), 기륭(基隆), 홋카이도(北海道), 대만(臺灣)으로 가는 관문으로서 여객 왕래, 화물 집산의 요지이며 유럽과 아시아 연락의 국제열차를 운행함으로써 세계 교통의 대관문으로서 손색없는 자연적인 위치 조건과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지도 10] 조선 시대의 부산(대동여지도 1861년 제작, 서울대학교 규장각 제공) 부산이란 지명은 원래 15세기 전반까지 부산포(富山浦)라 하였으나,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부산포(釜山浦)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부산포는 원래 독립된 지방행정 단위의 군이나 현이 되지 못하고 동래도호부(東萊都護府)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 동래는 오랫동안 현으로 내려오다가 명종 2년(1547년)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동래도호부 관내의 역으로는 휴산역과 소산역이 있었다. 조선 시대 부산(동래)은 나라의 관문이었기 때문에 국방상 요충지였다. 금정산성은 그 규모로 볼 때 국내 최대의 산성이며, 국방시설도 발달하여 지금의 수영에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부산진에는 부산진영이 설치되어 있었다. 1) 근대 부산의 교통 우리나라는 강을 이용한 수운이 발달하였는데, 수운과 관련한 도시는 한강으로는 춘천과 원주, 충주, 청주, 금강으로는 공주와 강경, 영산강은 영광과 나주, 낙동강은 대구와 진주 등이었다. 부산은 낙동강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 항로는 구포~삼랑진~현풍~사문진~왜관 및 신촌(상주군)~달지진 및 마전(예천군)~양호진(안동)까지 연결되어 우리나라의 관문인 부산포에서부터 경북의 최북단까지 담당하였다.(참고 10) 낙동강 연안의 김해와 창원, 밀양 등에서 지류별로 조세미를 집하(集荷)한 뒤, 다시 뱃길을 이용하여 상류로 거슬러 올라 성주까지 옮겼다. 당시 낙동강의 주요 나루는 아래로부터 김해의 강창포(감동포), 양산의 동원진, 밀양의 수산진, 의령의 정암진, 창녕의 우산진, 현풍의 답곡진, 대구의 사문진, 성주의 동안진, 상주의 회촌진, 용궁의 하풍진(삼강), 안동의 대항진 등이었다. 성주에 모인 조세미는 다시 육로를 이용하여 충주의 경원창(慶源倉)에 이르고, 또다시 배편으로 남한강 수로를 따라 서울로 수송하였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기 이전에 대부분 화물 운송은 낙동강 수운이 담당하였다. 경부선 개통 이후에도 어느 정도 수운의 역할이 있었으며, 일부 지역 토산물 등은 수운으로 하단포와 구포로 옮겨진 후 철도를 통해 소비지로 운송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부산항으로 수입된 외국 상품이나 수산물 등은 하단포와 구포에 집결된 다음 수운으로 경상도까지 운반되었다. [지도 11] 부산과 낙동강 수운(대동여지도 1861년 제작, 서울대학교 규장각 제공) 낙동강 수운을 통해 지역 특산품인 소금이 많이 운반되었다. 이 길은 영남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소금길이었다. 고대에서부터 구한말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소금은 전적으로 낙동강을 통하여 조달되었다. 낙동강 하구에 자리한 명지(鳴旨)와 녹산(菉山)의 바닷가에 있던 염좌(鹽座)에서 생산된 소금이나 해산물(건어물, 새우젓 등)이 구포의 남창(南倉) 나루터에 모였다가 상류로 거슬러 오르면서, 삼랑진의 뒷기미 나루터를 거쳐 수산과 남지, 박진으로, 더 위로는 밤마리(栗旨)와 현풍(玄風) 등지로, 또 상주의 낙동진과 안동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소금과 해산물을 팔았고, 현지에서는 나락, 보리, 콩, 팥, 기장, 조 등의 농산물을 싣고 내려왔다. 조선 시대의 인구는 이러한 지리적인 특성과 관련이 있는데, 말기인 1789년의 인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이 189,153명(경기도), 평양 107,590명(평안도), 의주 89,970명(평안도), 충주 87,731명(충청도), 전주 72,505명(전라도), 경주 71,956명(경상도), 함흥 71,182명(함경도), 상주 70,497명(경상도), 진주 69,495명(경상도), 길주 65,202명(함경도), 해주 63,472명(황해도), 대구 61,477명(경상도), 양주 60,425명(경기도), 강계 60,419명(평안도), 성천 58,956명(평안도), 나주 57,783명(전라도), 수원 57,560명(경기도), 영흥 57,560명(함경도), 성주 53,365명(경상도), 황주 54,061명(황해도), 홍주(홍성) 52,761명(충청도) 순이었다. 이 중에서 수운과 관련된 도시는 서울과 평양, 의주, 진주, 충주, 나주 등이었다. 2) 개항 부산의 발전은 개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은 1875년 5척의 군함으로 부산항에서 무력시위를 전개한 데 이어 강화도에도 운양호사건을 도발하고, 1876년 일본 정부는 소위 운양호 포격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군함 7척을 강화도에 보내어 조약 체결을 강요하여 1876년 2월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부산포(1885년, 고신대학 이상규 석좌교수 제공) 조약은 전문 12개 조항으로, “조선은 20개월 이내에 부산항 이외에 2개 항을 개항하고 일본 상인 활동을 보장하고, 일본은 조선이 지정한 항구에 영사를 파견하여 주재시키고, 일본인의 범죄 행위에 대하여는 일본 영사가 처리한다.”라는 등 불평등 내용이었다. 이어서 ‘병자수호조약부록’, ‘조일무역장정규칙’이 강제적으로 체결되었다. 한편 일본은 일본인 보호를 위한다는 구실로 외무성 관리를 관리관으로 파견하였고, 관리관과 동래부사 사이에 부산 일본인 거류지 설정 문제의 회담이 진행되어 1877년 1월 30일(양력) 부산구조계조약(釜山口租界條約) 체결로 일본인의 내왕과 통상, 토지임차권, 가옥 건축권 등의 확보로 점차 부산지방을 잠식하여 침략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부산에 일본 이사청의 설치로 영사관은 물론 감리제도가 폐지되고 일본 전관거류지가 초량왜관이 있었던 용두산 일대 330,000m2 면적으로 설치되었다. 일본 정부는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로 부산항 매축과 토목, 철도, 도로공사 등에도 주력하였다. 먼저 매축 및 부두 공사 시설을 시작, 오늘날 중앙동 부근 바다의 매축(바다를 메움)을 1902년 7월 착공하여 1905년 12월 준공하였고, 1902년 7월부터 1909년 8월까지 1, 2기에 걸쳐 136,534.2m2를 매축하였다. 이외에 초량과 부산진 앞바다 1,221,000m2도 매축하였다. 부산항 개항과 일본인 조계지 설치 이후 외국과의 항로가 개설되고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오사카상선과 조선우선으로 일본과 우리나라, 대륙을 연결하는 항로가 개설되었다. 이 중심에는 부산이 있었고, 부산은 이를 통해 급격하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31년 우리나라와 일본 간의 조선우선의 정기항로 현황을 보면 부산과 일본 간의 정기항로는 16회로 우리나라 항구에서 가장 많은 항로를 보유하였다. [표 31] 조선우선(朝鮮郵船)의 일본과 조선 간 정기항로(1931. 5.) * 자료 朝鮮旅行案內社(1931), pp.128~130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연락하는 관부연락선은 철도와 연계되어 철도국에서 운영하였는데 그 이용객도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1905년 이용객이 연간 35,000명에서 1925년에 598,174명, 1940년에 2,198,113명이었다. ▲관부연락선(景福丸,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아카이브 제공) ======================================= 참고 10) 고동환(2015), 《한국 전근대 교통사》, 들녁, pp.272~2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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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와 도시 | |
서울 | 2024.10.11 |
2. 서울 여기서는 근대도시의 성격을 가지고 철도의 영향이 매우 큰 도시와 내륙 교통으로 수운이 쇠퇴한 도시 그리고 철도의 기능을 새롭게 해석한 역을 선정하여 이를 설명해 보고자 한다. 철도를 통해 지역과 주변이 크게 변화한 주요 역으로는 고속철도가 정차하는 서울과 부산, 대구, 대전을 선정하였고, 철도가 만든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익산과 장항, 북한의 신의주 그리고 철도 개통으로 쇠퇴한 강경, 새로운 문화역으로 자리 잡은 황간역을 분석하였다. 우리나라 철도는 고속철도로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되었고, 수도권 고속철도인 GTX가 추진되고 있다. 2019년에는 국제철도협력기구(OSJD) 회의도 개최되어 향후 우리나라도 대륙철도를 달리는 꿈을 실현해 나가고 있다. 서울역의 시작은 경인철도로부터 시작되었다. 미국인 모스로부터 경인선 부설권을 넘겨받은 경인철도인수조합은 1899년 4월 4개 공구로 쪼개어 공사를 시작했다. 인천~노량진 구간을 우선 완공해 1899년 9월 18일에 영업을 시작했고, 한강철교 준공 후 1900년 7월 8일 경성~인천 간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경인선이 개통되자 12시간 걸리던 서울~인천은 1시간대로 단축됐다. 가히 교통 혁명이었다. 경인철도의 역은 초기에는 경성역(서대문역), 남대문역, 용산역, 노량진역, 영등포역, 오류동역, 소사역, 부평역, 우각동역, 축현역, 인천역 등 11개였다. ▲ 한강 철도건설 [그림 8] 초기 경성역의 모습 ▲ 초기 남대문역(훗날 경성역 → 서울역) 서대문역의 경우는 1919년 폐역이 되었지만, 그 역사를 보면 매우 흥미롭다. 경인선 개통 시 경성역으로 1900년 7월 8일 역사 업무가 시작되었다. 1905년 1월 1일부터는 경부선 시·종착역이 되었다. 그해 3월 27일 경성역에서 서대문역으로 개명되었다. 따라서 1905년 경성역이 서대문역이 된 이후 남대문역이 경성역이 된 1923년까지 약 18년 동안 우리나라에 경성역이라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1919년 3월 말 서대문역이 폐지되고 남대문역을 경부선의 기점으로 하였다. 또한 경의 본선의 일부를 개량하여 경성 서부의 아현터널 등이 준공되고 1920년 11월 수색~남대문 구간이 직통으로 연결되어 남대문역이 경의선의 기점이 되면서 우리나라 간선의 기점역으로 자리 잡았다. 1922년 7월경부터 경성역(구 남대문역) 신축에 착수하여 경성역은 1925년 10월 15일부터 신역에서 영업 개시하였다. ▲ 신축 중인 경성역(1925년 10월 15일 영업 개시) 건축의 경우에도 철도역은 큰 영향을 미쳤는데, 경성역(서울역)의 경우는 르네상스 혹은 절충식으로 불려 새로운 건축양식으로 소개되었다. 비록 일본인에 의해 지어진 건축물이지만 우리나라의 건축양식에 영향을 끼쳤다. 건축가는 쓰카모토 야스시였고, 시공은 시미즈건설, 건립 주체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였다. 경성역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나라 철도역의 효시였다. 승강기, 증기난방 등의 근대적인 설비를 완비하였으며, 당시는 기능적으로도 신식으로 중앙역에 걸맞은 당당한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경성역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열차가 수시로 왕래하여 국제 여객 수송에도 기여하였다. 1942년 10월 1일 현재 조선·만주·중국 직통 여객열차의 1일 운전횟수를 보면 부산~북경 구간 2 왕복, 부산~하얼빈 구간 1 왕복, 부산~신경 구간 1 왕복, 부산~봉천 구간 1 왕복, 경성~목단강 구간 2 왕복으로 경성역을 경유하였다. 개업 직후 여객수도 별로 많지 않았기 때문에 역 구내에서의 여객유도장치 설치의 필요성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 후 매년 증가하는 여객을 질서 있게 유도하기 위해 이 장치의 필요성이 점차 높아졌다. 1925년 7월에 조선철도에서는 처음으로 서울역의 맞이방(대합실) 및 여객용 승강장에 확성장치를 설비하여 여객의 정리 유도용으로 사용한 결과 여객으로부터도 호평을 얻어 양호한 실적을 올렸기 때문에 이후 급속하게 주요 역 구내에 설치되었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에는 등화관제 실시 시의 여객 유도와 더불어 관제 하의 역 구내 입환 작업의 능률 저하 방지라는 새로운 목적을 위해 역뿐만 아니라 조차장 구내에도 설치되었다. 설치를 시작한 지 불과 십수 년 후인 1939년도 말에는 설비 수가 53대가 되고 확성기 수도 200대를 넘었다. 역 구내 조명으로는 1932년에 경성역 구내의 남북으로 30m 철탑 2기를 건설하여 여기에 일광등 각 5개를 설비하고 동시에 용산역 구내에도 같은 철탑 1기를 건설하여 일광등 5개를 시설하였다. 한편 경성역의 경우는 지역 간 철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도시 교통사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899년 개통된 전차는 초기 경성역인 서대문역 인근인 서대문에서 청량리 간의 운행으로 대중교통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전차는 계층을 초월한 운송기관으로 시민들의 필요로 노선 연장과 복선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전차 수도 증가하여 대중교통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노선의 신설은 성곽의 파괴로 이어졌고, 성 밖까지 연결되는 전차노선은 서울의 공간구조를 변화시켰다. ▲ 차고지의 전차들(1968년 11월 29일 동대문 밖, 이혜은 교수 제공) 시내 대중교통수단으로 시민들의 환영을 받아 노선을 증설해야 했던 전차는 조선 시대 500여 년 동안 지속되어 오던 서울의 모습을 크게 변모시켰으며, 전차노선의 부설은 성문 개폐 및 인정과 파루까지도 폐지하게 하였다. 남대문에서 구 용산, 서대문에서 마포까지의 전차노선의 연장은 새로운 주거지 및 시가지 확장을 가져왔고, 이는 서울의 수평적 공간 확장에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지도 9] 서울 서부지역 철도 노선도(경성 외곽 순환선 포함, 1940년경) 또한 서울이 확대되면서 경성역은 광역교통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1929년 이후에는 용산~서강~당인리 간 및 서강~신촌 간 용산선에 열차 운전이 시작되었다. 또한 1940년도에는 용산~서강 간(4.3km) 및 서강~성산천신호소(수색조차장 내) 간 복선과 서강~신촌 간(1.6km) 선로 개량공사에 착수하였다. 이에 따라 직통 화물열차는 경부선 용산역에서 경성역을 통과하지 않고 직접 경의선 수색조차장으로 직결되는 한편, 용산역부터는 서강~당인리~신촌 또는 서강~신촌을 거쳐 경성으로 통하는 도시 환상선 운전을 개시하게 되어 도시 주변 교통은 한층 편리해졌다. ▲ 경성궤도(1930년~1961년) 아울러 경성역을 기점으로 경의선, 경부선이 통과하였고, 이를 통해 국제열차가 운행되었으며, 경춘선과 경성궤도 등 수도권의 거점 교통 역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표 28]을 보면 경춘선, 경성궤도 등도 경성역(전차 역명은 경성역앞) 전차로 연계되어 이동공간을 확대시켰다. [표 28] 근대 경성역과 연계 철도교통 ▲ 서울역 근처 경성역이 서울역이라는 지금의 이름으로 바뀐 것은 광복 이후인 1947년 11월 1일이다. 서울역의 새로운 변화는 2004년 고속철도의 개통과 함께 찾아왔다. 2005년 서울역의 고속철도 이용객은 1,200만 명에서 2017년에 2배인 2,400만 명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이제 서울역은 고속철도의 거점 역으로 중심에 있다. [표 29] 철도역 1일 이용객 추이(고속철도 + 일반철도)(단위 : 명 / 일 평균) * 자료 철도공사 1일 승하차 인원도 2021년 기준으로 서울역은 58,164명으로 가장 많은 여객이 이용하고 있다. KTX의 이용객도 서울역 1일 평균 이용객은 2019년에 78,774명으로 가장 많고, 코로나의 영향으로 2021년에 45,372명으로 감소하였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승객을 취급하고 있는 역이다. [표 30] KTX 역별 1일 이용객 순위(2019~2021년)(단위 : 명 / 일 평균) 이제 서울역은 수도권 고속철도를 통해 더욱 발전할 것이다. GTX 노선 중 가장 빠르게 진행되는 A노선은 지하 50m 깊이에서 최고 속도 시속 200km로 2023년 말에 개통될 예정이다. 완공 시 일산~서울역 14분, 동탄~삼성 20분이 소요되어 우리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이다. 그동안 서울역은 우리나라 철도교통의 거점 역으로 발전을 거듭해 왔다. 향후 서울역은 지리적인 위치와 경제적인 위상, 향후 한반도 철도망 계획에서도 그 위상이 더욱 확대 강화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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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와 도시 | |
교통정책의 변화와 도시 | 2024.09.30 |
1945년 해방 후 3년간의 미 군정을 거쳐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그해 12월에 체결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과의 원조 협정’에 따라 1949년 1월 1일부터 경제 부흥계획이 수립되었다. 제1차 5개년 부흥계획은 미국의 적극적인 협조하에 그 첫 단계로 3대 산업선(영암선, 함백선, 문경선) 건설 착수는 한국의 경제부흥을 위한 철도 부설과 산업개발의 첫걸음이었다. 해방 이후의 철도건설은 수익 채산성보다는 지하자원 개발과 산업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정책상의 철도건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지역사회 개발을 위한 노선은 대체로 동서의 횡단철도였으며, 대표적으로 영암선과 함백선, 충북선, 경북선, 경전선, 광주선 등이었다. 산업철도 노선은 지하자원의 채굴이나 수력 및 화력발전 개발을 목적으로 노선 주변에는 시멘트, 비료, 제철 등 기간산업이 자리 잡았다. 1953년 휴전 성립 직후의 한국 철도의 현황을 보면 선로 총연장은 4,265.4km, 영업 거리는 2,767.8km, 역은 412개소, 교통부 직원은 2만 8,525명이었다. 이 시기 전후 부흥사업의 목적으로 건설된 철도 노선은 충북선과 삼척발전소선, 강경선, 주인선(주안에서 남인천 구간), 오류동선, 사천선, 김포선, 옥구선, 우암선, 울산선, 장생포선 등이었으며, 이 중 충북선은 기존의 충북선(조치원~충주)을 연장하여 중앙선과 연결하는 것으로, 중부 내륙지역을 전국의 육상 교통 체계 안에 편입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960년대에는 철도청의 발족과 산업철도 건설, 시설 현대화가 추진되었고, 철도 노선 중심으로 복구가 진행되어 수송량이 증가하였다. 또한 경제개발을 위한 석탄, 시멘트 등의 자원 수송을 위해 노선이 급격하게 부설되어 수송량이 급증하였다. 경제개발을 위해 교통망 부설 역시 급하게 요청되었는데, 1960년 중반부터 고속도로가 건설되고 간선도로망이 갖추어져 도로 수송량이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이에 비해 철도 수송량의 증가 속도는 도로에 미치지 못하였다. 1961년 말까지 거의 완료한 복구공사와 아울러 새로운 철도의 건설도 추진되었으며, 1962년부터 시작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의해서 본격화되었다. 이 기간에 황지선과 경북선, 정선선, 동해북부선, 능의선, 망우직결선, 경전선, 경인선 복선화, 진삼선, 광주선 등 산업선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정선선과 경전선, 문경선이 새롭게 건설되었고, 호남선의 일부 구간의 복선화가 완료되었다. 또한 태백선과 중앙선, 영동선, 경인선, 경부선(서울~수원 구간) 등의 전철화 공사 등은 당시 화물 수송 위주로 발전하였다. 1970년대에는 산업철도 전철화와 수도권 전철이 추진되었다. 서울지하철 1호선과 함께 수도권 전철 경부선 서울~수원 41.5km 복선전철, 경인선 구로~인천 27.0km 복선전철, 경원선 용산~성북 18.2km 복선전철 등이 건설되면서 철도건설은 전철화를 고려한 철도시설을 설계·시공하게 되었다. 개통된 후 간선철도와 도시철도의 전체 이용객은 증가하였지만,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도시철도와 광역권의 철도 수요가 늘었고, 간선철도의 경우 1980년대에는 절대적인 수송량이 감소 추세로 돌아섰다. 여기에는 자가용 수송의 증가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에는 기존 선의 용량 증대, 부산지하철 개통, 1990년대에는 고속철도 건설과 2000년 이후에는 고속철도가 개통되어 철도의 모습은 획기적으로 변화하였다. 고속철도 운영은 주요 간선의 포화 문제 해결과 증가하는 물류비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묘책이었는데, 그 결과 철도 여객 수송량은 2004년 고속철도 개통 후에는 그 감소세가 둔화하였고 2010년 이후 증가하고 있다. 한편 화물의 경우 증가 추세에 있다가 1990년대부터 감소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감소가 지속되고 있다. 고속철도의 경우 2004년 경부고속철도가 개통되었고, 2015년에 호남고속철도, 2017년에 원주~강릉선이 개통되었다. 수도권 전철과 지하철의 경우 1974년에 서울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었고, 서울지하철 5~8호선이 개통 후 1999년 이후 연간 지하철 수송 인원은 20억 명을 넘게 되었다. 철도와 도시의 관계에서 하나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교통정책 변화이다. 근대 교통망으로 철도가 부설되어 도시가 크게 변화하였는데, 1960년부터 도로가 본격적으로 건설되면서 자동차 사회가 되었고, 도시 성장에 고속도로와 자동차가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다음의 [표 22]는 우리나라의 교통정책의 기조를 나타낸 것으로 1970년부터 본격적으로 도로 위주의 투자가 이루어졌다. 그 후 다시 철도의 부활을 알리는 고속철도 건설이 본격화되어 다시 도시 발달에 철도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표 22] 교통정책의 변화 * 자료 : 국토개발연구원(1996), ‘국토 50년-21세기를 향한 회고와 전망’을 참고로 수정 여기서 당시의 변화를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교통정책의 변화와 도시 1) 도로의 발달과 철도의 정체 1960년대 후반부터 도로의 발달로 철도수송량은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철도 상황은 매우 절박하였다. 첫 번째 원인으로는 철도 투자액의 절대 부족이었다. 그동안 철도 투자는 경부고속철도와 수도권 전철 이외에는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우선 첫 번째로 투자 규모가 일반철도의 경우 1996년까지 1천억~2천억 원에 불과하였으며, 1조 원을 넘어선 해가 2001년이었다. 특히 투자의 내용도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철도를 안전 확보 차원에서 최소한으로 개량·보수하는 수준으로, 철도 미연결 구간의 확충을 위한 투자가 거의 없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 철도 스톡(Stock)은 정체 상태이며 선진국에 비해서도 매우 열악하였다. 특히, 그리스와 포르투갈, 스웨덴, 영국 등 한국과 국토계수가 유사한 4개국과 비교 시 우리나라 철도 스톡은 이들 국가의 40~50% 수준에 불과하였다(도로의 경우는 73.9% 수준). [표 23] 교통 부문별 시설 추이(1962년~2004년) * 자료 : 건설교통부, ‘건설교통통계연보’, 각 연도, 해양수산부, ‘해양수산통계연보’, 각 연도 두 번째로 기존 선의 속도 향상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지만, 도로와 비교해 속도 면에서 경쟁력이 그리 높지 않았다. 1960년대에는 무궁화의 최고 속도는 95km/h에서 1969년에 110km/h, 1985년에 140km/h 정도로 속도가 향상되었다. 교통수단의 선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속도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 철도는 자동차와 속도 경쟁력에서 우위에 있지 못하였다. 즉, 새마을호의 속도가 20년 전과 같이 최고 140km/h 머물렀으며, 실제 운행속도는 과도한 곡선 구간 및 취약한 설비 조건 등으로 107km/h 정도에 불과했다. [표 24] 철도수송 실적 추이(1961년~1989년) * 자료 : 철도청, ‘철도통계연보’ [표 25] 열차 최고 속도 변화 * 자료 : 한국교통연구원(2004), ‘21세기 국가철도망 구축 기본계획 수립연구’를 참고 세 번째로는 여유 용량 부족과 네트워크 효율이 떨어졌다. 우리나라 철도는 선로용량 한계에 이른 노선이 많아 효율적인 열차 운행에 차질이 있었고, 수요 증가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특히 서울~시흥(현 금천구청) 간의 한계로 서울역에 고속철도를 투입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으며, 중앙선과 영동선, 경전선 등 많은 노선도 포화상태였다. [표 26] 주요 철도 용량 애로 구간 현황(2006년 현재)(단위 : 회, %) * 자료 : 한국철도공사 아울러 우리나라 철도는 미연결 구간이 많아 일관 수송이 불편하였고, 주요 공항 및 항만 등 목적지까지 직접 연결 노선이 없는 등 단절 없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시설이 부족하였다. 네 번째로는 철도 투자 부족으로 궤도 및 구조물이 노화되어 있어 고속 및 안전운행에 차질을 주었고, 터널이나 교량 등 궤도 구조가 재래식이다. 또한 열차집중제어장치 등 신호 설비의 현대화 수준도 매우 낮은 실정이었다. 그러나 1990년 이후 철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함께 철도 투자는 약간 증가하였다. 1995년에 도로와 비교해 약 36%에 불과했던 철도 투자 규모는 2006년에는 53%까지 증가하여 철도가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하였지만, 그런데도 철도의 투자액은 도로 투자의 반 정도에 불과하였다. [표 27] 1990년대 이후의 교통시설특별회계 내역(세출예산 기준)(단위 : 억 원, %) * 주 : 1. 도로에는 광역도로, 산업단지 진입도로, 철도에는 광역철도 및 지하철, 고속철도 포함 2. 중앙정부에 의한 투자를 정리한 것임. 3. 2005년 이후 철도계정은 도시철도계정 포함 금액임. 4. ( )의 숫자는 비율 %를 의미함. 마지막으로 철도는 교통 시장 및 환경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그동안 우리나라 철도는 고급, 고속화된 서비스에 대한 이용자의 높아진 욕구에 부응하지 못하였고, 특히 고속철도 개통에 따라 전국이 반나절 생활권으로 변모하였으나, 교통여건 변화에 대응하는 연계 수송체제 구축은 미흡하였다. 아울러 철도 물류의 경우 택배 활성화 등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로의 전환이 적기에 이루어지지 않아 일관 수송체제 미비로 인해 환적이 불가피하여 신속성이 요구되는 화물처리에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 고속철도의 건설과 함께 시설과 운영을 분리하는 방안 등이 모색되었다. 이른바 상하 분리 방식은 유럽에서 도입된 철도정책으로 인프라 건설과 유지 보수는 국가책임으로, 운영은 공공성과 기업성을 조화롭게 추진하는 공사 책임으로 추진하는 것이었다. 2) 우리나라 고속철도의 건설 고속철도 건설정책의 추진에는 당시 해외에서의 고속철도 성공사례가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당시 일본의 성공적인 신칸센 운영과 프랑스 TGV 운영으로 각국에서 철도가 부활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 고속철도 건설은 1992년 6월 30일 충남 아산시 배방면 장재리에서의 기공식으로 출발하였다. 고속철도에 대한 논의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1973년에 프랑스 국철 조사단과 일본 해외철도기술협력회 조사단이 서울~부산 간 수송현황 및 타개책에 대한 조사를 통해 고속철도를 건설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 후 1980년 한국과학기술원(KIST) 지역개발연구소에서 전국적인 수송 체계 관련 연구를 통해 경부 축에 복선전철을 건설하거나 고속철도를 ‘대량화물 수송 체계 개선과 교통투자 최적화 방안 연구’에서 제안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2월 고속철도 관련 수송대책을 수립할 것을 지시하였고, 1982년에 제5차 경제사회발전계획에 서울~대전 간 고속철도 건설 계획을 포함했다. 1983년 이후 타당성 조사 결과 경제성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 후 1987년 노태우 대통령이 경부고속철도 건설 계획을 대통령 공약으로 제시하였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1970년대의 고도성장기를 지나며 교통 부문에서는 화물 수송능력 증대를 위해 기존 철도의 전철화를 추진해왔고, 지역 간 고속도로 확충, 국도의 포장에 주력했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도시교통문제의 심화, 지역 간 철도의 고속화를 주요 과제로 설정하였다.(참고 8) 세계은행은 이 두 가지 과제에 동의하고 차관 도입을 위한 연구를 발주하였다. 이것이 경부고속철도 경제성 연구를 미국의 루이스 버저(Louis Berger)와 국토연구원이 공동으로 수행한 1983년의 서울~부산 간 경부고속철도 타당성 조사 연구이다. 당시 경부 축(서울~부산 교통축)의 교통 수요는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연평균 10% 이상 증가하고 있었다. 항공수요는 분담률이 높지 않았지만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으며, 자동차화에 따라 고속도로는 몇몇 구간은 이미 포화상태였다. 그리고 몇 년 내에 곧 포화될 것으로 예상하였으며 자동차 수요의 60% 이상이 화물차였다. 철도는 여객 수송 수요에 밀려 화물 수송 여력이 고갈되었다. 경부선이 유일한 1급선이었지만 속도를 높이려면 대폭적인 선형개량이 필요하고, 노후화하여 개량한다고 하여도 용량 증대에는 한계가 있었다. 경부 축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교통 수요가 집중된 지역으로 일본의 동해도 축(도쿄~오사카)에 버금가는 수준이며, 파리~리옹 구간, 런던~에딘버러 구간보다 훨씬 높은 수요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 연구의 주안점은 고도 경제 성장의 견인차로서의 인프라 정책의 방향, 급속히 진행되는 자동차화의 추세에 대응하여 어떤 방향으로 철도정책을 정립하는가이며, 고속철도의 도입이 국가산업기술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였다. 2년여에 걸린 연구의 결과는 긍정적인 측면이 발견되어 경제성 분석도 충분하였다. 다만 당시 경제성 분석의 기초가 되는 시간가치나 통행비용 측면의 분석이 어려웠지만. 당시 교통 체계가 에너지 낭비적인 자동차 중심으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었고, 기존의 경부선 철도는 용량 한계에 이르러 새로운 노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업비의 규모가 우리 경제 규모에 비해 상당히 높았고, 또 당시 우리나라의 외채 규모 역시 상당한 수준이라 이와 같은 대규모의 프로젝트를 추진할 형편이 되지 못하여 연구진과 교통부는 5년간의 준비 끝에 사업 추진을 결정하였다. 차종 선정과 관련해서는 교통개발연구원에 의뢰하여 만든 고속철도기술조사 및 기본설계를 바탕으로 1992년부터 6차에 걸친 조사 등을 통해 1994년 6월 14일 차량 등 핵심기자재 도입계약이 한국고속철도공단과 한국TGV 컨소시엄 사이에 체결되었다. 고속철도는 건설 과정과 차량 도입과정 그리고 한국형 고속철도 기술 개발 등 발전을 거듭해 왔다. 고속철도 도입은 초기 서울과 천안, 대전, 대구, 경주, 부산 등의 각 역에 국한된 건축뿐만이 아니라 역 주위의 도시공간과 국토 공간의 이용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속도의 확대와 더불어 다가온 생활권의 확대는 역과 주변의 가치도 극대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고속철도시대를 열게 될 역에 대한 설계가 1995년 이후 진행되었으며, 1단계로 2004년 4월 1일 서울역~동대구역 구간을 개통하여 서울역과 대전역, 동대구역이 기존 철도 역사에 고속철도차량이 정차 가능한 형태로 플랫폼의 개량 및 증설이 이루어졌다. 2010년 11월 1일 2단계 구간으로 동대구역~부산역 간이 개통되면서 오송역과 김천(구미)역, 신경주역 등이 새로 건축되었다. 철도가 시속 300km로 운영되어 자동차와 비교해 속도와 대량 수송, 안전성, 환경과 에너지 면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게 되어 산업혁명 이후 철도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고속철도 개통으로 도시는 다시 한번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되었다. ▲세계 다섯 번째로 고속철도 개통(2004년 4월 1일, 자료 : 한국철도공사) 3) 고속철도의 영향력 고속철도 개통은 지역 발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고속철도의 영향력은 정차역뿐만 아니라 이용객이 승하차 가능한 영향권의 범위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참고 9) 서울역의 영향권은 행정구역상 서울시 전역과 경기도, 인천광역시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수도권 전역으로, 역을 중심으로 약 70km 내외의 지역이 되고 있다. 광명역의 영향권은 광명시와 안양시, 부천시 등 경기 남부 지역과 서울의 자치구로 구성된다. 약 20km 떨어진 곳에 서울역과 용산역이 있지만, 경기 북부와 서울 등에서도 광명역으로 KTX 탑승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이용자 분포는 14.5%가 안양시에서 접근하고, 광명시에서는 11.9%, 서울의 금천구에서 7.5%가 이용하고 있다. 천안아산역의 영향권은 남서쪽으로는 서산시와 홍성군, 보령시, 북쪽으로는 수원시와 용인시를 포함하는 50~70km로 나타나고 있다. 천안아산역의 이용자는 48.3%가 천안시, 29.4%가 아산시에서 접근하고 있다. 오송역의 영향권은 단양군과 제천시를 포함하여 동북쪽으로 70km, 남쪽으로는 공주시와 대전시 일부를 포함한 30~50km로 나타나고 있다. 이용자의 대부분이 역을 중심으로 반경 30km 내외의 지역에서 접근하며 청주시와 세종시에 집중되어 있다. 청주시에서 이용하는 비율이 57.1%, 세종시에서 이용하는 비율이 25.3%이다. 대전역의 영향권은 북서쪽 반경 50~70km 지역으로 대전시와 계룡시, 공주시, 군산시 등을 포함하고 있다. 전체 이용객의 60.7%가 대전시에서 접근하고 있다. 동대구역의 영향권은 북서쪽으로는 김천시와 구미시까지 포함하며, 남동쪽으로는 경산시와 경주시를 포함하는 70km 내외의 지역이다. 89.8%의 이용자가 대구시에서 접근하며, 특히 수성구와 동구, 북구의 이용객이 56.1%로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 부산역의 영향권은 부산시를 비롯하여 서쪽으로는 창원시, 북쪽으로는 양산시를 포함하여 30~50km 지점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용자의 97.5%가 부산시에서 접근하며, 특히 해운대구와 부산진구, 중구 등에서 이용객들이 주로 접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지도 8] 고속철도 영향권(천안아산역 50~70km, 한국교통연구원 자료) 고속철도와 함께 광역철도의 경우도 지역을 변화시키고 있다. 2000년대 접어들면서 경의·경춘선 복선전철과 인천공항철도, 분당선 연장, 신분당선, 서울도시철도 7호선 연장선 등이 개통되어 수도권 지역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 참고 8) 국가기록원 자료 및 철도학회 고속철도 개통 10주년 기념 토론회(2014년 5월 22일) 자료 참고 9) 한국교통연구원(2015), ‘KTX 이용특성 및 영향권 분석조사 분석’, pp.120~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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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개통이후의 지역변화 | |
철도와 도시의 발달 | 2024.09.20 |
철도와 도시의 발달 우리나라에 철도가 부설되어 노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도시가 발전하였다. 철도는 개항지와 내륙의 도시들을 연결하는 노선이었다. 노선의 특징은 도로와 비슷하게 종관형으로, 이는 지형과 도시 발달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05년 경부선과 경의선, 1914년 호남선과 경원선이 완공되면서 조선 시대에 발달하였던 도시와 다른 새로운 도시들이 철도 부설과 함께 성장하였고, 기존의 도시보다 신흥도시 중심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였다. 1905년 경부선의 개통으로 서울과 부산의 이동시간이 14일에서 14시간으로 단축되어 시간과 공간의 지도가 바뀌게 되었다. 철도와 도청소재지의 이전도 깊은 관련이 있는데, 1910년에는 경기도 도청소재지를 수원에서 경성부로, 1920년에는 함경북도 도청소재지를 원산에서 나남(청진)으로, 1923년에는 평안북도 도청소재지를 의주에서 신의주로, 1925년에는 경상남도 도청소재지를 진주에서 부산으로 각각 이전하였다. 모두 철도가 지나가는 곳이었다. 전통적으로 대구와 공주, 상주, 의주, 전주, 광주, 함흥이 발달하였는데, 철도 개통 이후 각각 부산과 대전, 김천, 신의주, 익산, 군산, 목포, 원산 등의 도시가 발전하게 되었다. [표 17] 신흥철도 도시(부)의 인구변화(단위 : 명) * 자료 :《조선총독부통계연보》 참조 당시 부는 시에 해당하는 것으로, 신흥도시 인구 증가는 신의주가 가장 많이 증가한 19.3배를 제외하면 거의 5배~8배로 1920년과 1944년을 비교해 볼 경우도 부(시)의 전체적인 인구 증가율은 5.7배에 달해 비슷한 증가율을 보인다. [그림 6] 철도 부설로 탄생한 신흥도시의 인구변화 당시의 우리나라 전체 인구는 1920년과 1944년을 비교해 볼 때 전체인구는 1.5배 증가하여 당시 도시부에 해당하는 곳이 더 많이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철도와 연결된 지정면 / 읍에 해당하였던 곳을 보면 [표 18]과 같이 김천의 경우도 1920년에 비해 1940년에 3.4배나 인구가 증가하였다. [표 18] 신흥철도 지정면 / 읍의 인구변화(단위 : 명) * 자료 :《조선총독부통계연보》 참조 철도망으로부터 소외되어 발전이 멈춘 대표적인 예의 하나는 경상북도 상주이다. 1928년 통계를 보면 상주 인구는 24,000명, 김천이 13,000명, 안동이 10,000명, 문경이 2,000명, 예천이 5,000명으로 상주는 그 지역의 중심이었다. 상주는 쌀 생산과 양잠으로 유명하였고, 예로부터 상주 명주는 전국적으로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상주는 철도 경부선이 김천을 경유함에 따라 해방 이후 계속해서 발전에서 소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김천에서 영주까지 연결되는 경북선상에서 위치하고 있는데, 2004년의 인구는 상주가 11만 명, 김천 인구는 14만 명이었다. 철도가 발전한 지역은 역을 중심으로 도시가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이 역 주변에 정주하면서 관공서와 학교, 상업 기능 등이 집적되었고, 인구가 증가하고 지역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철도가 만든 신흥도시를 보면 대부분 철도역 주변에 경찰서, 우체국, 행정기관, 학교, 시장, 상점 등이 들어서면서 지역이 크게 변화하였다. 다음의 [표 19]를 보면 철도 개통으로 소비가 촉진되었고, 사업과 각종 영업이 발전하여 인구 증가와 지역의 발전, 관광객 증가 등으로 이어졌다. [표 19] 철도 개통과 도시의 발전 * 자료 : 鐵道院(1917), 《鐵道の社會及び經濟に及ぼせる影響》를 참조하여 정리 [그림 7] 일본의 신칸센 개통과 쇠퇴한 도시(X는 쇠퇴한 도시) (일본 波床正敏 교수 제공, 오사카산업대학) 한편 일본의 경우도 재미있는 분석이 있다. 고속철도인 신칸센이 개통되면서 이 노선에서 벗어난 도시들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점이다. 자료를 보면 쇠퇴한 도시로는 하코다테, 도야마, 가나자와, 와카야마, 도쿠시마, 구마모토, 가고시마가 그러한 도시이다. 이러한 도시들은 메이지 시대에 인구가 전국 15위 내에 포함되었지만, 지금은 여기에 포함되지 못하고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이는 신칸센 운행 여부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표 20] 철도 개통 전후와 철도역 부근 발전 [표 21] 철도 개통과 인구의 변화(단위 : 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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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개통이후의 지역변화 | |
철도의 개통 - 사설철도와 지역의 변화 | 2024.09.06 |
철도의 개통 3) 사설철도와 지역의 변화 사설철도 운영에 따른 지역의 변화를 당시 기록을 중심으로 설명해 보고자 한다.(참고 6) (1) 금강산전기철도 금강산전기철도(주)는 경원선 철원역을 기점으로 강원도 회양군 안풍면 화천리까지 길이 101.4km, 궤간 1.435m의 전기철도 부설 허가를 1919년 8월 12일에 얻었다. 이 회사는 조선에서 수력전기로 전기사업을 하고, 그 전력을 동력으로 하여 철도사업을 경영하며, 남는 전력을 가지고 지방의 전등 전력사업도 운영하였다. 또한 경성전기(주)에 전기를 팔았다. 나아가 철도사업으로 세계적인 명산인 금강산 관광에 기여하였다. (2) 조선경남철도 조선경남철도(주)는 경부선 천안역을 기점으로 충청남도 서부 해안을 끼고 남하하여 전라북도 군산(群山) 대안(對岸)까지 그리고 천안에서 북상하여 안성까지 158.8km, 궤간 1.435m의 증기철도 부설을 신청하여 1919년 9월 30일 허가를 받았다. 이 철도는 충청남도 및 경기도 남부, 강원도 중앙부를 횡단하여 동해로 통하는 일대 교통로를 형성하는 것이다. 또한 허가선 연선(沿線)은 기름진 들판을 이루는 광대한 농지와 굴곡이 많은 장대한 해안선을 끼고 해륙산업의 개발과 경제 지역과의 교류 발전 촉진 측면에서 주목을 받았다. (3) 신흥철도 신흥철도(주)는 1931년 4월 30일 국철 함경선 함흥에서 서호리까지 연장 18.5km, 궤간 0.762m의 증기·전기철도의 부설 면허를 얻었다. 함흥~서호진 구간에는 과거 함흥탄광철도(주)가 1913년 9월 29일 부설 허가를 얻어 1915년 12월 20일부터 영업을 개시하였는데, 국철 함경선의 부설로 같은 구간을 병행한다는 이유로 국가가 매수하여 1922년 12월 1일부터 폐지되었다. 그 후 서호진 지역이 조선 질소비료 등의 공장지대로 발전하여 함흥시가와 화물, 여객의 교류가 왕성해져 다시 사설철도가 출현하였다. 회사는 이미 부설된 함남 송흥에서 도안까지의 구간 28.5km의 부설 면허를 9월 15일 얻었다. 이 구간의 부전령(赴戰嶺)이라는 준험한 곳을 넘는데, 700m나 되는 해발고도 차이(標高差)로 인해 조선에서는 최초의 강삭철도(鋼索鐵道, 인클라인) 7.1km가 운행되었고, 동력으로 전기를 추가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4) 다사도철도 1935년 다사도(多獅島)철도(주)는 1월 21일 국철 경의선의 종단 신의주에서 평안북도 다사도까지의 39.3km, 궤간 1.435m의 철도 부설 면허를 얻었다. 신의주와 건너편인 만주 측 안동은 모두 압록강 유벌(流筏, 베어낸 나무를 강물로 띄워 보냄)의 집산지로, 황해로 통하는 배로 연결되는(舟運) 교통으로 번영해 왔다. 그런데 약 12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의 겨울 동안은 압록강의 동결로 인해 이러한 경제활동이 모두 정지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류 30km 정도 되는 다사도 부근은 혹한일 때도 얼지 않으므로, 이것을 이용할 수 있게 되면 1년 동안 경제활동이 가능해진다. 이것에 착안하여 철도 부설을 하게 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다사도의 항구 건설도 진행되어 양쪽 계획이 진척되어 나갔다. 이어 같은 회사는 12월 10일 같은 철도의 양시(楊市)에서 분기하여 국철 경의선 남시(南市)까지 18km 지선의 부설 면허를 얻었다. 이것으로 다사도철도는 경의선 양쪽으로 접속하게 되어 경의선의 복선적인 기능도 하게 되었다. (5) 조선경동철도 조선경동철도(주)는 7월 5일 기존 부설된 여주에서 경기도 점동면까지 16km 노선에 이어 9월 23일 국철 경부선 수원에서 인천항까지 54km, 궤간 0.762m의 증·가솔린 철도의 부설 면허를 얻었다. 이 철도는 인천항과 수원을 연결하고 나아가 이미 부설된 노선을 통해 오지와의 중요한 교통로를 형성하는 것이 되었다. 조선철도(주)는 10월 10일 황해선 기존 면허 노선의 도중인 취야에서 옹진까지 구간 25.2km의 철도 부설 면허를 얻었다. (6) 삼척철도 삼척철도(주)는 1936년 3월 2일 강원도 동해안 정라(汀羅)에서 도계(道溪)까지의 35.7km, 궤간 1.435m의 철도 부설 면허를 얻었다. 이 철도는 삼척지구의 무연탄 지하자원 개발을 주목적으로 하며 그 수송기관으로서 계획된 것이다. 이 무연 탄광은 지리적으로 교통이 불편한 강원도 오지에 있으며, 지역적으로도 불리한 조건이 많았으므로 개발이 늦어져 있었다. 일본전력회사는 발전 연료의 확보를 위해 삼척 탄광에 관심을 가지고, 소유자인 조선무연탄회사로부터 권리를 받아 개발에 착수, 삼척개발회사가 창립되어 채광을 시작하였다. 무연탄을 일본으로 출하하는 항구로 처음 정라를 기점으로 하여 철도 면허를 얻었지만, 다음 해 3월 25일 이것을 묵호(墨湖)로 변경하여 철도 연장도 6km 늘어나 전체 41.7km가 되었다. (7) 경춘철도 경춘철도(주)는 1936년 7월 13일 경성부(京城府) 청량리에서 강원도 춘천까지의 구간 92.2km, 궤간 1.435m, 증기·경유(輕油)철도 부설 면허를 얻었다. 춘천은 강원도 거의 중앙에 있는 도청소재지 및 주요 지방 도시로, 철도 부설 요청이 이전부터 있었다. 1920년에 경춘전기철도(주)가 경성~춘천 간에 면허를 얻었지만, 오랫동안 공사에 착수하지 못해 그만 1926년에 면허의 효력을 잃었다가 다시 부설 면허를 얻게 되었다. 춘천이 경성과 가까운 곳임에도 불구하고 철도의 혜택을 입지 못한 것은, 연선(沿線)의 농림산업 이외에는 두드러지는 산업 없이 춘천 이외에 특별한 도읍도 없었던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그러나 조선에서 산업개발이 진행되고 경제활동이 활발해져 경성과 춘천의 관민(官民) 사이에서 철도 부설에 대한 의지가 생김에 따라 자본금 1천만 엔의 철도회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면허는 처음 경성 교외의 청량리에서 춘천까지 92.2km였는데, 1937년 6월 15일 사업계획서의 변경으로 기점을 경성부의 제기정(祭基町)으로 옮겨, 선로 연장이 95.6km가 되었다. 그러나 공사 시행으로 결국 93.5km가 되었다. 당시 조선의 수많은 사설철도 대부분이 일본 자본가에 의해 건설되었지만, 이 철도는 다음에 언급할 조선평안철도와 함께 조선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조선 내 자본에 의해 부설된 사설철도라고 할 수 있다. (8) 조선평안철도 조선평안철도(주)는 1936년 9월 7일 국철 평남선 진남포에서 평안남도 귀성(貴城)면 용강온천까지의 구간 35.7km, 궤간 1.435m의 철도 부설 면허를 얻었다. 이 철도는 연선 주변으로 광량만(廣梁灣)의 큰 제염(製鹽)장으로 산출하는 소금 수송을 주요 목적으로 계획되었으며, 더불어 연선 주변 농산물의 수송 및 용강온천 여객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9) 단풍철도 단풍(端農)철도(주)는 1936년 12월 26일 국철 함경선 단천(端川)에서 함경남도 천남면 홍군리까지의 구간 74.5km, 궤간 1.435m의 철도 부설 면허를 얻었다. 이 철도는 함경남도 동북부 오지의 전원(電源)개발이 주요 목적으로, 장진강 수력전기회사의 언제(堰堤, 댐) 공사로 사용할 자재 수송을 위해 계획된 것인데 연선 지방 개발보다는 오지의 삼림자원 개발에 공헌하였다. ======================================= 참고 6) 선교회(1986) 《조선교통사》, pp.897~808, pp.864~8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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